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전해 들었던 내용에 의하면, 여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히바니가 내민 나뭇가지를 건네받은 발레리아는 연기를 피해 슬쩍 목을 빼고 미리 배운 대로 그 불길에 맹세했다.
“나, 발레리아. 나의 신랑 스카리와 세상의 끝까지.”
정해진 말을 뱉고 나니 그 또한 낯간지러웠다. 세상의 끝까지라니. 영원히 사랑하겠다거나 그런 서약도 있을 텐데, 어딘지 비장하게 느껴졌다. 쑥스러워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스카리가 나뭇가지를 건네받았다.
“발레리아, 나의 신부와 세상의 모든 불이 꺼질 때까지.”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설명하기 어려운 무게감이 있어 의미가 더 크게 느껴졌다. 단순히 식순에 따른 절차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데도 마냥 설레었다.
그다음은 첫 사냥물의 교환식이었다.
“자, 그럼! 교환!”
히바니의 성마른 목소리가 울리자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스카리의 등 뒤에 서 있던 겹겹의 전통 의상을 입은 나이 든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의 키보다 더 큰 늑대 가죽을 어깨에 걸쳐 주었다.
가뜩이나 묵직한 옷에 짓눌려 있던 어깨가 훅 내려앉았다.
‘아.’
이자들의 성혼식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라고 한다. 사실 이것 때문에 작년 12월에 청혼을 받은 그녀가 그와 석 달이 지난 오늘에서야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 단출하고, 크게 준비할 거리가 없어 보이는 이런 마을 잔치 같은 결혼 준비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게 아니다.
숙부가 슬며시 사과의 뜻으로 보낸 편지의 내용처럼, 이자들에게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어릴 때 처음으로 사냥한 사냥감을 아내나 남편이 될 상대에게 건네주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고원의 전사가 되었음을 증거하는 첫 사냥감은 가죽을 벗겨 보관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첫 번째 사냥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는데, 성혼식에서 주고받는 첫 사냥감은 평생 사람들 사이에 이야깃거리가 된다고 했다.
혼인할 때 예물 반지가 얼마나 큰 보석을 달고 있는지, 얼마나 비싸고 무거운지를 두고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까?
당연히 그 점은 발레리아에게 문제가 되었다. 그녀는 사냥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어릴 때 부왕과 숙부님과 대신들의 사냥을 구경이나 다닌 정도? 실제로 뭔가를 잡았었다 해도 보관해 이곳까지 가져오지 않았으니 난처했던 것이다.
그와 ‘진짜로’ 혼인을 약속하고 난 후 발레리아는 에이키와 히바니를 통해 앞으로 그녀의 삶에 대해 경고를 듣기도 했는데, 그녀가 노즈윈드인들과 발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히바니는 ‘스카리 같은 놈을 차지하고 싶다면 제대로 사냥해!’ 하며 그녀를 떠밀었고, 에이키도 ‘뭐… 전통이라서.’ 하는 태도였다. 난감한 발레리아의 상황을 전해 들은 그녀의 충직한 기사들이 ‘공주님, 저희가 몰래 잡아 올까요?’ 하고 편법을 제안했지만 그건 발레리아가 거절했다.
기사들을 시켰다는 사실을 들켰다가는 더 민망하고 곤란해질 것 같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기사들이 잡아 온 것을 건네면 스카리가 그녀의 예물이 아니라 기사들의 예물을 받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녀의 반응을 기대하듯 보는 스카리의 눈빛에 괜한 오기가 들기도 했다.
“나, 할 수 있어.”
그래서 혼인을 미루고 석 달을 기다렸다. 눈이 녹고, 동면 중인 짐승들이 깨어나는 시기까지.
두 달여간 사냥하는 법, 활 쏘는 법, 칼을 드는 법을 배운 발레리아는 지난 보름, 처음으로 사냥에 나섰고 성공은 했다.
성공은 했는데….
