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쪼매난 게 눈깔을 저렇게 뜨는데? 점마가 니가 나불댔던 저원의 그 점마냐? 두 명이라더니?”
발레리아는 반의반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만 쥐고 있으니 침상 아래로 발을 내리고 일어선 스카리가 여자에게 말했다.
“그래, 저원에서 온 공주. 너희에게도 손님이지. …발레리아, 지금 신경 쓸 것 없는 여자다. 나중에 부족 회의가 시작되면 보게 될 테니.”
끝말은 발레리아에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신이 없던 발레리아에게 그의 말은 완벽하게 곡해되었다. ‘저원에서 온 공주이며 손님이고, 발레리아라 하는데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여자다.’로 해석되고 만 것이다.
발레리아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나를 뭐라고 소개한 거야?’
발레리아는 그와 그녀가 결혼할 사이라 알았다. 스카리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도 그녀는 그와 스카리가 사랑하는 사이라 믿었다. 고작 몇 주지만 그렇게 행동해 오지 않았던가.
‘저원의 공주라고? 손님?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그가 그녀를 조금이라도 배려하고 존중했다면 조금 전 제가 밤새 나뒹굴었다 실토한 여자에게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손님이며 공주라 소개해선 안 되었다. 발레리아의 머릿속에서 그가 그녀를 이렇게 소개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저 여자에게 그녀와 자신의 관계를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발레리아는 벌벌 떨리는 손끝을 오므리며 띄엄띄엄 말했다.
“스카리, 우리, 봄에, 네가, 악속을….”
화가 목구멍까지 꽉 차올라서, ‘봄에 우리 결혼하기로 약속했잖으냐.’ 하는 질문조차 엮을 수가 없었다. 끝에 가서는 자신이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수치스러워 말끝이 삭아 들었다.
벗어 두었던 옷을 집어 들다 말고 고개를 든 스카리가 되물었다.
“약속?”
스카리는 마치 전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약속을 말이지?”
“봄에, …한다고.”
“……?”
“혼인을….”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였다. 알아듣지 못한 스카리가 살짝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발레리아는 도리어 제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이 남자가 지금 장난을 치는 건가? 하지만 스카리가 지금 그녀와의 약속을 모른 체하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안 되었다.
“봄에, 우리, 혼….”
막 그녀가 용기를 내어 혼인하기로 했지 않으냐 물으려는 찰나였다. 한 남자가 유르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피히, 밖에 난리가 났다. 다들 인났나?”
그 사내는 키가 스카리만큼 컸으나 몸집은 조금 작은 회색 눈썹의 전사였다. 눈가에 문신이 흉악하고 목소리가 몹시 낮아 위협적으로 들렸다. 그는 사피히의 수전사인 무치였다. 잠시 그녀를 보던 스카리가 ‘나가서 이야기하지.’ 하고는 어슬렁어슬렁 떨어진 짐을 챙겼다.
억양이 너무 세서 알아듣기 힘든 노즈윈드어는 계속 들렸다.
“테카스빈의 바흐트만 금마까지 전부 도착했다. 오늘 저녁에 예정대로 가나? 인나, 인나들.”
아무렇게나 떨어진 코트를 주워 입은 사피히가 아픈 머리를 문지르며 크게 하품을 했다.
“직접 왔대? 창자가 배배 꼬였다더니. 명줄도 참.”
“나캄코니보다는 그래도 금마가 낫지 않나. 스카리, 니는 이제 가나?”
발레리아는 숨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녀는 공주고, 품위를 잊어선 안 된다. 그렇게 애써 침착하게 자신을 억누르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듣다 보니 귀에 드는 한 단어가 있었다.
“사피히, 너도 정신 챙기고.”
사피히.
…사피이?
아마도 저 여자의 이름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이었다.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생각하던 발레리아는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에 입술을 벌렸다.
“사피…사페… 이?”
그러자 사피히가 고개를 돌려 발레리아를 보았다.
“뭐, 나 부르나?”
세상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 계집애가 샤페이였던 것이다. 그러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스카리 홀트 이 새끼가 그새 전 연인을 만나 바람이 난 것이다. 저에게는 전 연인 따위 별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는 양 굴어 놓고, 이렇게.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없던 일인 양 치부해 버린 것도 그래서였던 것이다.
발레리아의 사고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징검다리를 뛰었다.
“아… 피곤해 뒤질 거 같다야….”
“작작 좀 묵지. 속 괜찮나?”
