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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18)화 (18/139)

18화

분명 창문을 닫아 놓고 갔을 텐데?

나는 황급히 창문가로 달려갔다. 내려다본 바닥에는 작은 병 하나가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불현듯, 카리에가 수통에 독을 타서 샤샤가 모조리 쏟았던 일이 떠올랐다.

“……카리에.”

선반을 꽉 쥔 내 손등에 뼈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방을 뛰쳐나가 바깥으로 내려갔다.

나와 같이 살자는 말에 온몸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좋아했던 샤샤가 스스로 떠났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둘이었다. 저 호리병을 밀다가 같이 떨어졌거나, 아니면 일부러 잠복해서 기다리고 있던 카리에에게 잡혀갔거나.

……가능성은 두 개라고 생각할 만큼, 전자의 가정이 설득력 있다고 믿고 싶었다.

샤샤처럼 작은 몸이라면, 이 높이에서 떨어져도 안전하게 착지해서 근처 풀숲에 숨어 있을 테니까.

나는 가쁜 숨을 가다듬는 것도 잊은 채 부서진 호리병 주위를 샅샅이 훑었다. 새카맣게 몰려온 먹구름이 하나둘 빗방울을 흘려보내기 시작했지만, 그래서 복부에 욱신거림이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혹시 샤샤가 떨어졌다면 근처에 숨어 있을 법한 풀이나 나무들도 꼼꼼하게 살폈지만, 샤샤는 보이지 않았다.

“반쪽짜리 아가씨?!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얼른 방으로 돌아가요! 얼른!”

4층 밖으로 떡하니 나와 있는 내 이례적인 모습에 하인들이 기막혀하며 당장 방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쳤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샤샤.’

샤샤가 보이지 않을수록, 그래서 샤샤가 카리에에게 잡혀갔을 가능성이 커질수록, 심장에 바늘이 천백 개는 꽂힌 듯 싸늘해져 갔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반쪽짜리 아가씨가! 지금 비도 오기 시작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참다못한 하인 두 명이 내 양팔을 붙잡아 4층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나는 샤샤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초인적인 힘으로 그들을 뿌리친 뒤, 재빨리 카리에의 방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저, 저 미친 아가씨가!”

“에리카 아가씨 잡아라!”

내 뒤로 하인들이 여럿이 따라붙었지만, 내가 카리에의 방에 도착하는 것이 먼저였다.

나는 노크조차 없이 쾅 소리를 내며 카리에의 방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하인들 모두가 당황한 곳에서, 카리에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카리에.”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 카리에의 앞에 가 섰다. 부글거리는 속에서 당장이라도 피가 울컥거리며 역류할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카리에는 더없는 행복에 젖은 얼굴로 호록 차를 마시다가, 그제야 나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듯 ‘아’ 소리를 냈다.

“에리카.”

찻잔을 내려놓은 카리에가 하늘빛 눈동자를 들어 곱게 웃었다.

“어서 와.”

아름답고 안락한 방 안에서 최고급 드레스까지 차려입은 단정한 모습으로 미소 짓는 카리에와, 비를 맞아 더욱 헝클어진 머리로 꿉꿉하고 낡은 슈미즈를 입은 채 적의에 불타고 있는 나.

지금 카리에가 짓고 있는 웃음은, 내가 ‘에리카’가 되고 난 이래 본 것 중에서 가장 말갛고 순수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에리카’가 되고 난 이래 느낀 것 중에서 가장 끔찍하고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 * *

“어디 있어.”

밑도 끝도 없이 내뱉어진 내 말에, 카리에가 까르르 웃으며 하인들을 모두 내보냈다.

하인들은 머뭇거리면서도 카리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물론 나가기 전에 나에게 귓속말로 아가씨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둥 협박 어린 지시를 읊조렸지만, 그따위 것이 지금 내 귀에 들어올 리가.

이윽고 하인들이 모두 나가고 문이 닫히자, 카리에가 탁자에 턱을 괸 채 승리에 취한 눈빛으로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너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나는 성정이 고상해서, 비틀거나 자르거나 터뜨리는 건 취미가 아니거든.”

카리에가 마치 날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선심 쓰듯 말했다.

“마침 셀레스가 있었어. 아무리 멍청한 너라도 이건 알고 있지? 물에 타 먹으면 즉시 온몸의 피가 굳어서 죽는 거.”

본인이 대단한 자비라도 베푼 것처럼 하는 말에, 나는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려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셀레스. 어떻게 모를까.

한국에서 ‘청산가리’ 하면 ‘아 그 맹독’하고 곧장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는 ‘셀레스’가 그랬다.

셀레스는 즉시 숨을 끊을 수 있지만, 겉모습은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독이었다.

“……어디 있냐고. 물었어.”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알아차렸네. 네 멍청한 머리로 이렇게 빨리 올 수 있던 거 보면, 그 하찮은 미물이 꽤나 소중했나 봐?”

“…….”

“에리카,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이 저택에서 네 편은 하나도 없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저택에서 숨 쉬고 있었는데, 당연히 죽어 마땅한 게 아니겠니?”

카리에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다시 묻는 대신, 손을 움직여서 카리에 앞에 있던 찻잔을 쳐 날렸다.