눈을 굴리던 발레리아가 손짓하자, 그녀의 뒤에서 그녀의 예물을 가지고 기다리던 칼루치가 다가왔다. 웃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의 칼루치가 스카리의 어깨 위에 자그마한 갈색 토끼 가죽을 얹어 주었다.
“네게도 어울리네. 이런 진귀한 혼인식이라니.”
큰 토끼도 아니고, 정말 작은 토끼였다.
발레리아의 첫 사냥은 눈먼 새끼 토끼가 멍청하게 저 혼자 덫에 빠진 후에야 성공했던 것이다.
발레리아는 스카리의 커다란 늑대 가죽을 매만지며 어쩔 수 없이 민망해졌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 스카리 홀트가 받은 예물이 손바닥만 한 토끼래! 소문을 내는 못된 새끼도 있다. 너, 너, 너, 누군지 기억해 둘 거야. 히바니마저 낄낄거리며 웃는다.
얼마간 빤히 제 어깨를 눈만 내려 보던 스카리가 웃음을 터뜨리며 토끼의 귀를 툭 튕겨 본다.
‘공주의 하사품을 감사하게 받을 줄은 모르고.’
언제쯤 다음 식순으로 넘어가는 건지, 언제까지들 웃을 건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 그때, 차가운 남자의 손이 뺨을 감싸 왔다.
“발레리아, 살레르노즈.”
그는 여전히 그녀의 이름의 ‘스’를 발음하지 못한다. 아무리 가르쳐 줘도 항상 ‘즈’라고 발음을 하니, 한동안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스카리의 입술이 연한 미소를 머금고 속삭인다.
“마음에 든다.”
발레리아는 그의 청회색 눈을 마주 보았다. 처음 저 성터 어딘가에서 그를 마주하였을 때 그의 시선은 건조하기만 하였다. 그때의 공주는 걱정스러웠고, 이들 중 하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따뜻한 눈길을 받으며, 이들 중 하나가 되는 과정에 있다.
“처음이니까.”
“마지막이라 해야겠지.”
스카리가 나직이 웃으며 그녀의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쓸어내렸다. 발레리아는 그의 차가운 손길만으로도 짜릿했다. 앞으로, 그녀는 이자와 함께할 것이다.
“마지막.”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아쉽다. 그냥 기사들을 시켜서 사기를 칠걸.
생각한 발레리아는 그의 어깨 너머 펼쳐진 광활한 하늘을 보았다. 언제나 그녀의 머리 위에 머물 하늘이다. 어쨌거나 그녀는 야만인과 사랑에 빠진 공주였고, 이 야만의 세계는 그녀의 세계가 될 것이다. 언젠가 그러기를 바란다.
그녀는 성혼식 이전 수십 번 당부 받은 모든 식순을 기억하고 있다. 첫 사냥물을 교환하고, 맞절을 하고, 함께 파라윈의 마을을 행진하며 혼인을 알리고 축복받는다. 그러한 연후에 마지막으로 그들의 여신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뜻으로 커다란 불을 피우고, 아즈라굴랑시 때처럼 한바탕 신나게 노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뺨을 끌어당겨 입 맞춘 발레리아가 속삭였다.
“나의 신랑.”
아, 인생은 불가해하다. 말 한마디 제대로 통하지도 않았던 사람에게 이렇게나 빠져 버리기도 하니까. 아주 푹. 가늘게 눈꼬리를 접은 스카리가 그녀의 뺨을 거세게 쥐어 왔다. 화장이 다 번지도록 잡아먹을 듯 입술을 맞추었다.
“말세다, 말세야, 이놈들아, 아직 안 끝났다!”
히바니가 식순을 지키라며 고함을 쳤지만 못 알아들은 체했다.
먼 곳에서 시작된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고, 그녀의 미소도 점점 짙어지고, 스카리의 손은 서서히 따스해진다. 화려한 꽃, 드레스, 꽃다발, 피아노, 다이아가 알알이 박힌 반지, 수많은 하객들의 예의 바른 축하와 갈채, 그런 것이 없더라도 여느 공주 부럽지 않은 성혼이었다.
