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고 그러는 거겠지….”
목을 쭉 뺀 에이키가 통역했다.
“그게 아니라, 가만 안 두겠다는데.”
“뭘?”
그 순간 다시 유르트 밖으로 힘에 부친 고함이 절규처럼 울려 퍼졌다.
[스카리, 가만 안 둘 거야!]
에이키는 출산의 고통 속에서 대체 발레리아가 어떤 상태인지, 어떤 사고의 과정을 통해 저런 고함을 내지르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통역에 대한 약간의 책임감을 느끼며 말했다.
“형을 가만 안 두겠다는데….”
자리히와 다른 노즈윈드인들이 이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유르트를 보았다. 스카리는 잠시 에이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끝내 설익은 웃음을 머금었다.
발레리아는 투쟁적인 여자였다. 그 조그만 몸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큰 몸을 지닌 그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만큼 투지로 넘쳤다. 그는 그녀가 고함을 지를 때마다, 소리를 칠 때마다, 혹은 그에게 덤벼들 때마다 조금 더 큰 애착을 느꼈다.
[개새끼! 당장 들어오라고 해! 아흐윽!]
이번에는 알아들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발레리아는 가끔 화가 나면 그녀의 언어로 욕설을 뱉어 냈으니 익숙한 단어가 걸리는 것도 자연하다.
“어, 나 방금 알아들었어. 발레리가 욕한 거야, 저거 분명히 욕이었어.”
“개새끼였지?”
“개새끼였어.”
전사들은 두런거렸다. 스카리는 통역을 요구하듯 에이키를 바라보았다. 에이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산실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생명의 잉태를 허락받은 것이 오로지 여신과 같은 여자들이기 때문이다. 남자란 산실 안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불청객이요, 자칫 아이를 위해 찾아오는 여신을 떠나게 할 수 있는 부정을 일으킬 수 있는 이물이라 여겨졌다.
그의 형 스카리 역시 산모의 건강과 아이를 위해서라도 저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그럴 것이라면 말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에이키의 판단이었다.
“개새끼라는데. 몇 시간이나 이렇게 이어질지 모르겠네.”
일단 지금, 그의 형은 내색하지 않더라도 지금 적잖게 긴장 중이었다. 솔직히 에이키는 스카리가 이렇게 경직된 모습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무던한 듯 보였던 스카리의 안색도 처음보다 훨씬 색을 잃었고, 무릎에 올리고 있는 팔뚝에는 이미 핏대가 일어서 있었다. 솔직히 에이키는 저 안에서 산파 노릇을 하는 히바니와 고함과 비명을 주고받는 발레리아보다도 제 형이 더 위태롭게 느껴졌다.
얼마간 비명이 끊어졌다가, 다시 울리더니 무언가 와장창창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놀란 전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목을 뺐다. ‘싸움이라도 난 거냐?’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요란스러웠다.
스카리도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에이키가 그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형, 인내심은 이럴 때 발휘하라고 있는 거라고. 히바니가 잘하겠지.”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히바니도 거의 전쟁 통에서 함성을 지르는 목소리였다.
발레리아의 비명에, 이멜다의 큰 소리에, 히바니의 고함까지 겹치니 듣는 이들마저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자리히는 거의 귀를 막은 채로 안절부절못하고 서성거리다가 끝내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달아났다.
스카리는 최대한의 인내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그럴수록 의식조차 하지 못한 서슬이 일어 주위에 모여 있던 전사들의 숨이 대신 죽었다.
다섯 시간쯤 지나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비명이 멎었다. 비명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응애, 응애. 전쟁 통 같던 유르트 안에서 울리는 생명의 소리에 퀭한 얼굴로 기다리던 전사들이 반색하며 탄사를 뱉었다.
‘드디어.’
스카리는 그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켜며 일어섰다. 어느새 졸고 있던 에이키도 아기 울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태어났어.”
이 세상에 또 다른 생명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스카리는 당장이라도 유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갈 듯 문발 앞까지 다가갔다가 뚝 멈춰 섰다.
산파가 태어난 아기의 마를 쫓는 의식을 마치고, 아이를 데리고 나오기 전까지 그는 들어갈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문발을 걷어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이겨 내는 것이 지금 그가 겪는 난제였다.
얼마간 문발 안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소란과 목소리를 듣던 스카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내질렀다.
“히바니!”
히바니가 아이를 데리고 나오기를 기다리던 이들만 깜짝 놀랄 따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르트의 문이 걷히며 아기를 포대에 안은 히바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망할 새끼가, 참을성이 없어!”
스카리는 히바니의 품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아기는 작았고, 핏기도 가시지 않은 채였다. 눈은 뜨지도 못한 채였으나 오밀조밀하고 뚜렷한 이목구비만큼은 분명하게 보였다. 스카리는 그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켜며 주먹을 쥐었다.
히바니가 미동을 멈춘 그를 향해 놀리듯 말했다.
