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랑스러워서, 이 작은 여자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을 뿐이다.
이 조그마한 여자가 장난스럽게 눈썹을 한 번 올릴 때마다 저 눈썹을 갖고 싶었고,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입 맞추고 싶었고, 흐드러진 붉은 머리칼을 한 움큼 쥐고 싶었다. 엉망으로 제게 깔려 울음을 터뜨리는 걸 보고 싶기도 했고, 반대로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에 취해 야살스레 헐떡이는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우리, 혼인은?”
발레리아가 물었다. 그녀의 턱 언저리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던 스카리가 손끝을 멈추었다.
“혼인.”
“응.”
발레리아는 내심 긴장했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던 스카리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그게 중요한가?”
게슴츠레 그를 올려다보던 발레리아의 눈살이 가느스름하게 찌푸려진다. 그녀의 눈두덩을 엄지로 꾹 쓸어 누른 스카리는 달리 물었다.
“내 아이를 가지고 싶나?”
발레리아는 그의 말을 천천히 해석했다. 그리고 막 이해하였을 때, 불현듯 스카리의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움켜쥐었다. 그것만으로도 발레리아는 잠시 숨을 멈추어야 했다. 손길 닿는 것만으로도 젖어 들 것만 같은 흥분감이 일어났다.
“여기로, 네가 내 아이를 낳고, 우리 부족민 중 하나가 되어, 쭉, 나와 함께 있고 싶다는 건가? 고원에서 네가 살아남을 자신이 있나? 그 어떤 역경에도, 포기하지 않고, 달아나지 않고.”
발레리아는 그의 발음이 조금만 빨라지고, 조금만 흐트러져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스카리는 그것이 실로 아쉬웠다.
스카리는 발레리아가 자신과 혼인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노라 말한 여자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이 순간 의문이 들기는 하였다. 그녀가 지금 제게 혼인을 말하는 것이 그녀가 소기에 바랐던 목적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닌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해도 스치는 의문은 의문인 것이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그를 올려다보는 발레리아의 금갈색 눈동자에 약간의 불안이 스쳤다.
“혼인, 안 해?”
스카리는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는 혼인을 생각한 적이 없다.
믿을 수 없는 저원의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과거를 벗어던지고 파라윈에 정착할 만큼 강인한 여자라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그 이유였다. 노즈윈드인들은 공동체 생활을 한다. 그리고 스카리는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부족장이었다. 그와 혼인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부족의 중심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파라윈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사냥을 하고, 칼을 쥐고, 가축들을 돌보고, 때로는 싸운다. 때로는 수십 일 지붕 없는 풀밭 위에 잠들기도 한다. 누구 하나 예외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발레리아는 그런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파라윈에 든 지금도, 발레리아는 저를 돕는 아랫사람들을 부린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발레리아의 태도와 발레리아를 대하는 다른 로리아인들의 태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네 고집도 고집이다. 네가 생각하는 강한 여자가 대체 어떤 여자인데? 네 어머니의 일 때문에 그래? 그런 거냐?”
오래전, 자리히가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히바니로부터 그가 까탈을 부리는 이유가 무언지 전해 듣고 왔다면서. 자리히는 반은 틀리고 반은 틀렸다. 스카리가 강한 여자를 바라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원망 섞인 반감이 불러온 비뚤어진 가치관이 아니었다.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이나. 진실은 그 반대였다. 그는 한 팔로도 어머니와 그 자식들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강인했던 아버지의 끝으로부터 배웠다. 고원은 삶과 죽음이 아주 밀접하게 접한 세계라는 것을.
아버지의 삶은 아들의 거울이었다.
아버지는 살아남지 못했고, 그리하여 어머니가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그것이 어느 만치 큰 슬픔인지 스카리는 잘 알았다. 그 역시 아버지와 같은 끝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여 바란 것이다. 만일 자신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기꺼이 웃으며 이어진 생애를 살아남을 만큼 강인한 여자가 있기를. 패배한다 하더라도 일어서 싸워 나갈 여자를,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똑바로 이 고원과 맞설 수 있는 여자를.
“너보다 강한 여자는 없어.”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너도 이제 네 자식을 볼 나이잖아.”
하여 그는 발레리아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순간이 기이했다. 그녀는 형편없이 연약했다. 손목은 툭 치면 부러질 듯 가늘고, 손가락에는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았다. 상처를 덮은 문신으로 뒤덮인 그들과 달리 발레리아의 하얀 몸은 작은 흉조차도 찾기 어려울 만큼 매끄럽기만 하다. 그런데도 이토록 뜨거운 욕망을 느꼈다.
본능이 마음대로 활개 치게 두는 삶을 살아왔으나 제 마음이 이토록 제멋대로 날뛰게 두었던 적은 없었는데, 확실하게 그는 지금 통제 불능의 상태였다.
일어나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그녀의 턱에 입 맞춘 그가 속삭였다.
“혼인, 네가 더 이상 손님이 아니라 우리들과 함께하겠다면, 나 역시 원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너는 많은 걸 배워야겠지. 지금은 시기상조로군.”
발레리아는 몇몇 단어만 이해했을 뿐이었다.
“원한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네가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럴 수 있다면.”
“어떤 의미?”
발레리아는 확실하게 지금 그의 말을 못 알아듣고 있었다. 스카리는 평소보다 갈라진 목소리로, 나직이 뇌까리고 있었는데 가뜩이나 낮고 허스키한 음성이 뇌까리듯 속삭이자 단어와 단어를 따라잡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대체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 경향이 있다.