***
성혼식의 마지막 절차인 신랑과 신부의 거리 순방이 끝나자 잔치가 시작되었다.
발레리아는 신부에게 전해지는 노즈윈드인들의 선물을 받고, 그들로부터 술 한 잔씩을 얻어 마시며 돌아다녔고(그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스카리는 파라윈의 나이 지긋한 노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이게 성혼식 날인지, 아니면 단순한 축제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리하여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발레리아는 술독에 빠진 생쥐가 되었다. 만취했다는 뜻이다. 그즈음에는 제 주위로 다가와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말을 이해하고자 귀를 기울이던 노력도 그만두었다. 이제 알아듣지 못해도 즐겁고, 알아들어도 즐거웠다.
길고 무거운 치마를 걷어 올리고 휘청대며 걷는 그녀를 이멜다와 래리 경이 부축해 주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 너무 많이 마신 게 아닌지….]
[그러게요, 어디 앉으실래요?]
[으으으응?]
이멜다와 다른 파라윈 사람들이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도 같았는데 거의 안 들렸다.
세상은 어지럽게 돌고, 스카리는 저기 있었다. 멋있어. 내 남자. 귀여운 내 남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여자와 웃고 떠들던 에이키가 건들건들 다가왔다.
“공주가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야.”
발레리아는 극구 부정하며 스카리 쪽으로 걸어갔다. 휘청, 휘청, 이멜다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고개를 돌린 스카리가 그녀 쪽을 본다.
피식 웃은 스카리가 나누던 이야기를 멈추고 그녀에게 다가온다. 그러고는 흔들거리는 발레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잡더니,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 발레리아는 깜빡깜빡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그를 끌어안고 허물어졌다. 너무 졸렸다. 이 품에서는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선 곳이었다. 붉은 천으로 꾸며진 널따란 유르트. 여기가 어디일까?
저 밖에서는 여전히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발라당 넘어진 다람쥐처럼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거리던 발레리아가 몸을 돌렸다. 반대편의 붉은 천으로 잘 꾸며진 탁자 앞에 스카리가 걸터 서 있었다.
[어디….]
무심코 말하려다가, 모국어라는 걸 깨닫고 정정했다.
“어디야?”
“신방이지.”
스카리가 말했다.
혼곤한 채 신방이 뭘까 생각하다가 혼인 준비 내내 들은 말이란 걸 어렴풋이 떠올려 냈다. 노즈윈드인들의 혼인식은 단조롭고 심심한 편이지만 신방만큼은 그들이 여신을 모시듯 정성스럽게 꾸며 두는 것이 관례라, 붉은색을 많이 사용한다고 들었다.
얼마간 그녀를 바라보며 병 안의 술을 마시던 스카리가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맡에 앉았다.
스카리는 취한 그녀와 다르게 평소 같은 모습이었다. 느슨하게 늘어뜨린 어깨를 풀 때마다 두꺼운 근육질 팔뚝에 핏대가 일어나고, 턱 아래로 불거진 목울대가 오르내리는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녀처럼 작은 여자는 한 팔로도 안을 수 있는 그에게서는 로리아의, 아니, 그녀가 태어난 고국과 이웃 나라를 다 뒤져도 찾을 수 없는 야성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저 남자가 내 남자야. 생각하니 몽글몽글 감정이 솟구쳐 올라온다.
어떻게 저렇게 잘생겼지. 어떻게 저렇게 귀엽지? 어떻게 거꾸로 봐도 멋지지?
발레리아가 애교스러운 콧소리를 내며 그의 뺨을 더듬었다.
“스카리이.”
발갛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스카리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두드렸다.
“너무 취했다.”
“아니야. 기분이, 좋은, 거야.”
꼬인 발음으로 말한 발레리아는 엉겨 붙듯 스카리를 끌어안았다. 그를 쓰러뜨리려던 심산이었는데 당연한 거겠지만 스카리는 그녀 같은 여자가 매달려도 꿈쩍도 하질 않는다.
