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흐으, 으!”
혀로 그녀의 질구를 쓸어 올린 스카리는 숨이 넘어갈 듯 헐떡대는 발레리아를 눈만 올려 떠 바라본 후 입술을 뗐다.
“생각보다 즐거운데.”
발레리아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상기된 얼굴에는 아직 가시지 않은 흥분과 절정의 여운이 그득했다. 좋았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으.”
오르내리는 그녀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쓸어 쥔 스카리가 서서히 몸을 올려 그녀의 위로 엎드렸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속삭였다.
“지금은 확실히 술이 깬 얼굴이군.”
바로 콧등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발레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스카리의 허리를 더듬었다. 떨리는 그녀의 팔을 느낀 스카리는 두말 않고 그의 성기를 꺼냈다. 그는 아까부터 발기한 채였고, 인내 끝에 이미 그 선단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제는 되나?”
놀리듯 묻는 그를 올려다보던 발레리아가 양팔을 뻗어 그의 목을 휘감았다. 스카리는 굵직한 선단 끝을 조금 전 그가 물고 빨아 축축해진 그녀의 다리 사이에 맞추고는, 서서히 그녀에게로 무게를 실었다.
“아….”
굵직한 선단의 끝이 파고드는 묵직한 감각에 발레리아는 숨을 얕게 들이켰다. 어느 순간 그의 몸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듯 그녀를 찔러 왔다. 몸이 열렸다.
“흑.”
스카리는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바짝 그녀에게 몸을 포갰다. 자연스럽게 그를 삼키는 따뜻한 그녀의 내벽에 몸을 맡겼다. 오늘의 그녀는 평소보다 더 흥분하였는지 삽입의 과정이 수월했다.
사방에서 거근을 조여 대는 자극이 미간까지 타고 올라왔다. 살짝 몸을 기울인 스카리는 느릿하게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숨을 할딱대는 발레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좁은 내벽은 언제나 그를 거부하는 것처럼 열리기를 거부하다가도, 어느 순간 갈구하듯 들러붙는다. 그 간극이 언제나 그에게 흥분을 안겨 주었다.
살짝 빼냈다가, 다시 밀어 넣었다가, 조금 더 빼냈다가, 조금 더 깊이 찔러 넣는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고조되는 흥분이 팔뚝 위로 핏줄을 일으켰다.
“아, 흐, 으응.”
이미 한 차례의 절정 끝에 시작된 삽입에 발레리아는 어지러운 듯 고개를 젖혔다. 하얀 목이 길게 드러났다.
“아흑.”
그녀의 쭉 뻗은 목덜미를 이로 긁어 내린 스카리가 끓는 신음을 뱉어 내며 허리를 크게 빼냈다가, 거세게 짓쳐 넣었다.
“아!”
배 속을 찔러 올리는 우악스러운 힘에 발레리아는 그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 뜨겁고 우둘투둘한 내벽이 억세게 그를 움켰다. 단단하게 일어선 그의 것은 그녀의 살점에 비벼지는 것만으로도 사정감을 일으켰다.
열흘 만의 관계였고, 그는 더 이상 인내하고 싶지 않았다.
스카리는 그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 허리를 잡아 누르며 서서히 추삽질의 속도를 높여 갔다. 푹푹 찔러 넣던 것은, 이내 퍽퍽 쳐올리는 형태가 되었다.
“아, 흐, 으, 아!”
그의 굵직한 성기에 꿰이듯 찔린 그녀의 몸이 들썩였다. 배 속을 꽉 채웠다가 빠져나가는 그의 몸짓은 난폭하게까지 느껴졌다.
“발레리아, 아.”
쉰 목소리로 뇌까린 스카리는 점점 더 빠르게 몸을 치댔다. 철썩철썩. 젖은 살 부딪치는 소리도 함께 빨라졌다. 허벅지 안쪽이 벌게지도록 바짝 몸을 처박는 그를 느끼며 발레리아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흐느꼈다.
“흐, 으, 아흑! 스카리,”
너무 깊었다. 깊숙이까지 짓이겨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카리는 멈추지 않았고, 끝내 발레리아는 헐떡대며 스카리의 목에 매달렸다.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철썩거리며 부딪친 몸이 들썩댔다. 스카리는 한 팔로 그녀의 등을 안아 받친 채 거침없이, 빠르게 그녀의 질구를 찔러 올렸다.