“스카리 임마가 눈까리 희번뜩하게 부라리는데. 질 것 같나.”
사피히는 스카리를 보며 피식 웃었고, 스카리는 딱히 별 반응은 없었으나 저들의 대화를 우습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런 두 사람을 모습을 지켜보는 발레리아는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세상에, 남편이(아직은 아니지만) 전 애인을 만나 바람나고 소박맞는 비참한 일이 이 로리아의 공주에게 벌어지다니.
위신이 떨어져선 안 된다, 체면을 지켜야 한다, 그 일념만으로 안간힘을 쓰고 버티던 발레리아는 결국 인내심의 바닥을 보았다.
성큼성큼 걸어간 발레리아가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성에 몸을 뒤로 살짝 뺀 스카리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뭔가를 묻기도 전에 발레리아는 홱 돌아 나갔다. 그리고 유르트를 벗어나기 전, 근처에 놓인 장식용 물건을 손에 집히는 대로 바닥에 내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야?’
얼이 빠져 있던 사피히는 조금 늦게야 발끈하여 일어섰다.
“저 기집애가 저원에서 왔다는 금마 맞나? 싹수가 왜 저런데?”
스카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화를 내는 것조차 귀엽기는 했지만 이해가 안 되기는 매한가지다. 그가 하룻밤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술자리를 갖고 잠든 것이 화낼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곱씹다가, 발레리아를 따라 나가기 위해 코트를 주워들었다.
그가 코트를 걷어 내자 코트를 머리끝까지 덮고 잠들어 있던 그리카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어 자리히가 유르트로 되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공주가 화가 났던데.”
지독한 숙취에 바람을 쐬고 있었던 자리히는 조금 전 무시무시하게 성난 얼굴로 돌아간 공주를 본 참이다. 반대편에서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부터 시끄러워 머리가 앵앵앵앵 하나…. 내 잠 좀 자자, 좀 자자.”
졸음에 취한 음성이었다. 그는 유르트 구석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던 미미아윈의 전사였다.
“깼으면 재깍 인나, 타트람.”
“해는 왜 또 뜨나.”
사피히가 타트람의 옆구리를 발로 굴리며 말했다.
“무치, 시원한 물 좀 갖다 점마 정수리에 쏟아라.”
그쪽으로 힐끔 눈길을 주던 자리히가 다시 물었다.
“너만 보면 실실 쪼개던 저 쥐방울만 한 공주가 왜 저러는 건데?”
자리히가 아는 공주는 스카리에게 홀딱 빠져 있다. 스카리에게 들러붙는 꼴을 보면 그런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눈만 마주쳐도 온 얼굴이 화색이 되어 헤실헤실 웃어 대니 처음에는 저원 출신의 여자라는 게 못마땅하다 했던 녀석들도 ‘아, 뭐, 어쩌겠냐.’ 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지금 유르트 안에서 공주의 심기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미하게 고개를 저은 스카리는 자리히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뭐야, 대체?’
나가 버린 스카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리히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리카를 깨우러 걸어갔다. 사피히가 쏘듯 물었다.
“아까 그 저원의 여자는 왜 데려온 건데?”
“둘이 흘레붙은 지 꽤 됐으니까 그러려니 해라. 그리카. 너도 일어나라. 이제 아침이야.”
그 말을 들은 미미아윈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뭐?”
그들은 어제저녁 저원인들이 함께 왔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단순히 ‘그들에게 선물을 준 저원 사람들이 함께 왔고, 대부족 회의가 시작되면 소개할 것이다.’ 정도로만 말이다.
“흘레붙어?”
“어.”
“농담하나?”
“나야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사피히가 아는 한, 스카리는 심할 정도로 까다로운 사내였다. 파라윈의 그 수많은 여자들의 구애에도 눈썹 한 번 까딱이지 않았던 놈이다. 그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건 알지만 어찌 보면 병적이다 싶어 저 녀석은 평생 여자한테 정은 못 주겠구나 믿어 의심치 않았더랬다.
‘이거 내가 술이 덜 깼나.’
사피히의 의혹을 고스란히 입 밖에 낸 것은 타트람이었다.
“…취향이 뒤집혔나? 참말로 저원에서 온 것처럼 생겼든데, 칼이나 쥐나?”
“칼은 무슨. 어쨌든 부족 회의 때 스카리가 소개해 줄 거다.”
