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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23)화 (23/139)

23화

“네, 주인마님……. 저는 태어나서는 안 되는, 천한 아이인걸요…….”

나는 부러 비련의 주인공인 척, 흑 소리를 내며 발연기를 선보였다.

이제 대공저까지 왔는데 저놈의 정서 학대를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나 싶어서 ‘뉘예뉘예’하듯 대충 대꾸한 건데, 후작 부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물러났다.

……뭐야? 지금 이 발연기가 먹힌 거임?

아무리 레틸기스 즙의 효과가 대단해도 그렇지, 진짜 이 발연기가 먹혔다고?!

‘헐, 이럴 줄 알았으면 저택에서도 대충 발연기 하고 지낼걸!’

후작 부인의 굉장히 엄청난 눈썰미에 내가 경악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예비 비전하.”

주황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긴 남자가 하인복을 입은 여자 두 명을 대동한 채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내 보호자 자격으로 따라온 후작 부인을 힐끔했다. 역시 좀생이 후작 부인은 나보다 인사 순번이 밀린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평생 밀릴 텐데, 뭐 이거 갖고…….

“저는 대공성의 행정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집사 타한이라 합니다.”

“안녕하세요, 집사님. 저는 셀루리아 후작가의 에리카라고 해요…….”

나는 일부러 여리여리하고 툭 하면 쓰러질 것 같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다시 생각해 봤는데, 완벽한 내 꼭두각시라고 생각했던 사람한테 뒤통수 멋지게 당해 버리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람을 무너뜨리는 가장 최고의 방법은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굴어서 그 사람의 일부가 됐다가 배신 때리는 거라고.

뭐, 내가 후작 부인한테 소중해서 일부라는 건 아니고, 후작 부인이 나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철석같이 믿고 있어서 일부라는 얘기다.

“대공성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 둘은 앞으로 예비 비전하의 시중을 들 포카와 레비나입니다.”

“안녕하세요, 예비 비전하! 저는 비전하의 직속 하인 포카라고 합니다!”

“저도…… 오늘부터 예비 비전하의 시중을 들게 된 직속 하인 레비나라고 해요…….”

주홍색 머리카락을 앙증맞게 양 갈래로 묶은 포카는 검은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밝고 쾌활해 보였다.

반면 붉은 눈동자를 가진 레비나는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렸는데, 수줍음을 많이 타는지 하얀 뺨에 발그레하게 홍조를 띄우며 내게 인사했다.

“아, 안녕……. 잘 부탁해.”

나 역시 수줍은 듯 자신 없는 듯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인사한 뒤, 의구심을 품은 채 타한과 포카, 레비나의 얼굴을 스윽 훑었다.

‘뭐지. 왜 셋 다 외모가 장난 아닌 거지.’

보통 소설 속에서 사용인들이 이렇게 잘나기는 힘든데 말이다.

잠시 의문을 갖던 나는 이내 관심을 지웠다.

뭐, 미모가 잘날 수도 있지. 사람은 외모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아. 셀루리아 후작 부인께도 인사드립니다.”

타한이 그제야 발견했다는 듯 후작 부인에게 인사했다.

후작 부인은 이마에 커다란 혈관 마크를 단 채 호호 웃으며 부채를 펼쳤다.

“그래.”

“그럼 예비 비전하, 머무실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타한이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순간 후작 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나는 눈치 따위 전혀 없는 매끈매끈 뇌 소유자처럼 배시시 웃었다.

“네, 감사해요…….”

내 인사를 끝으로 타한은 곧장 처소까지 안내를 시작하려 했다.

그걸 막은 사람은 후작 부인이었다.

“흠. 크흠.”

후작 부인은 헛기침 소리를 요란히 냄으로써 자신도 곁에 있음을 표명했다.

그냥 나를 따라와서 처소를 배정받으면 될 텐데, 굳이굳이 ‘자신에게’ 처소를 안내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싶은가 보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듯, 타한의 얼굴에 떨떠름한 표정이 찰나에 스쳐 지나갔다.

타한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 뒤, 후작 부인에게 말했다.

“셀루리아 후작 부인께서는 잠시 기다리시면, 처소를 안내할 하인장이 올 것입니다.”

“뭐, 뭐? 나는 에리카의 외숙모다. 응당 집사인 그대가 처소를 안내함이 격에 맞지 않느냐!”

살랑살랑 부치고 있던 부채를 탁 접은 후작 부인이 맹렬하게 소리쳤다.

“부인.”

타한이 빙긋 웃음 지었다.

분명 웃음이었지만, 그 안에서 스산한 기운을 느낀 후작 부인은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물러났다.

“저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손님은 바로 에리카 르 셀루리아 예비 대공비 전하이십니다. 본디 대공성에서 집사의 안내를 받는 객은 가장 중요한 객이므로 저는 부인의 안내를 도와드릴 수 없으니, 부인께서는 부디 이곳에서 하인장을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와. 분명 얼굴은 웃고 있고 내용은 정중하며 말투는 극존칭인 하십시오체인데, 후작 부인의 반응은 욕을 한 사발 들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타한도 참 대단하단 말이야. 당신은 가장 중요한 객이 아니라는 말을 저렇게 면전에 대고 말하다니.’

