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에리카.”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후작 부인이 나를 불렀다.
그 지극히도 다정한 목소리에 불현듯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속으로 우웩거리며 구역질 시늉을 한 나는 겉으로는 흠칫 놀란 척을 하며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네, 네!”
“너는 어떤 드레스가 가장 마음에 드니.”
“저, 저는…….”
나는 다시 드레스를 주욱 훑어봤다.
어때. 눈새 짓 할 겸 가장 예쁘고 비싼 거 골라 봐?
“저, 저는― 저 푸른색…… 드레스요…….”
내가 고른 드레스는 전체적으로 사파이어 빛깔의 푸른색이 엷게 번져 있는 드레스였는데, 어깨에 작게 달려 있는 퍼프에는 여러 보석과 레이스들이 자잘하게 달려 있고, 밑으로는 플로팅 소매(floating sleeve, 팔꿈치부터 발목까지 늘어뜨려질 만큼 긴 것이 특징인 소매)가 허벅지 중간까지 길게 내려오는 형태였다.
하이 웨이스트인 상체는 억 소리 날 것처럼 화려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우아함과 고풍스러움을 갖추고 있어서 얼마나 비쌀지 딱 감이 왔고, 커틀이 보이는 치맛자락은 뭐…… 말할 것도 없었다.
반투명한 파틀릿(partlet, 네크라인 밑에 덧대어 가슴을 가리는 천)은 진주 장식이 무척이나 세세했고, 소매와 드레스 가장자리에는 무척 섬세하게 짠 레이스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치맛자락이 각도에 따라 반짝반짝 빛나고 있잖아. 딱 봐도 보석을 갈아서 뿌린 것 같은데 얼마나 억 소리 나겠냐고.’
옅은 물빛 드레스에 뿌려도 색이 튀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아쿠아마린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걸 뿌린 것 같은데, 돈지랄도 이런 돈지랄이 없다.
내가 선택한 드레스를 본 후작 부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려다가 겨우 호선을 유지했다.
“저…… 드레스 말이니?”
후작 부인이 들고 있는 부채로 내가 찜꽁한 드레스를 가리켰다. 나는 눈치 보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곤란하다면 저는 다른 걸로…….”
“곤란, 하긴.”
‘곤란’이라는 말에 내 치수를 기록하던 디자이너의 시선이 후작 부인에게로 향하자, 후작 부인은 이마에 커다란 혈관 마크를 단 채 호호 웃었다.
“하나뿐인 우리 조카를 위해서라면 하나도 곤란하지 않단다. 메디스 부인.”
후작 부인의 부름에 디자이너, 메디스 부인이 “네”하고 대답했다. 후작 부인은 통 크게도 곧장 내가 고른 드레스를 주문했다.
“오늘 잰 에리카의 치수에 맞게 저 드레스를 제작해서 왔으면 하네.”
“알겠습니다, 후작 부인. 다음 달 같은 날에 완성된 드레스를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사무적으로 답한 메디스 부인은 치수를 마저 기록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록된 치수를 몰래 확인한 나는 이렇게 굶고 있음에도 치수가 그다지 줄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작가 친구 버프, 정말 쓸 만하네.’
단백질 섭취가 부족해도 근손실을 반영구적으로 막아 주는 해맞이풀과 달맞이풀. 어쩌면 이것이 이곳에서의 진정한 판타지적 요소이리라.
아무것도 모르는 척 후작 부인에게 엿 먹이고, 내 근육들이 그대로라는 것도 확인하고, 엄청 예쁘고 반짝반짝한 드레스도 입게 되고!
‘일타쌍피에 피 하나 더 추가요.’
“알았네. 그보다, 메디스 부인.”
차륵, 하고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린 후작 부인이 메디스 부인을 불렀다. 메디스 부인이 안경을 한 번 추켜올리며 후작 부인을 돌아봤다.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해수 님을 한번 뵙고 싶은데.”
“―큽, 컥, 콜록콜록!”
아무 생각 없이 ‘피박아 기다려라’ 하며 히죽거리고 있던 나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후작 부인의 말에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후작 부인과 메디스 부인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나는 다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죄, 콜록, 죄송해요…….”
“아니란다, 에리카. 이제 치수도 다 재었으니 이만 방으로 올라가렴.”
“크흠, 네. 콜록, 큼…….”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응접실을 나섰다. 그간의 경험으로 감정 연기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소심이 영역에만 해당되는 모양이었다.
‘설마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 ‘해수’를 만나고 싶어 할 줄은 몰랐는데.’
셀루리아 후작도 아니고,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 직접 말이다. 후작 부인은 신교파에서 구교파로 전향한 귀족 가문 출신이라, 상업에 대해 다른 구교파보다도 더 배타적인 성향이라는 설정으로 알고 있었는데.
단순히 인맥을 쌓고 싶기 때문일까, 아니면 금전적 도움을 청하기 위함일까.
근세 유럽풍치고는 자본주의의 영향이 훨씬 더 깊게 배어 있는 이곳에서, ‘해수’는 베일에 둘러싸인 억만장자로 알려져 있었다.
자연히 해수와 연을 맺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많았고, 그중에는 고위층 귀족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상업에 호의적인 신교파 귀족들 한정이었는데.’
그런데 구교파의 핵심 귀족 중 하나인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 해수와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도 안 돼.’
구교파가 어떤 사람들인가.
구교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황제파 사람들로, 황권은 신께서 내린 불가침의 절대 권위라 맹신하면서 상업은 천박한 것으로 생각하는 꼰대 중의 꼰대들 아닌가!