자리히는 강제로 그리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그리카를 부축해 나가려는 찰나였다. 사피히의 손이 그리카의 어깨를 딱 붙잡았다.
“자리히, 니는 좀 더 세세하게 나불대고 가라.”
***
해에 한두 번 방문하는 까 포르투앙은 몇 개의 협곡과 평원이 맞닿은 지형이었다. 저 먼 곳을 날아오르는 매와 작은 새들을 얼마간 응시하던 그는, 그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이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스카리.”
이곳에서 만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길게는 몇 년, 짧게는 1년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도 내심 반가운 이들이 많았다.
“얘기 들었다. 저원 녀석들에게서 크게 얻어 냈다고?”
그들은 주로 파라윈이 이번에 가져온 물건들에 대해 말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저원 녀석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던데. 너희가 데려온 거지?”
“우리의 손님이고, 곧 너희의 손님이 될 테니 너희 쪽 녀석들에게도 미리 경고해 둬라.”
“저원인들이라니. 궁금해지네.”
적당히 그들을 상대해 준 스카리는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지겨워질 무렵 그들을 지나쳐 유르트로 향했다.
사실 발레리아가 그에게 화를 내며 돌아간 것 때문이 아니라도, 그는 오늘 부족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발레리아에게 전해 둘 말이 있었다.
이곳에 오는 길에 몇 가지의 설명과 함께 발레리아에게 언질을 하기는 했지만, 여정이 고되어 그녀가 제대로 듣지 못했기 대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대부족회의가 열릴 것이고, 그 전에 말해두는 편이 나았다.
처음 그녀를 파라윈에 두고 오려던 마음을 바꾼 건 이곳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어차피 올해의 부족 회의에서 파라윈은 그녀가 그들에게 준 물건을 나눌 것이기도 했고. 그녀 덕에 많은 부족들이 보다 쉽게 이번 겨울을 나게 될 것이었다. 발레리아도 그 자리에 참석하여 수혜를 입는 타부족민들에게 최소한의 존중과 감사를 받을 자격은 있었다. 안전을 위해서도 공연히 사람들에게 보이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스카리를 맞이한 것은 텅 빈 유르트였다.
‘…….’
두꺼운 코트를 벗은 스카리는 화로의 불부터 확인했다.
아예 유르트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인지 불씨가 약했다. 양탄자 위에 가부좌를 하고 앉은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야영지 근처에 있다면 괜찮을 터이니 별 염려는 들지 않았지만 미미아윈의 야영지까지 저를 찾아왔던 발레리아를 생각하니 약간의 노파심이 들었다.
곧 스카리는 하품을 하며 지나치는 전사를 불러 물었다.
“발레리아는?”
“아침에 널 찾아다니던데.”
화가 난 채로 떠난 이후 보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직접 찾으러 나갈까 하했던 스카리는 마음을 바꾸어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발레리아가 홀로 돌아다닐 수 있는 반경은 좁았고 부족 회의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정작 그를 찾아온 것은 발레리아나 그녀에 대한 소식이 아닌 그리카였다. 그리카는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가장 먼저 잠들었다가 가장 늦게 깨어난 사람이다. 자리히의 손아귀에 이끌려 나온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침 기도를 올리러 큰 불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그다지 달갑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아까, 저 앞에서 플로끼를 마주쳤는데.”
플로끼는 다히윈의 대표자였다. 부족장은 아니지만 부족 회의에서는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자이다. 샤페이의 사건 이후 다히윈과 파라윈은 미묘하게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다히윈의 부족장은 부족 회의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제법 되었다. 샤페이를 받아들인 것이 그자이고, 그의 아래 전사가 파라윈의 보고를 털어 가려 했던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그에게 머리 숙였으니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무슨 일로?”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너를 따로 만나고 싶다는데. 저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하기에 너한테 전한다고 했어.”
스카리는 약간의 짜증스러운 내색으로 턱을 매만졌다. 잠시 기다리던 그리카가 물었다.
“가서 거절할까?”
“아니.”
무릎을 짚고 일어선 스카리는 마지못한 투로 말했다.
“가 보지. 그리카, 너는 나가서 발레리아를 찾아봐라. 혹시 내가 늦어진다면 그녀를 준비시켜서 대유르트로 데리고 와.”
유르트 안을 쭉 둘러본 그리카는 그러마 했다.
