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무튼.
그렇게 ‘신.로.줄’은 ‘종교 갈등으로 인한 난관을 헤쳐 나가서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는 남주와 여주’라는 큰 틀과 세세한 설정만을 가진 채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런 소설(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에 내가 빙의를 한 것이다.
‘환장하겠네.’
내가 빙의한 이 ‘에리카 르 셀루리아’에 대해 설명하자면, 에리카의 어머니인 셀루리아 후작의 여동생 ‘할리아 르 셀루리아’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귀족치고는 신분에 대한 편견이 없었던 할리아는 우연히 저택에 새로 들어온 천민인 켈을 보고는 첫눈에 반하게 된다.
당연히 가문에서는 할리아의 사랑을 반대했고, 결국 그녀는 자신 몫의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켈과 함께 타국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할리아는 에리카를 낳다가 결국 세상을 등지게 된다.
홀로 남은 켈은 천민인 자신의 아래에서 딸아이가 잘 성장할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할리아가 남긴 유산과 함께 에리카를 셀루리아 후작 가문으로 보낸다.
그새 셀루리아 후작 가문은 할리아의 오빠인 펠리페가 가주 위를 이어받은 상태였는데, 펠리페는 자신의 조카인 에리카를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엄마를 잃은 조카가 가여워서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할리아의 재산과 결혼 시장에서의 에리카의 가치 때문에.
후작 가문은 에리카의 몸에 흐르는 천민의 피를 매우 수치스러워해서 에리카를 구박했지만, 동시에 이 사실이 가문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입막음했다. 이에 대해 저택 밖에서 입이라도 뻥긋하면 바로 목숨을 끊어 버리겠다고 했었지.
‘정말 웃기게도, 하인들은 원래라면 감히 함부로 올려다보지 못할 귀족을 무시한다는 희열과 쾌감 때문에 이 입막음에 제일 적극적이었지.’
말만 안 하면 월급 빵빵하게 나오지, 일 스트레스를 무려 ‘귀족’에게 풀 수 있지, 죽을 걱정도 할 필요 없지, 누가 말하겠냐고.
물론, 이 입막음 또한 조카의 사회적 체면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혼 시장에서의 에리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에리카 르 셀루리아’에게 짜인 설정이었다. 대체 어디에 등장시키려고 에리카와 카리에 설정을 짜 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 * *
수도의 번화가에는 수많은 사람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나는 빈센트가 미리 준비해 준 커다란 검은색 클록(cloak, 긴 망토)에 달린 후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뒤 목적지를 향해 재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빈센트가 시간을 벌어 줬다고는 하지만, 최대한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내가 향한 곳은 이렌텔 제국에서 가장 큰 은행인 켈타카 은행의 에이리트 제1지점이었다. 참고로, 에이리트는 이렌텔 제국의 수도 되시겠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동시에 안에 있던 모든 종업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근처의 문지기가 내게 정중하게 물었다. 나는 입을 열어 말하는 대신, 목에 걸고 있던 작은 인장 반지를 문지기에게 보여 줬다.
문지기는 반지에 새겨진 용 모양의 인장을 보더니, 잔뜩 당황해서 내게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해, 해, 해……!”
“조용히.”
이 문지기 신참인가. 나 분명 시끄러운 거 싫다고 말했었는데.
후드를 더 끌어당기며 경고하듯 말하자, 문지기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렸다.
하지만 이미 문지기의 태도로 내가 누군지 눈치챈 직원이 서둘러 내게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해수 님. 바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내게로 모였던 직원들의 시선은 모두 도로 흩어져 있었다.
누구와는 달리 눈치가 빠르군.
내가 도착한 곳은 3층에 자리한 은행장실이었다.
“은행장님, 해수 님 오셨습니다.”
“어서 모시도록 하세요.”
허락은 0.1초 만에 떨어졌다. 나는 직원이 열어 주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문이 닫혔다. 곧장 소파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간 나는 내가 이곳에 올 때면 늘 앉는 자리에 앉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갈색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깔끔하게 넘긴 은행장은 인자한 얼굴을 한 50대 초반의 남자였다.
지난 경험을 통해 내가 차를 내오는 등의 소모적인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터득한 은행장은 서론을 길게 잡는 대신 내게 서류철을 내밀었다.
나는 은행장에게서 서류철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딱히.”
서류철에 묶인 서류는 이번 분기의 내 수익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오래 밖을 나다닐 수 없는 까닭에 직접 움직일 수는 없었다.
때문에 나는 주거래 은행인 켈타카 은행에 모든 금융 거래 업무를 대리로 맡겼고, 투자를 하는 족족 대성공을 거두면서 나는 은행의 VVIP 고객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아, 혹시 은행이 나를 협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혼자인데다가 일부러 신분까지 숨기고 있는 사람이라니, 그걸 빌미로 협박하기에 더없이 적합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 투자에 성공한 후에, 미리 은행의 지분을 절반 매입해 놓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협박에는 협박이지.
