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8)

[음….]

[아는 거 없어요? 당신들 대체 아는 게 뭐죠?]

날카로운 공주님의 일침에 마르틴 경과 빈즈 경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사실 그들은 파라윈 사람들과 가깝게 어울리면서, 사실 입에도 못 담을 말들이나 그들의 은어를 제법 배웠다. 하지만 이런 말을 공주님께 가르쳐 드려도 되나 싶고….

***

대부족 회의가 열리는 거대 유르트와 그 유르트를 중심으로 설치된 열두 개의 유르트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일곱 부족들이 다 모였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언성이 높아지거나, 다툼이 나는 일도 있다.

다히윈의 플로끼와 이야기를 마무리한 스카리는 준비를 마치고 와 그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쪽이 뚫린 네모 모양으로 배치된 십수 개의 상 정면에는 파라윈에서 가져온 물자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밖에도 각각의 부족들이 가져온 물건들이 배분을 기다리고 있다.

미미아윈의 사피히와 테카스빈의 뮬러가 만나 인사하고 그리 멀지 않은 그들의 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다히윈도, 헤즈윈도 오늘만큼은 평화로운 시늉을 하였다.

대부족 회의는 겨울을 앞둔 그들이 함께 공생하기 위해 물자를 나누고, 내년에 대해 논의하는 중요한 날이므로 부족 사이의 감정을 그나마 덜어 내고 마주한다. 보통 처음에는 늘 이렇게 잔잔한 분위기에서 회포를 풀며 시작한다.

“올겨울도 무사히 나겠습니다, 히바니.”

히바니는 노즈윈드인들 중에서도 거의 최고령자에 가까운 연장자로서 파라윈 부족민들이 모인 자리의 두 계단 높은 상석에 앉아 인사를 받았다.

“매년 그랬지. 여신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는 우리가 서로를 신뢰해야 하는 게야. 가장 중요한 건 신뢰다.”

“당연한 말을.”

“당연한 걸 실천할 줄 모르는 놈들이 지천이니 하는 말이다!”

히바니의 성격을 익히 아는 다른 부족민들은 퉁명스럽게 땍땍거리는 그녀에게 가능한 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 스카리에게도 간간이 알은체를 하였다.

‘…….’

각진 턱을 괴고 앉은 스카리는 그들이 가져온 저원의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레리아가 가져온 물건들이니, 발레리아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의 그녀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몰랐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렇지 않다. 오늘 그에게 그렇게 화내고 돌아간 후로 보이지 않은 것이 은연중 거슬렸다.

‘봄?’

왜 그렇게 화를 낸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어렴풋이 그녀의 오해에 대해 가늠할 만한 게 있다면 사피히였다. 하지만 단순히 술을 마시다 잠든 것만으로 그녀가 화를 낸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발레리아는 파라윈에서도 종종 그가 다른 전사들과 술을 마시고 잠든 것을 본 바가 있었고, 그때는 화를 내지 않았다. 질투라고 한다면 솔직히 것도 귀엽기야 했지만 약간 답답한 건 사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카가 인파를 헤치고 그들의 자리로 다가왔다.

“스카리.”

스카리가 힐끔 그에게 눈길을 준 후 물었다.

“발레리아는 찾았나?”

“찾기는 했는데, 공주가 네 유르트를….”

거기까지 말한 그리카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무슨 일이지?”

그리카는 그 광경을 묘사할 다른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공주가 미치광이처럼 네 유르트를 난자하고 있었는데.’라는, 직설적인 표현 말고는.

잠시 고민하던 그리카는 간신히 그나마 무난한 문장을 골라냈다.

“…네게 결투를 신청할 기세로 유르트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던데.”

구부리고 있던 어깨를 편 스카리가 살짝 턱을 당겼다. 그리고 그리카가 말한 ‘제게 결투를 신청할 기세로 난장판을 만드는 모습’을 그려보고는 설핏 웃고 말았다. 귀여운 여자였다.

