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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6)화 (6/139)

6화.

그런 나를 후작 부인이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물잔을 쥔 후작 부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예전부터, 네 어미의 분별없는 행동이 언젠가 이 사달을 낼 것을 알고 있었다. 귀족이라면 응당 귀족의 품위와 고귀함이 있거늘, 그 천한 것 때문에 저택을 나가서 그 몸에 천한 씨를 품어?!”

품위는 당신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속으로 꿍얼거리면서 나는 착실히 겁먹은 연기를 선보였다. 이렇게 연기에 재능 있는 줄 알았으면 연기과에도 원서 한번 넣어 볼 걸 그랬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다시 분이 차올랐는지, 후작 부인이 손에 들고 있던 물잔을 그대로 나에게 끼얹으려다가 잔에 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전자 안의 물을 잔에 따랐다.

“혹여라도 이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이 셀루리아의 평판이 대체 어찌 되겠느냔 말이야! 셀루리아 가의 금지옥엽 아가씨가 천민의 아이를 낳았다? 하! 이건 전 세계가 조롱하고 비웃을 이야기야!”

촤악― 다시금 물세례가 이어졌다.

뚝뚝. 물방울이 뺨을 지나 턱 아래로 방울져 흘러내렸다.

눈을 한 차례 깊게 감았다가 떠서 눈가에 맺힌 물방울을 모두 흘려보낸 나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보잘것없는 동물처럼 몸을 더욱 움츠리며 속삭였다.

“……자, 잘못했습니다…….”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얼굴이 물 범벅이겠다, 나는 흑흑하며 나지막하게 흐느끼는 시늉을 했다.

적막이 가득 찬 공간에는 나의 흐느낌과 후작 부인의 숨 고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씨근덕거리며 나를 맹렬히 노려보고 있던 후작 부인은 이내 휙 나로부터 몸을 돌렸다.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하는 너를 아직까지 키워 주는 우리에게, 너는 목숨을 빚진 것이다.”

“…….”

“알았느냐? 너는 앞으로도 평생, 죽을 때까지 우리의 명에 복종해야 하고, 결코 우리를 배신할 수 없는 졸개인 것이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봄이라지만, 물을 이렇게나 뒤집어쓰고 있으니 떨리는 것은 주체할 수 없었다.

“이만 꺼지거라.”

싸늘한 축객령을 내린 후작 부인은 곧장 몸을 돌려서 응접실과 이어진 제 침실로 사라졌다. 잠시 그대로 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젖어서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후…….”

굶어 가면서 툭 하면 욕만 처먹으려니 너무 힘들다.

‘차라리 고1로 돌아가서 입시 다시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일순 멈칫했다.

아니, 잠깐. 고1로 돌아간대도 내가 왜 입시 다시 준비해야 해. 버킷리스트 짜서 하고 싶은 거 다 해 볼 시간도 없는데.

만약에 돌아갈 수 있다면 뭐부터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는 이내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새삼스럽게, ‘김해수’로서의 마지막 순간에 느꼈던 쇠붙이의 감각이 생생해서,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정말로, ‘에리카’가 정신적 학대만 당해서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손찌검이라도 당했더라면, 나는.

그때처럼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한 번 둑이 터져 버린 댐은 언제 다시 물이 넘칠지 몰랐다. 나는 댐 안의 물이 넘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런 엿 같은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직접적인 폭력만 쏟아지지 않는다면, 나는 그 어떤 거라도 참고 넘길 수 있어.’

아무리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더라도, 나는 이 이상 그 어떤 이유로도 저들과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정신적 학대는 내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이 정도는 참고 넘길 수 있었다.

아무 복수도 하지 않고, 그냥 성인이 되자마자 가문과 연을 끊고 나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것으로, 나는 지금 받고 있는 이 부당함을 관대하게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만 지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선을 넘지 않을 수 있게.

하인들의 적의 가득한 시선과 목소리를 익숙하게 흘려버리며, 나는 기가 죽은 척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 골방으로 올라왔다.

* * *

“샤샤, 잘 있었어?”

누군가가 내 공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침대 위에서 안절부절못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샤샤는 나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 짧은 몸으로 어기영차 다가오는 모습이 왠지 웃겨서,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샤샤가 나를 보고 저렇게 심각한 눈을 하고 있는데, 웃으면 곤란했다.

나는 문을 꼭 닫은 뒤 샤샤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샤샤는 한참을 꿈틀거려야지만 올 수 있는 거리를 나는 단 세 걸음 만에 도착했다.

“샤샤, 나 괜찮아.”

쪼그려 앉아서 샤샤를 보며 그렇게 말했지만, 샤샤는 내 젖은 몰골이 속상한 듯 그 자리에서 몇 바퀴를 뱅글뱅글 돌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샤샤, 정말이야. 나 진짜 괜찮아.”

샤샤가 작은 얼굴을 들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촉촉해진 두 눈이 왠지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지. 물세례 받고 욕 처먹고 온 건 난데 왜 내가 샤샤를 달래야 할 것 같지.

‘그 전에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계속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니 점점 더 추워졌다.

나는 두 팔을 쓱쓱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슈미즈까지 다 갈아입어야겠네…….”

저번에 카리에에게 찻물 세례를 받았을 때는 슈미즈를 완전히 덮는 커틀을 입고 있어서 괜찮았지만, 이번에 입은 커틀은 가슴 바로 밑까지 오는 커틀이었기 때문에 슈미즈까지 다 젖어 버렸다.