‘Latte is horse’라는 성립할 수 없는 명제를 입에 달고 사는 바로 그!
‘……하긴, 근래 들어서 신교의 권위가 부쩍 상승했지.’
자신의 절대 권위를 믿는 오만한 성정으로 타락한 구교의 교황 대신, 기부금 없이 신께 신실한 마음을 바치는 것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파하는 신교의 교황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가 상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상인들은 대부분 평민이었다.
그들의 눈에 신분과 직업의 귀천을 매우 강조하는 구교보다, 신분과 직업의 귀천은 없고 그저 자신의 직업에 맞게 소명을 다하면 된다고 다독이는 신교가 더 예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는가.
자고로 종교는 신도빨이다. 신도의 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도의 수가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구교가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현재로서는 신교보다 구교의 입지가 더 강했다. 구교는 천여 년을 내려온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신교는 생긴 지 백여 년이 겨우 지났으니까.
나로서는 신교가 구교를 누르고 1인자가 되는 것이 더 유리했지만, 딱히 지금 상태에서 고착돼도 상관없었다.
아무리 구교가 날고 긴다고 해 봤자, 지금 세상에 만연히 퍼져 있는 자본의 영향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전지전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에서, 이미 나는 승자지.’
앞으로 딱 2년 남았다. 2년만 버티면 나는 그 누구도 태클을 걸 수 없는 부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홍홍 콧노래를 부르며 내 작디작은 골방으로 돌아왔다.
* * *
아무 일도 없을 때는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던 하인들의 방문이 부쩍 늘었다.
“반쪽 아가씨. 이거 처먹으세요.”
밥은 안 주면서 피부에 좋다는 오이 같은 채소들을 가지고 온다든가.
“반쪽 아가씨. 오늘부터 이 비누로 씻으세요. 씻고 나면 이거 바르고.”
밥은 안 주면서 고급 비누와 고급 로션을 가지고 온다든가.
“반쪽 아가씨. 살찐 건 아니죠? 작작 처먹으세요.”
밥은 안 주면서 내가 살쪘는지를 확인하러 온다.
‘아니 X발, 밥은 좀 줘 놓고 살쪘냐 안 쪘냐 물어보라고. 내가 지금 먹을 게 없어서 몰래 사 둔 견과류를 새 모이만큼 먹고 있건만!’
최근에는 하인들이 자주 4층을 들락거리기 때문에 빈센트가 오는 빈도도 대폭 줄어서, 빵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가물거릴 지경이었다.
한국이 배경이었으면 그래도 밥 정도는 줬을 것 같은데, 배경이 서양이라 그런지 정말 굶긴다.
‘서럽다, 정말.’
“배고파…….”
침대에 누워서 몸을 동그랗게 말며 중얼거렸다. 힘도 없어서 ‘흐어어’하고 다 죽어 가는 소리를 내자, 내 옆에 있던 샤샤가 깜짝 놀라서 다급히 제 머리로 내 뺨을 톡톡 두드렸다.
대답할 힘도 없어서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두드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샤샤가 제 입으로 내 뺨을 앙 깨물고 나서야 피식 웃었다.
“나 안 죽었어, 샤샤.”
금빛 은빛 두 눈으로 나를 세심하게 훑던 샤샤는 내가 손을 들어 몇 번 까딱거리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정갈하게 똬리를 틀고 앉아서 진중하게 눈을 감는다.
“……?”
샤샤가 뭘 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힘마저 없던 나는 그냥 멍하니 샤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문득, 샤샤의 앞으로 하얀 연기를 닮은 뭔가가 모이기 시작했다.
‘……응?’
조금씩 조금씩 모인 연기(?)는 점점 솜처럼 변하더니,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커다란 소보로빵처럼 모습이 바뀌었다.
톡.
빵을 닮은 그것은 허공에서 완성되자마자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제야 눈을 뜬 샤샤는 제 작은 머리로 자신의 몸통보다 훨씬 커다란 그것을 내 쪽으로 끙끙 밀었다.
그래 봤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나 가지라고? 나 주는 거야?”
그것을 집어 들며 내가 묻자, 샤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작은 입을 벌려서 앙 하고 다무는 시늉을 하는데…… 음…… 먹으라는 걸까?
“……나 먹으라고?”
반신반의하면서 묻자, 샤샤가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반짝한 두 눈을 보니, ‘맛있을 거야’하고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아하, 그렇구나”하고 영혼 없이 대꾸하면서 눈을 흐리게 떴다.
‘마법 같은 기타 판타지적 장치는 없을 예정이라며, 이신아.’
이게 마법이 아니면 뭔데.
손에 들린 하얀 구름빵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봤지만, 빵 냄새는커녕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샤샤가 먹으라고 줬는데 설마 독은 아니겠지.
‘뭐, 독이더라도 상관없잖아.’
나는 별생각 없이 구름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이거…….’
엄청 맛있어!
솜사탕처럼 달면서도 고소하고, 입 안에서 사르르 녹나 싶으면서도 포만감이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서 암냠냠 구름빵을 먹어 치웠다.
미쳤다. 나는 그 말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이건 요리계의 혁신이었다.
‘대체 샤샤는 정체가 뭐길래 이런 걸 만들어 낼 수 있는 걸까.’
정체가 뭐길래 그 많은 동물 중에 왜 하필이면 뱀 모양인지도 궁금했다.
‘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뱀의 특징은 거의 없다시피 하단 말이지.’
내가 구름빵을 맛있게 먹는 게 뿌듯했는지, 샤샤가 제 몸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한껏 의기양양해져서 반짝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