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아까 느꼈던 차가운 감촉은 이 감촉이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끔벅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서 실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다행이다.
그 모든 아픔을, 너 이겨 냈구나.
“깨어났구나, 너?”
내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뱀이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입가에 헤실거리는 웃음을 짓다가 이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뱀은 눈 못 깜박이잖아?’
눈꺼풀이 없는데 깜박일 수 있을 리가!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현상을 본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자, 실뱀이 꾸물꾸물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내 쪽으로 다소곳이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멍하니 실뱀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하하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뱀이 눈 좀 깜박일 수 있지. 뱀이 그럴 수도 있지.
신아가 뱀이 눈을 못 깜박인다는 상식을 몰랐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장르가 판타지이니만큼 판타지적인 요소를 도입하고 싶었나 보지.
“로맨스 판타진데 왜 판타지적인 요소를 안 넣냐고? 판타지 요소가 없긴 왜 없어. 바로크 시대 배경에 중국풍 황제 정권 섞었잖아.”
“뭐……”
“거기다가 내 소설에서까지 여성 차별 보기 싫어서 양성평등 설정도 넣었어. 그렇다고 배경 고증이 정확한 것도 아니고. 그걸로 판타지적 요소는 차고 넘치는걸?”
“…….”
“……아놔.”
웃음이 뚝 끊겼다.
근세 유럽풍 배경에 자본주의와 중국풍 황제 정권을 콜라보한 걸로 판타지는 충분하다고 했던 이신아가 이런 쓸데없이 현실에 반하는 설정을 할 리가 없다.
나는 진중한 얼굴로 실뱀을 빤히 바라봤다.
“너 뱀이니?”
뱀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뱀 아니니?”
깜박.
“정체가 무엇이냐. 어서 밝히지 못할까.”
깜박. 깜박.
실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수하면서도 무지한 모습에, 나는 문득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 내가 묻는다고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뱀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어.
나는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실뱀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툭 물었다.
“이름 지어 줄까?”
왠지 실뱀의 두 별빛 눈동자가 한층 더 반짝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양손으로 조그만 실뱀을 들어 올린 뒤 눈을 맞췄다.
순한 뱀은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나를 말꼬롬히 마주 보았다.
‘보통 동물의 이름은 그 동물의 울음소리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지.’
하지만 뱀은 울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뱀의 울음소리 대신 뱀이 혀를 낼름 할 때 나는 소리에서 이름을 따오기로 했다.
‘물론 얘는 혀를 낼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이쯤 되면 그냥 눈을 흐리게 뜨는 수밖에.
나는 흐린 눈으로 실뱀을 바라보면서 고민에 잠겼다.
‘뱀이 혀를 낼름 할 때 보통 츠스슷 하는 소리가 나잖아.’
그걸 줄이면 ‘스스’가 되겠다.
‘하지만 ‘스스’는 뭔가 ‘스파게티와 스튜’의 줄임말 같아서 배가 고파진단 말이야.’
안 그래도 배고픈 일상인데, 이 실뱀을 볼 때마다 스파게티와 스튜가 생각나서 더 배고파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배고파지려고 하는 속을 외면하면서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샤샤’로 하자. 어때? 마음에 들어?”
뱀이 ‘스스’하면서 혀를 ‘샤샤샥’ 집어넣으니까, ‘샤샤샥’을 줄여서 ‘샤샤’라고 명명했다.
‘샤샤’가 제 이름으로 낙점됐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실뱀이 춤을 추듯 몸을 흔들거렸다. 자그만 눈동자가 살짝 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나도 참. 뱀이 어떻게 눈을 휘어.’
아무래도 배가 고파서 헛것을 보는 모양이다.
“아, 맞다. 너 배고프지?”
그렇게 다쳤다가 이제 막 깨어났는데, 당연히 배가 고플 터였다.
샤샤가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고개를 갸웃했다. 샤샤를 내 어깨에 올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 아래 숨겨 뒀던 과일 하나를 꺼냈다.
언젠가, 뱀은 작은 곤충 말고 과일 같은 것도 먹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 것 같아서 꺼낸 과일이었다.
손에 잡힌 건 하루라도 더 오래 두고 먹기 위해 샀던 덜 익은 사과였는데, 한쪽 면이 지나치게 파릇파릇했다.
‘……음, 보기만 해도 셔 보여.’
신맛이 입에 감도는 것 같아서,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아무튼, 이 풋사과는 작은 샤샤가 먹기에는 너무 딱딱해 보인다. 먹다가 이빨이 부러지거나 턱이 나가면 어떡해.
나는 내 어깨 위에 다소곳이 있는 샤샤를 빤히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샤샤가 순한 눈으로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슬쩍 한 손을 들고 심장을 움켜쥐었다.
‘왜 사람들이 ‘하찮고 소중하다’는 표현을 쓰는지 알 것 같아…….’
한 번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이 조그마한 실뱀은, 정말로 더없이 하찮은데, 그만큼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당장 사과를 도로 내려놓은 나는 종이 가방을 뒤져서 말랑말랑한 산딸기 한 알을 꺼냈다.
