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박데기 영애의 반격을 조심하세요 (1화) (1/139)

1화.

1. 구박데기 영애가 재력을 숨김

“에리카.”

지금 나를 경멸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저 18살 소녀의 이름은, 카리에 르 셀루리아.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칙칙한 느낌이 나는 내 머리 색과 눈동자 색과는 달리, 그녀는 누가 봐도 잘 관리됐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탐스러운 허니 블론드와 푸르른 청공을 닮은 은청안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절벽에 겨우내 피어나는 꽃처럼 사랑스러운 아름다움까지 지니고 있는.

나와는 다른.

이 셀루리아 가문의 ‘진짜’ 아가씨였다.

“나는 너 따위가, 왜 아직까지도 이 저택에서 숨 쉬고 있는지 모르겠어.”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난 카리에가 찻잔을 쥔 채로 내 앞에 섰다. 나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카리에를 올려다보았다.

보이고 싶지 않아서 테이블 아래 숨긴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카, 카리에…….”

“감히 그 천한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카리에가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조륵, 내 머리 위로 뜨뜻미지근한 물이 흘러내렸다.

“거슬리니까.”

조르륵.

아주 약간만 기울인 찻잔에서는 찻물이 얇은 가닥으로 흘러내렸다.

조금씩, 조금씩 내 밀 빛 머리카락을 적신 찻물이 이내 이마와 관자놀이를 타고 턱 밑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

찻물이 눈가에도 흘러들어 와서 눈을 감았다. 끊임없이 졸졸 흐르는 찻물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별 볼 일 없는 너 따위가,”

“…….”

“감히 나를 불러?”

카리에가 나를 비웃었다. 잔뜩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찰싹 달라붙은 채 눈을 꼭 감고서 벌벌 떨고 있는 내 모습이 웃긴 모양이었다.

“야. 너는 절대로 내 사촌 언니 같은 게 아니야. 그냥 우리 가문의 수치일 뿐이지.”

“…….”

“대답 안 해?”

“……응.”

입술을 달싹이자 찻물이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씁쓰름한 맛이 가득 퍼졌다.

머리에 떨어지던 찻물이 끊겼다. 잔 안에 있던 차가 모두 바닥난 모양이었다.

아쉽다는 듯 빈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린 카리에는 이번에는 내 앞의 찻잔을 들고 내 머리 위로 바로 부어 버렸다.

촤악.

“…….”

잔뜩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을 미역처럼 덮었다. 카리에가 나를 보며 다시 킥킥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치워 냈다.

“반쪽짜리 주제에, 치우긴 어딜.”

머리카락을 밀어 내고 시야를 확보하자마자 다시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때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리 위에서 즐거운 듯한 카리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천한 너는 그 멍청한 꼴이 더 어울려.”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툭 뒤로 민 카리에는 손수건을 꺼내서 나와 닿은 손을 더럽다는 듯이 박박 닦으며 응접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나서도 한동안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이내 머리카락을 다시금 가다듬은 뒤 허리를 곧게 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옷이 엉망으로 젖어 있었다. 조금 더 시선을 내리자 카펫에도 찻물이 떨어져 있었다.

‘치우는 하인들이 미친 듯이 욕을 하겠네.’

또 천한 피가 섞여 있는 반쪽짜리가 우리 아기 천사 아가씨의 심기를 건드렸네 어쨌네 하겠지.

한동안 귀가 간지럽겠는걸.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그나마 멀쩡한 옷소매로 얼굴을 대충 닦아 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 밖으로 나가자, 응접실을 치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나를 보고는 대놓고 비웃었다. 몇몇은 저들끼리 쑥덕쑥덕 나를 안주 삼기도 했다.

“더러운 천민 놈 피가 흐르는 반쪽짜리 주제에.”

“아이 씨, 저거 치우려면 또 엄청 고생하겠네.”