짓이길 듯 내벽을 파고 들어온 그의 성기는 긁어내듯 빠져나가는 허전함을 인지하기도 전에 다시 짓쳐 들어왔다.
그 과정이 반복되자 긴장으로 수축되었던 내벽은 반복된 마찰에 예민하게 고조되어 애액만 줄줄 흘려 댔고, 어느새 더 깊숙이까지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이완되었다.
“아흑, 으, 응!”
한 차례의 가라앉았던 열기가 아랫배 속에서 뭉근하게 피어오른다. 등골이 오싹할 만큼의 쾌감이었다. 절정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그 삽입 과정만으로도 온몸이 달았다.
발레리아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고양되는 쾌감에 발끝을 오므리며,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로 스스로의 음핵을 더듬었다.
“스카리, 아, 흐, 으응, 아.”
흠뻑 젖은 체모 아래의 음핵이 비벼지는 것과 그가 찔러 올리는 배부른 쾌락이 겹쳐지는 순간에는 숨이 막혔다.
“흑, 으! 아흑!”
그의 성기에 강제로 열린 질구는 끝없이 질컥대며 부딪쳤다. 질구에서 흘러나온 액과 타액이 뒤엉켜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골 아래로 흘러내렸다.
발레리아는 들썩이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그의 턱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스카리는 정신없이 혀로 그녀의 입술을 빨고, 입 안의 혀를 쫓으며 몸을 부딪쳐 왔다.
스카리의 몸짓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도 강하게 치대는 통에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까지는 마치 장난이었단 듯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 아, 아흐, 아!”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를 다잡기도 전이었다. 손가락 새새로 걸리는 그의 은발을 움켜쥔 발레리아가 비명 같은 신음을 뱉어 내며 고개를 젖힌 순간, 스카리가 거세게 몸을 밀어 넣었다.
“읏.”
“아흑!”
그의 성기가 뱃가죽을 눌러 올릴 만큼 깊숙이 처박혔을 때 그의 호흡이 달라졌다. 거친 숨소리가 아득한 쾌락에 잠긴 그녀의 얼굴 위를 맴돌았다. 그르렁거리듯 숨을 들이켠 스카리가 한 번 세게 허리를 뺐다가 처박았다. 배 속 깊숙이에 삼켜진 그의 성기가 꺼덕대더니, 이내 뜨거운 뭔가를 뱉어 냈다. 울컥울컥, 쏟아져 들어오는 욕정이 뜨거웠다.
발레리아는 바르르 몸을 떨며 제 위로 쓰러져 오는 스카리의 무게를 느꼈다. 그는 한 팔로 그녀의 어깨 옆 바닥을 짚고 기댔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빼냈다. 그의 커다란 물건이 빠져나가자 배 속이 텅 빈 듯 갑자기 허전해졌다. 다리 안쪽으로 흘러내리는 그의 것이 느껴진다.
발레리아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포만감을 느끼며 그의 가슴팍을 끌어안았다. 스카리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마주 안고는, 흐른 애액으로 뒤범벅된 엉덩이를 주물렀다.
얕게 숨을 몰아쉬던 발레리아가 고개를 젖혀 그를 보았다.
애정으로 가득한 청회색 눈이 그녀에게 머문다. 좋았다거나, 좋다거나, 뭐 그런 이야기를 할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들은 대화보다 대화하지 않는 것이 더 편안한 연인이었다. 아니, 오늘부터는 부부라 해야 할 것이다.
늦은 밤, 저 밖은 성혼을 축하하는 잔치가 한창이었다.
***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깨고 나니 스카리의 품이었으며, 정오였다. 약간의 숙취에 시달리며 이불 속에서 꿈지럭대던 그녀는 스카리의 한마디에 일어나야 했다.
“이제 출발 시간이군.”
대충 차림을 마친 발레리아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작별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신방 앞에서는 파라윈 사람들이 떼로 몰려 그들에게 환호인지 야유인지 모를 소릴 냈다. 스카리가 별 신경 안 쓰는 걸 보면 저 또한 이자들의 전통인 모양인데, 왠지 이상하게 오늘은 부끄러웠다.
스카리의 옆에 바짝 붙어선 발레리아는 파라윈의 길목으로 나갔다.