“자, 샤샤. 이거 맛있겠지? 먹어 볼래?”
나는 작은 산딸기를 샤샤의 얼굴 가까이 내밀어 주었다. 샤샤는 고개를 저으며 작은 머리로 산딸기를 내 쪽으로 밀었다.
설마 거부당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샤샤를 내려다보았다.
“음, 산딸기 싫어해?”
나직이 묻자, 샤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어?
“샤샤, 안 먹고 싶어?”
이번에는 샤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멍한 눈으로 샤샤를 바라보다가 이내 허허 웃으며 산딸기를 입에 넣었다.
산딸기 특유의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머리를 비우려 노력했다.
그래, 뱀이 사람 말 좀 알아들을 수도 있지.
이곳은 근세 유럽풍과 중국풍 황제 정권이 섞인 판타지 세계고, 나는 아직까지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빙의란 걸 했다.
그런 마당에 뱀이 말을 알아듣는 것 정도는 당연하……
‘……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잖아!’
쭈그려 앉아서 소리 없이 발광하며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는데, 문득 한쪽 팔에서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움찔하며 바라보니, 샤샤가 제 머리로 내 팔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너, 설마 지금 나 위로하는 거니.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않나. 물론 샤샤 본인은 자기가 내게 병을 줬다고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그것이 왠지 웃기게 느껴져서, 나는 피식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웃자, 내 기분이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샤샤가 눈을 휘어 웃으며 몸을 흔들었다.
그래, 인생 뭐 있어. 뱀이 사람 말 알아듣는다고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샤샤가 귀여우면 된 거 아닌가.
“너, 네가 귀여운 거 알아?”
종이 가방에서 산딸기를 한 주먹 더 꺼낸 내가 오물거리면서 묻자, 빳빳하게 굳은 샤샤가 이내 휙 고개를 돌리고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검은 꼬리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너 지금 부끄러워하니?’
그렇게 얼굴만 숨기고서 다 숨겨졌다고 생각하는 거야?
“……샤샤, 너를 정말 어떡하면 좋으니.”
너무 쪼맨해서 와랄라 해 줄 수도 없고 말이야. 이마를 짚으며 깊이 한숨을 내쉬자, 움찔한 샤샤가 나를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뭔가가 잘못된 걸까 싶어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에, 나는 한 손으로 샤샤의 머리를 슥 쓰다듬었다.
“네가 너무 귀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소리야.”
다시금 빳빳하게 굳은 샤샤가 푹 고개를 내 어깨에 박았다. 푸스스 웃은 내가 맹렬히 흔들리는 샤샤의 꼬리에 슬쩍 손을 갖다 대려고 했을 때였다.
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에 흠칫 놀랐던 나는 이내 노크를 한 사람이 빈센트라는 것을 깨닫고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샤샤를 달랜 뒤, 문 밑으로 빈센트가 놓고 간 쪽지를 집어 들었다.
나의 충실한 조력자 빈센트는 내가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는 가문의 중대사 같은 것들도 쪽지를 통해 알려 주고는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덤으로, 가끔씩이지만 빵 같은 것도 두고 가곤 하지. 정말 가끔씩이지만…….’
더 자주 주면 들키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속으로 빈센트에게 감사를 표한 나는 이번엔 또 어떤 골 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는 쪽지를 펼쳤다.
「앞으로 두 달 뒤, 두 분 아가씨 모두 황실 무도회 참석 예정.」
“하…….”
‘무도회’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나는 와락 얼굴을 구겼다.
물론 신아가 스토리 부분에 대한 설정을 짜 놓은 게 거의 전무하다시피 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이벤트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나는 이 무도회에서 귀족들에게 전시될 예정이라는 것.
‘좋은 안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종의 전시.
‘하루 종일 벽의 꽃처럼 은은하게 웃으면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지.’
테라스에서의 휴식? 그딴 거 없다. 온종일 전시해서 귀족들 눈에 눈도장 찍기도 바쁜데, 테라스 휴식은 무슨 얼어 죽을 소리.
아, 이 망할 놈의 세상은 여기든 저기든 미성년자에게 가혹한 것은 똑같았다.
쪽지를 본 내 표정이 안 좋아지자, 슬쩍 쪽지를 살피던 샤샤가 조심스럽게 내 뺨에 얼굴을 비볐다.
흡사 기운 내라는 듯한 그 몸짓에, 잔뜩 성질나 있던 내 기분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샤샤, 이 언니가 기운 냈으면 좋겠어?”
불현듯 흠칫한 샤샤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나는 충격받은 얼굴로 샤샤를 바라봤다.
“내가 기운 안 냈으면 좋겠다고……?”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흡사 브루투스에게 배신당한 카이사르처럼 샤샤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자, 잔뜩 당황한 샤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순한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망울망해졌다. 나는 끙끙거리는 샤샤를 보고 바로 장난을 집어치웠다.
우리 귀여운 샤샤를 울릴 수야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