***
발레리아는 이멜다가 쓰고 있는 조금 떨어진 곳의 유르트에 와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털모자를 집어 던지자 적갈색 머리칼이 부하게 일어났다. 이멜다가 공주님이 그러시면 안 된다며 그녀의 머리를 허겁지겁 정리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발레리아의 손은 극심한 충격에 떨리고 있었다.
[공주님?]
이멜다가 염려스럽게 부르는 목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스카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했다.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난 한 달여간 그들은 정말로 연인보다 가깝게 지냈고, 그녀는 그에게서 애정마저 느꼈다. 그랬는데 저를 이따위로 대우할 줄은 몰랐다.
다른 여자랑 잤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저를 저원의 공주, 파라윈의 손님이라며 멀리 대한 것부터가 가슴 미어지는 배신감을 불러왔다. 심지어 전 애인 앞에서였다. 제가 혼인을 약속한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듯한 표정까지.
그런 것들이 되감기고, 되감기고, 되감겨서 끝내 치 떨리는 결론이 내려졌다.
또 당했다.
이 공주가 혼인 빙자 사기를 당하고 만 것이었다. 첫 만남부터 그들을 등쳐 먹으려던 야만인이라는 것을 잊고 믿음을 주어 또 이런 꼴을 당했다.
이멜다가 염려스럽게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니, 얼굴이 왜 그래요. 공주님.]
발레리아는 이멜다의 표정으로 말미암아 제 얼굴이 얼마나 비참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눈물을 꾹 참아 낸 발레리아가 이멜다를 끌어안았다.
[이멜다. 으.]
수치스러워서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까 전에 보았던 여자를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지는 듯하였다. 샤페이라는 계집애. 가장 분한 건 지금도 그녀는 질투가 난다는 것이었다. 이 순간까지도 자신이 뭔가를 잘못 본 것은 아니었을지, 자신을 의심하고 싶은 알량한 미련이 분했다.
한참 눈물 대신 신음만 삭이며 이멜다를 붙들고 있으려니 래리 경과 기사들이 찾아왔다.
[어, 저기, 이멜다 양. 혹시 공주님이… 아니, 공주님?]
그들은 저 밖에서 파라윈의 전사들이 발레리아를 찾고 있는 걸 보고 이상하다 싶어 이멜다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미 이멜다와 찰싹 붙어 앉아 있으니 뜻밖이다 싶었다.
[어, 여기 계셨습… 어?]
묻던 래리 경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들의 공주님이 울 것 같은 새빨간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마르틴 경이 약간의 당혹감을 드러내며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입술을 앙다문 발레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노즈윈드인들이 공주님께 무슨.]
물끄러미 발레리아의 기색을 살피던 이멜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런데 경들은 왜 공주님을 찾아요?]
[아니, 그, 바깥 얘기나 좀 전해 드릴까 하고. 코코이누 씨와 그리카 씨가 공주님이 어디 있는지 찾지 뭡니까.]
[왜요?]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카 씨는 특히나 엉뚱한 분이고….]
발레리아는 그들의 말을 죄 흘려들었다.
‘발레리아, 멍청한 년.’
잊었을까 하는 말이지만, 가끔 공주의 말버릇은 그렇다.
어쨌거나 혼인 빙자 사기를 당하고 그렇게나 마음고생을 했으면서 또 멍청하게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이 치욕이었다. 서러움에 눈물이 날락 말락 하자 이멜다가 재빠르게 그녀를 안고 토닥여 주었다.
[공주님, 왜 그러세요, 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발레리아는 이멜다를 밀어내고 일어났다.
[이멜다.]
[네, 네, 공주님.]
[편지 도구 가져왔어? 펜이나 종이, 아니, 아무거나, 뭐든.]
갑작스러운 발레리아의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멜다가 두말없이 짐 가방에서 잉크와 펜과 양피지를 꺼냈다.
먼저 로리아로 보냈던 프림 경이 아직도 회신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때의 서신조차 로리아에 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카리와 잘된 이후 발레리아는 언제 로리아에서 회신이 오든 간에 자신의 다음번 편지가 ‘별문제 없어요. 잘 해결했어요.’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너무 순진했던 것이다.
래리 경과 기사들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펼쳐지는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경들이,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본국으로 편지를 가져다줘야겠어요.]
[프림이 제때 로리아에 도착했다면 올해 안에 회신이….]
눈치 없이 옳은 말을 하려는 마르틴 경의 옆구리를 쿡 찌른 래리 경이 재빠르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공주님이 원하신다면요. 저, 공주님…. 그런데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편지는, 어떤 편지를…?]