열흘 만에 이렇게 마음 편히 안기는 것이었다.
이들의 혼인은 정말이지 절차부터가 너무 복잡하고 귀찮은 게 많았다. 스카리는 그런 그녀를 귀엽단 듯 들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오늘 즐거웠나?”
“당연히….”
그렇다 대답하려던 발레리아는 문득 말을 멈추었다.
술기운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제가 혼인을 했다는 데에서 오는 낯선 의식 때문인지 옛 생각이 났다.
먼저 결혼해 떠난 언니들과 앞으로 떠나게 될 막냇동생 기오르지아에 대한 생각이었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언니들도 나처럼 행복했을까?
언니들은 결혼 생활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는 그다지 해 주는 편이 아니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기꺼이 식장으로 걸어 들어갔던 언니들의 지금 결혼 생활은 어떨지. 이자와 사랑에 빠진 자신은 아주 운이 좋은 경우였다. 사랑에 빠져선 안 된다는 가르침을 무시한 결과지만 그녀는 아주 만족하고 있으니까.
로리아에 머물 적 조금 더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 못한 것이 갑작스러운 후회가 되어 찾아왔다. 술기운은 계속해 그녀의 생각을 뻗어 나가게 했고 기분은 가라앉았다.
‘……?’
그러는 동안, 스카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발레리아의 표정을 가만 지켜보았다. 발레리아는 기분 좋은 듯 웃다가, 심각한 얼굴로 눈살을 구기다가, 갑자기 울상이 되었는데 그로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당연히 알 도리가 없었다.
잠시 기다리던 스카리가 그녀의 코끝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왜 그러지?”
발레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냥….”
스카리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 장식을 하나둘 빼냈다. 어질어질한 기분으로 눈을 감은 발레리아는 그의 손길을 음미하며 떠오르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스카리, 너를 언니들이랑 기오르지아한테 보여 주고 싶어. 알베르토도 너를 보면 좋아할 텐데….]
말하고 나니 진심이었다. 스카리는 로리아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그녀의 가족에 대해서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지만 발레리아는 문득 진심으로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스카리가 빼낸 머리핀을 내려놓다 말고 관찰하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발레리아는 그의 시선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내 동생들이 얼마나 착하냐면, 숙부님이 어릴 때 괴롭혔을 때조차도 항상… 기오르지아는 내가 너한테 시집간다고 했을 때 울었어. 사실 나한테 얘기는 안 했는데, 밤에 우는 걸 봤어. 언젠가 기오르지아에게는 꼭 당신을 보여 주고 싶다.]
“발레리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스카리가 천천히 그녀의 턱을 잡아 돌렸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해 주면 좋겠군.”
“공용어 배우는 거 어때?”
스카리의 눈살이 단숨에 찡그려진다. 그게 뭐 그렇게 우습다고, 발레리아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스카리의 뺨과 턱에 차례로 입 맞추었다. 미동 없이 그녀의 입맞춤을 받던 스카리의 미간이 서서히 펴졌다.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번졌다.
발레리아는 표정이 다채로운 편이라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뚜렷하다. 스카리에게는 가끔 낯설 때가 있다.
“싫어?”
반응하지 않는 스카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발레리아가 물었다.
스카리는 대답 대신 그녀의 턱 끝을 매만졌다. 그는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참고 해 나가는 인내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지만 발레리아가 물을 때면 기묘하게 너그러워져서 마음이 동한다.
“생각해 보지.”
실상 그에게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라는 정형화된 틀에 대하여 일생 기대하지 않고 살았던 그가 온전히 자신을 귀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와 발레리아는 아직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다. 그러니 그녀가 살아온 세상에 관심이 생기는 것도 자연한 순서일 것이다.
“네 고향이 궁금해지는군.”
눈을 껌뻑껌뻑하던 발레리아가 작게 웃더니, 이내 졸린 듯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피곤하기도 할 것이었다.