건성으로 옷장을 뒤지던 나는 가장 위에 있는 슈미즈를 꺼냈다.

“그냥 대충 이거 입고 있지, 뭐.”

다음으로 나는 귀찮은 눈으로 한쪽에 좌르륵 걸려 있는 커틀을 응시했다.

한동안 빤히 커틀을 바라만 보던 나는 한숨 쉬듯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냥 커틀은 입지 말까?”

커틀 한 번 입으려면 은근히 손이 많이 가고 귀찮았다. 아무리 커틀을 일상복으로 입는다고 해도 슈미즈만 입고 있는 것보다는 불편하기도 했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더 불려갈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진중하게 고민하던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아 몰라, 내가 입기 싫다는데 뭐 어쩔 거야.”

배 째 그냥. 나는 발로 옷장 문을 닫은 뒤 평소 하던 것처럼 그대로 슈미즈를 침대로 던지려다가 멈췄다.

내 소중한 샤샤가 있는 침대에 슈미즈를 그냥 던질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샤샤가 슈미즈에 깔리거나 하면 절대 안 되지.’

나는 사뿐한 걸음으로 침대까지 간 뒤 침대 한쪽에 슈미즈를 조심스럽게 올려놨다. 그러고는 커틀을 벗으려고 끈을 푸는데, 문득 샤샤가 침대 저 끝자락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몸을 왠지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 같고.

‘왠지…… 꼬리 끝도 발갛게 물들어 있는 것 같고.’

젖은 커틀을 벗어서 한구석에 치운 뒤 슈미즈까지 벗으려던 나는 문득 멈칫했다.

혹시…….

“샤샤, 너…… 지금 수컷이라고 등 돌리고 있는 거야? 누나 옷 갈아입는다고?”

내 말이 정곡을 찌른 듯, 오들오들 떨리던 샤샤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꼬리가 발갛게 물든 건 착각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꼬리가 저렇게 터질 것처럼 발간데 착각은 뭔 착각이야.

“하…….”

문득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진짜 골 때린다.

나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뒤, 벗은 옷을 욕실 앞에 던져 놓고 샤샤에게로 다가갔다.

제게로 다가오는 걸 느꼈는지, 샤샤가 더욱 바짝 굳었다.

“샤샤.”

“…….”

“너 왜 이렇게 귀여워.”

푸쉬쉬. 그런 바람 빠진 소리라도 날 것처럼, 빳빳하게 굳어 있던 샤샤의 분홍 꼬리가 흐물흐물하게 무너져 내렸다.

한순간에 나무토막에서 말랑말랑 젤리로 변해 버린 샤샤는 그래도 꿋꿋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샤샤를 콕콕 두드렸다.

“샤샤, 고개 들어도 돼. 나 옷 다 갈아입었어.”

내 말에, 샤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샤샤의 고개가 천천히 내 쪽으로 향했다.

“어때, 나 다 입었지?”

나는 자못 의기양양하게 양손을 옆구리에 올렸다. 말간 별빛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갈아입으니까 어때. 나 예뻐?”

고작 잠옷으로 입는 슈미즈인데 예쁘고 자시고 할 게 있냐고 물으면, 음. 그냥 내가 자뻑 좀 해 봤다고 시인할 수밖에.

치맛자락을 팔랑거리며 한 바퀴 휘리릭 돌아봤다. 마지막으로 밀 색 머리카락까지 사락 쓸어 주며 훗 하고 웃자,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던 샤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예쁘다고?”

기껏해야 흐린 시선이 돌아올 줄 알았던 나로서는 얼떨떨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벙한 내 물음에, 샤샤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끄덕.

“…….”

미치겠다. 설마 정말로 고개를 끄덕일 줄 몰랐던 나는 뒤늦게 수치심을 자각했다.

차라리 핀잔을 주거나 무시를 받았더라면 뻔뻔하게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예상외로 인정을 받아 버리니 오히려 어쩔 줄을 몰랐다.

‘앞으로는 좀 자중해야겠다…….’

나는 샤샤 앞에 다소곳하게 앉아서 진중하게 말했다.

“샤샤, 내가 미안해. 네가 이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어. 앞으로 조심할게.”

정작 샤샤는 의아한 듯 눈을 끔벅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 * *

내 생각보다, 이번 무도회는 꽤 중요한 이벤트인 듯했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내 눈앞의 아름다운 드레스들을 바라봤다. 내 앞에 펼쳐져 있는 마네킹에 입혀진 드레스는 무려 7벌이나 됐다.

그것뿐이랴.

오늘은 무도회로부터 한 달 하고도 3주 전이었다. 웬일로 나는 지금 후작저의 메인 응접실에서 디자이너에게 치수가 재어지고 있었다.

‘저번 건국제 연회 때는 그냥 기성복 중 아무거나 골라 기존의 내 치수에 대충 맞췄었는데…….’

지금은 무려 7벌 중에서 고르고 있었다. 그것도,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의상실인 ‘에인시아’에서, 하나뿐인 내 맞춤복 목적으로!

나는 드레스를 보던 시선을 틀어 저기 테이블 앞에서 찻잔을 호록거리고 있는 후작 부인을 흘끗 곁눈질했다.

‘후작 부인도 와 있고 말이지.’

이건 즉, 세간의 이목을 엄청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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