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래도 어머니, 어머니 혼자서는 어린 해수 키우기가 몹시 빠듯하잖아요. 집에 빚도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미 경력이 단절된 지도 오래라 다른 직장 찾기도 힘드실 테고……. 해수도 아버지가 있는 게 정서상 좋을 거예요.”
“그런 사정이 다 고려돼서 아버님 집행유예 받고 풀려나신 거니까 너무 그러지 마시길 바랍니다. 경찰들도 아버님 감시 잘할 테니,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무력하고 힘없는 미성년자와 경제력 없는 성인 여성이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김해수였을 때는 엄마를 죽인 범죄자 새끼를 벌하기 위해 내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지만, 한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지금은 아니었다.
성인만 돼서 내 재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기만 하면, 나는 저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기다려 줘, 샤샤.’
나는 와신상담하듯 내가 죽일 사람의 얼굴을 머릿속에 새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너의 복수를 할게.’
결코, 곱게 죽이지는 않을 거야.
지금껏 쌓아 올렸던 그 모든 부와 명성은 철저히 무너뜨리고,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귀족으로서의 긍지는 시궁창에 처박아 버릴 거야.
차라리 깔끔하게 죽여 달라고 짐승처럼 울부짖도록, 그렇게.
‘그렇게 복수를 할게.’
죄 없는 너를 죽음으로 몰아간 저들이, 절대로 태평하게 웃음 짓지 못하도록.
내 모든 것을 걸어서, 반드시.
‘그러니까……, 그러니까, 샤샤.’
너는 그냥 그곳에서 웃고 있어 줘.
* * *
바람이 불어왔다.
꿈속이었다.
사방에는 온갖 풀과 꽃들이 예쁘게 자라 있었다. 푸르른 보석처럼 새파란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뽀얀 뭉게구름이 동실동실 떠가고 있었다.
나를 포근히 감싸는 햇살마저도 따뜻해서,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다.
- 해수
무척이나 익숙한, 그만큼 반가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샤샤!”
조그맣고 까만 샤샤가 꽃들의 한가운데에서 나를 말꼬롬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손을 뻗어 샤샤를 들어 올렸다.
“우리 샤샤, 여기 있었구나?”
- 응, 나 여기 있어
샤샤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봤자 무척이나 조그만 끄덕임이라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내 웃음에 맞춰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바람결을 따라서 몸을 흔들고 있으니, 샤샤가 나를 따라 하듯 같이 몸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에 풀이 스쳤다. 풀잎에 매달려 있던 이슬이 발에 닿아 희게 빛났다.
“샤샤, 구름 태워 줄까?”
떠다니는 구름이 너무나 몽실몽실해 보여서 불쑥 물었다. 샤샤가 기쁜 듯 눈가를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떠다니던 구름 하나가 내려와 나와 샤샤의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샤샤를 구름 위에 놓아 주었다. 새하얀 구름 사이에서 까만 샤샤가 퐁 올라앉았다.
샤샤를 태운 구름이 동실동실 허공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샤샤가 충분히 즐거워할 때까지 구름을 잔뜩 태워 준 나는, 이번에는 바닥 가득 피어난 별꽃을 모아서 샤샤가 타고 있는 구름 가득 놓아 주었다.
“이건 샤샤가 좋아하는 별꽃.”
샤샤가 기쁜 듯 구름 위에서 한 바퀴 빙 돌았다.
샤샤가 기뻐하는 모습에 덩달아 기뻐진 나는 다음으로 하늘에 손톱만큼 조그맣게 박혀 있는 하얀 달을 따다가 샤샤의 앞에 놓아 주었다.
“이건 내가 하늘의 달을 따다 주고 싶어서.”
그다음에는 바람을 불러들여서 이 공간 가득 차 있는 달콤한 꽃향기를 모두 그러모아 샤샤에게 보내 주었다.
“이건 내가 샤샤에게 달콤한 걸 잔뜩 주고 싶어서.”
이곳에서라면, 아무리 무력하고 쓸모없는 미성년자인 나일지라도 샤샤에게 뭐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에는 또 뭐를 해 줄까?
뭐를 해 줘야 샤샤가 기뻐하지?
또 뭐를 해 줘야…….
- 해수
재빨리 머리를 굴리는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샤샤가 말을 걸어왔다.
- 난 괜찮아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샤샤를 바라봤다.
그럴 리가 없었다.
“샤샤.”
- 난, 정말 괜찮아
샤샤가 부드럽게 눈을 휘며 웃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목이 메어 와서,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아, 샤샤.
한없이 안타까운 내 샤샤.
“나는 너한테…… 아직 해 주고 싶은 게 많은데.”
들끓는 감정에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나는 웃었다. 겨우 만난 샤샤에게 눈물 따위 보여 줄 수 없었다.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샤샤가 천천히 속삭였다.
- 그럼, 나 노래 불러 줘
“노래?”
- 응
저번에 들려줬던 그 노래, 하고 샤샤가 덧붙여 속삭였다. 나는 최대한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큼큼,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내 입에서 단 하나의 청자를 위한 곡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랑님 보내는 강가에서
그곳에서 나는 나는
아롱아롱 이별 노래
슬픈 사랑 노래 불러요
노랫가락이 한없이 고요한 꿈속 공간을 가득 채웠다.
경쾌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쓸쓸하게 들리는 가락이었다.
푸른빛 고운 이 강물
얼마가 지나야 마를까요
해마다 나의 이별 눈물
푸르른 물결에 더하는데
느릿하게 노래를 부르며 샤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게로 머리를 내맡긴 샤샤가 내 손길을 느끼듯 눈을 반쯤 내리떴다.
방울방울 봄비는요
무지개 너머로 인사하고
우리우리 사랑님은요
푸른 강 너머로 인사해요
불현듯, 어디선가 옅은 새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온전히 눈을 뜬 샤샤가 말간 두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를 두 눈에 담은 샤샤가 예쁘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새파란 하늘과 푸르른 들판이 서서히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금 샤샤를 쓰다듬으면서, 작별 인사하듯 마지막 가사를 속삭였다.
안녕안녕 내 님 안녕
내 사랑 부디 안녕……
새가 다시 울었을 때, 꿈속 세상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눈을 떴다. 허공 가득 녹아든 벽색 새벽이 깨끗했다.
문득, 까닭 없이 눈이 시려와서,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물방울이 흩어졌다.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