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8)

‘…전부 오해라고?’

에이키의 말이 진실이라면, 스카리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곤혹스럽게도 성질 급한 공주의 오해였다는 결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오해였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내심의 안도는 잠시일 뿐이었다. 먹먹한 가슴은 풀어질 줄 모른다. 분노는 가라앉는데 서러움은 더 크게 일어났다. 발간 그녀의 눈시울을 들여다보던 스카리가 서서히 허리를 숙여 물었다. 그는 마치 귀엽단 듯 보고 있었다.

“더 남은 오해가 있나?”

오늘 그녀가 오해하지 않은 유일한 진실은 이 남자가 그녀와 혼인할 생각이 없다는 것 하나뿐이다.

발레리아는 울지 않으려 입술 안쪽의 살을 씹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거절당한 것 같은 이 너절해진 기분 때문에 이 이상으로 비참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발레리아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돌아섰다.

[개자식.]

스카리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왜.”

발레리아는 거칠게 그를 뿌리치려 했으나 스카리의 힘은 당연하게도 더 셌다. 매섭게 그를 노려보는 발레리아를 내려다보는 스카리의 입가에 미소가 뚜렷해졌다.

“아직 화가 덜 풀렸나?”

“개개끼.”

“개새끼.”

래리 경이 그도 모르게 입술을 가리며 헛기침했다. 발레리아는 저를 놀리는 것처럼 보이는 스카리에게 화가 나 다시 한번 씹어 뱉었다.

“개, 새끼.”

스카리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는 오늘의 사건을 ‘성가시다’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비록 발레리아가 발단이 되기는 하였으나 그들 간의 다툼은 부족 회의가 열리는 동안 심심찮게 벌어져 왔기 때문이다.

원흉이 파라윈이 되었으니 어느 정도의 책임은 져야겠지만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별것 아닌 일이었다.

고백하건대 그는 이 작은 몸으로 덤벼들고 맞서는 저 투지 꺾이지 않는 작은 여자에게 지독하게 매료되었다. 돌이키면 이 작은 여자는 항상 그래 왔다. 그들의 땅에 온 이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 이 가느다란 손목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랬다.

사피히에게 덤벼들던 순간, 가슴께 일어나던 흥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와 혼인하여, 제 아이를 낳기를 원하는 이 여자에게 그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이끌림을 느꼈다.

“놔.”

이렇게 앙칼지게 구는 태도에서조차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안 놔?”

“에이키.”

떨쳐 내려는 발레리아를 놓지 않은 스카리가 입술을 뗐다. 시선은 그녀에게 둔 채였다.

“어?”

오래전, 그는 꿈을 꾸었다. 여신의 태를 빌어 눈앞의 여자가 그를 찾아왔다. 꿈에는 언제나 의미가 있다 믿기에 그는 오래도록 자신이 그런 꿈을 꾼 이유를 생각하였다. 그런데 비로소 모든 대답이 분명해졌다. 그날의 꿈은 여신의 계시였다.

네가 찾던 여자 여기 있노라고.

그들의 여신께서 일러 주셨던 것이었다.

“그녀에게 청해라.”

“뭘 말이야, 형?”

“내 아내가 되어 달라고. 자리히, 너는 우리의 쥬릭 언덕의 창고를 열 준비를 해. 나는 이 여자와 혼인하겠다.”

이번에는 에이키와 자리히가 차례로 넋을 놓았다. 에이키가 통역의 역할을 잊고 버벅거렸으나, 그는 필요치 않았다. 래리 경이 명백하게 이해하여 당혹스러운 듯 ‘고, 공주님께 청혼을 했습니다.’ 하고 모처럼 밥값을 했기 때문이다.

발레리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스카리를 보았다. ‘뭐, 갑자기?’ 그러나 그녀보다 더 당황스러워하는 것은 에이키였다.

“형, 이 공주를 아내 삼겠다고? 진심이야, 농담이야? 나 지금 구분이 안 되는데 진….”

“그녀가 알아야 할 것들은 네가 알려 주고. 다들 모여 있으니 알릴 시기로도 적당하겠군.”

“말도 안 통하잖아.”

에이키는 오늘 몇 시간 접한 상황만으로도 자신이 없는 동안 로리아인들과 그들 부족 사이의 소통이 얼마만큼 엉망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제 형이었다. 그의 형은 에이키가 평생 가도 혼인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 몇 없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에이키만큼이나 넋이 나가 있던 자리히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이 아직 화해도 안 해서 분위기 엉망인데, 네가 저원 여자를 아내 삼겠다고 소문이라도 내려는 거냐?”

“그래. 불만을 가질 녀석들과 해결을 보기에는 좋은 날일 테지.”

“좋은 날이 아니라 최악이다. 스카리,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아니, 애초에 저원 여자랑 결혼을 하겠다고? 이 여자에게서 자식을 보겠다고?”

“여신께서 그녀를 내게 보냈다.”

