24화
나는 의아한 얼굴로 꽃다발을 들어 올렸다.
일반적인 꽃다발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지금 필 리 없는 쪽동백꽃과 흔한 들꽃인 별꽃으로 만든 다발이었다.
‘모양이 조금, 삐뚤빼뚤한 것 같기도 하고.’
삐죽삐죽 튀어나온 곳을 세심하게 갈무리하고 있자니, 아까 문 앞을 서성거리던 게 혹시 이 꽃다발을 주려고 그랬던 거였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으면서 문을 닫았다.
“아, 향기 좋다.”
이유 모를 그리움과 함께, 쪽동백꽃의 맑은 향기가 폐부 가득 차올랐다.
나는 침대 옆에 놓여 있는 화병에서 꽃을 빼내 다른 화병에 꽂은 다음, 들고 있던 꽃다발을 빈 화병에 담았다.
“오래오래 피어 있으렴.”
들을 수 있을 리 없는 꽃들에게 조곤조곤 속삭인 나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누워서 화병에 담긴 꽃다발을 바라봤다.
천천히, 다시금 수마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샤샤가 죽은 후로 늘 악몽을 꾸거나 아예 꿈을 꾸지 않았었는데.’
왠지, 오늘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 * *
“거기, 누구세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세이룬은 순간 숨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다.
어디에 꽃다발을 두고 가면 좋을지 고민하느라 방 앞을 서성거리던 그는 갑자기 들려온 에리카의 목소리에 한껏 당황하다가,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문 앞에 꽃다발을 놓아두고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대공비의 처소 앞에서 도망쳐 봤자, 결국 숨어든 곳은 바로 옆방에 위치한 대공의 처소였지만.
“하…….”
세이룬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을 닫은 뒤, 그 자리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 거세서, 주위의 소리를 모두 집어삼켜 버렸다.
세이룬은 제 심장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목소리…….”
방금, 목소리를 들었다.
반년여간 듣지 못했던, 그녀의 목소리였다.
이제는, 곧, 자신의 부인님이 되는―
“―아.”
세이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긴 흑빛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보고 싶어.”
그가 사무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무작정 찾아가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원래 용족의 고향인 동방의 려 제국에서는 혼례 전에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 만나지 못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세이룬과 에리카는 미성년자이지 않은가.
원래 용족은 가사에서 깨어나는 즉시 성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사(假死)는 용족이라면 누구나 생에 한 번은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일종의 등용문으로,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고치 안에서 겪는 변태 과정처럼, 이 또한 어린 용이 방대한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신체를 각성시키는 과정이었다.
용족이 성인이 되는 조건은 신체의 각성이므로, 자연히 가사에서 깨어나면 성인으로 인정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세이룬의 경우에는 이르게 가사에 들기도 했거니와 평균 가사 기간의 반도 채우지 않고 깨어났기 때문에, 어린 나이를 고려하여 예외적으로 올해가 다 지나기 전까지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있게 되었다.
려 제국에서 미성년자는 이성에게 얼굴을 보일 수 없다는 전통도 있었다. 따라서 미성년자 부부는 성년이 될 때까지 서로 내외하거나 만나더라도 얼굴을 가린 채 만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는 없어.’
자신이 무슨 심정으로 강제로 가사에 들었는데, 올해가 다 가기까지 에리카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시간만 죽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세이룬은 테이블 가득 펼쳐져 있는 서적들을 살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서적들은 그동안 려 제국에서 있어 왔던 미성년자 혼례에 관한 자료를 모아 둔 것으로, 혹시 전통을 어기지 않으면서 에리카의 얼굴은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가사에서 벗어나자마자 체사에게 부탁해 동방에서 공수해 온 것이었다.
실은 동방의 전통 따위, 세이룬은 굳이 지키고 싶지 않았다.
그놈의 전통을 싫어한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그날 이후로 세이룬의 모든 규칙은 단 한 존재만을 위해 맞춰져 버렸으니까.
하지만 세뤼아가 내건 혼례의 조건이 이 전통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그저 이런 서적이나 뒤적이면서 방법을 강구하는 것뿐이었다.
방대한 양의 서책을 뒤적이면서, 세이룬은 이런 생각을 했다.
세뤼아가 자신의 이름으로 에리카에게 청혼서를 보낸 것은, 모두 자신이 전통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어차피 옆방에 에리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잠들지 못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세이룬은 밤새도록 서적을 훑어 내렸다.
* * *
드디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결혼식 날이 도래했다.
‘바로 뭣 같은 미성년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날!’
눈을 뜨자마자, 나는 참을 수 없는 상쾌함에 실실 웃음을 흘렸다.
너무 행복하고 후련해서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예비 비전하, 그렇게 좋으세요?”
준비 내내 내가 계속 실실거리고 있자, 옆에서 내 웨딩드레스를 손봐 주고 있던 포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너무 기분이 좋은데 포카까지 귀여워서 본능적으로 나간 손이었다.
“응, 너무너무 좋아.”
