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14)화 (14/139)

14화

산뜻한 긍정에, 나는 입이 절로 찢어져라 웃음 지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큼…… 나중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에리카’가 빚을 청산하러 왔다고 할게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선이라면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세네카 소공작인 킬리언 르 세네카라고 알려 오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세네카 공작저를 찾으면 된다고 했다.

남주인 그의 신분과 이름 같은 건 당연히 알고 있던 나는 하마터면 이름을 묻는, 지극히 당연하고 기본적인 절차도 생략할 뻔했다.

‘허술하다, 에리카…….’

이에 대해서 킬리언이 의구심을 품으면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의심만 생겨 해만 됐을 것이다.

이윽고 킬리언이 떠난 뒤, 그의 뒤에서 음흉하게 웃고 있는 내 머릿속으로 샤샤의 시무룩한 목소리가 전달됐다.

- 싫어……

“샤샤?”

흠칫 놀란 나는 서둘러 어깨에 얹어져 있던 샤샤를 손바닥 위에 얹었다.

원망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샤샤는 이내 잔뜩 울상을 지은 채 꾸물꾸물 기어가 내 손가락을 꽁꽁 감쌌다.

- 쟤, 빚, 싫어……

샤샤가 칭얼거리듯 내 손가락에 제 뺨을 비벼 왔다.

- 쓸모, 내가 더 많아

샤샤가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두 눈을 멀뚱하게 깜박이던 나는 이내 나는 피식 웃으며 샤샤의 검은 몸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샤샤. 나는 임자 있는 놈은 관심 없어.”

특히나 나는 신아와 취향이 다른 까닭에, 킬리언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내 대답에 샤샤는 안심한 것처럼 하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샤샤와 눈을 맞췄다.

“우리 샤샤, 방금 그거 질투한 거야?”

- ……나 진지해

“응, 나도 진지하게 묻는 거야. 우리 샤샤, 방금 질투했어? 내가 샤샤보다 킬리언이랑 더 친해질까 봐?”

샤샤의 조막만 한 얼굴은 나름 심각해 보였지만, 그래도 샤샤가 너무 귀여워서 자꾸만 묻고 싶은 걸 어떡하나.

긴장기 하나도 없는 내 물음에, 샤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말꼬롬히 쳐다보기만 하더니, 이내 한숨을 폭 내쉬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 샤샤, 삐졌어?”

- ……

“샤샤아, 정말 삐진 거야?”

- ……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묻자, 샤샤는 손가락을 더욱 바짝 감은 채 그 위로 얼굴을 묻어 버렸다.

보통 같으면 조금이라도 움직였을 꼬리마저 아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이번엔 정말로 단단히 마음 상한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귀가할 때까지 열심히 샤샤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야 했다.

아니, 근데 샤샤는 너무 귀여워서 자꾸 놀리고 싶단 말이야…….

* * *

와그작!

분을 못 이긴 델레미아는 녹셰로부터 온 서신을 구겨 버렸다.

해수에 관한 D등급 열람 정보가 보석으로 치장된 손아귀 아래 무참히 구겨졌다.

“하! 뭐? 해수에 관한 이 이상 등급의 정보가 없어?”

새빨간 거짓말이다. D등급 열람 정보는 델레미아도 모두 알고 있는 정보인데, 정보 매매를 업으로 삼는 곳에 정말로 이 이상의 정보도 없을 리가.

델레미아는 구긴 종이를 있는 힘껏 바닥에 던져 버렸다.

상업은 정보가 생명줄이었고, 그런 만큼 그녀와 녹셰의 인연은 상당히 두터운 편이었다.

그동안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녹셰에 물어다 준 돈이 얼마인데, 감히 이딴 식으로 뒤통수를 쳐?

씩씩거리는 델레미아의 눈치를 보던 직속 하인 세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주인마님……. 다른 길드에 서신을 보내 볼까요?”

“다른 길드?”

코웃음 치며 되물은 델레미아가 돌연 노기 띤 얼굴로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던졌다.

챙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기 파편과 찻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내가 왜 지금까지 녹셰만 애용해 왔었는데! 길드에도 서열이 있어. 녹셰가 제공하지 않은 정보는 다른 길드도 눈치를 보느라 제공하지 않는단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마님.”

세라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델레미아는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탁상에 두드렸다. 어떻게든 해수를 제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어머니?”

그때, 침실의 문이 열리며 카리에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잔뜩 굳어 있던 델레미아의 얼굴이 제 딸을 보고 한층 누그러졌다.

“조금 그렇구나. 그런데 카리에, 갑자기 무슨 일이니?”

델레미아가 카리에를 향해 한 손을 뻗었다.

들어오라는 손짓에, 배시시 웃은 카리에가 쪼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건 아니고, 에리카 걔 때문에요.”

“……에리카? 그 애가 뭐 어쨌니?”

달갑지 않은 이름에 델레미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카리에는 폭 한숨을 내쉬며 이어 말했다.

“요즘 들어서 걔가 제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레틸기스 즙이 제 일을 다 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요즘 교육이 뜸해서 그런 건지…….”

“본분을 망각해? 감히?”

델레미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기분이 나빠서 화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던 델레미아는 카리에의 말을 더 듣지 않고 곧장 세라에게 명령했다.