발레리아는 이를 꽉 물었다.
막상 스스로가 어떤 편지를 쓰고 싶은지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그간 혼자 해결하려던 혼인 문제가 수포가 되었다고? 스카리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그자가 싫다고? 비로소 언니들과 친척들의 가르침이 이해가 되었다. 혼인한 사람이 다른 상대를 찾아도 모른 체하며 웃어야 하고, 그들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정신 차려, 발레리아.’
금갈색 눈동자에 그득 눈물이 고였다.
그녀가 크게 화내고 돌아 나온 후 스카리가 어찌 했나? 그는 심지어 따라 나오지도 않았다. 아직도 그 여자와 함께 있겠지.
‘이 걸레 같은 새끼….’
펜을 드는 그녀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친애하는 국왕 폐하, 나의 그리운 동생 알베르토에게.
알베르토, 석 달 만에 이렇게 편지를… 이 절륜한 걸레 같으니라고….
이 절륜한 걸레 새끼, 몸으로 공주를 홀려. 절륜한 걸레 새끼… 쓸데없이 잘생겨서 얼굴값 한다고. 그 얼굴에 넘어간 자신이 미친 것이었다.
‘친애하는 국왕 폐하’로 시작된 편지지가 ‘절륜한 걸레 새끼’로 도배가 되기 시작하니 이멜다는 황망하여 말을 잊었고, 래리 경도 사색이 되었다.
공주님이 정신이 회까닥해 버려서 ‘이 편지를 폐하께 보내렴.’ 하고 시킨다면 어떤 말로 뜯어말려야 할지가 염려될 정도였다.
그러나 다행히 발레리아는 그 정도로 이성을 잃지 않았고, 대신 다른 형태로 이성을 잃었다. 펜을 집어 던진 발레리아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저, 공주님? 어디 가시….]
[따라오지 마.]
래리 경과 기사들 그리고 이멜다마저 꼼짝 못 할 만큼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녀와 스카리의 유르트로 돌아갔다. 유르트 안은 당연히 비어 있었다. 기대도 않았는데 가슴 한편이 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 걸레 새끼가 지금 제 전 연인과 붙어먹고 있다 생각하니 다시 피가 거꾸로 솟았다.
한참 빈 유르트 안을 노려보던 발레리아는 짐들을 마구 풀어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손에 잡히는 거라면 뭐든 다 거꾸러뜨렸다. 스카리가 놔두고 간 옷은 바닥에 깔고 콩콩 뛰면서 발로 밟았고, 짐 상자 속에 든 칼이며 장갑이며, 마구 같은 것들은 하나하나 뜯을 수 있는 건 다 뜯어 집어 던졌다. 이불도 내팽개쳤다. 양탄자도 다 뒤집었다.
쿵, 탁, 와장창, 쿵, 쨍그랑, 데구루루.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를 듣고 지나던 라헤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무슨 일… 어, 공주, 여기 있었….”
[지금 건드리면 네 머리채도 같이 잡을 거야.]
라헤는 흥분으로 제정신이 아닌 발레리아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그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갔다.
라헤가 돌아간 후 발레리아의 분은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르트로 돌아온 건 결국 스카리가 아니라 라헤였다.
그녀는 더 열과 성을 다해 짐을 내던지다가 쏟다가, 스카리가 돌아와 얼마나 기분 나빠할지를 생각하고, 그래 봐야 지금 제 기분보다는 덜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주먹을 쥐고 발을 구르며 참지 못한 비명을 으으! 하고 삼켰다.
끝내 발레리아는 스카리의 짐을 뒤졌다. 그리고 날이 휜 짧은 칼을 꺼내 스카리의 베개를 모조리 찢었다. 베갯잇 속에 들어 있던 정체 모를 새털들이 휘날려 기침이 났다. 보고 놀라라지. 스카리 홀트는 감히 로리아의 공주를 기만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최소한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펄펄 휘날리는 깃털 사이로 문 앞에 선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다름 아닌 그리카였다.
“공주 여기 있다고 해서 왔는… 데.”
그리카는 불가피한 이유로 먼저 부족 회의장으로 간 스카리의 명령을 받고 발레리아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부족 회의에 데려갈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라헤에게 소식을 듣고 유르트로 돌아온 것이다. 스카리는 발레리아가 다른 부족장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기 전에 정확하게 그녀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듣기를 바랐다.
‘음….’