***

털옷으로 온몸을 칭칭 동여맨 발레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이멜다는 비장한 얼굴로 발레리아를 뒤따랐다. 래리 경과 기사들만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 그녀를 졸졸 쫓을 뿐이었다.

‘여기야?’

매년 대부족 회의가 열리는 장소라는 이곳의 대형 유르트 내부는 바깥보다 훨씬 따뜻했다. 사람들로 번잡했다. 건조한 공기를 더 건조하게 만드는 것은 수십 개의 횃불이다.

사방에 상을 깔아 두고 각각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보통 상석으로 여겨지는 안쪽의 단상에는 위 돌의자에 앉은 스카리가 보였으며, 그 옆에는 히바니와 그리카가 있었다.

‘최대한 공주의 품위를 지키면서 외교적인 자세로 스카리에게 따져 묻겠다.’ 그리 마음먹고 찾아온 발레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이 이상 화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이 앉은 공간의 중앙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곡식도, 옷감도, 어디에 쓰는 것인지 모를 검은 돌 같은 것들도 잔뜩 있었다. 그러나 단언컨대 가장 눈에 띄는 것들이 산더미를 방불케 했다.

발레리아가 저것들이 자신이 가지고 온 지참금, 달리 말해 파라윈에게 갈취당한 물건들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에는 큰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상자의 양식이나, 술병, 짐승들의 생김새까지 전부 로리아의 것이었으므로.

‘대체, …이게 뭐야?’

멍하니 둘러보던 발레리아는 서서히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저자들이 그녀의 지참금을 나누어 가지려 모인 것이었다. 스카리가 그들에게서 갈취해 갔던 그 지참금을.

조그맣게 말아 쥔 주먹을 벌벌 떨며 침을 삼키던 발레리아가 잇새로 신음을 뱉어 냈다.

‘…그래서 나를 못 따라오게 하려고 한 거야?’

처음 스카리는 그녀가 함께 이곳에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졸라서 온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세상이 전부 비뚤게 보이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도록 섞이고 겹친 노즈윈드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참금 근처에 모여 있던 노즈윈드인들이 그녀를 본다. 처음 보는 얼굴인 것으로 미루어 다른 부족 사람이었다. 그녀는 저들이 그녀의 지참금을 만지는 것도, 구경하는 것조차도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를 식히려 했다. 하지만 한번 열이 오르기 시작하니 도저히 제대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저 안쪽에 앉아 있던 스카리가 그녀를 발견하고 눈길을 보냈다.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미소 짓는다. 그 미소는 어김없이 그녀를 떨리게 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분노로 치가 떨렸다는 것이다.

발레리아 살레르노스는 공주다. 로리아의 셋째 공주다. 하여 그녀는 이 정도로 체면을 잃을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녀를 발견한 그리카가 가부좌를 하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울 때였다.

발레리아는 그녀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비단을 만지작거리는 사내를 밀쳐 낸 후 똑바로 스카리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스카리!”

앙칼지게 울리는 그녀의 고함에 홀 안의 시선이 일제히 발레리아에게로 향했다.

이멜다는 오만상을 일그러뜨린 채로 몸싸움도 불사하겠노라는 의지를 온 얼굴로 드러내며 뒤따랐고, 래리 경은 ‘이를 어쩌나, 이를 어쩌나, 이를 어쩌나.’ 하고 염불을 외며 더 이상 일이 커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대로한 공주님은 일을 이대로 정리하실 마음이 분명 없으셨다.

허리를 펴고 앉아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는 스카리에게 다가간 발레리아가 그의 어깨를 거세게 밀쳤다.

“개개끼!”

앙칼진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개개끼, …개끼…, …끼….

노즈윈드인들의 머리 위로 메아리가 맴돌았다.

별안간의 고함에 놀란 노즈윈드인들이 눈을 껌뻑이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개개끼가 뭔지 이해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도 있었으나, 그게 욕설임을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래, 욕을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욕을 먹은 대상이다.

‘스카리… 한테?’