“이놈아, 네 새끼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들끓는 듯했다. 다섯 시간이 넘게 이어진 인내 끝에, 격랑이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그가 바랐던 여자가 낳은 그의 자식이었다. 아기에 관심을 가진 전사들이 하나둘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와, 태어났어. 태어났어. 은발이네.”
조금 떨어진 곳으로 피신해 있던 자리히가 마치 제 일인 양 다급히 다가오며 물었다.
“할머니, 아들이야, 딸이야?”
“아드….”
히바니가 대답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포대기에 안긴 아기를 내려다보던 스카리가 히바니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유르트의 문발을 걷어 내는 손길에는 주저가 없었고, 걸음은 폭이 넓었다.
놀란 히바니가 고함을 내질렀다.
“아직은 안 돼! 나와 이 녀석아! 당장 나오지 못해!”
히바니가 바락바락 소리쳤으나 스카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전쟁 통이었던 것이 거짓이 아닌 듯, 산실 안에는 피 내음과 약초 내음이 뒤엉켜 있었다. 겹겹의 가죽으로 덮은 침상에는 녹초가 되어 이멜다와 하라킬라의 보필을 받는 발레리아가 보였다. 높게 쌓은 베갯머리에 축 머리를 대고 누워 그가 있는 쪽을 본다. 창백한 얼굴은 땀투성이였고, 눈빛에는 맥이 없었다.
스카리의 가슴은 크게 죄어들었고, 걸음은 더 빨라졌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그를 발견한 하라킬라가 말했다.
“스카리, 아직 끝이 나지 않았어. 지금은 발레리아를 보러 들어오면 안….”
“스카리, 이리 와.”
발레리아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뻗었다. 스카리는 홀린 듯 침상 위로 무릎을 짚고 올라가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정신없이 그녀의 땀에 젖은 이마와 뺨에 입 맞추었다. 그리 한 후에야 제가 얼마나 긴장하였는지, 얼마나 지독한 염려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의 발레리아.”
그는 꽉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깊은 숨을 뱉어 냈다.
그녀는 오늘 그들의 아이를 낳았다. 그에게 생에 첫 아이를 안겨 주었다. 그는 먹먹한 감격마저 느꼈다.
하라킬라는 관습마저 저버리고 들어온 스카리를 내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유르트 입구에 선 히바니와 눈을 마주치고는 일단 물러났다.
힘없이 스카리에게 안겨 있던 발레리아가 가물가물하게 감기는 눈꺼풀을 열며 미소 지었다.
“아들이라는데…. 봤어?”
아랫입술을 꾹 당겨 문 스카리가 등을 구부려 그녀의 뺨에 콧등을 비볐다.
“그래.”
그의 목소리는 잠기고 말았다. 발레리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녀는 스카리의 가슴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산고에 시달릴 때는 제가 이토록 고통받는 것을 내버려 두는(그게 이자들의 관습 때문이라 할지라도) 스카리가 원망스럽고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는데, 지나고 나니 까맣게 잊혔다.
이 단단한 품에 안기니 노고마저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너희 전통들 중에는,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많아.”
발레리아가 투정하듯 중얼거리자 스카리가 작은 웃음을 흘리며 더욱 꽉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는 게 있나?”
스카리는 한 번 더 물었다.
“바라는 것.”
지금 그는 무엇이든 그녀에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젖힌 발레리아가 따라 물었다.
“원하는 거?”
“그래, 뭐든 말해라.”
곰곰이 생각하던 발레리아가 막 무어라 입술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전사들에게 아기를 내보이던 히바니가 되돌아왔다.
히바니는 발레리아의 옆에 바짝 붙어 제 새끼에게는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은 스카리를 향해 혀를 찼다.
“부정 타게 어딜 감히 산실로 뛰어 들어와? 뛰어 들어오기는… 늦바람에 정신을 못 차려서 그냥.”
“히바니, 아기 보여 줘.”
작게 웃은 발레리아가 투덜거리는 히바니를 향해 힘없이 양팔을 벌렸다. 못마땅한 눈길로 끝끝내 스카리를 쏘아본 히바니가 그녀에게 아기를 안겼다. 갓 태어난 아기를 데리고 나가 사람들에게 무사 탄생을 소개하는 것은 이들의 전통이라 하여, 발레리아도 처음으로 안는 아기였다.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작은 몸이 양팔에 감기자 왈칵 눈물이 났다. 스카리는 그녀의 머리를 한 팔로 끌어안은 채로 눈만 내려 그들의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몇 가닥의 은발이 두드러진 쪼글쪼글한 아기였다.
가슴 속으로 충만함이 차올랐다. 너무나 신비로웠다.
“발레리아는?”
“괜찮아? 발레리아, 괜찮아?”
유르트의 문밖에서, 선뜻 산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이들이 목을 이리저리 빼며 안을 살폈다. 그중에는 게슴츠레 눈을 뜬 자리히도 있었다.