‘뭐, 매입하는 과정에서 편법을 좀 쓰긴 했지만.’
일단 이 자본주의 신분제 사회에서 내가 살아남아야 하는데 양심이 다 뭔 소용이람.
아무튼, 태평하게 여기 앉아서 회상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군청색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여 받아 든 서류를 훑어 내렸다.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의 주식은 모두 상승세이고, 부동산을 사 놓은 지역도 값이 배 이상 뛰었다. 에이리트 은행을 끼고 개인으로 인수한 귀족 전용의 고급 의상실인 ‘에인시아’와 디저트 가게인 ‘세사르’도 연 매출이 상당해서 내게로 떨어지는 금액이 쏠쏠했다.
왜 하필 에인시아와 세사르를 인수했냐면, 그 둘이 이렌텔의 사교계를 꽉 쥐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혹시 나중에라도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손톱으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인부를 몇 명 고용했으면 해요.”
“인부…… 말씀입니까?”
“네. 저번에 제가 50만 금화에 사들였던 아이스멜 산 있죠? 거기서 금광을 캐세요.”
“금광…….”
은행장은 묻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했던 나의 경고를 기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예,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지요.”
은행장의 대답을 들은 나는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슬쩍 후드를 젖히고 은행장을 빤히 바라봤다. 내 빤한 시선에 움찔한 은행장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사륵 눈가를 휘면서 이어 말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 정체는 함구하고 있어야 할 거예요.”
“…….”
“나는 정체만 까발려지는 것뿐이지만, 은행장님은 이 은행의 지분을 절반 갖고 있는 내 심기를 건드리는 게 되어 버리니까요.”
이 경고는, 처음 투자에 성공한 이후 은행이 내게 감시를 붙였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서부터 은행장을 만날 때마다 내가 종종 던지는 경고였다.
감시로 인해 알게 된 내 정체를 밝힌다면, 이 은행은 결코 무사하지 못하리란 경고.
대외적으로 나는 대귀족 가문인 셀루리아의 귀염받는 영애라 알려져 있었다.
에리카 르 셀루리아는 이 은행이 망해도 셀루리아 영애로서의 신분이 있으니 괜찮지만, 하급 신흥 귀족인 은행장은 이 은행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그는 내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
내 안위를 함부로 위협할 생각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하고.
은행장은 여부가 있겠냐는 듯 또박또박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해수 님.”
대답은 흡족스러웠다.
* * *
내가 이 몸에 빙의한 시점은, ‘에리카’가 14살이 되던 해였다.
나는 내가 빙의한 몸이 ‘에리카 르 셀루리아’라는 것을 알아차린 직후부터 재게 움직였다.
나는 여유롭고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내가 죽었다느니, 갑자기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인 것)에 빙의했다느니 하는 태평한 감상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은 없었다.
우선, 화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초인 해맞이풀과 달맞이풀을 찾아서 샐러드에 섞어 먹기 시작했다.
이런 설정이 왜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해맞이풀과 달맞이풀을 섞어서 1년간 꾸준히 복용하면 영양이 부족해도 체력이 쉬이 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독성에 면역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대체 신아 얘는 이 설정을 어디에 쓰려고 이렇게 넣어 놓은 걸까.
뭐, 나만 개꿀이지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레틸기스 즙 중독에 대비하면서 동시에 후작가 사람들 몰래 가명으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빙의 전에는 제발 고치라고 잔소리했던 신아의 완벽주의가 뽀뽀하고 싶어질 만큼 찬란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세계를 창조한 신(작가)의 친구답게 모든 투자에 성공했다.
내가 주식을 사들인 회사는 승승장구했고, 내가 주식을 팔아 치운 회사는 그대로 주욱 하락하기 시작했다.
내가 헐값에 사들인 부동산은 갑자기 황실의 주도하에 개발되기 시작해서 그 값이 몇 배나 뛰었고, 사교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의상실-에인시아와 디저트 가게-세사르를 위태로울 때 인수해서 그 가게들이 다시 정상에 우뚝 서는 걸 흐뭇하게 지켜보기도 했다.
물론, 내가 억만장자가 되었다고 해 봤자 아직 미성년자인 내가 곧바로 독립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법적으로는 미성년자의 개인 재산을 보호자가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지만, 재산을 성년이 될 때까지 억류하는 것은 가능했기 때문에 나는 내 이중생활이 들키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내 은닉 재산을 들키게 된다면, 분명 나를 죽이려고 할 테니까.’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은 보호자에게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흑흑. 내가 바로 제국 제일가는 억만장자인데, 왜 있는 돈을 쓰지를 못하니…….’
아, 눈물 좀 닦아야겠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돈을 굴리려면 저택 밖으로 자주 나돌아다녀야 했다. 그리고 당연히 혼자서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나를 도와주던 기적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셀루리아 후작의 보좌관 중 한 명인 빈센트 하르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