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5)화 (5/139)

5화.

“우리 샤샤, 수컷이니? 그래서 ‘언니’가 아니라고 고개 저은 거야?”

끄덕끄덕!

샤샤가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내가 기운 냈으면 좋겠다고 반짝거리는 두 눈이 말해 오는 것 같아서, 나는 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샤샤. 알았어. 우리 샤샤의 애교 보고 누나가 기운 낼게.”

내 말에 샤샤가 기쁜 듯 다시 내 뺨에 얼굴을 비벼왔다. 언뜻 본 눈이 곱게 접힌 것도 같았다.

그래, 우리 샤샤가 나보고 이렇게 힘내라는데, 내가 기운 안 낼 수 없지.

* * *

저택에서 내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뭐, 그나마 하는 일이라곤 가끔 카리에의 성질 받아주기, 후작 부부에게 끌려가서 자존감 실추 및 세뇌당하기, 하인들에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좋은 안줏거리가 되어 주기…… 정도일까.

당장 두 달 뒤에 무도회에 나간다고는 하지만, 벌써부터 집중 관리를 받는 것은 카리에고 나는 한 달 전부터 대충 옷 고르고 설렁설렁 관리받고 하다가 집중 관리는 며칠 전에서야 시작된다.

그전까지 내가 하는 일을 굳이굳이 꼽자면, 평소보다 더 불려 가서 세뇌당하는 것 정도일까.

이 골방에 갇혀서 인터넷도 못 하고, 책도 못 읽고, 음악도 못 듣고, 티브이도 못 보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하, 정말 기력 제로 인생이다.”

차라리 수학 문제라도 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정말로 어디가 크게 잘못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멍하니 중얼거리며 침대에 털썩 누웠다. 배가 고팠지만 이미 견과류를 한 주먹이나 먹었으니 오늘은 참아야 했다.

도록도록 눈동자를 굴리다가 창을 바라보았다. 작게 보이는 창으로 푸른 하늘이 조그맣게 비쳤다.

그 조그만 하늘에 뭉게구름이 둥둥 떠나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노래 하나를 흥얼거렸다.

무슨 노래를 흥얼거리는지도 자각하지 못하면서 흥얼거리고 있는데, 내 옆으로 샤샤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무기력한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샤샤가 기운 내라는 듯 내 뺨에 제 작은 뺨을 비볐다.

가만 보면 샤샤는 얼굴 비비는 걸 정말 좋아했다. 특히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주로 얼굴을 비비는 걸로 봐서, 그 행동이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치, 본인이 그런 행동으로 기분이 좋아지니까 나도 그럴 거라 믿는 것처럼.

‘하는 생각조차 하찮고 소중하다…….’

나는 손을 뻗어서 샤샤를 쓰다듬다가 천천히 샤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샤샤, 내가 노래 불러 줄까?”

아무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에, 샤샤가 별빛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흔들었다.

노래 좋아하는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샤샤의 꼬리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살랑이는 꼬리가 톡 하고 내 손가락에 닿았다.

“……!”

놀랐는지,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샤샤가 두어 번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잽싸게 몸을 돌돌 말아 똬리를 틀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똬리 가운데에 쏙 집어넣는다.

꼬리에 내 손 좀 닿았다고 부끄러워하는 건가?

‘저는 내 몸에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비비면서.’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손을 거둬 갔다.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은 나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봄비 머금은 강가는

푸른빛이 참 고와요

그곳에서 나는 나는

슬픈 노래 불러요

경쾌하면서도 어딘지 쓸쓸하게 들리는 곡조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얼굴을 숨기고 있던 샤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느른하게 눈을 내리뜨며 샤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울방울 봄비는요

무지개 너머로 인사하고

우리우리 사랑님은요

푸른 강 너머로 인사해요

이 노래는 학교 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만든 노래였다. 뭐라더라, 옛 전통문화와 현대의 장르를 크로스오버해서 노래 하나 작곡하는 게 과제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지다가 눈에 띈 정지상의 ‘송인’에 발라드를 끼얹어서 과제 곡을 만들었지.

안녕안녕 내 님 안녕

내 사랑 부디 안녕

의도치 않게 내 절명곡(絶命曲)이 되어 버렸지만.

노래의 분위기가 쓸쓸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지, 가만히 노래를 듣던 샤샤가 내 손가락에 조그만 머리를 비볐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샤샤에게로 얼굴을 가져갔다.

“지금 나 위로해 주는 거야?”

샤샤가 눈을 아래로 늘여 뜨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속삭였다.

“괜찮아. 원래 이런 노래인걸.”

오히려 원작 시보다는 슬픔 좀 덜어서 만든 건데.

내 말에, 한숨 쉬듯 폭 하고 숨을 내쉰 샤샤가 내 검지를 부드럽게 감쌌다. 뱀이 따뜻할 리가 없는데, 샤샤와 닿은 손가락이 왠지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샤샤를 쓰다듬기 위해 샤샤가 감싼 손의 반대편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순식간에 얼굴을 찡그린 나는 목 끝까지 치민 욕지거리를 애써 삼키며 샤샤를 침대 위에 내려놨다.

커틀 입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슈미즈만 입고 있었으면 역시 천박한 천민 피는 못 속인다는 개소리 들었을 듯.

“누…… 크흠. ……누구세요?”