“저 멍청한 꼬락서니 좀 봐 봐. 천민 놈 피는 어디 안 간다니까.”

나는 위축된 것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며 내 방으로 돌아갔다.

하인들 앞에서조차 대놓고 앞담 당하는 구박데기.

그것이 바로 나, 에리카 르 셀루리아였다.

내 방은 후작저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 4층의 골방이었는데, 나름 후작저 안이라 깔끔하기는 했지만 이 가문의 ‘진짜’ 아가씨인 카리에의 방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4층은 창고 방 하나와 안 쓰는 다락 하나, 내 방으로 쓰는 골방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나는 이 저택의 유일한 내 공간인 골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 X발…….”

문을 닫자마자, 나는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방금 전까지 짓고 있던 겁먹은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얼굴 가득 떠오른 표정은 짜증과 귀찮음이 반반 섞인 표정이었다.

“진심 언제 한번 날 잡고 콱 뒈지게 패고 싶다…….”

잔뜩 젖은 커틀(kirtle, 속옷인 슈미즈 위에 착용하는 의복)을 벗은 나는 슈미즈만 입은 채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화창한 날 곰팡이 피도록 맞아 보면 이런 쓸데없는 소모전은 그만두지 않을까.

“할 줄 아는 거라곤 머리 위로 차 뿌리는 거밖에 없는 꼬맹이 주제에.”

아, 추가.

천민의 피가 흐르는 나는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세뇌도 할 줄 안다.

“저게 무슨 아기 천사야.”

18살 아기 봤냐. 사람 세뇌하는 천사 봤냐고.

쯧쯧거리며 혀를 차는 동안 나는 얼추 다 씻었다.

뭐, 어차피 나에게 천민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해도, 자존감 후려치기 전법은 씨게 당했을 것이다.

후작 부부는 나를 뜻대로 움직이기 편한 마리오네트로 만들고자 했으니까.

‘후작의 여동생인 우리 엄마의 재산을 가로채고, 나를 결혼 장사에 팔아먹기 위해서는 내가 자아 없는 마리오네트인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그래서 후작 부부는 효과적인 정신적 학대를 위해 작년부터 내게 매일 레틸기스 즙을 섞은 물을 먹이고 있었다.

레틸기스란 이름의 과일로 만든 즙은 먹으면 점점 생각이 둔해지고 멍청해지는 효과가 있어서, 세뇌가 필요한 자들에게 무척이나 인기 있는 독약 중 하나였다.

나를 마리오네트로 만들고자 하는 후작 부부가 이 약을 참을 리 없지.

‘하지만 나는 해맞이풀과 달맞이풀 덕분에 이 세계의 모든 독극물에 면역이 있단 말씀.’

그게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미 진즉 머리가 텅 빈 마리오네트가 되고도 남았다.

나는 수건으로 최대한 머리에 있는 물기를 닦아 낸 뒤, 방 한구석에 딸려 있는 작은 옷장을 뒤졌다.

몰래 숨겨 놓은 여성용 하인 복장을 꺼낸 나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구시렁거렸다.

“내가 이딴 학대를 앞으로 2년이나 더 참고 있어야 하냐고. 그래도 하나뿐인 조카인데 미안하지도 않냐, 미친 자식들…….”

하얀색 앞치마까지 익숙하게 두른 나는 최대한 얼굴을 가리는 머리 스타일로 머리 모양을 바꾼 뒤, 성형 수준의 화장술로 인상을 전혀 다르게 했다.

코 주변에는 주근깨를 그리고 눈가에는 커다란 점도 찍은 뒤 도수 없는 안경까지 쓰자, 아까의 그 ‘가짜’는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하인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흠, 역시 내 변장은 완벽하다니까.”

고딩 시절, 친구들에게서 암암리에 전수받았던 화장술은 어디 가지 않았다.

내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방문 밑으로 기다리던 쪽지가 쏙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다가가 쪽지를 집어 들었다.