조그맣고 하얀 얼굴의 여자가 스카리 홀트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둘 저 여자가 누구냐며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고, 공주님….’

래리 경은 느닷없이 터진 공주님의 몹쓸 발언에 기겁하며 입을 벌렸다. 욕설을 가르쳐 주었던 기사들도 조금 당황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푸…. 으, 흐.”

웃음이 터진 것은 진작 그녀의 어설픈 화법에 익숙했던 파라윈 사람들뿐이다. 스카리의 근처에 앉아 있던 히바니가 낄낄낄 웃기 시작하는 것으로, 근처에 둘러서서 술잔을 나누고 있던 다른 파라윈 사람들이 배를 잡고 구르기 시작했다. 비웃음을 당했다는 걸 깨달은 발레리아는 더 분하여, 스카리가 들고 있던 술잔을 빼앗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는 홧홧한 술기운을 빌어 다시 한번 소리쳤다.

“개개끼! 웃지 마!”

쨍그랑! 그녀가 집어 던진 술잔이 저 아래로 굴러갔다.

황당함을 갈무리하기 위해 잠시 침묵하던 스카리가 턱을 매만졌다. 뒤이어 주위 상황을 쭉 돌아보던 자리히가 성이 나 재빠르게 다가왔다.

“아니, 공주, 갑자기 왜….”

“자리히, 둬 봐.”

손만 들어 자리히를 만류한 스카리가 느긋하게 바닥을 짚었다. 그러고는 양탄자를 툭툭 두드리며 밑도 끝도 없이 화를 내는 발레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마저 떠올라 있었다.

“…내게 한 말인가?”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는 스카리의 어투에 발레리아는 일순간 제가 기사들에게까지 기만당했는지 의심했다.

“너, 개개끼….!”

“…개새끼.”

“개개끼!”

“개새끼.”

웃음을 참듯 살짝 아랫입술을 당겨 문 스카리가 발음을 고쳐 주었다.

“갯새…. 으!”

발레리아는 미칠 노릇이었다.

사람이 화났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사람이기는 할 텐데 반응이 이따위였다. 스카리가 손짓하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사내가 발레리아가 죄 마셔 버린 술잔에 새 술을 채웠다.

스카리는 자연스럽게 술잔으로 목을 축인 후 턱을 매만졌다.

“네가 내게 화가 난 것은 알겠다만, 왜 그러는 거지?”

그러는 동안,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사피히는 특별히 더 불쾌함을 느꼈다. 스카리가 완전 얼이 빠졌다더니, 정말이었다. 면전에서 개새끼 소리를 듣고도 웃고 있다니. 그를 모욕한 여자는 저원 출신이었다.

“점마 정신에 문제라도 있나? 아니면, 스카리, 니 놈 머리에 문제 생겼나?”

스카리는 힐끔 그녀 쪽으로 눈길을 주었을 뿐이다. 사피히가 들으란 듯 말했다.

“저원 여자, 니는 일단 빠져라. 점마랑 쌈질을 할라면 나중에 니들끼리 하든가. 시건방지게.”

사피히의 말에 ‘이게 뭔 상황이가?’ 하며 보고 있던 다른 부족의 노즈윈드인들이 희한하단 표정으로 발레리아를 바라보았다. 스카리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늘만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지. 이렇게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었다만.”

“왜 다짜고짜 욕지거린데?”

입술을 바르르 떨며 스카리를 노려보던 발레리아가 사피히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하는지는 저 계집애에게 스카리를 빼앗긴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뒤집어졌다.

“아쭈? 눈 봐라.”

사피히가 어이가 없단 듯 웃으며 일어섰다.

발레리아가 힘주어 말했다.

“너, 입 닫아.”

“뭐?”

발레리아는 사피히의 입을 삿대질하며 가로 긋기까지 했다. 그쯤 되니 사피히는 순수하게 모욕감을 느꼈다.

“조막만 한 저원 계집애가 스카리를 끼고 따라왔다더니 간댕이가 부었나. 임마, 내가 누군지 아나?”

