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나는 들고 있던 와인을 홀짝이며 생각을 돌렸다.
아무리 독립적인 공국의 주인이더라도, 드레인 대공가는 일단 이렌텔 제국 소속이었다.
대공가가 제국의 주요 행사에 불참하는 것에 대한 불만의 여론이 나올 법하건만, 아랫선은 몰라도 윗선에서는 그런 말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나오면 사람이 아니지. 애초에 공국이 산악 지대인 동쪽에 있는 이유가 적대국인 아이테 제국과 맞닿아 있는 곳이기 때문인데.’
그러니까, 공국은 전쟁을 대비한 일종의 방패인 셈이다.
아무튼, 그렇게 교류가 뜸한 까닭에 드레인 대공가는 철저한 비밀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본디 비밀이 많으면 그만큼 소문도 무성해지는 법.
드레인 대공가는 대공가에 열등감을 느끼는 자들에게 더없이 안성맞춤인 안줏거리였다.
뭐라더라,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했던가…… 아, 사람을 산 채로 찢어서 잡아먹는다고 했다.
그것뿐이랴.
눈동자와 마주치면 돌이 되고, 목소리를 들으면 고막이 찢겨 나가고, 옷깃이라도 스치면 그 자리에서 숨이 멎는다더라.
물론 그것을 진짜로 믿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평민층에서는 아이가 말을 안 들을 때 부모가 ‘너 지금 잠 안 자면 무서운 대공님이 데리고 간다’는 식으로 겁을 주기도 했다.
어려서 그 소리를 듣고 자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대공 가문의 이미지가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래서 드레인 대공가의 별칭이 ‘괴물 가문’이었지, 아마.
‘아아, 갑자기 안구에 습기가 차네…….’
국경을 수호해주는 일등 공신의 평판이 ‘괴물’이 될 줄이야.
이 얼마나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인지.
‘하지만 뭐, 나랑은 250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는걸.’
그런 쓰잘데기없는 데 관심을 쏟을 바에야, 2년 뒤에 저놈의 집구석을 탈출해서 꾸려 나갈 샤샤와의 행복한 라이프를 구상하는 게 더 가치 있었다.
그리고, 작가 친구인 나조차도 드레인 대공가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했으니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떠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고 보니 참 이상하네.’
왜 신아는 드레인 대공 가문에 대한 설정만 나한테 비밀이라며 알려 주지 않은 걸까.
홀로 잔을 기울이며 자작하는데, 다시 안내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한순간에 소란스러웠던 장내는 침묵으로 가득 찼다.
입을 다문 모든 귀족들이 황실 가족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또각또각, 레드 카펫을 밟고 황족의 자리인 상석까지 걸어간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만 고개를 들도록 하시오.”
그 말이 끝나고 나서야 귀족들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역시 사생아 황자는 이번에도 불참하는구나.’
하긴, 이런 곳에서 다른 귀족들과 아주 약간의 접촉이라도 있으면 황태자가 곧장 쓱싹해 버릴 테니까.
그 사람 신세도 나처럼 참으로 가엾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황실 가족이 등장할 때 잠시 멈췄던 오케스트라 음악이 다시금 잔잔하게 홀을 메우기 시작했다.
본디 황실 무도회에서는 황제와 황후가 첫 춤을 추는 것이 예법이었다. 귀족들 모두가 황제와 황후를 응시하며 첫 춤 추기를 기다리는데, 황제가 말했다.
“이번 연회의 첫 춤은 짐이 아닌 황태자가 출 것이오.”
황제의 선언에, 귀족들이 한 차례 술렁거렸다. 연회에서 첫 춤을 추는 상대는 대개 혼약을 약속한 사이거나 이미 결혼한 부부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황태자와 첫 춤을 추게 될 이가 거의 황태자비로 내정된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귀족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가세요, 태자.”
황후의 말에, 황태자가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회장으로 걸어 나왔다.
황태자, 칼릭스 르 이렌텔.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에 금을 녹여 만든 듯한 선명한 황금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그는 무척이나 잘생긴 사람이었다. 거의 모든 소설에 나오는 황태자가 그렇듯이.
‘잘생긴 것과 더불어, 이렌텔 황실이 그렇듯 황권신수설을 뼛속 깊이 믿는 사람이었지.’
그리고, 음, 얘는 설정을 들으면서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캐릭터였다.
왜냐면, 황태자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줄 때 신아의 손에 들려 있던 논문이 폭군 살해 논쟁에 관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자, 차분히 생각해 보자.
‘황태자’를 설명할 때 하필이면 ‘폭군을 살해하는 것에 관한 논쟁’을 연구한 논문을 들고 있었다.
그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신아의 5년 지기 친구로서 단언한다.
아니다. 절대 우연일 리가 없지.
‘……고인 될 분에게 명복을.’
나는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황태자의 잘생긴 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묵념했다.
신아는 소설 진행 도중 저 칼릭스 황태자를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고증을 좋아했던 신아였으니, 황태자의 죽음도 논문 내용을 참고해서 설정한 거겠지.’