수십 명의 전사들과 로리아인들이 대기하고 있다. 전사들은 스카리의 명령에 따라 사막을 건너 두 달여의 여정을 시작할 자들이다.
전사들이 말과 수레에 싣는 물건들은 공주를 아내로 들인 대가로 스카리가 로리아에 보낸다는 물건들이었다. 그런데 그 물건들이 당황스럽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막대한 황금이었다. 미리 뭔가 갈 거라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맙소사.’
황금으로 만든 주전자, 황금으로 만든 팔찌, 황금 목걸이, 황금 조각상, 황금 접시, 황금 잔, 황금…. 발레리아는 대체 이 많은 것들을 노즈윈드인들이 다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인가 싶었다. 그리고 평소에는 왜 사용하지 않는지도.
“우리가 가진 일부지.”
믿기지 않아 수레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머리 위에 스카리의 커다란 손이 얹혔다.
사막 저편에서는 금붙이를 매우 귀하게 여긴다는데, 노즈윈드인들에게는 실생활에 쓸 일이 없어 조금 떨어진 언덕의 비밀 공간에 모조리 쌓아 두고 살고 있다. 그들이 금붙이를 꺼내는 건 유목 상인들과 특정한 물건을 교환할 때가 전부였다.
다만 이번에 그녀와 혼인하게 되었으니, 귀한 여자를 내준 그들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그들의 전통이었다.
오늘 출발할 저 수레들은 전사들과 함께 내려가, 오래지 않아 사막 저편의 더운 땅에 이를 터다. 그녀의 고향, 로리아에.
“스카리, 확인해 봐.”
저 앞에서 마그리나가 소리쳤다. 스카리는 그녀를 둔 채로 어슬렁어슬렁 수레 쪽으로 걸어갔다. 발레리아는 말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발레리아에게도 할 일은 있었다.
미리 와 있던 이멜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공주님, 나오셨어요?]
오늘 전사들과 함께 로리아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는 래리 경과 다른 기사들과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좋은 아침이야.]
[이제 정오예요.]
작게 웃은 발레리아가 이멜다의 뒤편에 선 래리 경과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진작부터 나와 있던 래리 경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로리아식 예복을 입고, 그 위에 얇은 가죽 코트를 걸치고 있다. 어제 마신 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울기라도 한 건지 코끝이 발갰다. 말들을 세워 둔 기사들은 언제나처럼 가벼운 가죽 갑옷에 바지만 걸친 편한 차림이었다.
너울거리는 먹먹함을 애써 뒤로하고, 발레리아는 그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래리 경, 고생했어요. 기사분들도.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래리 경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투로 물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요.]
알베르토는 기사들과 래리 경이 그녀의 곁에 남아 있기를 바랐으나, 발레리아가 거부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행복할 방법을 찾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지 않은가. 평생 그녀와 함께할 것이라 습관처럼 말하던 이멜다야 다르다고 해도.
기사들은 차례차례 발레리아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공주님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공주님 덕분에 여기까지 와서 즐거운 경험을 하고 가게 됐습니다. 잘 해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가지만,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이번에 돌아가는 길에는, 오가는 길을 외워 볼 테니까요.]
그러고는 차례로 세워 둔 말로 돌아가 마저 떠날 준비를 한다. 남은 건 마르틴 경뿐이다. 마르틴 경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약간 우울한 듯한 이멜다의 얼굴을 흘끔흘끔 보았다.
‘왜 이러나.’ 하는데, 마르틴 경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저… 공주님.]
[예.]
[생각을 해 봤는데… 저는 여기 좀 더 있다 가도 될 것 같기도 하고….]
발레리아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고, 이멜다도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마르틴 경을 보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마르틴 경이 중언부언 덧붙였다.
[아니, 저, 그래도 두 여성분만 남기고 가는 건 기사도에 맞지도 않고, 아니, 뭐, 딱히 다른 생각이 있어서는 아니지만. 아니라도, 뭐, 말동무라도 필요할 수도 있고, 뭐, 그래도 사내가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마르틴 경은 힐끔힐끔 이멜다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이멜다의 얼굴도 발개졌다.
‘어머, 이거 뭐야?’
발레리아는 노도처럼 찾아든 급진전을 직감하고 멈칫했다. 빠져 줘야 하나 싶을 정도로 뜨거운 눈빛이었다. 어쨌거나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지라 기쁘게 답했다.