지난 열흘간, 혼인의 관습에 따라 아내 될 여자와의 만남을 금지당하여 속이 마른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다. 스카리는 제 어깨에 늘어지는 발레리아의 등을 쓸다가 아쉬운 마음을 잠시 내려 두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오늘 많이 취했고, 그 역시 신랑으로서 밖에 나가 마무리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자라.”
스카리가 발레리아를 침대 위로 누이고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발레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며 일어서려는 그를 붙잡았다. 멈춰 선 스카리는 그의 팔을 감싸 쥔 발레리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발레리아는 잔뜩 피곤한 얼굴로 기어이 몸을 다시 일으켜 앉더니, 앙금앙금 무릎으로 침상을 딛고 섰다. 그러고는 스카리의 뺨을 꽉 잡아 숙이게 했다.
“왜.”
발레리아가 눈썹 끝을 내려뜨리고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다. 귀여운 그녀의 모습에 스카리는 웃음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발레리아는 신기한 여자였다. 저렇게나 귀여운데도 눈빛만큼은 매섭다. 처음 그를 갈고리처럼 챘던 순간의 예의 그 사냥꾼의 눈이었다.
목을 쭉 빼고 그의 입술에 입 맞춘 발레리아가 속삭였다.
“가지 마.”
“곧 오지.”
스카리가 단조롭게 답했다. 그런 그를 감기는 눈으로 가느스름히 올려다보던 발레리아가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복잡한 매듭으로 묶인 겹겹의 천들을 풀어낸다. 그들의 복장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술에 취해 있기까지 하여 손짓이 더디고 어설펐다.
어깨에 힘을 푼 스카리는 가만 그녀가 하는 양을 게슴츠레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발레리아가 그의 시선을 의식한 것처럼 조그맣게 변명했다.
“안 취했어.”
쑥스러운지 살짝 혀끝을 내밀어 입술을 쓴다. 그녀의 붉은 혀를 따라 눈을 미끄러뜨리던 스카리가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
“취한 게 아니라는 말이지.”
“아니야.”
발레리아는 누가 봐도 취한 것처럼 웃으면서, 취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그 말을 했다. 이렇게 귀여우니 차갑던 남자의 가슴도 단숨에 들끓게 만들 밖에. 그녀는 너무 쉽게 그의 욕망에 불을 붙였다.
저 밖에서 울려오는 잔치의 떠들썩함을 향해 잠시 눈길을 준 스카리가 그녀의 턱을 쥐며 침상 위로 올랐다. 발레리아는 그의 무게에 떠밀려 누웠다. 그의 그림자가 단숨에 발레리아를 삼켰다.
그녀의 손을 밀어낸 스카리가 대신 천 옷의 매듭을 풀었다. 부드러운 옷감을 한 겹, 한 겹, 느린 속도로 걷어 냈다.
발레리아가 상기된 눈으로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옷이 벗겨지고 어느 흉터 하나 없는 뽀얀 젖가슴이 드러났다. 스카리는 그도 모르게 숨을 낮추었다. 동그랗게 솟은 젖가슴이 아름다운 몸이었다.
목 안이 메마르게 갈라진다. 지난 열흘간 이 입술의 감촉이 몇 번이나 맴돌았던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하얀 몸은 이상하리만치 그를 흥분시켰다.
우윳빛으로 빛나는 살결에 입맞춤의 흔적이 남는 것, 움켜쥔 손자국이 남는 것, 때로는 자신으로 인해 드는 멍의 흔적까지도 그를 흥분하게 하는 요소였다.
“으응, 스카리….”
발레리아가 살며시 팔을 오므려 몸을 틀었다. 그녀의 어깨를 잡아 누른 스카리는 허리를 숙여 발레리아의 입술을 삼키듯 입 맞추었다. 입술이 겹치고, 자연스럽게 숨을 나누었다. 오고 가는 혀끝은 성마르게 서로를 쫓았다.
헐떡대는 젖가슴을 한 움큼 크게 쥐자 대번에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잔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응.”