한데 상황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리카가 한참 찾아다닌 공주는 성격이 무딘 그리카의 눈에도 확실히 소름 끼치게 보일 만큼 제정신이 아니었다.
발레리아가 칼을 든 채로 무어라 쏘아붙이는데, 그리카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롸롸롸롸? 롸롸롸롸, 롸롸롸롸롸롸롸!
한 마리의 짐승처럼 베개를 찢어발기는 공주의 손이 지난 자리마다 깃털이 펄펄 휘날렸다.
‘어어….’
그리카는 처음으로 저원 출신 여자를 얕봐선 안 된다는 히바니의 경고에 대해 생각했다.
“그년들, 보통 년들 아니다. 생긴 거에 속아 넘어가지 마라!”
애써 정신을 가다듬은 그리카가 그녀를 불렀다.
“공주, 어….”
“나가!”
발레리아가 돌연 소리 질렀다. 깜짝 놀란 그리카는 임무보다도 그녀를 진정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나직이 불렀다.
“어, 공주… 그런데 그 전에, 잠깐, 무슨 일이….”
한참 그를 노려보던 발레리아는 그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르더니 산발한 머리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카가 머쓱하게 목을 당기는 순간, 칼을 냅다 집어 던진 발레리아가 그리카를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네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갈 거야.]
덩그러니 남은 그리카는 떠나 버린 발레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안 되겠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공주를 저런 상태로 부족 회의에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유르트에 남아 전전긍긍하며 서 있던 기사들과 래리 경은 나름 심각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뭔가 큰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래리 경은 원래 걱정이 많았으므로 망상은 끝이 없었다. ‘이자들이 우리를 제물로 바치기라도 하려는 건가?’, ‘이자들이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었나?’.
그러는 동안 이멜다는 발레리아가 남겨 두고 간 양피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좋아 죽으시려던 우리 공주님이 오늘 왜 그러실까. ‘절륜한 걸레 새끼’로 도배된 편지의 내용은 상당히 곤혹스럽게 느껴졌다.
‘설마… 바람났나? 이 망할 놈이?’
그렇게 이멜다가 진실에 근접한 추측을 하고 있을 때, 유르트의 문이 홱 열리더니 찬 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되돌아온 발레리아는 놀라울 만큼 산발을 한 채였다.
[고, 공주님?]
빈즈 경이 그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머리에 깃털이 콕콕 박힌 채 산발한 공주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아니, 공주님, 왜 그러고 다니세요.]
재빠르게 다가간 이멜다가 그녀의 머리를 털어 깃털을 정리해 주려 했으나 발레리아가 단호하게 밀어냈다. 발레리아의 눈시울은 이미 벌겠다.
[이멜다, 나 진정이 안 돼. 못 참겠어.]
[예? 무슨 일이신데…]
얕게 가슴을 들먹이며 분을 삭인 발레리아가 섬뜩하게 래리 경을 노려보며 말했다.
[욕.]
[예?]
[욕이요.]
잔뜩 긴장해 있던 래리 경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니… 죄송합니다만, 예? 욕이라뇨?]
[이 사람들의 욕을 내게 알려 줘 보세요.]
앞뒤 없이 무작정 욕을 가르쳐 달라는 요구는 래리 경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불안이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주님, 그런데 대체 왜 그러시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래리 경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래리 경이 지난 두어 달 동안 부쩍 노즈윈드어가 늘기는 했지만, 욕 같은 건 특별히 배우지 못했다.
만국 공통으로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가 욕이라 해도, 그가 노즈윈드인들의 욕설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까닭이다.
[어… 음, 그러니까. 얼간이.]
[그게 무슨 뜻인데요?]
[바보 같은 놈이라는.]
[그런 거 말고, 진짜 욕 말이에요. 진짜 욕이 뭔지 몰라요?]
무능력을 지적받은 기분이 된 래리 경은 조금 위축되었다. 감기 기운이 남은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보지만 모르는 욕을 기억해 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도움을 준 건 흉흉한 기세의 공주님을 보며 슬그머니 구석에 박혀 있던 마르틴 경과 빈즈 경이었다.
[저… 공주님, 그러니까. 진짜 험한 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아주 심한 걸로. 기왕이면 죽은 노즈윈드인들이 관 뚜껑을 박차고 튀어나올 만큼 심한 걸로.]
기사들과 래리 경은 도대체 노즈윈드인들이 공주님을 얼마나 화나게 만든 건지 아연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