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돈이 억 소리 날 정도로 정말 많으면, 시중에 퍼져 있는 돈의 흐름을 원하는 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흐름만 바꾸는 것뿐이랴. 귀여운 액수의 돈을 홀라당 냠냠해 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즉, 나한테 한 가문의 돈줄을 모두 틀어막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말씀!’
돈으로 가문 하나를 압박해서 내 결혼을 유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한 두 번째 방법이었다.
셀루리아 후작 가문보다 격이 낮은 가문들은 대상으로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청혼서를 날려 봤자 그 콧대 높은 후작 부부는 쳐다보지도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렌텔에 셋 있는 공작 가문의 돈줄을 틀어막아서 셀루리아에 청혼서를 넣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결혼으로만 재산 회생이 가능하도록 물밑 작업을 한다 할지라도, 결혼 대상을 셀루리아로 특정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다? 그건 그냥 누가 어떻게 생각해도 작위적이지.’
셀루리아 후작가가 일부러 유도한 상황이 아니냐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무튼, 특정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공작 가문이 셀루리아에 청혼서를 넣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 방법은 득보다는 실일 가능성이 더 컸다.
‘아무리 내가 억 소리 나는 부자라고 해도, 세 공작 가문 모두의 돈줄을 틀어막는 데는 무리가 있으니까.’
그러면 누구의 돈줄을 틀어막아야 하느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곧장 책상 앞에 앉아서 빈센트에게 보낼 쪽지를 적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외출하고 싶어」
요즘 빈센트는 4층으로 간단한 먹거리를 갖고 찾아오는 빈도가 대폭 늘었다.
아마, 후작 부부에게 불려 가는 횟수가 대폭 늘어난 나를 걱정하는 모양이다.
사흘에 한 번씩 4층 창고 방을 점검하러 오는 하인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그 일을 대신해 준다는 명분도 생겨서 거리낄 건 없다고 했다.
‘흠흠, 아무튼.’
그 덕분에, 하고 싶은 말을 쪽지에 적어서 문 앞 작은 꾸러미에 넣어 두면, 빈센트는 4층에 올 때마다 그 쪽지를 보고 즉석에서 답장을 해 방문 밑으로 넣어 주고는 했다.
나는 다 적은 쪽지를 꾸러미 안에 넣었고, 다음 날 빈센트에게서 답장을 받았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시간을 내겠습니다.」
분명 내 부탁은 갑작스럽고 뜬금없었다.
그뿐일까. 곤란하기까지 할 테다.
하지만 빈센트는 거절하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조차 없이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그 상냥한 대답을 받아 든 나는 힘없이 웃으며 빈센트가 주고 간 빵을 손에 꼭 쥐었다.
“……바보 같은 사람.”
정말, 내가 뭐라고 당신은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건데.
자아조차 짓이겨진 채 주야장천 학대만 당하는 구박데기 아가씨에게서 무슨 콩고물이 떨어진다고.
“착한 사람…….”
다시금 중얼거린 나는 이내 눈빛을 맑게 하며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 * *
“셀루리아 가문의 돈줄을 틀어막으세요.”
이틀 뒤, 켈타카 은행의 은행장실에 들어선 내가 지시했다.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은행장이 슬쩍 한 손을 들어 귀를 두드렸다. 잘 들리는 게 맞는지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저런, 벌써부터 노환을 걱정하다니 가엾기도 하지.
“셀루리아의 돈줄을 틀어막으라는 소리로 들렸다면 맞게 들었으니 안 두드려도 돼요. 축하드려요, 아직 청력 정정하시네.”
“예……?”
“두 번 말해야 할까요?”
“아니, 그…… 진심이십니까?”
“그럼 제가 이 귀한 시간에 농담 따먹기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요?”
안 그래도 시간 없는데 말이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은행장을 지그시 응시했다.
흠칫한 은행장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닙니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셀루리아 가문의 수입원은 모조리 끊고, 후에 새로 생길지도 모르는 수입원도 모조리 차단해 주세요. 물론 안 할 것 같기는 하지만, 혹시 대출을 신청해도 절대로 해 주지 말고.”
아렌텔의 제1은행인 켈타카 은행에서 대출을 반려당한 자는 켈타카의 눈치를 보는 다른 은행에서도 대출을 받기 어려웠다.
이어서 나는 은행장에게 세부 지시 사항을 꼼꼼히 말해 줬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은행장을 마지막으로, 용건을 모두 마친 나는 곧장 후드를 꾹 눌러쓴 뒤 빙글 몸을 돌렸다.
“아.”
나는 그대로 은행장실을 나서려다가 다시 은행장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해수가 셀루리아 후작 가문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소문도 카더라 식으로 내 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카더라…… 식이요?”
“증거는 없이 그냥 말로만 그렇다더라 하는 소문 말이에요.”
나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해수가 셀루리아 가문의 돈줄을 끊어 놓았다는 소문의 이점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해수의 재력이 무서워서 어느 가문이든 함부로 셀루리아 가문을 선뜻 도와주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물론 황가는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돈을 천대하고 체면을 내세우는 황가에서 과연 돈으로 체면을 구긴 셀루리아 가문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려고 할까?
