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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3)화 (3/139)

3화.

빈센트 하르센.

신아가 ‘신.로.줄’의 설정을 짤 때는 등장하지 않은 인물로, 에리카로서 알아본 바로는 셀루리아 후작 가문의 가신인 하르센 남작 가문의 가주라고 했다.

엘리트답게 지적이고 고아한 외모를 갖고 있는 그는 후작의 보좌관으로 있기에는 상당히 아깝다고 생각될 정도로 유능한 인재였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도 묻지 않고 나를 전적으로 도와주고는 했다.

꼭 오늘처럼 말이다.

‘심지어 얘는 내가 억만장자라는 것도 모르는데.’

아무리 그동안 나를 죽 도와줬다고는 해도 완전히 믿을 수 없어서 내게 은닉 재산이 있다는 것은 비밀로 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의 도움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후드를 깊게 눌러쓴 뒤, 은행을 나왔다.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근처 식당에 들렀다.

스튜와 빵을 배가 터지기 직전까지 꾸역꾸역 먹는 나를 보던 주인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괜찮냐고 물었지만, 나는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게 내 최후의 만찬이었으니까. 앞으로 3개월 동안은 이런 양질의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할 예정이거든.

나는 2층에 있는 식당은커녕 3층으로도 잘 내려가지 못했다.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카리에는 내가 4층 밑으로 내려오는 걸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뿐이면 얼마나 다행이게. 나를 만만하게 보는 하인들은 내게 식사를 가져다주지도 않았다.

‘매주 레틸기스 즙이 섞인 생수통은 꼬박꼬박 갖다주면서 말이지.’

어이가 실종되는 소리였다.

아무튼, 배고픔을 참다가 참다가 더 이상 참으면 죽을 것 같다고 판단이 되면, 나는 그제야 주방으로 내려가서 빵이나 과일을 찾아 먹고는 했다.

물론 야심한 시각에 주로 행하는 일이었지만, 만약에라도 사람들에게 들켜 버리면 그날 나는 밤새도록 후작 부부와 카리에 앞에서 강제로 ‘자기비판’을 해야 했다.

만약 거부하거나 피곤해하는 기색이 보인다?

회초리가 날아오지는 않는다. 후작 부부는 나중에 결혼 장사로 팔아먹을 ‘사랑스러운 조카’의 몸에 만약의 ‘흠집’이라도 나는 걸 극도로 싫어하거든.

그러나 회초리 따위가 날아오는 대신 나는 두꺼운 사전 3권을 위로 높이 치켜들고 밤새도록 식당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후작 부부와 카리에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

손 들고 있기 무시하지 마라. 진심으로 이건 고문이다.

“잘 먹었습니다. 여기, 값이요.”

“그, 그래요. 다음에 또 와요.”

오늘따라 더 많은 값을 받게 된 주인장은 애매한 얼굴로 나를 배웅했다. 돈 많이 받은 건 좋은데, 내가 괜찮은지 걱정이 된다는 얼굴이었다.

가게를 나온 나는 곧장 근처의 식료품점에서 견과류와 육포, 그리고 과일 몇 개를 샀다.

‘이걸로 그래도 한 달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과일은 적어도 모레면 다 먹어야겠지만.

사들인 음식을 후드 안쪽으로 감춘 나는 후드를 조금 더 깊게 눌러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어두운 골목길 옆을 지나갈 때였다.

“야, 야. 조금 더 때려봐. 안 움직이잖아.”

“때리는 것보다는 막대기로 찌르는 게 어때? 꼬리 쪽 찔러 봐. 뚫리나 보자.”

“아니면 잘라 볼까? 안 꿈틀거리니까 재미없어.”

킬킬거리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앳되었다. 변성기도 오지 않은, 아이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서린 까닭 없는 악의를 느낀 순간,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자신보다 약한 이를 내려다보며, 까닭 없이 괴롭히고 싶어 하는 눈. 목소리. 감정.

그리고 날아오는 무자비한 폭력.

“감히 내가 말하는데 어디서 말대꾸야……!”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늘진 골목길 한구석에서 남자아이 넷이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를 끄적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둘러싼 곳에는 한 뼘 길이의 작은 실뱀 하나가 잔뜩 다친 채 의식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소리 없이 아이들 뒤로 다가간 나는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저 하얀 목.

정말, 가늘고, 약해 보였다.

“앗, 깜짝이야! 뭐, 뭐예요. 누구세요?”

그제야 나를 발견한 한 소년이 화들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제 맞은편 아이가 놀란 것을 본 내 바로 앞의 아이도 나를 돌아보고는 놀라서 옆으로 주저앉았다.

“누, 누구세요!”

저보다 약하고 작은 생물은 주저 없이 해맑게 괴롭히면서, 저보다 강하고 큰 존재를 보면 덜덜 떨며 두려워한다.

금방이라도 앞질러 나갈 것 같은 손을 꽉 쥐며 등 뒤로 숨긴 나는 아이의 목에서 시선을 뗐다.

나는 느릿하게 아이들을 스윽 훑은 뒤, 가운데에서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널브러져 있는 뱀에게로 시선을 줬다.

“괴롭히니 어때?”

“……네, 네?”

“재밌어?”

스륵, 고개를 기울이며 다시 아이들을 내려다봤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아이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 그게 무슨…….”

“재밌어하는 것 같아서. 너희보다 더 약한 존재를 괴롭히는 것 말이야.”

