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에리카요?”
“네. 제 시문학 가정교사인 셀레타 박사께 듣기로, 에리카 영애께서 예술계의 난제였던 시 ‘하늘, 별, 바람, 꽃’에 나타난 알레고리를 새롭게 해석하셨다고 해서요. 저는 셀레타 박사께서 누구를 이렇게 칭찬하신 건 처음 봤거든요.”
“아…….”
“그 해석에 대해 같이 토론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 그런데, 카리에 영애, 다음에는 꼭 에리카 영애와 함께 와주시길 부탁드려요.”
대체 왜? 대체 왜 그 천한 것에게 관심을 두는데?
온전한 귀족은, 완벽한 셀루리아는 그 애가 아니라 나잖아?
벌써 5년도 더 지난 이야기였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속에서부터 천불이 끓어올라 속이 뒤집히는 줄 알았다.
당신이 그렇게나 보고 싶어 하고 토론하고 싶어 하는 걔가 실은 천민의 피를 반이나 타고난 천한 잡종이었다고 외쳐 버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써야 했는지!
“어머니, 아버지. 저 가짜 셀루리아는 언제까지 집에 있나요?”
에리카를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그 애가 증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그 애가 이 집에서 나가면, 나는 더 이상 이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될 테니까.
카리에의 물음에 곤혹스러워하던 후작 부부는 조심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카리에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 애는 계속 네 사촌 동생으로서 후작저에서 살 거란다. 그 애가 차후 꽤 명망 있는 가문과 혼인하면, 후작가의 가주가 될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모두 너를 위해서 그런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렴.”
그런 건 필요 없으니 그냥 갖다 버리라는 말은 거절당했다. 혹시 저 애가 변심해서 우리를 배신하면 어떡하냐는 물음에도, 그럴 리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애에게 레틸기스 즙을 섞은 물을 먹이고 있단다. 그 물을 먹으면 생각이 둔해지고 멍청해져서 주입식으로 듣는 말을 진짜라고 믿게 돼. 그러니 그 애는 결코 우리를 배신할 수 없어.”
후작 부부가 하도 그렇게 말하자, 카리에는 결국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마주치는 것조차도 증오스럽지만, 그래도 자신을 위해서 쓰일 졸개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무도회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자리였다.
차기 황제인 황태자는 첫 춤의 상대로 카리에를 지목했고, 카리에는 차기 황태자비로서 다른 사람들의 선망 어린 눈길을 받으며 무도회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처음으로, 내가 저 애를 압도할 수 있는 자리였는데―
“안녕하세요, 셀루리아 가의 에리카 영애. 반가워요. 나는 드레인 대공인 세뤼아 르 드레인이라고 해요.”
―대체 왜?
대체 왜 너는 그렇게 큰 거야?
왜 그렇게 커서, 너는 나만을 위한 자리에서마저 나를 눌러 버리는 건데?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명망 있는 가문과 혼인해서 자신에게 도움을 줘?
멍청해지는 물을 마셔서 가문의 말을 잘 따라?
모두 다 개소리였다.
‘죽여 버릴 거야.’
그 애가 죽어서 사라져 버린다면, 그럼 나는 나를 지킬 수 있겠지.
카리에는 무도회가 파한 다음 날 곧장 수도의 시장으로 외출했다.
그녀는 곧장 약초방을 찾아갔고, 동행한 하인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몰래 레스테란 이름의 풀을 구입했다.
약초방 주인이 말하기로, 자신이 구입한 레스테는 티스푼 한 숟갈 분량을 우려 먹으면 복통을 완화시키는 약초지만, 그 이상을 우려 먹게 되면 하루 뒤 전신이 마비되어 버리는 독초였다.
‘그 반쪽짜리의 사지가 마비돼 버리면 부모님도 더 이상 가짜를 집에 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 버려진 그 애는 내 걸림돌이 되지 않겠지.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온 카리에는 이대로 오늘 당장 차를 우려서 줄까 하다가, 며칠간 더 괴롭힌 다음에 괴롭힘마저 질려 버렸을 때 쫓아 버리자고 결심했다.
‘내가 너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데, 죽기 전에 내 분풀이 상대나 돼 버려.’
가슴이 이렇게 저릿할 정도로 뻐근한 것은, 모두 걸림돌을 처리할 수 있다는 희열 때문일 것이다.
카리에는 비리게 웃으며, 언제 에리카 그 잡종을 쫓아 버릴까 고민했다.
* * *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나는 멍하니 눈을 떴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배꼽과 옆구리 중간 부분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으로 인해 비가 오는 것을 알았다.
“…….”
나는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신음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들여 왔던 습관이라,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 괜찮아?
멍한 정신을 갈무리하기 위해서 다시 눈을 감는데, 문득 걱정 어린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반짝, 눈이 떠졌다.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훑었다.
걱정이 한가득 담긴 샤샤의 은빛 금빛 두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옅게 웃음을 흘렸다.
아아.
조금 응어리지려던 마음이, 저 괜찮냐고 물어오는 목소리 하나에 스르르 녹아내렸다.
“샤샤.”
나는 반쯤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두 손을 뻗어 샤샤를 담았다.
“난 괜찮아.”
- ……
“정말이야. 그냥, 원래 비 오면 여기가 조금 아파.”