내가 묵념을 하는 동안에도 황태자는 착실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걸음이 다른 방향으로 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셀루리아 가의 고귀하신 영애. 부디 그대와 첫 춤을 출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황태자의 걸음이 멈춘 것은, 내 옆에 서 있던 카리에의 앞이었다.
황태자의 금안이 부드럽게 접혔다. 설마 황태자가 저에게 올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카리에는 이내 투명한 하늘빛 눈동자 가득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허락에 감사드립니다.”
황태자가 단정한 동작으로 카리에의 손을 잡고 홀 중앙으로 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한 쌍의 남녀를 보면서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거였구나.’
후작 부부가 이 무도회에 그토록 공을 들인 이유.
후작 부부는 이 무도회에서 차기 황태자비로 내정될 사람은 카리에라는 것을 모두에게 드러내고 싶은 것이었다.
황실과의 혼약인데, 당연히 꼬투리 하나조차도 잡히고 싶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카리에가 오늘 올 때 그렇게 긴장했던 거였군.’
슬쩍 시선을 움직여서 후작 부부를 보니, 그들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황태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홀로 나가는 카리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왜 나한테는 미리 말 안 해 준 거지.’
설마 나 보내려 할 때도 나한테 미리 말 안 해 주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근처 하인에게 빈 와인 잔을 넘겨준 후, 다른 하인이 들고 있던 트레이에서 핑거 푸드를 집어 먹으며 소름을 달랬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그나저나, 계속 느끼는 거지만 이곳은 정말로 근세 유럽, 그중에서도 바로크 배경이었다. 매일 입는 옷과 더불어, 저기서 연주되고 있는 건반악기가 무려 하프시코드인 것만 봐도 그랬다.
‘그래, 바로크 시대에 무슨 피아노겠어. 그치, 신아야?’
굳이 이런 부분이 고증에 들어맞을 필요는 없는데.
하프시코드 특유의 챙캉챙캉하는 소리를 들으며 피아노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셀루리아 가의 에리카 영애.”
그 말을 인지하는 순간, 나는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셀루리아 후작 부부가 연결해 준 사람인 줄 알았다.
나를 며느리로 팔아넘길 후보 가문의 사람.
그래서 나는 빙그레 접대용 웃음을 새로 지으며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반가워요, 나는 드레인 대공인 세뤼아 르 드레인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저는 드레인 대공랑, 자네한 르 드레인입니다.”
‘……네?’
내게 다가온 사람은 무려 이 무도회의 핫 토픽, 뜨거운 감자, 드레인 대공 부부였다.
지금 황태자가 첫 춤을 추고 있는 와중인데도, 계속 대공 부부를 곁눈질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
경악한 셀루리아 후작 부부의 시선도 이쪽으로 향한 것을 보면서, 나는 그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제 딸에게 쏠릴 이목을 내가 다 가져갔다고 또 개지랄 떨겠네.’
대공 부부가 말을 걸었다고 신나 할 에리카의 자존감을 짓밟는 학대가 얼마나 더 빈번하게 자행될지, 아아, 보인다 보여.
도라방스도 이런 도라방스가 다 있나…….
하지만 이대로 대공 부부에게 다른 곳으로 가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에리카’ 흉내를 내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대공…… 전하?”
한 번 놀라 준 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다급히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어 보이며 허리를 굽혔다.
“세,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에리카가 드레인 대공 전하와 대공랑 전하를 뵙습니다…….”
조금 자신감이 없는 것처럼 말꼬리를 살짝 흐리는 것까지, 완벽했다.
나는 조금 눈동자를 굴리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드레인 대공을 바라봤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녀의 자안과 마주하고 나서는 화들짝 놀란 토끼처럼 잽싸게 다시 고개를 내렸다.
이러면 좀 어벙해 보였겠지.
속으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위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도 좋아요, 에리카 영애.”
다시 들려온 대공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나는 일부러 쭈뼛거리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흘끔흘끔 대공 부부의 눈치를 보는 척을 하고 있는데, 대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영애는 귀여운 사람이네요.”
“……네?”
순간적으로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만큼 정말로 놀랐다.
와. 나 귀엽다는 말 처음 들어.
당황한 나는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공을 바라봤다. 그런 내가 웃겼는지, 대공이 웃음을 담은 자안을 더욱 곱게 접었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 어떡해.’
미인의 청초한 얼굴이 내게로 기울어지니,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그렇게 울렸다.
‘대공랑님, 정말 죄송해요. 저 방금 당신 부인에게 설렌 것 같아요.’
근데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이건 생리적인 반응이거든요…….
반사적으로 숨을 참고 오들오들 떠는데, 내 귓가로 다가온 대공이 나직이 속삭였다.
“영애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네요.”
“……네?”
“부디 잘 부탁해요.”
조곤조곤 속삭인 대공이 굽혔던 허리를 폈다. 나는 멍한 얼굴로 대공을 바라봤다.
잘 부탁한다고?
……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