목 안으로 웃은 스카리는 투박한 손끝으로 꼿꼿하게 서는 젖꼭지를 꼬집었다. 발레리아는 허리를 들썩이며 어깨를 움츠렸다. 스카리는 그녀의 입술에 비비며 떨리는 숨을 뱉어 냈다.
“아.”
“흐읏.”
발레리아는 어지러운 취기 속에서 그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저릿한 흥분이 일어났다. 입술에 닿는 숨결도, 끝없는 입맞춤도, 술처럼 달았다. 그를 밀어낸 그녀가 허겁지겁 치마를 벗어 내렸다.
열흘 만에 다시 그와 입 맞추고, 몸을 맞댄다 생각하니 발레리아는 그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입 맞추는 내내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계속 웃으니 입술을 뗀 스카리가 그녀를 쳐다본다.
발레리아는 뚫어질 듯한 그의 시선이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은근하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그의 몸을 더듬었다. 스카리는 얕게 숨을 몰아쉬며 웃더니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자리 잡았다.
그는 발레리아의 다리 사이를 그 크고 단단한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의 손에 물기가 묻어났다. 그녀는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체모 아래의 미끈거리는 살점을 위아래로 문질러 비비던 그가 이내 바지의 허리끈을 풀어냈다.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발레리아가 팔을 뻗어 그의 팔목을 쥐었다.
“그거, 싫어.”
발기한 그의 물건을 꺼내 곧장 삽입하려던 스카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발레리아가 조그맣게 덧붙였다.
“…그렇게 말고.”
그동안 발레리아와 스카리의 관계는 과격하고 거친 경우가 많았다. 시작할 때 그녀는 언제나 젖어 있었고, 그러지 않더라도 스카리의 손장난 몇 번이면 흥건히 쏟아 내는 탓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스카리라는 남자 자체가 특별히 부드럽고 정성스러운 애무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가 애무에 가장 긴 시간을 들였던 것은, 그와의 첫 관계에서 그녀가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까지 갔던 그날뿐이었다. 사실 그마저도 애무라기보다는 도저히 그를 감당하지 못하는 그녀를 달래는 투박한 손장난에 가까웠다.
물론, 발레리아는 날것 그대로의 욕망으로 부딪쳐 오는 그와의 관계에도 만족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첫날밤이 아닌가.
스카리는 그녀가 스스로 벗어 내린 치마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싫다고?”
“싫어…. 그렇게.”
발레리아는 슬며시 다리를 빼 오므리며 그를 밀어냈다.
먼저 그를 유혹하듯 옷을 벗었던 발레리아의 태도가 돌변하자 스카리로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미 흥분해 있던 그는 강제로 그녀를 붙드는 대신, 몸을 기울여 숙인 후 발레리아의 턱을 그쪽으로 향하게 했다.
“왜?”
발레리아는 살짝 부푼 입술을 오므리며 힐끔 그를 곁눈질하다가, 슬며시 그의 가슴께를 어루만졌다.
솔직히 공주의 입장에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민망한 일이었지만, 돌려 말할 만큼 그녀가 그들의 말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돌려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핥아 줘.”
“…….”
“바로, 하지 마.”
스카리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그는 섹스에 있어 명령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처음 발레리아와의 관계에서 언어적 장벽을 느낀 후 나름대로는 그녀를 배려해 왔다.
“…핥으라고?”
조금 더 발개진 발레리아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스카리의 눈은 보지 못한 채였다.
얼마간 물끄러미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스카리는 이내 소리 내어 웃으며 발레리아의 어깨에 이마를 떨어뜨렸다. 한 손은 그녀의 젖가슴을 느릿느릿 주무르면서 생각했다.
발레리아가 원하는 게 무언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녀는 몸 구석구석 빨고 핥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객관적 사실과 별개로 주관적인 문제는 있었다. 자존심과 습관의 문제였다.