[원하시는 만큼 머물다 가도 괜찮아요. 나도 이멜다도 기쁠 거예요.]
마르틴 경은 뭐가 빠진 사람처럼 히죽 웃더니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나 안 가! 너희들끼리 가라!]
그러자 이런 대답들이 돌아온다. ‘어, 결국 결정하셨습니까?’, ‘형, 고백했어?’, ‘야, 조용히 해!’ 듣는 귀가 민망할 일이다.
발레리아는 전 공주답게 모른 체해 주었다. 그러고는 마지막까지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하는 래리 경을 눈짓으로 떠밀었다.
[…공주님.]
[걱정 말고 가세요.]
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멜다가 냉큼 끼어들었다.
[맞아요, 허구한 날 달아날 생각만 했으면서, 이제 와서 왜 이렇게 충성스러운 척을 하세요?]
[그런 척이 아니라, 정말로… 정이라도 들었는지, 공주님께서 혼자 괜찮으실지….]
다람쥐처럼 양 볼을 부풀리고 울먹울먹하던 래리 경은 끝내 발레리아의 손을 덥석 잡더니 흐느꼈다.
[공주님,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지요. 제가, 흐윽, 제가 모자란 놈이라서, 제가 모자라서…! 이게 다 펜스 그자 때문에…!]
발레리아는 진심을 다해 그를 위로해 주었다.
[처음에는 고생하긴 했지만 나만 한 것도 아닌걸요. 덕분에 내가 빨리 이자들의 말을 익힌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고마워요. 달아나지 않고 함께 있어 준 것도. 돌아가면 모두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래리 경은 울음 범벅된 얼굴을 소매로 훔쳐 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전사들이 선물을 실은 수레로 다가가 엉금엉금 올라앉았다. 래리 경은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얼마 후, 노즈윈드의 전사들이 기사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피리를 불었다. 출발의 신호였다.
기사들은 우렁차게 그녀와 이멜다를 향해 ‘건강하세요! 공주님!’, ‘마르틴 경, 공주님과 이멜다 양을 잘 지키십시오!’ 하며 소리쳤고, 래리 경은 끝내 통곡을 하며 ‘공주니이이임, 흐으윽, 공주니이이임…! 만수무강하십시오…!’ 소리와 함께 수레에 실려 멀어졌다.
돌아보지 않는 노즈윈드인 전사들과 달리, 기사들은 몇 번이나 뒤돌아 그들을 보았다. 뒤에 남기고 가는 동향인이 안타까운지, 아니면 그들도 이 땅에 아쉬운 추억이 생긴 것인지.
이 바람 좋은 정오, 점처럼 멀어져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한참 그렇게 서 있던 발레리아는 그들이 꽤 멀어졌을 때 충동적으로 내달렸다. 스무 걸음, 평원의 경계까지 달려가 두 손을 나팔처럼 모아 소리쳤다.
[다들…! 무사히 조심히 돌아가요! 알베르토 폐하께도, 기오르지아한테도, 언니들한테도 그리고, 그리고 숙부님한테도 고맙다고 전해 줘요!]
저 멀리서 응답하듯 세차게 깃발이 흔들렸다.
그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발레리아는 돌아섰다. 그녀의 왼쪽 앞에는 발간 얼굴로 서로 아웅다웅하는 이멜다와 마르틴 경이 보였고, 조금 더 떨어진 우측에서는 전사들이 떠난 후의 뒷마무리로 한창인 사람들 사이에 선 스카리가 보였다. 커다란 상자에 걸터 기댄 스카리가 빤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발레리아는 주저 없이 스카리 쪽으로 향했다.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은 스카리가 손짓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스카리의 등 뒤에 있는 상자들은 전부 비어 있었다. 스카리가 금으로 세공한 굵은 팔찌를 그녀의 손목에 끼워 주었다.
“네게 어울리는군.”
발레리아는 가만히 제 손목에 감기는 차가운 무게감을 음미했다.
“슬픈가?”
그가 물었다.
발레리아는 고개를 들고 다시 한번 고원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음.’
함께했던 사람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낸 오늘, 허전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로리아는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문명의 나라였다. 그녀는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공주는 시작될 모험이 두렵지 않았다. 지금 제 앞에 거석처럼 선 이 남자를 낳은 이 세계는 새로 배워 나갈 곳이다.
