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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12)화 (12/139)

12화

돈은 별 볼 일 없는 신흥 귀족 가문도 구교파에 속하는 귀족 가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녀가 직접 경험했으니까.

이제 이 세상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군사력에 버금가는 것은 금전이었다.

상업과 금전을 하찮게 보는 것과는 별개로, 델레미아는 그 힘을 무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황가에는 명분이 있다지만, 실질적 권력인 군권과 금권이 없으면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해.’

그래서 델레미아는 금전에 있어서 제일가는 해수를 제 밑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군력은 회유에 어려움이 있는 드레인 대공가가 휘어잡고 있으니 불가능하다 치더라도, 금전의 힘만큼은 수중에 두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후에 셀루리아의 가주이자 이렌텔의 황태자비가 될 제 딸이 안정적이고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 테니까.

‘판단을 잘못했어. 돈을 굴리는 사람이니 당연히 명분과 권력에 목마를 거라 생각했는데…….’

간단히 귀족의 신분을 주고 셀루리아 가문을 인맥으로 삼게 하면 넘어올 줄 알았더니, 초장부터 만남을 거절할 줄이야.

푸른 눈동자를 차갑게 내리뜨며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델레미아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델레미아의 직속 하인인 세라가 황급히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주인마님?”

“비밀리에 알아볼 사람이 있어.”

“‘녹셰’에 사람을 보낼까요?”

‘녹셰’는 이렌텔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보 길드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델레미아가 미에트로 백작 영애일 때부터 애용하는 길드이기도 했다.

제국의 권력자 대다수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기에 황가에서조차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곳.

세라의 나직한 물음에, 델레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액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해수’가 누군지 알아봐. 개인정보, 인상착의, 관련 거래처, 아니면 아주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어. 그자에 대한 정보는 뭐든 전부 알아 오도록 해.”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 동안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그녀가 느긋하게 덧붙였다.

“물론, 약점이면 더 좋겠지.”

* * *

오랜만에 후원으로 놀러 나왔다.

가지각색의 꽃과 나무로 화려한 저택의 본 정원과는 달리, 저택 뒤쪽의 조그만 후원은 외진 곳에 존재감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딱히 별 관리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작은 규모라서 사용인들과 저택 주인들의 관심이 미치지 않았는데, 그래서 나는 날이 좋을 때면 가끔 후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샤샤, 햇살 좋지?”

아무리 외진 곳에 자리한 후원이라도 혹시 사람들이 소리를 들을까 봐 소곤소곤 물었다.

내 손목에 몸을 감고 고개를 기웃거리던 샤샤가 눈을 휘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쿡쿡 웃으면서 샤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솔직히, 후원은 ‘후원’이라는 말이 과분하게 느껴질 만큼 그냥 외딴 들판에 가까웠다. 그나마 있는 후원이라고 우길 만한 것이라면 쪽동백나무 두 그루일까.

나는 내 골방에서 미리 챙긴 돗자리를 쪽동백나무 밑동에 펼친 뒤, 그 옆에 작은 손수건을 펼쳤다.

“자, 샤샤. 여기는 네 자리야.”

내 손목에서 내려온 샤샤가 손수건 위로 올라갔다.

샤샤가 내려간 자리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작은 꽃문양을 잠깐 쳐다본 나는 이내 어깨를 으쓱한 뒤 돗자리 위에 누웠다.

쪽동백나무 밑동에 고개를 받친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깥쪽으로 해를 바라보며 피는 여타 다른 꽃과는 달리, 쪽동백꽃은 안쪽에서 땅을 바라보며 폈다. 나뭇가지 가득 쏟아질 것처럼 피어 있는 별 모양의 하얀 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여린 실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다. 들에 종종 솟아 있던 청사초가 느릿하게 물결이 일듯 흔들렸다.

“아, 향 좋다.”

바람 사이사이에 얽혀든 쪽동백꽃의 향이 무척이나 달콤했다.

입가에 느릿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나는 슬쩍 몸을 틀어서 모로 누우며 샤샤를 돌아보았다.

샤샤는 그 어여쁜 별빛 눈으로 나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한결같은 시선이 괜히 낯간지러워서, 나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옆에 자라 있던 실별꽃을 땄다.

“샤샤, 이것 봐. 꽃 예쁘지?”

샤샤의 고개가 꽃을 향해 도로록 기울어졌다. 나는 소리 죽여 웃으며 물방울만 한 작은 꽃을 샤샤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조그만 샤샤 위에 얹어지니까 꼭 모자 같았다.

제 머리 위에 폭 얹어진 자그마한 꽃이 신기했는지, 고개를 젖혀 꽃을 보려고 애쓰던 샤샤가 문득 앳치! 소리를 냈다.

- ……?

실별꽃을 하나 더 따서 샤샤의 머리에 또 얹어 주려고 했던 나는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도로록, 내 시선이 샤샤에게로 향했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틀던 샤샤가 다시금 앳치! 하는 재채기 소리를 냈다.

“……흡.”

나는 웃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샤샤가 머리에 얹어진 꽃도 떨어뜨린 채 얼굴을 가릴 만큼 부끄러워하는데, 웃으면 양심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저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안 웃어!’

하, 진짜 미치겠다.

‘앳치’ 소리 실화냐고. 저 귀여운 재채기 소리 뭔데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해.

“흠흠…… 샤샤.”