역시 서비스직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럼 가시지요, 예비 비전하.”

타한이 새로 웃음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까 후작 부인에게 지은 것과는 전혀 다른, 봄바람처럼 한없이 부드러운 웃음을 보면서, 나는 다시 눈치란 전혀 없는 매끈한 뇌 소유자처럼 마주 웃었다.

“네, 집사님.”

“그저 타한이라 불러 주시면 됩니다. 말도 편하게 낮춰 주십시오.”

“응, 타한.”

나와 타한, 그리고 내 두 직속 하인은 하하 호호 웃으며 덩그러니 버려진 후작 부인을 등진 채 대공성 안으로 들어갔다.

‘아, 좀 꼬시다.’

남에게 주제 파악 운운하는 너나 거기서 좀 주제 파악하세요.

역시 사람은 자신이 행한 걸 직접 겪어 봐야지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지 알 수 있다.

‘아무튼, 내가 셀루리아 가문에 복수할 때 굳이 해수를 영업하지 않아도 되겠네.’

그럼 나는 유유히 복수를 끝내고 산뜻하게 이혼해 준 다음에 한가로운 솔로 라이프를 즐기면 되겠다.

‘아, 벌써부터 쓰레기 치우고 놀러 갈 생각하니 막 두근거린다.’

가장 먼저 뭘 하면 좋을까. 아무래도 내 최애 악기 피아노부터 제작 의뢰 맡겨 놓는 게 좋겠지?

나는 탭댄스를 추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억누르며 얌전하게 타한의 뒤를 쫓아갔다.

* * *

내게 배정된 방은 엄청나게 크고 으리으리했는데, 대공성의 손님방은 원래 이렇게 다 화려하냐는 내 물음에 여기는 대공성의 안주인이 대대로 사용해 온 방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 손님방 아니고 그냥 바로 안방을 내주는구나.’

뭐, 대공가는 이게 당연한가 보지.

세상은 넓고, 나는 빙의란 걸 했으며, 각 지역마다 문화는 정말 다양하다.

그러니까 그럴 수 있지.

포카와 레비나가 내가 간단히 즐길 티타임을 준비하는 동안, 타한은 내가 알아야 할 정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결혼식은 바로 내일 오후에 진행될 것이고, 선대공 부부는 결혼식 후 일주일 후에 대공성을 떠나 세계를 유람할 예정이며, 안주인으로서의 업무는 그 전에 선대공랑께서 인수인계해 줄 거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인수인계를 제외한 다른 두 내용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을 모두 끝마친 타한은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설렁줄을 당겨 달라고 덧붙인 뒤에 밖으로 나갔다.

나는 포카와 레비나의 도움을 받아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는 벗어 버리고 간편한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완전히 옷을 갈아입은 후 포카와 레비나까지 밖으로 나가자, 방 안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흐아아아…….”

그제야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워서 팔다리를 쭉 뻗었다.

진심 내가 멀미 잘 하는 사람이었으면, 나는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송장이 되었을 것이다.

마구 헤엄치듯 팔다리를 휘적거리던 나는 정말 피곤하기는 했는지 어느 순간 잠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포카와 레비나가 정성스럽게 준비해 준 다과상이 식어 가는 것도 모른 채 꿈나라에서 헤매던 내가 문득 잠에서 깬 것은, 문밖에서 느껴진 인기척 때문이었다.

‘……뭐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후작 부인이었다.

‘혹시, 카리에처럼 후작 부인도 나 독살하려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한 번 카리에에게 크게 덴 적이 있는 나는 눈을 부릅뜨고 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투시 기능이 없는 내 안구가 한스러울 뿐이었다.

그렇게 베개를 꼭 껴안은 채 문을 노려보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잠깐. 그러고 보니, 여긴 후작저도 아니고 대공성인데 후작 부인이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저 인기척의 주인이 후작 부인은 아니라는 소린데.

일단 후작 부인이 아니라면 내 신변에 위협적인 인기척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설렁줄 가까이로 다가가며 큰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누구세요?”

“……!”

제 인기척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밖에서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하는 줄 어떻게 아냐고?

숨을 급히 들이쉬는 소리가 저렇게 생생하게 들리는데 어떻게 몰라.

‘저기요, 제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요?’

그렇다면 큰 오판을 하셨네요. 지금 당황하는 소리도 다 들리거든요…….

어이없어하는 내 머릿속으로, 문득, 부끄러워서 얼굴을 숨겼지만 꼬리는 분홍색으로 물들인 채 맹렬하게 흔들고 있던 샤샤가 떠올랐다.

비식, 불현듯 입가에 힘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 인기척의 주인이 샤샤일 리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저 사람에 대한 경계가 누그러들었다.

“혹시 저에게 볼일이 있으신가요?”

나는 문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것이 느껴졌는지, 어쩔 줄 몰라 하듯 복도를 마구 서성거리던 그 사람은 이내 다른 곳으로 황급히 도망가 버렸다.

조금씩 작아지던 발소리가 곧 완전히 끊겼다.

잠시 문에 귀를 대고 있던 나는 소리가 완전히 들려오지 않자 천천히 문을 열었다.

턱.

“……?”

문을 열다가 뭔가가 채는 감각이 들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문 아래 웬 꽃다발이 하나 놓여 있었다.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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