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오늘도 후작 부부에게 끌려갔던 나는 눈을 멍하니 깜박이며 멍청하게 되물었다.
방금 건 연기가 아니라 진심 되시겠다.
내 어벙한 되물음이 경멸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후작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에 하얀 종이봉투를 던졌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종이봉투를 열었다.
대공가의 문양이 양각되어 있는 종이는 막눈인 내가 보기에도 엄청 비싼 종이였다.
“드레인 대공자께서 네게 보낸 청혼서다.”
“와…….”
“그렇다고 자만하지 마라. 네가 가치 있어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너의 뒤에 있는 셀루리아를 목적으로 네게 접근한 것이니.”
“아하…….”
오구오구 그래쪄요. 셀루리아가 그르케 대다내서 무려 별 볼 일 없는 천민 나부랭이인 나한테 청혼서가 온 거예요?
우리 셀루리아, 참 대다내요!……
……아아. 눈이 저절로 흐리게 떠지려고 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애써 표정을 수습했다.
자, 에리카. 슬픈 생각. 슬픈 생각.
‘그나저나, 드레인 대공가는 왜 뜬금없이 나한테 청혼서를 보낸 걸까?’
뭐 나야 거절 걱정 없어서 고맙긴 했지만, 이러다 나중에 뭔가가 대차게 꼬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드레인 가문이 셀루리아와 연을 맺는다는 목적으로 청혼한 거면, 나중에 셀루리아에 복수할 때 방해하는 건 아니겠지…….’
좌우명이 명생명사(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다)인 셀루리아는 만만하게 볼 수 있어도, 군력 빵빵한 드레인 대공 가문이 비호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말로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해수를 영업해서 셀루리아보다 해수가 더 쓸모 있을 거라고 약을 파는 수밖에.’
솔직히, 명분과 군력을 모두 쥐고 있는 드레인 대공가에게 연줄을 더 만드는 것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틈을 노려서 내가 이혼 후에도 해수로서의 도움을 주겠노라고 꼬드기면 성공하지 못할 것도 없지!
‘샤샤의 복수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는 여유로운 억만장자 솔로 라이프를 만끽하며 좋아하는 작곡이나 하면서 멘탈 치유를 할 예정이었지만, 뭐 어쩌겠어.’
나한테는 느긋한 세계 유람보다 샤샤의 복수를 하는 게 더 중요한데.
드레인 대공령이 자리한 제국 동부는 거대한 산맥이 자리 잡고 있어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자연히 대공령에는 영지민이 많이 거주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거둬들이는 세입은 다른 비옥한 영지보다 적을 터였다.
그러니 대공가가 잡을 손은 당연히 셀루리아보다 해수 쪽 아니겠는가!
‘괜찮아. 나는 할 수 있다! 이 자식들의 모가지를 날려 버릴 수 있다!’
나는 속으로 불끈 주먹을 쥐었다.
내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일도 모를 후작은 이어서 뭐라뭐라…… 아 뭐랬지…… 아무튼 대충 내 자존감을 후려치는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 녹음해서 본인에게 곧이곧대로 돌려주고 싶다.’
자고로 사람은 역지사지의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지 않은가.
대충 영혼 MSG을 첨가한 뉘예뉘예 반응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다 보니, 드디어 학대가 끝나는 시간이 도래했다.
‘종강의 기쁨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쁨이로구나.’
나가라고 훠이훠이 내젓는 저 손짓이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나는 잔뜩 쭈그리된 모습을 선보이는 걸 잊지 않으며 서둘러 내 골방으로 돌아왔다.
“진심 몇 시간 내내 고개 숙이고 있으니까 목디스크 걸릴 거 같아.”
목을 한 바퀴 돌리는데 뚜둑 소리만 대체 몇 번인지.
‘하지만 이 짓도, 얼마 뒤면 진짜로 끝이야.’
끝이 정해져 있으니 정말로 마음이 한결 가뿐했다.
이래서 퇴사 예정인 사람들의 얼굴이 비교도 안 되게 밝은 거구나.
* * *
옅은 햇살이 눈을 간질였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세이룬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반투명한 휘장 사이로 들이비친 햇살에 눈이 부셨다.
“깼니?”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세이룬의 귓가로 부드러운 미성이 닿았다.
세이룬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부드러운 흑빛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팔짱을 낀 채 문가에 비스듬히 서 있던 세뤼아는 세이룬과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가사를 이렇게나 일찍 끝내 버리다니. 고작 5개월 만이던가?”
“…….”
“너, 정말로 그 아이가 보고 싶었나 봐?”
“……해수는요?”
세이룬이 물었다.