그는 한 번도 여성기를 빨거나 핥아 본 적이 없었고, 관계에 있어 그래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채 살아왔다. 자신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레리아의 부탁을 들으면 그는 너그러워진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고 그런 그녀와 눈을 마주치던 스카리는 이내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상관없게 만드는군.”
설핏 웃으며 뇌까린 그가 그녀의 허벅지를 강제로 잡아 벌렸다. 갑작스럽게 끌려간 몸에 발레리아가 움찔하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찰나였다.
스카리의 손이 발레리아의 양 허벅지를 높게 밀어 들더니, 그대로 그녀의 다리 사이, 흥건하게 젖어 있는 입술에 얼굴을 묻었다.
“아! 아흑!”
예민하고 여린 살점이 뜨거운 숨으로 덮이자 발끝이 오므라질 정도의 쾌감이 일었다. 발레리아는 다리 사이를 핥아 올리는 스카리의 뜨거운 혀를 적나라하게 느꼈다. 그의 숨결이 스칠 때마다 온몸이 녹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쮸웁, 쮸웁, 그가 강하게 빨아 댈 때는 정신마저 쏙 빠져 버리는 것 같았다.
“아, 흐, 으! 스카리, 아!”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동대는 그녀를 더욱 단단히 붙들고는, 갈라진 틈새를 혓바닥으로 쓸어 올리고 혀끝으로 음핵을 눌러 비볐다.
“아흐, 으, 아!”
발레리아는 아랫배를 그득 채우는 열기를 느끼며 허리를 뒤틀었다. 그는 베어 물듯 그녀의 허벅지를 비비고, 액이 흘러나오는 질구를 핥고, 몇 번이고 음핵을 빨아 댔다. 엉덩이가 저절로 들썩거렸다. 타액으로 범벅이 된 다리 사이로 끝없이 뭔가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얼마 후 장난스럽게 얼굴을 흔들어 비비던 스카리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해 주는 걸 원했나?”
여전히 그녀의 음문에 입술을 누른 채였다.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자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아, 흑!”
“이렇게?”
그는 말도 못 할 만큼 흥분한 발레리아의 반응이 퍽 만족스럽다는 듯 입매를 당기더니, 다시 그녀의 여린 살결을 쭙쭙 빨기 시작했다. 엉덩이 골부터 음핵에 이르는 혓바닥의 열기는 형언할 수조차 없었다.
“으, 흐, 으, 좋아. 아, 흑.”
가장 발레리아를 미치게 만드는 것은 그의 혀 놀림이었다.
그는 뜨거운 뱀처럼 그녀의 다리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녀를 빨면서 스스로 흥분한 그가 숨이라도 뱉어 낼라치면, 훅 끼얹어 오는 따뜻한 자극에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아득하게 좋은 감각이었다.
“흐, 으, 흑, 아흑! 스카리, 아응!”
흐르는 액을 모조리 훔쳐 내던 혀끝이 끝내 흥분으로 예민하게 벌어져 있던 질구를 가르고 들어왔을 때 발레리아는 끝내 이성을 잃고 스카리의 머리를 쥐었다. 그리고 그녀도 모르게 앞뒤로 그의 머리를 흔들었다.
“아흑, 으, 흐으!”
질구의 얕은 곳을 찌른 혀가 부드럽고 연한 살점을 휘저어 댄다. 스카리는 기꺼이 혀를 쑤셔 박으면서 웃었다.
그의 손자국이 벌겋게 남은 그녀의 흰 허벅지는 바르르 떨렸다. 몸은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술기운에 흐렸던 정신마저 흥분에 찔려 깨어났다.
“스카리, 더, 아, 흑, 더….”
스카리는 멈추지 않고 혀를 깊숙이 쑤셔 넣고 헤집었다. 깊숙이까지 파고든 혀가 제 안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흑!”
발레리아는 끝내 그의 혀 놀림만으로 절정에 올랐다. 머릿속이 희게 점멸하며, 온몸이 벼락 맞은 듯 떨렸다. 오므라지는 질구 안에서 왈칵 액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