온 신경을 사피히에게 집중하고 있던 발레리아는 기적처럼 그 말을 알아듣고는 애써 가소로운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알아, 너 누구인지.”

“뭐?”

“스카리의, 지난 여자.”

그리하여 스카리는 드디어 발레리아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알게 되었다.

단순한 투기라기에도 이상하다 싶은 상황이었는데, 발레리아가 엉뚱한 오해를 한 것이다. 사피히를 그의 전 연인이었던 샤페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랬다면 오늘 아침의 일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스카리는 왜 발레리아가 사피히를 샤페이로…. 거기까지 생각하던 스카리는 ‘아아.’ 했다.

‘비슷하게 들리나보군.’

이런 때에조차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 스스로 낯설었으나, 발레리아는 심각하게 귀여웠다.

검지와 엄지로 관자놀이를 짚은 스카리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발레리아의 지금 행동은 그러니까, 제 영역을 침해당한 작은 짐승의 분노 표출 비슷한 것이었다.

사피히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발레리아 쪽으로 걸어갔다.

“니 내가 스카리 임마 애인으로 뵈나.”

그리고 사피히의 빈정거리는 말은 또 한 번 소통의 비극을 불러왔다. 발레리아의 귀에는, 저를 향해 조롱 조로 던져진 사피히의 말이 ‘내가 스카리의 애인인 거 보이냐.’와 비슷하게 곡해되고 만 것이다.

가슴이 또다시 와르르 무너지는 듯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애써 눈을 부라리며 숨을 크게 들이켠 발레리아가 씹어 뱉었다.

[망할 계집애 같으니라고.]

“뭐라 하는데?”

[여기가 로리아였으면, 내가 너희한테 이따위 모욕은 안 당했어.]

“니 지금 싸우자는 거냐? 아침부터 말이여.”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하는 두 여자의 분위기를 잠재운 것은 스카리였다. 스카리가 사피히의 어깨를 붙잡으며 단조롭게 말했다.

“사피히, 이 여자는 건드리지 마라, 내가 사과하지.”

스카리의 태도는 공격적이지 않았지만 으레 이 남자가 그러했듯 무게감이 있었고, 사피히는 언짢은 내색으로 멈추어 섰다.

“스카리, 니 왜 이 저원 년을 다 받아 주나? 아무리 눈깔이 돌아갔어도 그렇지. 아니, 얘는 왜 이래 겁대가리 없이 눈깔을 희번덕희번덕하는데?”

“너를 그녀라고 생각하는 것 같군.”

“누구.”

“샤페이.”

사피히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손가락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샤페이? 나?’ 그러자 이번에는 미미아윈 쪽의 전사들이 분개하며 일어섰다.

“뭐라나? 다히윈으로 달아난 그 계집애? 지금 사피히를 모욕하는 거냐…!”

파라윈에서 달아난 샤페이는 한때 노즈윈드의 여러 부족들을 발칵 뒤집었던 적이 있다. 다히윈과 파라윈의 관계가 엉망이 되면서 모든 부족들이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여자 하나 달아나고, 여자 하나 받아 준 것의 문제가 아니었다. 샤페이라는 여자가 파라윈의 내부 정보를 제 몸과 함께 다히윈에 팔았던 것이 문제다. 한때 스카리의 연인이었다 주장한 여자는 파라윈이 그들의 재물을 비밀스럽게 보관해 두는 창고의 위치까지 다히윈에 불었는데, 다히윈의 탐욕스러운 매칼이라는 자가 몰래 그 창고를 털려다가 발각되었다.

파라윈인들을 매우 분개하게 했고, 상황은 부족 간의 전쟁으로 번지기 직전까지 갔더랬다. 가까스로 스카리와 다히윈의 부족장이 협의하여 무마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족 불문, 노즈윈드의 의리파 전사들에게 있어 샤페이는 배신자이며 다히윈의 창녀에 불과하니 충분히 모욕으로 느낄 수 있었다.

