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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21)화 (21/139)

21화

셀루리아의 차 사업은 오로지 고위층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품을 생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애초에, 영지에서 걷는 세금만으로도 충분한 수입을 걷는 셀루리아에서 이 사업을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황실에 납품되는 차를 어중이떠중이에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시작된 사업이지 않은가.

그런데, 더 이상 고위층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셀루리아의 차 사업은 완전히 망해 버리겠지.

‘아니, 이미 망했어.’

델레미아는 애써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 무엇보다 든든했던 수입원이 모조리 막혔다.

델레미아는 변하지 않는 명제에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하는 대신 사태를 냉철하게 파악했다.

이 인위적인 소행은 신교파의 소행일 확률이 높았다.

영지민의 봉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흑차를 십 분의 일 가격으로 수입하는 것은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지 않고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생각했어.’

다른 구교파 귀족이라면 몰라도, 돈의 권력을 인정하고 있는 셀루리아는 다른 수입원을 찾는 데 거리끼지 않았다.

그들이 셀루리아의 수입원을 모조리 막아서 돈으로 숨통을 조이려 한다면, 이쪽도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내 맞대응하면 그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해수.”

델레미아의 말에, 펠리페와 카리에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해수라면……”

“그 베일에 가려진 억만장자 말씀이시죠, 어머니?”

펠리페가 말끝을 흐리자 카리에가 잽싸게 거들었다.

델레미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레미에게 지시했다.

“이번에야말로 해수에게 가서 전해. 그대가 남자라면 셀루리아의 조카사위가 될 수 있을 테고, 여자라면 황자비가 될 수 있도록 셀루리아의 이름으로 도와주겠노라고.”

물론, 반쪽짜리 에리카라 허울뿐인 조카사위에, 황자 또한 사생아라 명목뿐인 황자비겠지만.

델레미아는 속엣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 * *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추위가 매서워진 요즘, 셀루리아 저택 안에는 우중충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최근까지 계속 호시탐탐 나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던 카리에가 몸을 사리고 있는 것만 봐도, 가문 분위기가 어떤지 알 수 있잖아?’

내가 원하는 대로 은행장이 일 처리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해 준 모양이었다.

하긴, 그동안 내가 투자로 불려 준 돈이 얼만데. 이 정도도 안 하면 양심이 없는 거지.

‘그나저나 해수와의 결혼이라니…… 그건 결혼이 아니라 비혼인데요.’

나 자신과 하는 결혼식은 비혼식 아닌가.

‘하긴, 나 중딩 초반 때까지는 비혼이 꿈이었는데.’

툭 하면 햇빛 쨍쨍한 날 곰팡이 피도록 때리는 아비란 놈 때문에 결혼 따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적이 있었다.

물론 멋진 나는 그 트라우마도 멋지게 극복해 냈지만.

‘그나저나, 아직도 해수를 회유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직 돈줄을 틀어막은 게 해수라는 소문은 못 들었나 보네.’

아니면 애써 외면하고 있거나. 뭐, 그럴 가능성은 거의 0에 수렴하지만.

오늘 후작 부인이 내 앞에서 세뇌하듯 해수를 엄청 치켜세웠던 것만 봐도 외면은 절대 아니었다.

‘아. 떠올리니까 다시 토 나올 것 같아…….’

사람들이 왜 수치사로 죽는지 이해가 가는 시간이었는데.

‘그렇게 날 제거할 속셈이었으면 인정.’

후작 부인의 해수 칭찬 세례는 카리에가 한 그 어쭙잖은 독살 시도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침대 위를 뒹굴댕굴거리던 내 눈에 불현듯 오른쪽 손목이 들어왔다.

작고 귀여운 꽃문양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저 깨끗하기만 한 손목.

순간, 싸하게 퍼져 가는 감정이 무거워서,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것은 곧 샤샤가 내 곁에 없다는 것을 뜻했다.

“……일부러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툭 내뱉듯 중얼거린 나는 손목을 부여잡은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내 힘을 되찾기까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어, 샤샤.

지루하더라도, 하늘에서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줘. 알았지?

* * *

“……그러니까 지금, 셀루리아의 숨통을 옥죈 게 해수라고?”

미간을 왈칵 구긴 델레미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보좌관 레미를 노려보았다.

우물쭈물하던 레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주인마님.”

“하. 하하하, 하하…….”

어이없다는 듯 기가 막힌 웃음을 내뱉던 델레미아는 이내 희고 곧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웃음이 점차 사라져간 자리에는 분노가 새파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뭐? 조카사위의 자리를 줘? 황자비의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

“아아악!”

수치심에 못 이긴 델레미아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찻잔 깨지는 소리가 고막을 시끄럽게 긁어내렸다.

지금까지 해수를 얻겠다고 저지른 갖은 흑역사가 치가 떨릴 정도로 부끄러웠다.

“감히…… 감히 한낱 평민 따위가…… 대귀족인 나를 이리 우롱해?”

이번에는 주전자가 날아갔다. 벽에 맞은 자기 주전자는 퍽 소리를 내며 떨어진 뒤 바닥을 굴렀다.

“감히, 감히, 감히……!”