- ……
“그래서 그래.”
내 설명이 마음에 차지 않는지, 샤샤가 뭐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였다가 다시 다물었다.
지금까지 며칠에 걸쳐 샤샤가 알려 준 바에 따르면, 샤샤의 ‘말’은 공기의 파동으로 전달되는 ‘소리’가 아니라 상대의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의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자신의 기운을 소모해서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양을 보내면 기운이 부족해져 몸이 점점 투명해진다고도 했다.
몸이 완전히 투명해지면 소멸된다고도.
그래서 나는 샤샤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닌 이상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지.
“샤샤…….”
내 부름에, 지난 2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조금 더 자란 듯한 샤샤가 내 손가락에 얼굴을 부볐다.
그 가녀린 행동이 사랑스러워서 입가에 다시금 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한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샤샤를 쓸어내리면서 속삭였다.
“소중한 내 샤샤.”
- ……!
문득 샤샤가 통 튀어 올랐다. 꼬리를 발갛게 물들인 샤샤가 이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잔뜩 숙였다.
정말, 부끄러워하는 것도 한결같았다.
“나는 샤샤가 내 곁에 있어 줘서 정말 행복해.”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이 작은 공간에서 하나뿐인 위로가 되어 준 존재.
의미 없이 버려지는 나날들에 의미를 더해 준 존재.
알지 못했을 때는 이 따뜻함을 몰랐으니 견딜 수 있었지만, 이미 알아 버린 지금은 이 따뜻함이 없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 정말로 외로웠구나.’
신체적 학대만 없으면 정신적 학대 따위는 얼마든지 흘려 버릴 수 있다고 자위하고 있었지만, 실은 외로움과 아픔으로 곪아 가고 있었던 거다.
- 나도……
수줍어서 잔뜩 기어드는 목소리가 그래도 용기 내서 대꾸해 왔다.
하루에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횟수를 사용하면서까지 말해 올 만큼, 소중한 고백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살풋 웃을 때였다.
어느새 온몸을 분홍빛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인 샤샤가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내 오른 손목에 몸을 칭칭 감았다.
뱀답지 않은 뜨끈한 온기가 차가웠던 손목을 타고 퍼져 나갔다. 나는 샤샤의 행동이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샤샤?”
- 내가……
다시금 샤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샤샤를 내려다봤다. 역시나, 말을 단기간에 많이 한 부작용인지 샤샤의 분홍빛 몸이 조금 투명해졌다.
“샤샤, 말은 이제 그만……”
- 꼭
하나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샤샤의 맑은 두 눈동자가 나를 곧게 응시했다.
- 행복하게
- 해 줄게
한 박자 깊게 끊어 말한 샤샤가 내 손등에 얼굴을 비볐다. 반투명한 몸으로 부빗거려 오는 몸짓이 애틋해서,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샤샤를 살살 쓰다듬었다.
“나는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걸.”
그러자 샤샤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처럼.
- 더, 더, 나는, 더……
“샤샤.”
나는 다급히 샤샤의 말을 끊었다.
기운을 많이 쓴 부작용으로 샤샤의 몸이 한층 더 투명해져 있었다.
말을 조금이라도 더 하게 된다면, 샤샤는 소멸해 버릴지도 몰라. 문득 그런 두려운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알았어, 샤샤. 기대할게.”
그래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샤샤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날 행복하게 해 준다고 했으니까, 기대할게.”
그렇게 말하며 샤샤의 머리에 촉 입을 맞춰 주자, 빳빳하게 굳은 샤샤가 말랑말랑 푸딩처럼 팔을 타고 축 미끄러져 내렸다.
“샤샤?”
샤샤가 미끄러져 내린 손목 안쪽에서 다섯 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은색 꽃 문양이 반짝이는 것 같아 의아한 마음이 든 것도 잠시,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샤샤를 받쳤다.
샤샤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내 손바닥에 푹 고개를 박았다.
‘아, 정말이지…….’
그 수줍어하는 모습에 나는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봐, 샤샤.
너는 지금도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걸.
* * *
「……하여, 죄송하지만 해수 님과의 티타임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와그작.
고풍스러운 필체가 적힌 고급 편지지가 셀루리아 후작 부인, 델레미아의 손 아래 무참히 구겨졌다.
델레미아는 왈칵 인상을 찌푸리며 구겨진 서신을 방구석에 던져 버렸다.
“감히…… 근본도 없는 것이 돈 좀 있다고 내 만남 요청을 거부해?”
감히, 이렌텔의 개국 공신 가문인 셀루리아의 안주인을 말이다!
한동안 씩씩거리며 분을 다스리던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델레미아의 친정 가문은 미에트로 백작 가문으로, 신흥 귀족으로서 상업에 발을 들였다가 후에 세를 불린 후 구교파로 전향한 가문이었다.
구교파에 속한 가문들은 모두 명망과 전통이 있는 가문이라, 구교파에 속하는 것은 귀족들이라면 응당 꿈꾸는 일이었다.
델레미아는 자신의 가문이 구교파에 속한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꼈으나, 과거 상업으로 세를 불린 신교파 출신 가문이라는 꼬리표를 늘 수치스러워했다.
그 수치심은 구교파의 중심인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안주인이 되고서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수치심만큼, 델레미아는 금전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