돌아선 스카리가 발레리아에게 사피히는 샤페이가 아니다, 일러 주기도 전이었다.

“이 개 같은 년.”

분개한 사피히가 욕지거리를 씹어 뱉으며 스카리를 밀치고 발레리아에게 다가서 그녀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휘청이며 떠밀린 발레리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감히 나를 쳤어?’

상황이 좋고 좋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의 남자와 뒹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 미개한 야만인에게 모욕당하는 것은 용납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이자들은 지금 그녀의 지참금을 갈라 먹으려 모인 자들이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발레리아가 사피히에게 다가가 그대로 따귀를 쳐올렸다. 짜악! 소리와 함께 미처 피하지 못한 사피히의 고개가 돌아갔다.

“워우.”

흥밋거리처럼 지켜보던 다른 부족의 사람들까지 넋을 놓을 만큼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

사피히는 너무 어이가 없어 한동안 자신이 맞았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저 조그마한 여자가 제게 이렇게 덤벼들 줄 몰랐다. 키는 제 코밑에 겨우 닿을 지경으로 작고, 칼 한 번 쥐어 본 적 없는 게 분명해 보이는 작은 손이었는데 매웠다.

바로 제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별안간의 사태에 히바니는 꼬치 끝으로 이를 쑤시며 ‘아이고 재밌다.’ 하며 질겅거렸고, 별안간 선전 포고를 날려 버린 공주를 본 자리히는 말을 잃었다. 그리카는 그저 멍했다. 그가 불을 통해 보았던 환시가, 그들이 먼 어딘가로 달려가던 그 광경이 사실은 부족 간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는 뜻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세상에, 세상에,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로리아 측도 마찬가지였다. 냅다 저질러 버린 발레리아를 지켜보던 이멜다는 혹시라도 저자들이 반격한다면 온몸으로 공주님을 보호할 기세로 몸을 낮추었으며, 래리 경과 기사들의 넋은, 뭐 말할 것도 없이 탈출 상태였다.

‘이러다가… 우리 전부 여기서 죽는 거 아니야?’

로리아의 셋째 공주님 되시는 발레리아 살레르노스는 사실, 로리아의 독특한 왕자님 공주님들 중에서도 가장 독한 분이었다. 화가 나면 앞뒤가 살짝 없는 분이시기도 했다. 가장 두려운 것은 공주님이 이 상태에서 끝낼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이번만큼은 스카리도 조금 놀랐다.

“발레리아.”

스카리가 살짝 눈살을 찡그리며 발레리아를 불렀다.

그러나 발레리아는 스카리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황당한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는 사피히의 시선을 받아쳤다.

[계집애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예의도 모르고, 상식도 모르고.]

미미아윈의 무치가 성난 걸음으로 다가왔다.

“지금, 누구를 때린 거냐?”

무치의 가슴팍을 밀어 세운 것은 한 걸음 그쪽으로 나선 스카리였다. 스카리의 거센 힘에 밀린 무치가 눈을 부라렸다.

“스카리, 니도 봤다.”

“봤지, 내가 사과하지.”

“그냥은 못 넘어간다.”

“물러나. 두 번 말하게 말고. 다투려고 모인 자리가 아니잖나? 그 반대지.”

“너 이 자식…!”

다툼이 벌어지기까지 일촉즉발이었다. 전연 관계없는 부족의 전사들은 ‘워.’ 하며 야유했고, 얼이 빠져 있던 사피히의 분을 일깨웠다.

그런데 상황은 또 이상하게 흘러갔다. 사피히가 발레리아에게 다시 달려들기도 전에, 홱 고개를 돌린 발레리아가 느닷없이 스카리를 두 손으로 거세게 밀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전혀 밀려나지 않자 미친 듯이 두 손으로 그의 몸을 난타했다.

[나를 그렇게 대해?]

조그마한 주먹을 쥐고, 누가 봐도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스카리를 팡팡 때리고 있다는 것을 알 만큼의 힘이었다.