챙그랑―!

손에 맞은 찻잔이 날아가 벽에 맞고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부서졌다.

갑작스러운 파열음에 카리에가 흠칫 놀랐다. 나는 곧장 그녀의 턱을 움켜쥔 뒤 내 쪽으로 우악스럽게 돌렸다.

“무, 무슨……!”

“카리에. 내 인내심은 시험하지 않는 게 좋아.”

내 눈과 강제로 눈을 마주친 카리에가 다시금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가 내 눈을 피하려고 애쓰며 소리쳤다.

“이, 이미 죽은 건데, 시체가 있든 없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인내심. 시험하지 말라고 분명 말했는데.”

턱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 이상 손에 힘을 주면, 왠지 이 가녀린 턱을 부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사람은 정말 쉽게 부서져 버려.

안 그래?

어디선가 그런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정말로 턱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더 강해지려 할 때였다.

“……쓰, 쓰레기통!”

턱에 가해지는 힘을 참지 못한 카리에가 발작하듯 외쳤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턱을 움켜쥔 내 손에서 힘이 탁 풀렸다.

내가 손을 놓자마자 카리에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최대한 문 쪽으로 가까이 바짝 붙었다.

“뭐……?”

소리 내 물었다는 자각조차 없는 물음이었다.

자신의 도가 지나쳤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 모양인지, 카리에는 빨개진 턱을 두 손으로 매만지면서도 나의 시선을 피했다.

“주, 죽었으니까 버려야 할 거 아니야.”

변명처럼 중얼거리는 카리에의 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성큼성큼 방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쓰레기통으로 걸어갔다.

귀족의 것이랍시고 고급스럽게 장식되어 있는 쓰레기통을 조심스럽게 쏟아 냈다.

그 틈을 타서 카리에가 하인들을 부르기 위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지만, 나는 정신없이 온갖 쓰레기들 사이에서 내 샤샤를 찾기에 여념 없었다.

“……하.”

그리고 마침내, 내가 샤샤를 찾았을 때.

그래서 떨리는 두 손으로, 더없이 소중하게 샤샤를 들어 올렸을 때.

“이게! 정말 미쳤어요?!”

“감히 카리에 아가씨의 방에서 이게 무슨 행패예요!”

“천한 피가 섞였으면 천한 것답게 몸이나 사리고 있어야지, 이게 대체 무슨!”

우르르 들어온 하인 대여섯 명이 내 양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두 팔을 붙든 하인들을 떨쳐 내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혹시라도 손에 조심스럽게 쥐고 있는 샤샤가 다칠까 그러지 못했다.

결국 나는 하인들 손에 이끌려 카리에 앞에서 처박히듯 강제로 무릎이 꿇렸다.

“당장 사과드리세요!”

“감히 고귀한 셀루리아의 아가씨를 윽박지르다니!”

“죽을죄를 지었지만, 그래도 꼴에 반쪽이 셀루리아니 이 정도에서 끝나는 건 줄 아세요!”

하인들이야말로 나를 윽박질렀다.

내 앞에 선 카리에는 다시 이전의 그 표독스러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카리에와 눈을 마주쳤다.

“―!”

경멸스럽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던 카리에가 일순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가만히, 그저 가만히 카리에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 얼굴에서 셀루리아 후작과 후작 부인의 얼굴도 찾아내 머릿속에 수없이 덧그렸다.

머릿속이 분노라는 새하얀 섬광으로 지워져 나가는 와중에도, 그 얼굴들만은 한구석에 박아 넣듯 끊임없이 되새겼다.

그동안 소심한 연기만 해 와서 내가 몹시 만만했던 모양인데.

당신들은 말이야, 나는 얼마든지 건드려도,

내 샤샤만큼은 절대로 건들지 말았어야 했어.

그동안 나는 내 안의 댐이 터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댐이 터져 버리면, 길고 가늘게 살고자 했던 내 삶은 집요한 복수로 얼룩져 버릴 테니까.

평생 행복하게만 살기에도 부족한 삶이었다. 평생 기쁨만 누리기에도 짧디짧은 삶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게 행해지는 학대가 신체적 폭력이 아닌 것에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받는 정도의 정신적 학대는 내게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소중한 내 삶을 복수 같은 거로 희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

나는 김해수로서 죽기 직전, 처음으로 행했던 복수의 순간을 떠올렸다.

평생을 숨죽이며 살았던 내가 복수를 감행한 이유는 하나였다.

엄마가, 내 눈앞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으니까.

복부가 찔린 채, 피가 그득히 고인 웅덩이 안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이, 그렇게.

그렇게 식어 가고 있었으니까.

지금, 내 손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는 샤샤처럼.

“이…… 년이…… 감히 나한테……!”

피가 잔뜩 빠져나가 창백해진 채 저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엄마. 피를 줄줄 흘리며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아빠라는 이름의 범죄자 새끼.

그리고, 엄마가 맞았던 칼에 복부를 찔려 죽어 가던 나.

그것이 김해수였던 나의 복수였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정의의 잣대처럼 보이는 법은 그저 힘 있는 자들이 무기처럼 휘두르는 글자일 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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