“펠리페가 돌아오는 대로 에리카를 응접실로 데리고 와. 제 위치가 뭔지 오늘에야말로 똑똑히 각인시켜 줘야겠으니.”

“네, 마님.”

세라가 순종적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카리에는 제 뜻대로 잘 풀린 상황이 기꺼워서 속으로 몰래 웃음 지었다.

본분 망각? 그 멍청한 게 그런 고차원적인 결심을 할 수 있을 리가.

* * *

밖에 나갔다 올 때면 늘 그랬듯, 이번에도 나는 빈센트에게 받은 쪽지를 문지기에게 보여 줬다.

하인으로서의 내 설정은 말을 못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빈센트가 준 쪽지로 문지기에게 외출 허가와 그 사유를 알리고는 했다.

그러면 문지기 두 명은 내 쪽지를 꼼꼼히 훑고는 나를 통과시켜 줬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내가 내민 쪽지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나를 서둘러 들여보냈다.

“너 오늘 에리카 아가씨 담당인 하인이지?”

뜬금없이 질문이 날아왔다.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대충 어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끄덕임에, 오른쪽의 문지기가 측은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하르센 보좌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주인님과 주인마님께서 에리카 아가씨 찾으신다고 해. 너 돌아오는 즉시 말 좀 전해 달라고 부탁하시더라.”

“어서 가서 아가씨 사람 꼴 만들어 놓고 주인님과 마님께 보내도록 해. 서두르지 않으면 괜히 너한테도 불똥이 튈 수 있으니까.”

왼쪽의 문지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을 보탰다.

“쯧, 말 못 한다고 그 천민 피가 흐르는 아가씨 밑으로 배정받았다니.”

“가여우니, 괜한 문책 당하지 않도록 이거라도 도와줘야지.”

“…….”

아 네 그러십니까.

나는 흐린 눈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야, 아니면 감히 나를 모욕했다며 어퍼컷이라도 날려야 하는 거야 뭐야.’

어이가 없는 내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샤샤가 조심스럽게 내 목에 제 뺨을 비볐다.

기운 내라는 듯한 그 조심스러운 몸짓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난 괜찮아.”

- ……거짓말

“진짠데.”

나는 실없이 대답하며 반쯤 뛰는 걸음으로 내 방을 향해 올라갔다.

‘빨리 옷 갈아입고 변장을 지운 다음에 서둘러 내려가면 돼.’

나를 병균 취급하는 하인들은 내 담당인 날만 제외하면 나를 피하기에 바빴다.

내가 밖으로 외출하는 날일 때면 빈센트가 내 담당을 하인 신분의 나로 조작해 놨으니, 내가 하인 행세를 하며 나돌아다녔다는 것을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냥 짜증 나는 게 있다면, 평소보다 1.5배 이상은 늦었을 테니 욕은 15배 이상 더 처먹으리라는 거지.’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하며 막 4층에 올라섰을 때였다.

‘……미친.’

X 됐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감각도 온전히 느낄 새 없이, 나는 곧장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아이 씨, 지금까지 처자고 있는 거야 뭐야. 왜 몇 번을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어?”

웬 하인 하나가 분기탱천한 채로 내 방문의 문고리를 콱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문고리를 돌리려는 하인의 손을 꽉 붙들었다.

“뭐, 뭐야!”

갑작스럽게 등장한 나 때문에 깜짝 놀란 하인이 파드득 몸을 떨었다.

나는 당장 입을 열어서 오늘 에리카의 담당은 나라고 말하려다가, 뒤이어 나는 말을 못 하는 설정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입만 뻐끔거렸다.

망했다…….

“너, 너 누구야.”

잽싸게 내 손에서 손을 빼낸 하인이 나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봤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서 내 입을 가리킨 뒤 가위표를 했다.

“……말을 못 한다고?”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인 뒤, 이번에는 나를 가리키고는 방문을 가리켜 봤다.

제발 알아들어라.

“네가 오늘 저 반쪽짜리 아가씨…… 아니, 에리카 아가씨 담당이란 거지?”

다행히 하인은 내 보디랭귀지를 순조롭게 이해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인은 과하게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꼼짝없이 그 반쪽…… 아니 에리카 아가씨의 상판대기를 봐야 하나 했는데, 마침 담당이 딱 오다니! 살았다 야.”

“…….”

음, 오늘 뭔가 일진이 안 좋은 듯했다. 남주한테서 빚 얻어 냈다고 좋아라 한 게 바로 아까 전인데, 이게 바로 흥진비래라는 건가?

“그럼 네가 책임지고 반쪽, 아니 에리카 아가씨 데리고 나와라. 알았지?”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 하인이 날아갈 것만 같은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멀어져 갔다.

나는 한심한 눈으로 멀어져 가는 하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너는 방금 네가 두드린 어깨가 그토록 경멸하는 에리카 아가씨의 어깨란 걸 알고 있니.’

원효대사의 해골 물처럼, 자신이 두드린 어깨가 내 어깨라는 걸 알면 토악질하려나.

‘그리고 나서는 일심 사상이나 배워라.’

아마 어려워서 눈물이 쏙 빠질 거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가운뎃손가락을 조용히 치켜들었을 때였다.

“아, 맞다.”

갑자기 하인이 빙글 몸을 돌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