그럴 리가. 오히려 카리에의 황태자비 내정을 무르려고 할 것이다.
‘이걸 모를 셀루리아 후작 부부가 아니지.’
그들이 카리에를 황태자비에 내정시키려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가.
그러니 그들은 돈으로 구긴 체면을 어떻게든 당장 회복시키려 혈안이 될 것이다. 본 가문은 돈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 가문임을 황가에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기서 이점 둘째.
체면은 곧 명분이고, 명분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껍데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실질적 권력의 원천인 금전과 군력이지.
‘하지만 금전이 모두 틀어막혔으니, 궁지에 다다른 그들이 손을 뻗을 곳은 군력밖에 없어.’
이렌텔 제국에서, 셀루리아의 구긴 체면을 단숨에 상회시킬만한 군력을 지닌 가문은 드레인 대공 가문밖에 없었다.
결국 셀루리아에서는 드레인 대공가와 연을 맺으려 할 것이고, 자연히 대공가에 청혼서를 넣게 될 터였다.
사람과 사람이 맺어지는 결혼이야말로 연을 맺는 데 매우 적격이었으니까.
다행히, 현 대공에게는 여주, 남주와 비슷한 나이의 대공자가 있다는 설정을 신아에게서 얼핏 들은 듯도 했다.
‘아니었으면 정말 대공 전하의 첩으로 들어가야 했을 뻔.’
내가 아무리 내로남불을 싫어해도 어쩌겠는가. 나는 가문이 까라면 까야 하는 힘없는 미성년자에 불과한데.
‘물론, 그것도 대공가에서 청혼을 거절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겠지만.’
하긴, 저번 연회에서 대공과 대공랑의 사이가 매우 좋았던 걸로 봐서는 거절당할 확률이 99.99%이긴 했다.
나는 속으로 어깨를 으쓱인 뒤, 곧장 저택으로 돌아왔다.
* * *
“후작 각하! 큰일 났습니다!”
셀루리아 저택의 노집사, 하르만이 부리나케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초겨울의 어느 날,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후작, 펠리페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우아하게 내려놓으며 일갈했다.
“하르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경거망동하지 말라 했을 텐데.”
같이 식사하고 있던 델레미아와 카리에의 찌푸린 얼굴 또한 하르만에게로 향했다.
“하르만, 자네가 그리 경솔하게 행동하면 아랫것들이 보고 무얼 배우겠어.”
안 그래도 해수에게 보내는 제의를 번번이 퇴짜 맞고 있던지라 신경이 곤두서 있던 델레미아가 날카롭게 덧붙였다.
하르만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종종걸음 쳐서 펠리페에게 다가갔다.
“정말……, 정말로 큰일입니다…….”
울먹이듯 중얼거린 하르만이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밀었다.
큰일이라 봤자 얼마나 큰일이겠어. 펠리페는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한 얼굴로 종이 더미를 받아 들었다.
느긋했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영지민 집단 봉기?”
보고서에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영지민이 집단적으로 봉기를 일으켜서 수확물이 모두 엉망이 돼 버렸기 때문에 올해는 세금을 걷을 수가 없다니.
“뭐? 봉기라뇨?”
“말도 안 돼. 그 버러지들이 감히 셀루리아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켰다고요?”
덩달아 얼굴이 굳어진 델레미아가 묻자, 옆에서 카리에가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
역시 잔뜩 얼굴을 찌푸린 펠리페는 두 사람에게 뭐라 대꾸할 정신도 없이 보고서를 델레미아에게 넘겼다.
펠리페에서 받아 든 보고서를 휙휙 넘기던 델레미아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하. 세율을 높인 것도 아니고, 갑자기 왜 이제 와서……”
“마님, 주인마님! 큰일 났습니다!”
이번에는 델레미아의 직속 보좌관인 레미가 다급히 뛰어왔다. 식탁 위에 보고서를 던지듯 내려놓은 델레미아가 소리쳤다.
“이번엔 또 무슨 큰일이야!”
“세, 세멘테 왕국에서…… 흑차가 대량으로 유입되었습니다…….”
“뭐? 흑차가?”
“네……. 저희 농지에서 재배하는 흑차와 질도 완전히 똑같은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어제부터 저희의 십 분의 일 가격으로 시중에 납품되었다고…….”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얼굴이 잔뜩 험악해진 델레미아가 주먹으로 식탁을 쾅 내리쳤다.
셀루리아 후작가는 대규모 차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차 농장에서 가공하는 차는 후발효를 거치는 ‘흑차’로, 와인처럼 오랜 숙성을 거친 후 완성되는 고급 차였기 때문에 단가가 매우 높아 고위층에서만 향유되고 있었다.
차가 납품되는 곳이 황실과 세사르가 전부였으니 말 다 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고급 차가…… 십 분의 일 가격으로 시중을 휘젓고 다닌다고?
“미쳤어. 미친 게 틀림없어…….”
델레미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고위층이 구태여 거금을 들여서까지 다른 이들과 차별화된 것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신은 저들과 근본부터 다르다는 우월함을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이 향유해 오던 고급품이 대중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대중화된 그것을 외면하겠지.’
대중화된 이상, 그건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