저를 쳐다보는 무심한 시선에, 세뤼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사랑을 하면 성정이 유해진대서 몇 년째 기대하고 있건만, 우리 아들은 몇 년이 지나도 영…….”
“대답해 주세요. 해수는요?”
묻는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이불을 쥔 손등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 손을 힐끗한 세뤼아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왜, 네가 자는 동안 누가 그 아이 홀랑 채 갔을까 봐 걱정돼?”
“…….”
정곡이었는지, 세이룬은 대답 없이 꾹 입을 다물었다.
왠지 시무룩해 보이는 듯한 기색에, 세뤼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네가 시무룩해하는 것도 보고 말이야. 너, 설마 누가 그 아이 채 가는 거 상상해서 그런 거니?”
“……어머니.”
세이룬이 한숨처럼 말하며 머리를 길게 쓸어올렸다.
무뚝뚝한 아들을 조금 더 놀려 볼 생각에 신이 났던 어머니는 자신을 노려보는 아들의 눈동자를 보고 서둘러 항복했다.
“알았다, 알았어. 그러게, 평소에 그런 귀여운 반응 좀 보였으면 나도 이렇게 신기해하지 않을 것 아니니.”
투덜거린 세뤼아가 이어 말했다.
“그 아이는 아직 미혼으로 잘 지내고 있단다.”
“……하.”
잔뜩 긴장하고 있던 세이룬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심지어는 옅게 웃기도 하는 제 아들을 보며, 세뤼아는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어머머. 너 지금 웃고 있니? 너 설마 그 아이 앞에서는 그렇게 자주 웃니?”
“…….”
세뤼아의 호들갑에 세이룬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세이룬은 세뤼아를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카에게 선택받기 위해 매력을 갈고닦으려면 당장 준비를 시작해도 부족했다.
얇은 겉옷을 걸쳐 입고 곧장 방 밖으로 나서려는 그의 뒤에 대고, 세뤼아가 느지막이 덧붙였다.
“근데 그 아이, 혼약자는 있단다.”
“……!”
세이룬이 재빨리 세뤼아를 돌아보았다.
분노와 절망, 서러움이 가득한 세이룬의 얼굴을 찬찬히 감상한 세뤼아가 약 올리듯 물었다.
“상대는 안 궁금하니?”
“……누굽니까. 그 사람.”
턱에 잔뜩 힘을 준 세이룬이 씹어뱉듯 물었다. 상대가 누구든 다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목소리였다.
세뤼아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산뜻하게 덧붙였다.
“너야.”
“……네?”
문득, 세이룬의 살벌한 얼굴이 어벙하게 풀렸다.
“너 가사에 들었을 때, 내가 네 이름으로 그 아이한테 청혼서 보냈거든. 그 아이가 괴로워하는 걸 도저히 못 봐 주겠어서 말이야. 물론 긍정의 답변이 왔고.”
“…….”
“어때. 엄마 잘했지? 막 애교 잔뜩 떨어 주고 효도도 엄청 열심히 하고 그러고 싶지?”
“응, 응?”하고 세뤼아가 재촉하듯 물었다.
잠시 그대로 표정 없이 굳어 있던 세이룬은 이내 스르륵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나는 정말로…….”
세이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두근거려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우리 아드을, 지금 설레어 하는 거야? 그 아이와 결혼한다고?”
제대로 말도 못 잇는 세이룬의 근처에서 알짱거리며 세뤼아가 놀리듯 물었다. 계속 그렇게 세뤼아가 세이룬의 인내심을 콕콕 찌르고 있을 때였다.
“세뤼아.”
어디선가 나타난 자네한이 세뤼아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왜애’하며 품에서 벗어나려는 세뤼아를 더욱 꼭 끌어안은 자네한이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주저앉아 있는 세이룬을 바라봤다.
“미안, 세이룬. 네 엄마가 또 귀찮게 굴었지?”
“뭐? 아니야! 자네한, 이건 귀찮게 군 게 아니라 아들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 것뿐이야!”
세뤼아가 말도 안 된다는 눈빛으로 자네한을 노려봤다.
그새 자리에서 일어난 세이룬은 대답 없이 세뤼아를 빤히 응시했고, 자네한은 미안한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지금 막 깨어나서 해야 할 일도 많고 확인하고 싶은 일도 많지? 결혼과 관련된 사항은 네 집무실에서 확인할 수 있단다. 네 엄마는 내가 잘 데리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 보렴.”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자네한은 세이룬과 같이 있을 거라고 몸부림치는 세뤼아를 번쩍 안아 들고 성큼성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세이룬은 이내 몸을 돌려 자신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네한이 말해 준 대로, 에리카와의 결혼과 관련된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복도를 걸어가던 세이룬은 몇 걸음 채 걷지 못하고 돌연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결혼…….’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해서, 그는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