「준비 완료. 지금, 저택 후문.」

내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역시 빈센트. 착하면서도 유능한 사람이라 얼굴에 뽀뽀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쪽지를 주머니 안에 잘 숨긴 나는 입꼬리를 한껏 휘어 웃으며 문을 열었다.

원래 사람이 자주 올라오지 않는 4층은 역시 사람이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계단이 아닌, 4층에서 저택 후문으로 바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봄날의 환한 햇살이 내게로 한가득 드리웠다. 뺨에 닿아 오는 따뜻한 감촉에, 입가에 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가씨.”

그때, 바로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가에 그려져 있던 미소가 더 짙어졌다.

나는 빙글 몸을 돌렸다. 나를 부른 사람은, 하늘빛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내려 묶고 붉은 눈에는 안경을 쓴, 나의 하나뿐인 조력자였다.

셀루리아 후작의 보좌관, 빈센트 하르센.

“혹시라도 가문에서 아가씨를 찾을 경우, 제가 2시간까지는 시간을 벌어 보겠습니다. 외출과 귀환은 이 쪽지를 문지기에게 보여 주시면 원만할 겁니다.”

빈센트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준수한 외모로 가득 쏟아지는 햇살에 안 그래도 흰 피부가 더욱 희게 빛났다.

“늘 고마워요, 빈센트.”

쪽지를 받아 들며 내가 속삭이자, 움찔한 빈센트가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는 “아닙니다……”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하여간, 우리 보좌관님은 이상한 데서 작아진다니까. 속으로 키득거린 나는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저 이제 나가볼게요.”

* * *

세상에 이런 일이.

내가 ‘에리카’의 몸에 빙의한 직후,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보통 소설에 빙의된다면 몇 자라도 쓰인 소설에 빙의되지 않던가?

‘근데 난 이게 뭐야.’

믿을 수가 없어서 한참을 거울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거울에 비치는 사람은, 원래의 ‘내’가 아닌 밀 색 머리카락에 군청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외모의 여자였다.

그래도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지나가는 하인을 붙들고 한참을 물었다.

내가 정말로 ‘에리카 르 셀루리아’냐고. 이 가문이 정말로 ‘셀루리아 후작 가문’이냐고. 이 제국의 이름이 정말로 ‘이렌텔 제국’이냐고. 신교 교황의 이름이 정말로 ‘세인트 바네사’냐고.

결국 ‘드디어 정신이 돌아 버렸냐’는 경멸 어린 대꾸를 듣고서야, 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친구가 설정만 짜 놨던 소설, 《新 로미오와 줄리엣》의 조연에 빙의했다는 현실을.

* * *

《新 로미오와 줄리엣(이하 신.로.줄)》은 내 친구 이신아가 공부를 목적으로 쓰려고 했던 소설이었다.

“해수야, 나 설정 짜봤어. 들어봐.”

신아는 ‘신.로.줄’의 설정을 하나 짜기만 하면 곧장 내게로 달려와 미주알고주알 말해 주고는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영국 작가의 소설이니만큼 남주와 여주 가문의 갈등은 근세 유럽의 종교 갈등을 따와서 설정했다. 마법 같은 기타 판타지적 장치는 없을 예정이다. 등등.

신아는 완벽주의자였다. 고로, 뭔가를 하나 만들어 내기로 하면 설정을 완벽하게 짜 놓는 강박증이 있다는 소리였다.

가문 하나하나, 작중 배경인 이렌텔 제국의 대외 관계 하나하나, 지리적 요소 하나하나, 작중에 번창하는 사업까지 하나하나 짜 나가던 신아는, 결국 메인 스토리 부분에서는 남주와 여주의 첫 만남만 정해 놓고 나가떨어졌다.

물어보니, 정신이 고갈되고 피폐해져서 더 쓸 수가 없단다.

아니 그럴 거면 대체 왜 설정을 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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