“뭐?”

스카리는 이해할 수 없단 듯 저를 바라보는 발레리아의 시선을 받아 냈다. 바람 찬 고원에 산새처럼 날아든 발레리아, 그녀는 그가 둥지를 틀고 싶게 하는 여자였다. 한 마디의 말조차 필요치 않았다. 하얀 눈이 내리던 시월의 마지막 밤처럼.

서서히 충혈되는 눈을 깜빡이던 발레리아가 떨리는 입술을 뗐다.

“갑자기, 왜….”

스카리는 여전히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너보다 나를 감동하게 할 여자를 찾을 수 없을 테니까.”

매끄럽게 웃은 스카리가 그녀의 턱을 젖혀 키스했다.

당황으로 눈을 회동그랗게 뜨던 발레리아는 다정한 그의 입맞춤에 그녀도 모르게 팔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감지도 못한 눈으로 제게 입 맞추는 스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가슴 속 울분이 입맞춤 한 번에 녹아내린다니. ‘이거 또 사기 치려는 거 아닌가?’ 하는 일말의 의심마저 흐물흐물 흩어졌다. 저란 공주는 대체 뭐가 문제일까? 모를 일이다. 그 모든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억울할 만큼 그가 좋다는 것 말고는 모르겠어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랬듯 덥석 그에게 매달려 그에게 키스했다.

그러는 동안, 느닷없이 키스하는 두 남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황당할 뿐이었다.

‘뭔데 이거….’

이멜다와 래리 경은 칼로 물 베기라는 사랑싸움의 결말이 또다시 공주님과 스카리가 흘레붙는 결론으로 끝이 난 것에 ‘못살아.’ 하는 표정이 되었고, 에이키는 명백하게 애정 가득한 스카리의 옆얼굴을 보며 ‘진짜 반년 사이에 뭔 일이 생긴 거야.’ 하고 했던 생각을 또 했으며, 자리히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왜 저 여자한테 정신을 못 차리는지 모르겠다니까. 말세야.’

얼마 후, 낮게 웃은 스카리가 입술을 뗐다. 그의 눈은 애정으로 가득하였다. 입맞춤에 취해 있던 발레리아는 여전히 믿기지가 않아서 물었다.

“…진짜, 혼인해?”

스카리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발레리아의 뺨을 세게 쓸어 문질렀다.

“이번에는 정말로 약속하지.”

이번에는 정말로 약속해.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발레리아는 입술을 앙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오늘 제가 저지른 일을 떠올렸다. ‘으’ 하는 신음이 목구멍으로 기어 올라왔다. 발레리아는 마지막 자존심을 놓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키, 그, 그렇게 하겠다면 내가, 오늘 일은 한 번만… 용서해 줄 거라고 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에이키가 헛바람 터지는 소리를 냈다.

‘이야, 저 공주.’

발레리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팩하니 그를 쏘아보며 다시 말했다.

[한 번만 용서해 주는 거야. 바람나면 용서 안 해, 가만 안 둔다고도. 이번에는 진짜 약속한 거 지켜야 된다고 해.]

스카리가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에이키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번 일은 눈감아 주겠다는데,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면… 음, 가만 안 둔대. 그리고 혼인하겠단 약속 안 지키면 그것도 문제 삼겠다는데….”

발레리아를 내려다보던 스카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기억해 둬야겠군.”

***

그날 밤, 파라윈의 스카리 홀트는 저원의 공주와 결혼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노즈윈드의 모든 부족민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였다. 간신히 잠재웠던 분란이 다시 한번 잡음과 함께 일어났다. 그리하여 당황한 자들의 불만을 달래고, 자신이 일으킨 물의에 대한 사과하기 위해 발레리아는 그들에게 로리아의 지참금을 나누어 주는 것을 허락해야 했다.

공식적으로 지참금을 갈라 먹고 나니 얄밉게도 노즈윈드인들은 태도를 바꾸었다. 개중에는 저원의 공주 따위 존재조차 않았다는 듯 구는 자까지 있어 허탈할 정도였다.

‘사람이 어디나 똑같긴 한가 보네.’

지난 넉 달간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지참금에 대한 미련은 상당하였으나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사실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진짜 혼인해?”

그녀는 여전히 믿기지 않아서 계속 물었다. 당한 게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그중 한 번은 저 혼자 오해한 것이라 해도).

“그래.”

“진짜 해?”

“그래.”

살며시 피어오르려는 웃음을 입술 안쪽으로 모아 오므린 발레리아는 슬며시 스카리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새침하게 어수선하게 지참금을 챙기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스카리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정말, 모를 남자.’

발레리아는 꽉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입술을 비집고 올라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으니 스카리가 물었다.

“즐거운가?”

고개를 든 발레리아는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자신의 어휘가 턱없이 모자란 것이 아쉬웠다. 행복하다는 표현은 그들의 말로 어떻게 말하는지, 에이키라는 그자에게 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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