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이곳에서의 용건은 그것이 다였다는 듯, 대공과 대공랑은 내게 마지막으로 웃어 준 뒤 곧장 회장을 나가 버렸다. 대공 부부가 나가자 이제 사람들의 이목은 모두 내게로 쏠렸다.
대체 셀루리아의 에리카 영애는 드레인 대공 부부와 무슨 사이인지, 황제께는 인사조차 안 드린 대공 부부가 왜 영애와만 말을 주고받고 갔는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대공의 미모에 잠시 홀렸던 이성이 다시 돌아왔다.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이성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누구 나 기절시켜서 내 골방에 데려다준 뒤 깨워 줄 사람.
* * *
내 예상은 정확했다.
후작 부부의 정서 학대 횟수는 무도회 이전보다 더욱 증가했으며, 카리에의 히스테리 또한 부쩍 늘었다.
이게 다 대공 부부로 인해서 내게 쏠린 관심 때문인데…….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네.’
대공 부부가 나한테 말 건 게 내 탓이냐고? 그리고 까짓거 뭐 말 좀 할 수 있지. 남 탓할 거면 대공 부부한테 가서 따지든가!
‘와, 생각하면 할수록 더 억울해.’
더 찬찬히 생각해 보면, 후작 부부의 의도는 성공하지 않은 게 없었다.
카리에는 무사히 황태자와 첫 춤을 춤으로써 차기 황태자비로서 낙점되었고, 셀루리아 후작 가문은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음으로써 황실의 사돈 상대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근데 나를 이렇게 갈궈!’
대공 부부와 말 몇 마디 나눈 걸 빼고는 불쌍한 골방 신세인 이 나를!
나는 분노에 차서 샤샤가 만들어 준 구름빵을 팍팍 뜯어 먹었다. 하, 정말 이렇게 스트레스받는데 구름빵마저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샤샤가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빵을 마저 먹어 치운 나는 허전한 빈손을 탁탁 털다가 샤샤의 걱정을 눈치채고는 얼른 방긋 웃어 보였다.
“난 괜찮아, 샤샤. 좀…… 똥 같은 사람들이 생각나서 그래.”
“…….”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해? 아 물론 묻는다고 생각하니까 좀 무섭긴 한데…… 가 아니라!”
하마터면 ‘똥이 무서워서 피한다’는 명제에 혼자서 설득될 뻔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이어 말했다.
“그냥 한낱 배설물처럼 엄청 짜증 나고 하찮은 존재들이야. 정말 정말 별거 아니니까 걱정 뚝!”
내 설명에도 샤샤의 걱정은 그칠 줄을 몰랐다. 결국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최후의 필살기: 화제 전환’을 시전했다.
“맞다, 샤샤. 나 저번에 무도회 갔을 때, 드레인 대공 전하와 대공랑 전하를 뵈었거든.”
불현듯 샤샤의 몸통이 통 튀어 올랐다.
나를 올려다보는 샤샤의 두 눈이 댕그래져 있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대공 전하를 뵀다고 하니까 놀랐어?”
내 질문에, 샤샤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푹 숙이기만 했다. 잠시 의아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의문을 거둬들이고 기억 속의 드레인 대공을 떠올렸다.
내 얼굴 위로 꿈꾸는 듯한 표정이 그려졌다.
“대공 전하…… 무척이나 아름다운 분이셨지.”
아아, 찬란했던 그 미모. 눈부시던 그 미소.
“검은 벨벳처럼 윤기가 좌르륵 흐르는 흑단색 머리카락에…… 상급의 자수정을 공들여 세공한 것처럼 아름다웠던 눈동자…….”
그 외모를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금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든 샤샤가 다급한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이어 중얼거렸다.
“살짝 설렜어, 나……”
- 아니야
불현듯, 머릿속으로 앳된 미성 하나가 파고들었다.
깜짝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휙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 뭐야, 방금……?”
분명, 목소리였다. ‘아니야’라고 했던 목소리.
목소리는 그 짧은 말을 끝으로 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샤샤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샤샤, 너도 들었지? 나만 들은 거 아니지? 분명 ‘아니야’라고 했어. 그치?”
물끄러미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샤샤가 꼬리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어벙하게 눈을 깜박이다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너?”
끄덕.
“방금 그거…… 네가 말한 거야?”
끄덕끄덕.
샤샤의 산뜻한 긍정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우리 샤샤가 보통 뱀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말도 할 수 있다고?
너무 놀라서 입만 뻐끔거리던 나는 조금 뒤 떠듬거리며 다시 묻는 데 성공했다.
“근데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했어?”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샤샤는 이내 시무룩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까지는 말 못 한 거였어?”
……끄덕. 샤샤가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또 말을 안 하고 있는 것도 의아했다.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다시 물었다.
“지금은 왜 말 안 해? 혹시 말하는 데 제약 같은 게 있는 거야?”
잠시 내 눈치를 보던 샤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흡사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자신에게 실망할까 걱정하는 눈치라, 나는 얼른 두 손으로 샤샤를 들어 올렸다.
“우리 샤샤, 말도 할 줄 알고. 멋지네!”
서둘러 칭찬해 주자 샤샤의 맑은 눈동자에 금세 뿌듯함이 차올랐다. 나는 기분이 좋아진 샤샤를 확인하고 은근슬쩍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흠흠, 아무튼 그래서 말이야. 그렇게 아름다우신 대공 전하께서 나한테 할 말이 있으셨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셨거든?”