고개를 든 발레리아는 그들을 발견하고는 끝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나가! 부정 타니까 나가!’ 히바니가 불붙인 나뭇가지를 흔들며 그들을 쫓았다.
스카리에게 머리를 기댄 발레리아는 잠자코 그쪽을 바라보았다. 찬란히 비쳐 드는 석양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풍광,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드는 모습. 기이한 주술적인 상징들과 그녀로서는 아직 그 기원을 알지 못하는 이국의 물건들 사이에 앉은 자신을 되감았다.
이곳은 고원이고, 이곳은 사막이다.
오래전 로리아의 세 번째 공주로 태어난 발레리아는 자신이 어느 멋진 나라의 왕자나 공작쯤 되는 사람과 결혼할 줄 알았다. 그리한다면 자연히 그녀의 자식도 왕이나 공작쯤 될 터이니, 점잖고, 예의 바르고, 훌륭한 사람으로 키울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이 야만의 세계에 떨어져, 화려한 캐노피도 우아한 장식품도 하나 없는 투박한 유르트에서 첫 아이를 낳았다. 왕이나 공작의 아내가 되지 못한 그녀의 아이는 이제 경쟁을 해야 할 것이고, 어쩌면 고된 삶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세상에서는 누릴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자유와 행복을 누릴 것이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그녀를 의아한 듯 내려다보던 스카리가 물었다.
“괜찮나?”
“아틸라도, 나도 괜찮아.”
발레리아는 부드럽게 아이를 당겨 안았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고원의 핏줄과 저원의 핏줄을 한 몸에 안고 태어난 첫 번째 아이의 이름은 아틸라다.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발레리아는 신비하고도 경이로운 순간에 잠겨, 한참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어딘가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흔적이 있고, 어딘가에는 고국의 흔적이 엿보이는 듯도 하다.
말끄러미 고개를 든 발레리아가 스카리를 쳐다보았다. 스카리가 그녀 쪽으로 허리를 기울였다. 발레리아가 가까워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막에 길을 만들자.”
“…….”
“내가 너를 만나게 해 준 저 사막, 아틸라를 만나게 해 준 사막에 길을 만들자. 이 아이가, 온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거야. 저 아래에도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 주는 거야. 나는 그러고 싶어. 스카리.”
발레리아 살레르노스, 그녀는 전(前) 로리아의 세 번째 공주다. 가끔 외교 대사의 노릇을 겸하는.
비스듬히 고개를 내린 스카리가 발레리아를 바라보았다.
“싫어?”
아무렇지도 않은 채 뱉은 말이었지만 발레리아는 아주 조금 긴장했다.
노즈윈드인들은 기본적으로 저원에는 관심이 없고, 이미 소수로나마 자유자재로 저원을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사막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제 바람을 곡해하여 듣는다면 어찌 설명을 해야 할까…. 잠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발레리아.”
목 안 깊이 울리는 웃음소리가 따스하게 콧등 위로 떨어졌다.
땀에 젖은 그녀의 이마 위로, 다시 뺨으로, 크고 투박한 손이 드물게도 섬세하게 아기를 안은 그녀의 팔을 감쌌다.
“네가 원한다면.”
스카리는 그녀가 고국에서 만났던 신사들과는 완벽하게 거리가 먼 사람이다. 점잖지도, 몸에 밴 배려도 찾기 힘든 야만인. 하지만 가끔은 그래서 더 날것 그대로의 애정을 느낄 때가 있다.
“세상을 다 달래도.”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 진심일 것이다.
그녀는 문득, 갑작스럽게 시작된 산통으로 인해 잊고 있던 편지를 떠올렸다. 쓰다 말고 내팽개쳐 버린 편지의 말미에 적어 넣을 구절이 악상처럼 떠오른다.
‘얘, 샤리네. 이제 왕자나 왕은 시시해.’
***
이듬해, 고원과 저원을 잇는 사막의 길이 열렸다. 고원인들은 저원인들에게 그들이 사막을 오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때로는 기꺼이 함께했다. 단절되었던 고원인과 저원인들의 교류의 서막이었다.
로리아의 셋째 공주 발레리아 살레르노스의 외교는 그리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으로 기록되었다.
***
…이제들 아셨습니까? 노즈윈드가 어떤 나라인지. 우리의 이웃 나라, 로리아의 셋째 공주님이 그 무시무시하고 미개한 곳에서 얼마나 특별한 결혼 생활을 하고 계신지도요? 듣자 하니 그 후에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는데, 그다음 어찌 되었냐면, 음… 대충, 그리하여 고원의 야만인에게 시집간 로리아의 공주님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
아니, 거, 내가 너무 성의가 없다니. 보십시오, 벌써 한밤중입니다. 사랑에 빠져 잠 못 이루는 공주님의 이야기도 좋지만, 우리는 이제 잘 시간이지 않습니까? 자자, 오늘은 이쯤 하십시다.
다들 잘 자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