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숙이며, 내 앞에 있던 아이의 턱을 슬쩍 쥐었다.

“그래서 나도 궁금해졌어. 나보다 더 약한 존재를 괴롭히면, 재밌을까?”

턱을 쥔 손에 힘을 가하자, 순간 진한 지린내가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으, 으아아악!”

문득 정신을 차린 아이 중 한 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한 명이 도망치자, 주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퍼뜩 정신을 차린 아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쳤다. 내 앞에 있던 아이도 턱을 쥐던 내 손을 뿌리친 뒤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달려 나갔다.

나는 텅 빈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내 예상을 한 치도 빗겨 가지 않는구나.

나는 곧장 손을 뻗어서 축 늘어져 있는 뱀을 손바닥에 올려놨다.

약하고 보잘것없다는 이유만으로 만신창이가 된 생명을, 같은 이유로 고통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 내가 외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여기저기 상처의 흔적이 만연한 실뱀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만 비늘로 덮여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뱀은 항상 눈을 뜨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이내 실뱀을 음식이 든 종이 가방에 넣은 뒤 저택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다행히 오늘도 무사히 내 방까지 돌아왔다.

나는 내 비상식량이 든 소중한 종이 가방을 벽장 한구석에 잘 숨긴 뒤, 조심스러운 손길로 실뱀을 꺼냈다.

까만 실뱀은 그때까지도 죽은 것처럼 움직임 하나 없었다.

“설마, 이미 죽었나……?”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던 나는 서둘러 ‘퉤퉤’하고 말을 뱉는 시늉을 했다.

말이 씨가 된다는데, 이 무슨 망발이람.

일단 상처라도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쪽 서랍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들었다. 신부로서의 가치를 훼손당하면 안 되므로, 후작이 내게 상처가 생기면 치료하라고 준 최고급 의료용품이었다.

‘직접 치료사를 보내 주기는 싫고, 흉은 지면 안 되니까 그냥 이거 줘 놓고 나 몰라라 하는 거지.’

나쁜 자식. 속으로 꿍시렁거린 나는 익숙하게 용품을 다루며 실뱀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에리카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집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악마 때문에 치료 행위에 나름 익숙했다.

‘그나저나, 뱀한테 인간용 용품을 써도 되나……?’

급한 대로 상처를 소금물로 씻어 내고, 꼭꼭 씹어 으깬 약초와 함께 붕대를 감던 내 손이 일순 멈칫했다.

잠시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던 나는 이내 하하 웃으며 붕대를 마저 감기 시작했다.

“같은 동물이잖아. 괜찮아.”

나는 지난 생명과학 시간에 배웠던 몇 안 되는 지식 중 하나를 떠올려 봤다.

인간은 동물계 척삭동물문, 뱀도 동물계 척삭동물문…….

‘으아아, 그 뒤로는 다 다르잖아!’

나는 소리 없이 오열했다.

부디, 이 약초가 뱀에게도 좋은 영향을 줬으면 좋겠다.

* * *

이토록 마음이 전전긍긍한데, 잠이 잘 올 리가 없다.

나는 벌써 10번도 넘게 자다가 일어나서 창가에 누인 실뱀을 확인했다.

‘거의 10분에 한 번씩 깨서 확인하는 듯…….’

깨끗한 손수건에 놓인 실뱀은 여전히 내가 처음에 둔 모습 그대로였다. 가슴이라도 오르내리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뱀이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아 미치겠네.

“너 꼭 일어나야 해…… 알았지?”

평소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이 뱀에게 이렇게나 애착이 가는 이유는, 이 뱀한테서 과거 내 모습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까.

속삭이듯 중얼거린 나는 내 손의 소금기가 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쓰다듬지도 못하고 한없이 뱀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새삼…… 이렇게 보니까 얘 진짜 잘생겼다.’

뱀한테 잘생겼다는 표현이 어불성설일 수도 있지만, 정말 그랬다.

아니 그게 왜 어불성설이야. 뱀이 잘생길 수도 있지.

창가에 내린 달빛이 부서져 내리는 검은 비늘은 빛이라도 나는 것처럼 하얗게 빛났다. 어슴푸레한 시야 속에서 그렇게 가만히 뱀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하품을 하며 침대로 돌아갔다.

자기 전, 가물거리는 시야에 뱀을 한 번 더 담은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부윰한 의식 사이로, 문득 차가운 뭔가가 뺨에 닿는 것 같았다.

으음, 하며 슬쩍 인상을 찡그린 나는 몸을 돌려 누웠다.

그대로 깊은 잠에 다시 빠지려는 찰나, 차가운 감촉이 이번에는 반대쪽 뺨에 닿아 왔다.

그 순간, 눈꺼풀에 내리비치는 햇살이 확 느껴졌다.

‘아…… 잠 깼다.’

길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무심코 시선을 옆으로 내린 순간,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

응, 그래. 눈이 마주쳤다.

금색과 은색의 찬란한 눈동자. 뱀의 조그만 눈을 지칭하기에는 좀 웃긴데, 근데 진짜 그랬다.

밤하늘의 별빛을 모두 끌어다 품기라도 한 듯, 양쪽의 색이 다른 눈동자는 찬란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조막만 한 귀여운 얼굴로 나를 말꼬롬히 바라보던 실뱀이 이내 다시금 내 뺨에 제 얼굴을 비볐다. 흡사 애교를 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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