[이 야만인 새끼! 혼인하자 입에 발린 말을 하고, 그런 적 없어? 양아치 새끼들! 내가 가져온 지참금을 너희들이 다 나눠 가지게 둘 것 같아!]

구경꾼들은 사태 파악이 힘들었다.

조그마한 저원의 여자가 사피히의 뺨을 날리더니 이제는 스카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가장 이해되지 않는 건 스카리가 그런 그녀를 가만 내버려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내버려 두는 정도가 아니라 스카리는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내색이었다. 미묘한 그의 표정을 읽어 낼 줄 아는 이들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래리 경과 기사들은 진심으로 오늘이 그들의 기일이 될지 모르겠다는 불안으로 오금을 떨었다. 공주님의 말씀으로 미루건대 스카리가 또다시 그들의 뒤통수를 친 것이 분명했다. 이멜다만이 대로하여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저 망할 놈이, 공주님을 두고 바람이 나?’

발레리아는 양 팔뚝이 저리도록 스카리를 때리고, 또 때렸다. 제가 이 남자를 이렇게 때리고 있다는 것이 서럽고 아프고 슬프고 화가 났다. 미칠 것처럼 화가 나는데, 스카리는 정작 아무 반응이 없어서 더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나쁜 새끼, 나쁜 새끼, 양아치 새끼! 나랑 결혼 안 하면 지참금도 못 줘, 가지고 돌아갈 거야. 아무도 못 건드려!]

“발레리아.”

그녀가 거의 지칠 즈음, 아픈 내색조차 없이 묵묵히 맞아 주던 스카리가 부드럽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허리를 숙인 스카리가 약간 찡그린 얼굴로 웃더니 그녀의 뺨을 꾸욱 쓸어 냈다.

“네가 지금,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평소 그녀에게 말할 때보다 훨씬 느리고, 훨씬 정확한 발음이었다. 손길은 따스했고, 눈빛도 다정했다. 하지만 애석하다. 발레리아는 오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스카리가 그런 그녀를 알아차리고 다른 말로 바꾸어 설명하려는 찰나였다.

“사피히와 샤페이는 같은 여자가 아니…”

“이 계집애가, 보자 보자 하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사피히가 성큼성큼 다가와 발레리아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틈을 노린 무치가 스카리를 세게 밀쳤다. 별안간 머리채를 붙들린 발레리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믿기지 않았다.

붙잡혔다. 공주의 머리채가!

[어딜 감히 우리 공주님 머리를 잡아! 이 망할 년아!]

한 마리의 번견처럼 눈을 부릅뜨고 상황을 주시하던 이멜다가 사피히의 머리채를 쥐었다. 기사들이 ‘공주님을 지켜야 한다!’ 외치며 달려가기도 전이다. 그리고 그를 보는 래리 경은 졸도했다. 쿵.

사피히가 고함을 내질렀다.

“야!”

남 일처럼 관전하던 노즈윈드인들은 끝내 탄사 비슷한 걸 뱉어 내거나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자면, 실제로 지금 이 깽판을 즐기는 이들이 과반이다.

일곱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노즈윈드인들은 화합의 모임이라는 이런 행사가 따로 필요할 만큼 개별적인 역사를 지녔다. 따라서 어느 부족이든 빚과 앙금이 조금씩은 있었고, 그러다 보니 다른 부족의 망신을 도리어 반기는 건 본성이었다.

미미아윈의 또 다른 전사가 빠르게 달려와 이멜다를 떼어 내려 했다.

“뭐 하는 짓이냐!”

[이멜다 양! 제가 지켜 드리겠, 아니, 공주님!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멋들어지게 이멜다를 보호한 것은 반사적으로 몸을 내던진 마르틴 경이다.

발레리아와 사피히는 서로의 머리채를 잡은 채로 악악대며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고, 순식간에 몸싸움으로 이어진 상황에 잠자코 있던 미미아윈의 전사들도 험악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는 자연히 파라윈 쪽 전사들을 일으켰다.

