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나는 손가락을 얼른 내리고 모르는 척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근데 너, 반쪽, 아니 에리카 아가씨 담당이면서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하인이 다시 이곳으로 저벅저벅 돌아왔다. 나는 빈센트에게서 받은 쪽지를 보여 주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아까 문지기에게 주고 돌려받지 않은 채 그대로 이곳에 온 모양이었다.
‘아놔…….’
아니, 진짜 오늘 일진 왜 이래?!
내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하인의 눈빛에 의심의 기색이 점점 짙어졌다.
“그러고 보니, 너 얼굴 상당히 낯선데. 묘하게 누굴 닮았단 말이야.”
“…….”
깨달음을 얻고 일심 사상 배우면서 눈물 쏙 빠지라고 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내 정체를 깨닫길 바란 건 아닌데.
“너 어느 숙소 소속이야? 네 관리인의 이름이 뭐지?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됐어?”
하인은 친절하게도 말 못 하는 내가 대답할 수 있도록 선택지까지 제시해 줬다. 보기 1번부터 5번까지.
그녀 딴에는 나를 위한답시고 그랬겠지만, 나는 오히려 그 선택지 때문에 더 당황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구체적인 이름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니까 더 생각이 안 돌아가.’
어떡하지.
문지기나 빈센트한테 데려가야 하나? 아냐,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과 마주쳐서 일이 더 커지면 어떡해. 그냥 갑자기 말이 트였다고 하면서 구구절절 설명해 볼까? 아니면 그냥 아무 선택지나 골라 버려?!
그도 아니라면.
‘……자고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데.’
차라리 미친 척하고 제거해 버릴까.
짧은 순간에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주로 실현 불가능한, 과제에 미친 음대생일 때 현실도피로 읊조리던 쓸모없는 생각들이었다.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를 보는 하인의 눈에 서린 의심이 점점 확고하게 굳어져 가고 있을 때였다.
“그분은 제가 추천한 임시 하인입니다.”
순간, 천상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줄 알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울먹거리는 눈으로 빈센트를 바라봤다.
‘빈센트으!’
마음 같아서는 달려가서 정말로 뽀뽀 세례라도 퍼부어 주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빈센트가 달가워할 리 없으니 패스지만.
내 골방 옆에 있는 창고에서 나온 빈센트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내게 살짝 눈짓한 빈센트가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의도치 않게 두 분의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무례에 사과드립니다.”
“어, 어머! 아니에요, 무례는 무슨!”
화들짝 놀란 하인이 얼굴을 붉히며 얼른 손사래를 쳤다. 다시 고개를 든 빈센트가 빙긋 미소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사정이 딱한데 아직 미성년자라 정규 고용이 어려워서, 가끔 에리카 아가씨의 담당 하인으로 일하도록 배정했습니다.”
“하르센 보좌관님의 추천으로 들어온 아이였군요! 보좌관님의 보증이라면 당연히 믿을 만하죠.”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마구 고개를 끄덕인 하인이 휙 나를 돌아보았다.
‘뭐야…… 내 비위 돌려줘요…….’
나를 응시하는 그윽하고도 따스한 눈빛에, 나는 그만 토기를 느끼고 말았다.
“너 그래서 대답하기가 어려웠구나. 갑자기 의심하고 몰아붙여서 미안해. 어서 아가씨 데리고 응접실로 가도록 해. 혹시 힘든 일이 생기면 베타 숙소의 나디아를 찾아와. 알았지?”
우다다다 말을 끝낸 하인이 잽싸게 빈센트 옆으로 찰싹 붙었다. 빈센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그 물러난 만큼 거리를 좁힌 하인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나저나, 하르센 보좌관님은 어째서 여기 4층에 계세요?”
“후작 각하의 명으로 창고를 점검하러 왔습니다.”
손에 들린 서류철을 살짝 들어 보인 빈센트는 감사하게도 혹 덩어리 하나를 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문을 두드리며 없는 아가씨를 부르던 나는, 이윽고 재빨리 방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와 씨, 진심 빈센트 아니었으면 손에 피 묻힐 뻔했네.”
중얼거리며 재빨리 옷을 갈아입은 나는 곧이어 화장도 모두 지운 뒤, 침대 위에 올려둔 샤샤를 한 번 쓰다듬었다.
“나, 갔다 올게.”
샤샤는 잔뜩 걱정에 젖은 금빛 은빛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이내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웃으며 샤샤를 톡톡 두드린 후, 밖으로 나갔다.
* * *
카리에는 에리카가 제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평소보다 엄청 늦었으니까…… 빨리는 못 나오겠네.”
하여간, 천한 것들은 천민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꼭 티를 낸단 말이야. 에리카를 비웃은 카리에는 한 손 크기만 한 병 하나를 꼭 움켜쥐고는 4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예상대로, 아무도 없는 4층은 더없이 고즈넉하기만 했다.
카리에는 그래도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에리카의 방문을 열었다.
화려한 제 방과는 전혀 다른 누추한 방 안. 누추한 이불과 누추한 책상, 누추한 의자까지.
‘천민의 피가 섞여 있는 반쪽짜리에게는 더없이 잘 어울리는 방이지.’
가슴 한구석에서 울리는 욱신거림은 증오심으로 익숙하게 짓밟았다.