“얼마만큼요?”
“오늘 하루 정도는 라면 받침으로 수학 문제집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
포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그저 인자하게 웃을 뿐이었다.
극강의 수포자들은 알 것이다.
라면 받침으로 무려 수학 문제집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용기를 내야 하는 행동인지.
“저어, 예비 비전하…….”
그때, 옆에서 잔뜩 수줍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두 손으로 입을 가린 레비나가 고개를 푹 숙이며 속삭였다.
“제 머리도 쓰다듬어 주세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다시금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오구오구 하는 얼굴로 레비나의 머리도 쓰다듬어 줬다.
내 쓰다듬을 받은 레비나도 좋다고 배시시 웃었다.
내 인생 처음의 결혼식은 정말이지, 참으로 크고 성대했다.
화사한 흰빛이 가득한 홀 곳곳에는 투명한 다이아몬드와 푸른빛이 어여쁜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오케스트라가 한 층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피아노는 없고, 대신 하프시코드가 있었다.
하, 피아노가 그리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해.
“앗, 예비 비전하!”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고 흰빛의 실크 커튼에 가려진 홀을 훔쳐보다가 포카에게 걸렸다.
“비전하, 안 돼요! 드레스와 베일이 구겨진다구요!”
나는 포카의 손에 이끌려 커튼으로부터 두어 걸음 떨어졌다.
흐트러진 줄도 몰랐던 드레스와 베일을 툭툭 펴 주면서 포카가 속삭였다.
“오늘은 비전하께서 주인공인 날이잖아요. 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우셔야죠.”
음, 포카. 전 세계는 좀 많이 오버인 것 같다.
……라고, 보통 같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이 무슨 날인가. 바로, 내가 그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한 미성년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날이 아닌가!
“응, 포카 말이 맞아. 오늘만큼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워야지.”
오늘은 내가 미성년자 딱지를 떼고 다시 태어나는 날이니까!
학대당할 때 항상 수그려 왔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숙여 왔던 턱을 도도하게 치켜들었다.
옆에서 포카와 레비나가 내가 최고로 아름답다며 아첨을 떨었다.
오늘만큼은 나도 폭군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기로 했다.
“에리카.”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때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드레인 대공, 아니, 선대공이 나를 향해 웃음 지으며 서 있었다.
나는 서둘러 세뤼아에게 예를 갖췄다.
“안녕하십니까, 선대공 전하.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에리카가……”
“흠, 이제 그렇게 인사하면 안 될 텐데.”
세뤼아가 보랏빛 눈동자를 가늘게 접어 웃었다.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뤼아가 내 쪽으로 허리를 굽히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드레인 대공비인 에리카 르 드레인이라고 해야지, 아가.”
“……!”
순간, 갑자기 심장이 거칠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한때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고?’
웃기는 소리! 선대공 전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신다!
“네, 어머님…….”
나는 세뤼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세차게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다. 최애가 자신에게 웃어 주는 영광을 누린 성덕의 기분이 이러할까.
“에리카는 여전히 귀엽네.”
세뤼아가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내 볼을 가볍게 슥 훑었다. 나는 몽롱한 눈으로 세뤼아를 바라봤다.
‘와, 세수 절대 하면 안 되겠다…….’
아니면 어머님 손이 닿은 부분만 방수 패드 붙여야지.
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아가.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니?”
“네, 네! 영광이에요! 얼마든지 여쭤 주세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나왔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었다.
지금 우리 어머님께서 나한테 무려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는데!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무언의 아우성을 보내는 포카와 레비나을 보고 겨우 멈췄다.
그래, 기쁨이 주체가 안 된다고 포카와 레비나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녹아 있는 화장을 망쳐서는 안 되지.
초롱초롱한 내 얼굴을 보고 한 차례 청량한 웃음을 터뜨린 세뤼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물어볼게. 예전에, 길 가다가 다 죽어 가는 조그만 뱀을 본 적이 있니?”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걸 어떻게 어머님이 알고 있는 거지?
“네…… 있어요. 의식이 없어서, 제가 집에 데려가서 치료해 줬거든요.”
“어머, 의식이 없어서 치료까지 해 줬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되물은 세뤼아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들 녀석, 내숭은…….
세뤼아가 입을 가리며 중얼거린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앞서 되물었던 그 질문만으로도 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감출 길이 없었다.
‘뭐지? 내가 다친 생명을 치료해 준 게 그렇게 신기하셨나?’
그런 당연한 게 신기할 정도로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였나……?
그렇게 얼얼한 충격에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정말 예쁘구나, 에리카.”
갑자기 불청객이 툭 튀어나왔다.
나는 당장이라도 썩어들려는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셀루리아 후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외숙모…….”
가련한 척 여리게 대답하며 속눈썹을 바르르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게 매끄럽게 웃어 보인 후작 부인은 이내 내 앞에 서 있던 세뤼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대공 전하,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실 수 있으신가요? 에리카와 둘이서 할 말이 있어서.”
“그럴 수 없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