- ……

부끄러워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샤샤가 그래도 내가 불렀다고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나는 웃음기 싹 가신 엄숙 근엄 진지 표정으로 샤샤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까 그 재채기 소리, 다시 들려줄 수 있어?”

- ……

잔뜩 울상을 지은 샤샤가 삐지기라도 한 것처럼 휙 고개를 돌린 채 똬리를 틀고 얼굴을 가려 버렸다.

끝자락이 발갛게 물든 꼬리로 손수건 위를 톡톡 내리치는 것으로 봐서 삐진 게 확실했다.

‘그래도 샤샤를 위해서 일부러 웃음기 쫙 가신 목소리로 말했는데.’

놀리는 걸로 들리지 않도록 말이지.

“샤샤아.”

- ……

“응? 한 번만 더 들려줘라. 으응?”

- ……

꼬리로 손수건을 내리치는 강도가 더 강해졌다.

아까는 톡톡. 이었다면, 지금은 탁탁! 이랄까.

나는 다시금 입술을 꽉 깨물며 심호흡을 했다. 후우, 웃으면 안 된다.

나는 조심스럽게 샤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샤샤, 삐졌어?”

- ……

“그치만 샤샤의 재채기 소리가 엄청 귀여운 걸 어떡해.”

귀엽다는 말에, 잔뜩 심통이 났던 샤샤의 꼬리치기가 쨍 하고 멈췄다.

꼬리를 반쯤 붉게 물들인 샤샤의 똬리가 아까보다 조금 느슨하게 풀렸다. 나는 다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웃으면, 안 돼, 에리카.

마침 내 옆으로 쪽동백꽃이 한 송이 툭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 꽃을 집어 샤샤의 똬리 위에 얹어 줬다.

샤샤가 움찔 몸을 떨자, 꽃도 같이 움찔거렸다.

“우리 귀여운 샤샤가 삐졌으니까, 삐진 거 가라앉을 때까지 꽃으로 가려 줄게.”

- ……

“샤샤 삐진 거 빨리 가라앉았으면 좋겠다. 나는 우리 귀여운 샤샤가 보고 싶거든.”

팔에 턱을 괸 채 느른하게 속삭였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우리 마음 여린 샤샤는 토라졌어도 못 이기는 척 나를 다시 봐 주곤 했다.

그건 지금도 그랬다.

조금 고민하던 샤샤가 이내 슬그머니 제 몸보다 조금 더 큰 꽃송이 밑에서 꾸물꾸물 나왔다.

슬쩍 나를 흘긋거리려던 샤샤의 은빛 금빛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서 몸을 통 튕기는 샤샤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얼굴에 잔잔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나는 한 손을 뻗어 샤샤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귀여운 샤샤, 나 봐 줘서 고마워.”

긴장한 듯 빳빳하게 몸을 굳힌 샤샤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무 행복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마스터, 셀루리아 후작 가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검은 복면을 쓴 남자가 소리 없이 다가와 부복했다.

희미한 달빛만 새어 드는 방 안에서 검날을 닦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불꽃으로 빚은 듯한 남자의 붉은빛 머리카락이 흐릿한 비단 장막 사이로 어렴풋이 비쳤다.

“셀루리아?”

“예, 그렇습니다. 셀루리아 후작 부인인 델레미아 르 셀루리아의 수하입니다.”

“용건은?”

녹아 사라질 듯한 미성이 무미건조하게 공기를 울렸다.

남자의 물음에, 복면인이 대답했다.

“‘해수’의 정체를 캐 달라는 의뢰였습니다.”

“해수의 정체라…….”

남자의 입꼬리가 유려한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보료에 몸을 기댄 남자가 다시 흰 명주 천으로 검날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접수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D등급 열람 정보까지만 넘겨.”

“알겠습…… 예?”

가볍게 부복하던 복면인이 이어진 남자의 말에 멈칫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검을 모두 닦은 뒤, 천을 탁자 위 작은 함에 내려놓은 남자는 선홍색 눈동자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거래대로, 켈타카 은행장에게 D등급까지 넘겼다는 것도 알려 주고.”

“……예, 마스터.”

복종의 의미로 묵례한 복면인은 왔을 때 그랬듯 소리 없이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방 안, 제 얼굴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 검날을 이리저리 살피던 남자가 돌연 전조 없이 검을 휘둘렀다.

리본처럼 물결치듯 뻗어 나가던 검날이 방 안 가득 내려 있는 비단 장막을 잘라 냈다.

스르륵, 반투명한 비단이 물 흐르듯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비단이 사라진 자리로 남자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해수의 정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남자는 느릿하게 눈가를 접으며 검을 갈무리했다.

“미우나 고우나 어쨌든 세이룬의 첫사랑이시니, 이 정도는 해 주는 게 도리겠지.”

* * *

이번 분기의 쪽지가 도착했다.

「준비 완료. 지금, 저택 후문.」

빈센트 특유의 정갈한 글씨체가 적힌 쪽지를 받아 든 나는 입술을 비딱하게 들어 올렸다.

누가 보면 시건방지다고 평할 만한 미소였다.

“역시 빈센트는 천사가 틀림없어.”

빈센트한테 하면 분명 저 멀리 도망가 버릴 말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거울로 내 차림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하인 K의 모습. 오케이, 좋았어.

“자, 샤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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