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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16)화 (16/139)

16화

- 나 안 버려……?

샤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목소리에 서린 기대감이 왠지 묘하게 서글퍼서, 나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거칠게 휘저었다.

“어디서부터 말해 줘야 할지 감도 안 잡히네. 샤샤, 잘 들어. 난 너 절대 안 버려. 그리고 네가 방 안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는, 고작 이깟 일로 너한테 실망 전혀 안 했어.”

- ……!

샤샤가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두어 번 깜박이던 샤샤의 얼굴이 이내 울멍울멍하게 변했다.

작은 몸을 바르르 떨며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샤샤가 내 손가락 가까이 다가가 제 뺨을 비볐다.

나는 우는 샤샤를 도닥도닥 쓰다듬어 주면서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샤샤한테 믿음을 주지 못했나 보네. 앞으로 조심할게, 샤샤.”

아니라는 듯, 샤샤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내 손가락에 꼭 달라붙었다.

- 내가, 내가 잘못했으니까……

“샤샤, 말하지 마. 너 또 투명해졌어.”

불만스러운 눈으로 제 몸을 내려다본 샤샤가 한숨을 폭 내쉬며 내 손가락에 더욱 꼭 달라붙었다.

음, 이렇게 보니까 우리 샤샤, 얼마 전보다도 더 자란 것 같네.

한창 성장기인가 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샤샤의 몸을 쓰다듬었다.

“샤샤, 살아가면서 한 번도 실망을 안 시키고 살아갈 수는 없어. 나 자신에게도 싫은 점이 있는데, 하물며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싫은 점이 하나도 없을 수는 없으니까.”

내 말에, 샤샤의 몸이 일순 움찔거렸다. 나는 계속 샤샤를 쓰다듬으며 이어 말했다.

“특히나 같이 살아가는 사이는 더 그래. 잘 모르는 사이였을 때는 보이지 않던 단점도 같이 살아가면서부터는 하나둘씩 눈에 보이게 돼서, 전혀 실망하지 않을 수는 없어.”

- ……

“하지만 샤샤, 상대한테 실망할 만한 점을 발견했으면 그걸 고쳐 달라고 하면 돼. 처음부터 서로에게 완벽히 부합할 수는 없지만, 맞지 않는 건 살아가면서 맞춰 나가는 거니까.”

- ……

“그게 같이 살아가는 사이인 거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으면 같이 살아갈 수 없는 거지만.

사고가 잠시 한국의 김해수였을 때에 닿았다. 나는 내게 드리워진 범죄자 새끼의 잔상을 익숙하게 지워 내며, 이어 덧붙였다.

“그러니까, 단지 실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를 버릴 일은 결코 없어. 네가 방을 좀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다고 널 버릴 마음가짐이었으면 애초에 같이 살자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걸.”

- ……응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던 샤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샤샤가 완전히 기운을 되찾은 것을 확인한 나는 한숨 돌린 뒤, 흐린 눈으로 물 범벅인 바닥을 바라봤다.

여기 들어오면서 주님을 찾았던 그건 현실 도피를 좀 한 것이다.

정신을 일부 분열시킴으로써 저걸 다 치워야 한다는 현실과 앞으로 이틀간은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다는 현실로부터 일시적인 도피를 감행한 건데, 샤샤의 울먹임으로 인해 다시 현실로 강제 소환당했다.

괜찮다. 정말로 괜찮다.

나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다.

이건 그냥 잠깐 안구에 습기가 찬 것뿐이지.

정말이라고…….

* * *

에리카의 방에서 들려왔던 정체 모를 소음 때문에 여름임에도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카리에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이불을 벗어 던지고 방 밖으로 나왔다.

귀신에 대한 두려움도 에리카를 쫓아낼 수 있다는 희열이 압도해 버렸다.

“에밀리, 에리카 걔는 뭐 하고 있대?”

에밀리가 방으로 가져다준 아침 식사를 하다 말고 카리에가 불쑥 물었다.

옆에서 시중들던 에밀리는 의아한 얼굴로 카리에를 쳐다봤다.

“뭐 하긴요? 밥 처먹, 아니, 먹고 있겠죠.”

뭘 그런 걸 묻느냐는 에밀리의 시선에, 카리에는 아무것도 안 물은 것처럼 흠흠 소리를 내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날 카리에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곧 있으면 눈엣가시 같은 에리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니, 당장 눈앞에 에리카가 있어도 웃는 얼굴로 덕담을 건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카리에는 에리카의 방으로 하인을 보냈다.

에리카는 멀쩡히 잘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물을 조금 늦게 마셨나 보지.’

카리에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내일 에리카가 쫓겨날 때 어떻게 그 애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 줄까 하면서 즐거운 상상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카리에는 다시 에리카의 방으로 하인을 보냈다.

반복되는 명령에 하인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에리카의 방에 다녀왔다.

이번에도 에리카는 멀쩡히 잘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아침이니까, 내가 조금 조급했나 봐.’

왠지 조금 불안한 느낌이 차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침이니까 하면서 애써 자위했다.

그래, 조급해하면 안 된다. 카리에는 수련하는 마음으로 저녁까지 기다렸다.

‘적어도 어제 저녁에는 물을 마셨겠지.’