발레리아는 손을 뻗어 스카리의 턱을 매만졌다. 야만의 상징 같은 턱 아래의 문신이 드러났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은발 사이로, 겨울 하늘 같은 눈동자가 잔잔히 빛난다.
“나도 이런 거 할까?”
툭 뱉어진 발레리아의 물음에 스카리가 살짝 턱을 당겼다. 그러고는 웃는다. 발레리아도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이유 없는 낙천주의자가 아니다. 알고 있다. 앞으로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았다. 이자들의 말을 더 능숙하게 익히고, 이들의 삶을 배우고, 또 반대로 그녀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세상의 법칙이나 상식 같은 것을 조금씩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사실 세 번째가 그녀에게는 가장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말수 많지 않은 멋지고 잘생기고 그러면서도 사랑스럽기까지 한 이 남자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다.
발레리아 살레르노스는 결혼 장사로 연명해 온 너도밤나무와 포도주가 유명한 소왕국의 당돌한 셋째 공주다. ‘살레르노스’란 도토리처럼 대륙 어디에나 퍼져, 어느 땅에나 뿌리내릴 수 있는 이들의 다른 이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자.”
그녀는 굳은살과 상처를 훈장처럼 새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꼈다. 노즈윈드인들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인사한다. 모든 것이 순리처럼 느껴졌다. 저 앞에는 작은 횃불을 들고 다니는 그리카가 팔을 흔들어 인사한다.
빤히 그쪽을 보던 발레리아는 문득 생각했다.
‘아, 그러면 나 개종도 해야 하나?’
없는 신앙까지 끌어모을 생각을 하니 골치가 조금 아프다. 하지만 그녀는 곧 발상을 바꾸었다. 재미있을지도 모른다고. 그의 팔에 매달려 걷던 발레리아가 말했다.
“스카리.”
스카리가 말해 보란 듯 턱짓한다.
“[사랑해] 해 봐.”
“……?”
“일단 해 봐.”
스카리는 걸음을 멈추고는 슬쩍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의아쩍다는 내색이다. 햇살이 비치면 은회색으로 빛나는 지독하게 섹시한 속눈썹을 홀린 듯 올려다보던 발레리아가 다시 채근했다.
“해 봐.”
“무슨 의미지? 들어 보고 결정하지.”
“좋은 거. 내가 듣고 싶은 말.”
발레리아가 가볍게 앞질러 걸으며 고집을 부리자, 스카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멈추었던 걸음을 재개했다. 고민이 되는 내색이다. 하기야, 일생 해 본 적 없는 외국어가 그에게 어색하기는 할 것이다. 쑥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한참 생각하는 듯하던 그가 툭 뱉듯 말했다.
“자랑에?”
아… 귀엽기는 하지만 발음 때문에 안 되겠네. 조금 더 나중을 노려야겠다. 발레리아는 자지러질 듯 웃으며 주저앉았다. 찡그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스카리가 번쩍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래서 무슨 뜻이지?”
키득대며 그의 목을 끌어안은 발레리아가 속삭였다.
“사랑해.”
걸음을 멈춘 스카리가 고개를 돌려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발레리아는 장난스럽게 쪽, 하고 그의 단단한 턱에 입 맞추었다. 스카리의 입술이 서서히 호선을 그린다. 스카리는 몇 걸음 걷다가 설핏 웃고, 다시 몇 걸음 걷다가 그녀를 돌아보고 다시 픽 웃었다. 겹친 그림자가 발밑을 따랐다.
아, 생각해 보면 이 사람에게도 가르칠 것이 많았다. 정말로.
***
한 달 보름 후, 발레리아 살레르노스가 노즈윈드인과 혼인하여 그들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혼인하는 여자에게 재물을 보내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라고.
언제나 사막 남쪽의 나라들을 약탈해 왔던 자들이 보내온 첫 번째 호의는, 당황스럽게도 한때 사막 국경 왕국들이 그들에게 약탈당했던 수많은 보물들이었다.
소식을 들은 주변국들로부터 ‘우리 국보를 반환해라!’ 하는 요구가 빗발쳐, 로리아의 왕실은 또 한참 승강이를 벌이며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고 한다.
‘배은망덕한 노즈윈드인들!’ 그건 한동안 로리아의 유행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