만족스럽게 방 안을 둘러본 카리에는 곧바로 수통을 찾았다.
수통은 총 10개였는데, 모두 벽장 앞에 놓여 있었다.
‘이 통의 물이 반쯤 줄어들어 있으니까 이걸 먹고 있는 거겠지?’
카리에는 곧장 수통 하나를 집어 든 뒤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미리 가져온 액체를 흘려 넣었다. 레스테 잎을 열 숟가락 넣고 진하게 우려낸 액체였다.
액체는 약간 연한 노란빛을 띠었지만, 수통에 담긴 물도 어차피 레틸기스 즙을 섞어서 옅은 갈색을 띠는지라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액체를 반병 정도 넣은 카리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통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보니 정말 감쪽같았다.
‘멍청한 에리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내일, 적어도 모레면 사지가 마비돼서 버림받겠지.
근래 들어 지금처럼 기뻤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정말이냐고 물어오는 질문은 익숙하게 구기고 짓밟아서 형체조차 알 수 없도록 망가뜨려 버렸다.
그렇게 그렇다고 믿었다.
카리에는 뿌듯하게 웃으며 에리카의 방을 나섰다. 그녀가 막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을 한 칸 내려갔을 때였다.
문득, 뒤에서 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거나 옆으로 쓰러지는 소리였다.
‘뭐, 뭐야, 저거……?’
순간적으로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정체 모를 오싹함이 전신을 뒤덮었다.
그때, 뒤이어 탕 하는 소리가 연이어 우다다 들려왔다.
“―헉.”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이 이성의 한계치였다. 카리에는 뭐라 생각할 정신머리도 없이 부리나케 아래층으로 내려와 자신의 방으로 도망쳤다.
* * *
딱 감이 왔다.
후작 부인은 화풀이하려고 날 부른 거다. 후작은 시큰둥해 있고 후작 부인만 쥐 잡듯 나를 달달 볶는 것만 봐도 보였다.
‘아는 대로 다 불라고 했을 텐데 꼴랑 D등급 열람 정보만 받았으니, 저 자존심에 얼마나 열 받았겠어…….’
근데 문제는 항상 그거다.
바로, 왜 나한테 와서 이 지랄이냐는 것!
‘우리는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화풀이하는 건 옳은 행동이 아니라고 배웠어요!’
하긴, 근세 유럽풍 배경과 중국풍 황제 정권 설정인 곳의 귀족에게 뭔 도덕을 바라겠냐. 그냥 힘이 있어도 강제 숨김 처리 당하는 미성년자인 내가 눈 흐리게 뜨는 수밖에.
‘괜찮아, 에리카. 2년 남았어.’
저건 2년 지나면 평생토록 손절할 개소리인 것이다. 선량하고 가련한 미성년자인 내가 대인배스럽게 참아야 한다.
후작 부부 앞에서 다른 의미로 나를 세뇌시킨 나는 후들거리는 정신을 억지로 붙들고 내 골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샤샤?”
난장판이었다.
* * *
맙소사. 말도 안 돼.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고지능을 탑재한 우리 샤샤가, 철없는 강아지처럼 물건을 엎지르다니? 그것도 수통 전부를?
‘고지능이 수통의 뚜껑 따라고 있는 건 아닐 텐데…….’
물론 물로 바닥에 세계 지도를 그리라고 있는 것도 아닐 터였다.
‘아아, 주님.’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저걸 다 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져 버리고 말았다.
“여러분은 지금 무교인이 신을 찾는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멍하니 중얼거렸지만, 실은 내가 뭘 중얼거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르륵 시선을 돌려서 샤샤를 바라봤다. 그때 동안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샤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 물에, 독
- 어떤 여자가 탔어
“독?”
샤샤의 다급한 말에, 시선이 다시 바닥에 와르르 쏟아져 있는 물로 향했다. 눈이 절로 흐리게 떠졌다.
이번에도 딱 감이 왔다. 카리에 짓이군.
샤샤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 어디에 탔는지
- 정확히 보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다 쏟았다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샤샤가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게 생각나 냉큼 덧붙였다.
샤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 실망하지 마……
그 말에, 나는 우뚝 몸을 멈췄다.
실망?
지금 실망하지 말라고 한 거야?
- 나 버리지 마……
내가 대답이 없자, 샤샤가 더욱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시 속삭여 왔다.
나는 말문이 막혀서 샤샤를 내려다봤다. 내가 정말로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지, 샤샤의 별빛 두 눈은 절박함이 가득했다.
“샤샤.”
나는 하르르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샤샤를 들어 올렸다.
내가 저의 이름을 부르자,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맹목적으로 나를 바라보던 샤샤는 움찔해서 푹 고개를 숙였다.
“샤샤, 나 봐 봐.”
- ……
“샤샤.”
우물쭈물하던 샤샤가 천천히 시선을 들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샤샤와 눈을 맞춘 채로 말했다.
“내가 왜 실망해.”
샤샤의 두 눈이 댕그래졌다. 혼란스러운 듯 이리저리 흔들리던 은빛 금빛 눈동자가 이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샤샤를 바라보며, 나는 한 자 한 자 꾹꾹 누르듯 다시 말했다.
“내가 왜 널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