“무치, 비켜라.”

스카리는 그를 단호하게 막아선 무치를 향해 싸늘히 말했다.

“파라윈의 네놈들이 저원과 뭔 짓을 하든 우릴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상관할 바 아니지만, 모욕은 못 참아. 칼을 뽑는 한이 있어도.”

스카리의 입술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매년 12월, 보릿고개 직전에 열리는 대규모의 부족 회의는 이런저런 이해관계로 얽힌 일곱 부족이 전부 모인다. 그들은 수평적이며, 기본적으로 불같은 성정의 소유자가 많아 갈등은 필연적이었는데, 그 때문에 부족 회의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전통처럼 지켜졌다.

칼이나 무기를 잡지 않는 것이다.

스카리의 등 뒤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자리히가 으르렁거렸다.

“지금 해 보자는 거냐?”

“못 할 거 있나.”

“무치.”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발레리아와 사피히를 보며 배가 찢어져라 웃던 히바니가 무치를 향해 말했다.

“하여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싸움판만 났다 하면 저래 겁을 모르고 심각하게 만들지.”

“할멈, 할멈이 망령이 들어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그때였다.

[네놈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그들의 머리 위를 휩쓸었다. 그러나 노즈윈드인들의 시선을 훅 잡아끈 것은 그들의 귀에는 그저 롸롸롸롸롸롸로 들릴 뿐인 사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캬르릉! 하는 소리였다. 힘차게 뽑힌 벼린 검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공주님과 이멜다 양을 놔라!]

빈즈 경은 제게 쏠린 시선에 소설 속 용자가 된 것 같은 고양감을 느끼며 비장하게 소리쳤다.

[우리는 로리아에서 온 용맹한 기사다! 공주님과 이멜다 양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빈즈 경의 발검은 분명하게 분위기의 반전을 불러왔다.

빈즈 경이 바란 방향으로는 아니었다.

이제까지 별생각 없이 지켜보던 노즈윈드인들의 표정이 싸해졌다. 발레리아와 사이 좋게 머리채를 나누고 있던 사피히마저도 살짝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주 잠시 후, 그 사실을 알아차린 빈즈 경은 조금 당황했다.

‘어라.’

그가 원했던 그림은 비장하게 외친 그의 모습에 저들이 놀라 멈추는 것인데, 결과는 비슷했지만 어째 온도가 달랐다.

“오늘 해 보자고?”

마르틴 경과 대치 중이던 미미아윈 전사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물론, 빈즈 경은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눈칫밥으로 알아차렸다.

‘이게 아닌가 본데.’

빈즈 경은 슬슬 눈치를 보며 칼을 내렸다.

‘환장해 버리겠네….’

자리히는 한숨을 푸우우 하고 내쉬며 입술을 털었다. 저원인들은 정말로, 그들의 스트레스의 원흉이었다. 아니, 수많은 원흉 중 하나지만 최근에 그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나 할까.

세 걸음 뒤쪽에 서서 턱을 괸 채 피식피식 웃으며 지켜보던 라헤가 술잔을 비우며 물었다.

“작년에는 심심하게 지나갔는데, 올해는 한 판 하는 거야?”

“라헤, 가만히 있어.”

“자리히, 난 미미아윈의 딸보다는 그래도 공주가 더 귀엽다고….”

이래저래 피곤해졌다는 표정으로 눈을 굴리던 파라윈인들도 라헤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미미아윈과의 친분은 도탑지만, 몇 달이나 그들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안녕, 안녕, 하고 귀염을 떨던 공주에게도 나름의 우의라는 게 있다.

뭐, 일단, 다른 것보다도 미미아윈 놈들이 그들을 노려보는 게 가장 별로였달지.

고조되는 긴장감을 속에서 히바니가 짜증이 난다는 투로 들으란 듯 구시렁거렸다.

“샤페이 년이나 저년이나, 그년이 그년이지. 뭘 그게 모욕이라고 유난이야, 유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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