카리에는 저녁이 되자마자 서둘러 하인을 다시 보냈다.

4층에 다녀온 하인은 우리 아가씨가 왜 이러시나 하는 얼굴로 ‘반쪽짜리 아가씨는 잘 돌아다니십니다’하고 보고했다.

‘말도 안 돼!’

이번에야말로 에리카는 정말 사지가 마비되었어야 했다.

심드렁한 하인의 보고를 믿을 수 없었던 카리에는 직접 에리카의 방으로 올라갔고, 에리카가 독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정말로, 이건 말도 안 돼…….”

“아가씨?”

혼자서 중얼거리는 카리에를 하인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카리에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량이 잘못됐나? 아니면 물을 마시지 않은 걸까? 혹시 에리카가 눈치를 채고 먹지 않은 게 아닐까?’

온갖 가정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고, 그때까지도 멀쩡히 잘 돌아다니는 에리카를 확인하고서야, 카리에는 제 계획에 뭔가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뭐지?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카리에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계량의 문제는 아니었다. 티스푼 한 숟갈 분량 이상만 우려도 사지가 마비되는 레스테를, 무려 큰 숟가락으로 열 숟갈이나 우려서 수통에 섞었으니까.

‘물이 반쯤 줄어 있는 수통에 그 액체를 전부 다 넣었는데, 물을 마셨더라면 효과가 없었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눈치를 채고 먹지 않은 것이 아닐까?

‘아냐, 그것도 아니야.’

에리카는 물을 꼬박꼬박 잘 마시도록 교육받아 왔다.

그 물은 세뇌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주는 레틸기스의 즙을 섞은 물이었으니까.

그러니 멍청한 에리카가 벌써 이틀이나 물을 마시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것도 이틀이면 목이 꽤나 말랐을 텐데.

‘……그렇다면, 설마.’

문득, 초조한 기색으로 손톱을 뜯던 카리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의 생각 회로가 에리카의 방에서 나올 때 들었던 정체불명의 소음에 닿았다.

‘마시지 못한 거라면?’

카리에가 물에 독을 탔다는 것을 알아차린 누군가가, 물을 마시지 못하도록 일부러 통을 쏟은 거라면.

‘그러고 보니, 내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뭔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었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갑작스레 들려왔던 소음의 정체와 에리카가 마비에 걸리지 않았던 이유가 모두 해결이 됐다.

“……하, 역시 천한 것.”

귀족이라면 응당 정갈해야 할 방에 몰래 뭔가를 들여놓다니, 정말이지 천민들이나 할 법한 천박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카리에는 책상 서랍 안에 숨겨져 있는 레스테 잎을 떠올리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이 저택에, 에리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어.’

그 상대가 사람이든, 아니면 잘 길들어 주인에 대한 애정이 높은 동물이든.

절대로 가만두면 안 되지.

* * *

‘분명 카리에는 이상한 점을 느꼈겠지.’

수통에 독을 탔는데, 내가 멀쩡하니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가 어쩔 텐가.

하인을 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와서 독을 탔다는 것은, 후작 부부와 합의된 것이 아닌 독단적인 행동이란 뜻이었다.

다시 말해, 대놓고 후작 부부에게 가서 ‘제가 에리카를 독살하려고 물에 독을 탔는데 살아 있어요! 너무 수상해요!’하고 일러바칠 수도 없는 노릇!

‘카리에 혼자 알고 있는 건 나한테 아무런 해도 되지 않아.’

특히나 지금은 후작 부부, 특히 후작 부인의 시선이 해수에게 꽂혀 있을 때였다.

어제 불려 갔을 때 살펴본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들은 단순히 인맥을 맺거나 금전적 도움을 청하려는 게 아니었다.

‘아예 해수를 셀루리아의 밑으로 끌어들이려는 것 같던데.’

아무리 돈을 천박하게 생각하는 구교파 귀족이더라도, 결국엔 돈이 권력이라는 걸 무시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옛날부터 고위층 사람들이 그렇게 악착같이 세금을 걷으려고 한 것일 테지만.

어쨌거나, 그렇다면 해수에 대한 그들의 집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해수를 회유할 계획을 세워야 하는 후작 부부에게는 카리에의 전전긍긍함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지.

‘그래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으니, 일단 멍청한 척이라도 제대로 해야겠어.’

카리에에게 내가 똑똑해서 독의 위험을 피했다는 인상을 심어 주는 것은 곤란했다.

내가 멍청하지 않다면, 그만큼 더 철저한 탄압을 받을 테니까.

“하, 미성년자의 삶 참으로 기구하다아…….”

나는 대체 전전생에 무슨 삶을 살았길래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최소한 나라 하나는 팔아먹은 것 같은데.

나는 흐어어 한숨을 내쉬며 이불 속을 마구 헤엄쳤다. 그런 내가 많이 안쓰러웠던 모양인지, 샤샤가 다가와서 뺨으로 내 뺨을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나는 샤샤의 쓰다듬 테라피를 받으면서 조금씩 진정하기 시작했다.

“샤샤가 쓰다듬어 주니까 기분이 나아졌어.”

배시시 웃으면서 샤샤를 톡 두드리자, 걱정투성이였던 샤샤의 별빛 두 눈에 뿌듯함이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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