짜증 섞인 목소리가 다소 크게 나온 것 같아서, 한 차례 목을 가다듬은 뒤 다시 물었다. 다행히 뒤의 목소리는 소심하게 나와 줘서 한숨 돌렸다.

“주인마님께서 부르세요. 나와요.”

짜증이 짙게 배어 있는 목소리는 나에 대한 적의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 적의를 읽어 낸 샤샤가 불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왠지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망울에, 나는 작게 웃어 주며 속삭였다.

“괜찮아, 샤샤.”

정말로 괜찮았다.

적어도 손찌검을 하지는 않으니까.

“아, 뭘 그리 꾸물거려요! 당장 안 나와요?!”

으, 시끄러워. 보통 뱀과 달리 소리도 잘 듣는 우리 샤샤는 얼마나 시끄러울까.

나는 하인이 더 시끄럽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에리카,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나는 얼른 소심하고 주눅 든 표정으로 얼굴을 바꿨다. 나를 흘끗 쳐다본 하인이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아이 씨, 왜 하필이면 오늘 내가 담당인 거야. 재수 없게.”

‘재수 없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데, 저 자식이. 재수를 해 봐야 정신 차리지.’

나는 겉으로 잔뜩 쭈그러진 사람을 연기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저 하인을 강제로 책상에 앉혀 놓고 삼각함수를 풀게 했다.

‘평생 수학 문제나 풀어 버려라.’

내 기준 가장 심한 저주도 내렸다.

그렇게 겉과 속을 달리하며 하인을 따라가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 부부가 공용으로 사용하는 응접실에 다다랐다.

“주인마님, 에리카 아가씨를 데려왔습니다.”

하하. ‘아가씨’ 부분에서 이 부득 간 거, 나만 들은 거 아니지?

‘이 많이 갈아서 이 많이 상하렴. 네 이 상하지, 내 이 상하니.’

근데 정말로 이 상하면 나 때문이라고 내 탓 하겠지. 그렇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왔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들여보내.”

셀루리아 후작 부인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델레미아라는 이름의 후작 부인은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인으로, 카리에와 꼭 같은 푸른 눈동자를 지녔다.

후작 부인이 입고 있는 화려한 바로크식 드레스를 흘끔거린 나는 곧장 푹 허리를 숙였다.

후작이 없는 걸 보니, 오늘은 후작 부인만 내 자존감을 꺾을 요량인 모양이었다.

“세, 셀루리아의 주인마님을 뵙습니다…….”

내 인사가 다 끝나기도 전에 탁 하고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나는 바들바들 떨며 후작 부인의 눈치를 보는 시늉을 했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 탁자 위를 훑으니, 커다란 물잔에 물이 가득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은 물세례를 맞을 예정인 듯했다.

‘카리에가 뭘 보고 찻물을 뿌리는 걸 배웠겠어.’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후작 부인은 나에게 앉으라는 기본적인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제 손에 들린 찻잔을 기울여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에리카 르 셀루리아.”

후작 부인이 제 딴에는 나긋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움찔,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후작 부인을 올려다봤다.

‘지금 저 말에 대답하면, 감히 천민 피가 흐르는 너 따위가 셀루리아라는 고귀한 성이 가당키나 하느냐며 역정을 듣겠지.’

어쩌면 처음부터 물세례를 받을 수도 있고.

하지만 대답하지 않는다면, 너는 지금 네가 앉은 자리도 자각하지 못하냐면서 역시 천한 천민의 피라 멍청하기 짝이 없다고 욕을 처먹을 게 뻔하다.

후작 부인은 그냥, 꼬투리를 잡아서 나를 비하하고 싶은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그래도 내가 허영심이 있고 똑똑하지 않다는 걸 내보이는 쪽이 더 낫겠지.’

저번에 ‘에리카 르 셀루리아’라고 불렸을 때 “네”라고 대답했으니, 이번에도 그때와 똑같이 대답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나를 학습 능력조차 떨어지는 머저리라고 생각하고 경계하지 않을 테니까.

“네에…….”

일부러 느리고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후작 부인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입꼬리를 차갑게 비틀었다.

“하, 제 분수도 자각 못 하는 계집애 같으니라고.”

“…….”

“너는 감히 너 따위가, 네 이름 뒤에 ‘셀루리아’라는 고귀한 성을 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감히 너같이 천민의 피가 흐르는 것이 ‘셀루리아’의 성을 달 수 있다고 생각했어?”

“아, 아닙니다, 외숙모…… 아니, 주인마님…….”

나는 울상을 지으며 일부러 ‘외숙모’라고 부를 뻔한 말실수를 흘렸다.

‘외숙모’라는 호칭이 내 입에서 나올 뻔하자, 분을 참지 못한 후작 부인이 찻잔 옆에 있던 물잔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촤악!

물잔은 그대로 내 얼굴에 끼얹어졌다.

뚝뚝, 물이 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깊게 감은 나는 이어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감히 천한 피가 흐르는 주제에 누굴 외숙모라 부르는 것이냐!”

“죄, 죄송…….”

“하! 몇백 년이 넘게 이어져 온 명망 높은 세루리아 가문에 감히 더러운 천민의 피가 흘러들다니, 정말이지 수치스러워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어!”

앗 유감.

나는 후작 부인의 말을 설렁설렁 흘려 들으며 겉으로는 겁먹은 척 잔뜩 어깨를 움츠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