테이블 위에 있던 꽃병과 다과 접시도 집어 던진 델레미아는 테이블까지 엎은 뒤에 한동안 씩씩거리며 분을 삭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해수는 한낱 평민이었고 자신은 귀족이었지만, 당장 수중의 권력은 그자가 더 많았다.

이리 가볍게, 셀루리아의 모든 수입원을 끊을 수 있을 만큼.

분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델레미아는 하인들이 엉망이 된 방 안을 치우는 걸 지켜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해수가 저에게 칼을 빼 들었으니, 금전을 제 편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권력의 원천은 금전과 군력인데.’

그중에서 금전이 등을 돌렸으니, 군력이라도 악착같이 끌어오는 수밖에.

군력의 일인자는 동쪽 변방을 수호하는 드레인 대공 가문이었다.

구교파나 신교파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 가문이자, 황가에게는 충성하는 가문.

‘마침 드레인 대공에게는 에리카 나이 또래의 대공자가 한 명 있다고 했지.’

후에 카리에가 황태자비가 될 테니, 청혼의 명분도 나쁘지 않았다.

이 거지 같은 상황을 타파할 길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자, 델레미아의 눈동자에서 빛이 돌아왔다.

‘게다가 대공가는 오랫동안 이렌텔의 귀족가나 황가와 혼인 관계를 맺지 않았으니, 셀루리아가 드레인 대공가와 연을 맺을 것이라 하면 황가는 절대 마다하지 않을 거야. 셀루리아 가문은 절대적으로 황가를 지지하는 가문이니까.’

마다하기는커녕, 황가는 오히려 지지를 표명할 것이다.

더구나 셀루리아는 해수가 등을 돌린 가문이었으니, 힘의 균형이 쏠릴 위험도 없었다.

“에리카의 쓸모가 이제야 빛을 발하는구나.”

흐트러진 방 안은 금세 말끔해졌다.

델레미아는 붉게 칠한 입술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 * *

“전 절대 동의할 수 없어요!”

식사 후 다과 시간, 카리에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면서 소리쳤다.

찻잔을 쥔 카리에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냥 진작에 죽여 버렸어야 했다고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 동안, 조각 케이크를 잘라서 입에 가져가던 펠리페가 인상을 쓰며 카리에를 바라봤다.

“카리에, 품위 없이 그게 무슨 짓이냐.”

“하지만― 하지만 지금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뭐가 어처구니없다는 말이니.”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델레미아가 카리에를 응시했다.

제 어머니의 빤한 시선에 카리에는 저도 모르게 흠칫 시선을 피했다.

“에, 에리카 그 멍청하고 별 볼 일 없는 게 무려 대공가에 시집을 간다니까―….”

“카리에.”

델레미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리카가 좋은 가문에 시집갈수록 너에게 이득이라는 것을 왜 모르니. 에리카는 우리의 졸개야. 에리카가 대공가의 안주인이 된다면, 안주인의 권한은 우리의 수중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더구나 대공가는 중앙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호가호위하기에도 매우 적당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리에는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찻잔을 꼭 쥐었다.

“……하지만, 에리카가 대공비가 되면 ‘전하’가 되잖아요. 저는 그 녀석한테 고개 숙이기 싫어요.”

카리에가 투정 부리듯 툴툴거렸다.

델레미아와 펠리페는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카리에, 대체 그게 뭐가 걱정이란 말이냐. 너는 황태자 전하와 결혼하게 되면 ‘전하’가 될 테고, 이후 황태자 전하께서 황제 폐하가 되시면 너도 ‘폐하’가 될 예정이지 않니.”

펠리페의 웃음 섞인 말에, 카리에의 입에서도 조금씩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맞아요. 내가 너무 성급했어요. 어차피 고개 숙일 사람은 에리카인데.”

“그래, 카리에. 한낱 졸개에 불과한 애를 질투하거나 경쟁 상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단다. 에리카는 네가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아이니 그 애를 더 잘 써먹을 생각만 하렴.”

너와 가문에 이롭도록 말이야. 델레미아가 덧붙이며 과자를 하나 입가로 가져갔다.

“네, 어머니. 명심할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카리에는 천천히 손안에 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에리카는 ‘전하’, 나는 ‘폐하’.’

속으로 중얼거려 봤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카리에는 찻잔을 기울여 장미차를 한 모금 마셨다.

코끝을 맴도는 장미 향이 산뜻했다.

* * *

불과 어제까지 내게 해수에 대한 칭찬을 쏟아 내던 후작 부인은, 이제는 드레인 대공자에 대한 칭찬을 마구잡이로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해수도 그렇고 드레인 대공자도 그렇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 칭찬은 어쩜 그리 잘하는지.

대공자에 대한 칭찬 세례를 듣던 도중 은근슬쩍 해수에 관해 물었더니, 그 하수구 같은 놈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일갈이 돌아왔다.

‘해수가 자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이제 알았나 보네.’

고작 하루 사이에 칭찬의 대상이 바뀌는 저 뻔뻔함이라니.

아무튼, 일이 내 뜻대로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아서 그건 다행이라 할 만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것도 얼마 가진 않았지만.

“……네? 청혼서요? 저한테 청혼서가 왔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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