하, 그때 생각하니까 다시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는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때 진짜 내 심장이 아주 그냥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는데, 나 아마도 그때 전하께 반해 버린 것 같……”
- 안 돼
예의 그 앳된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을 울렸다. 왠지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느껴진 것 같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샤샤를 내려다보았다.
“샤샤?”
어? 잠깐. 샤샤가 조금 투명해진 것 같다고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인가?
하지만 샤샤가 너무나도 절박하게 고개를 내젓고 있어서 그에 더 의아할 새도 없었다.
나는 풋 웃으며 샤샤의 얼굴을 내 코로 톡 건드렸다.
“너 설마 내가 대공 전하를 사랑하게 돼 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 ……
정곡인 듯, 움찔한 샤샤가 서글픈 눈으로 내 눈을 피했다. 나는 다시금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뒤로 상체를 쓰러뜨렸다.
“아이고, 샤샤야― 그거 아니야. 멀쩡히 대공랑 전하께서 남편으로 계신 분께 내가 어떻게 감히!”
누가 들었다면 ‘그쪽이었냐’하고 흐린 시선을 보낼 법한 말이었지만, 어떡해. 사실인걸.
아무튼, 요점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누워 있는 자세 그대로 손 위에 있는 샤샤를 내 눈높이에 맞춰 들어 올렸다.
“샤샤, 나는 음…… 그래. 대공 전하를 동경하는 거야. 우아하고, 멋지고, 아름다우신 분을 순수한 마음으로 ‘멋지다’라고 생각하는 거지.”
줄곧 내 시선을 피하고 있던 샤샤가 슬쩍 다시 나와 눈을 맞췄다.
‘정말?’하고 물어오는 듯한 샤샤의 두 눈을 마주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럼! 나는 절대 불륜 같은 거 안 해. 내로남불? 안 사요, 안 사.”
으, 진심 극혐이다. 부르르 몸을 떨던 내 머릿속으로 문득 한국에서 내가 열과 성을 다해 좋아했던 최애가 떠올랐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까, 나 한국에서도 대공 전하처럼 엄청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어.”
꽤 오랜만에 떠올리는 한국에서의 추억이라 그런가.
나는 반쯤 추억에 젖어 과거를 회고했다.
“영화 하나 개봉한다고 하면 한 달 전부터 막 설레고, 팬 사인회 한다고 하면 정말 선착순에 들려고 새벽부터 줄 서서 기다리고 했었지. 드라마에 나온다고 하면 매주 볼 수 있다고 엄청 기뻐했……”
- 싫어……
내 목소리 사이로, 거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나는 흠칫 놀라서 샤샤를 내려다봤다가, 다시금 가맣게 죽어 가고 있는 샤샤의 눈을 확인하고 다급히 덧붙였다.
“아 물론 동경한다는 말이야. 동경!”
- ……
“샤샤, 그…… 내가 아까 말했었지? 나는 대공 전하를 성적인 의미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동경하는 거라고. 그거야, 그거!”
- ……
“내 최애가 좀 예쁘고, 멋있고, 귀엽고, 연기도 잘하고, 웃기도 잘 웃고, 울기도 잘 울고, 토끼 같아서!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동경한 거야!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을 어떻게 안 동경할 수 있겠어!”
나는 한참을 뻘뻘거리면서 샤샤에게 변명을 주절거렸다. 그런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샤샤는 그 뒤로도 한참을 침울해했고, 나는 한동안 샤샤의 심기를 살피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몰랐는데 우리 샤샤, 엄청난 질투쟁이네…….
* * *
카리에는 에리카가 싫었다.
그래, 이 감정은 ‘싫다’는 것이다.
온전한 귀족인 자신은 한참을 걸려 겨우 익히는 것들을, 평민도 아니고 천민의 피가 반씩이나 흐르는 그 잡종은 아무렇지도 않게 뚝딱 해치워 버렸다.
그 애와 비교당하면서 수치심과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다.
“이 책들은 에리카 아가씨께서 이미 모두 익히신 것들이랍니다. 아마 그때가 5살이셨죠? 정말이지, 저는 에리카 아가씨와 같은 신동은 처음 보았답니다. 그런 분을 가르칠 수 있어 무한한 영광이에요.”
“이건 에리카 아가씨께서 한 번에 맞추신 문제인데…… 하긴, 에리카 아가씨께서는 워낙에 신동으로 소문이 나신 분이라, 카리에 아가씨와 견주는 것도 이상하지요.”
저 애가 잡종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저 애를 찬양하는 꼬락서니란!
그뿐일까?
“카리에, 이거 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자신보다 못난 천한 잡종 주제에, 그 애는 마치 저보다 낮은 사람에게 은혜를 내리는 것처럼 툭하면 호의를 베풀어댔다.
그러고서는 배시시 웃는 모습이 어찌나 역겹고 메스꺼운지, 직접 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지 못한다.
이것으로 끝이었으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가정교사를 통해 에리카가 수재라는 소문이 퍼졌는지, 자신과 친해진 영애, 영식들이나 다른 이들도 자신과 함께 있을 때 가끔 에리카에 대해 묻고는 했다.
“카리에 영애, 듣자 하니 영애의 사촌 되시는 에리카 영애께서 그렇게 똑똑하시다면서요?”
그런 물음이 꼭 에리카는 그렇게 잘났는데 너는 못났다고 비웃는 것 같아서, 카리에는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짙은 모멸감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어렸을 땐 정말로 친해지고 싶었던 베이센 공작 영애가 자신보다 에리카에게 더 관심을 가질 때였다.
“어? 저는 분명 에리카 영애도 초대했는데, 왜 에리카 영애께서는 이곳에 오지 않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