혼인, 원한다, 배우자, 의미를 이해하다….
‘그러니까, 결혼하겠다는 건가?’
좌우로 눈을 굴리며 고심하던 발레리아가 스카리에게 재차 물었다.
“그래서 혼인해?”
스카리는 끝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애당초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그와 발레리아 사이에 오갈 수 있는 언어 수준으로는 피차의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발레리아가 조금 더 그들의 언어에 능숙해지거나, 혹은 제대로 된 통역이 가능한 이를 찾는 것이 더 빠를 터다. 에이키가 돌아온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었다. 생각한 스카리가 뜻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해서는 에이키가 돌아오면 얘기하지.”
그리고 그건 비극적이게도 발레리아의 오해를 샀다.
‘얘 방금 끄덕인 거지? 결혼한다는 거지?’
곱씹던 발레리아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에키가 뭐야?”
“에이키.”
“에이키?”
“에이키 홀트.”
무슨 단어일까, 하고 생각하며 듣던 발레리아의 금갈색 눈동자가 회동그래졌다.
“홀트?”
“내 형제지.”
‘형제가 있었어?’
스카리의 가족에 대해 그녀는 들어 본 바가 없었던지라, 발레리아는 조금 흥분했다.
“형제 있어?”
“한 명 있지. 너는 있나?”
“음… 누나 두 사람, 아래 누나 하나, 아래 오빠 하나.”
발레리아가 더듬더듬 설명했다. 유심히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던 스카리가 낮게 웃었다.
“언니 둘, 여동생 한 사람, 남동생 한 명이라는 거겠지?”
“……?”
“언니 둘, 여동생 한 사람, 남동생 하나.”
두 번의 반복 끝에야 발레리아가 실수를 정정했다.
“응, 언니 둘, 여동생 한 명, 남동생 한 사람…. 그러면, 에이키 어딨어?”
스카리는 살짝 어깨를 들먹였다. 그의 아우인 에이키는 워낙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이라 바람처럼 훌쩍 떠났다가 불시에 되돌아오곤 했다.
“언제 와?”
“…아마, 봄에는. 그때 혼인에 관해 네가 알아야 할 것들을 그 녀석이 설명해 줄 수 있을 거다.”
발레리아는 이렇게 이해했다.
‘…그러니까, 얘, 지금 봄에 동생이 오면 나랑 결혼한다는 거지?’
“정말?”
스카리가 턱을 까딱였다.
발레리아는 뛸 듯이 기뻤다. 히바니가 던지고 간 작은 돌들이 말끔하게 치워진 기분이었다. 새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와락 그를 끌어안고 쪽쪽쪽쪽 키스를 퍼붓자 스카리가 작게 웃으며 그녀의 코끝을 튕겼다.
귀엽단 듯 그녀를 바라보던 스카리가 윗몸을 들었다. 그러고는 길고 하얀 발레리아의 목덜미를 쓸다가, 허리춤에 매어 둔 끈을 풀어냈다. 배화교도인 그들은 모두 긴 가죽끈을 가지고 다닌다. 기도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보호의 상징이기도 했다.
스카리는 긴 끈을 풀어 발레리아의 손목에 감아 주었다. 그녀의 손목은 너무 가늘어서, 다섯 번이 넘게 감겼다.
“올겨울 그분의 가호가 네게 더 필요할 테니.”
기울어 온 스카리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입술을 맞붙인 채 느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그녀의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켰다. 세상은 핑크빛이고, 이 손목에 감긴 끈은 마치 혼인 전 주고받는 예물처럼 느껴졌다.
“스카리, 귀여워.”
발레리아가 속삭이자 스카리가 해괴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두꺼운 눈썹을 당긴다. 그럴 만도 했다. 어디 이 거구의 남자에게 귀엽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그러나 발레리아는 그가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와락 그를 끌어안고 단단한 가슴에 뺨을 비볐다.
***
이튿날 아침, 말끔히 쾌차한 발레리아는 눈을 뜨자마자 이멜다와 래리 경과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스카리가 건네준 팔찌를 은근하게 내밀며 말했다.
[혼인의 약속과 함께 어제 이걸 증표로 받았어요.]
[정말입니까?]
이멜다는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나, 래리 경은 뛸 듯이 기뻐하며 ‘드디어 말입니까?’ 하고 소리쳤다. 기사들도 매우 기뻐하며 발레리아를 축하해 주었다.
[역시, 우리 공주님, 결국 해내시는군요! 알베르토 전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온 얼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손을 비비던 래리 경이 물었다.
[아니, 그럼 날짜는 언제입니까? 그렇게 되면….]
[그의 형제가 돌아오는 내년 봄에 혼인식을 할 모양이에요.]
[형제요?]
[에에키라는 이름이었는데, 형제가 있었나 봐요. 조금 기다려 봐요. 너무 채근하는 건 이쪽이 급해 보이잖아요. 요즘은 특히나 파라윈 사람들이 동절기 준비로 바쁜 것 같고….]
발레리아는 제법 파라윈의 안주인 행세를 하며 그들을 염려했다. 래리 경은 콧대가 단숨에 높아진 그들의 공주님을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공주님. 공주님께서는 분명히 잘 해내실 겁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공주님이 되시겠네요. 노즈윈드인과 혼인한 첫 번째 공주님으로요.]
이멜다가 한숨을 섞어 웃으며 추켜올렸다. 싱긋 이멜다에게 웃어 준 발레리아는 설레는 마음을 꾹꾹 담아 눌렀다.
‘일단은 해결된 거네.’
먼 길을 돌고 돌았지만 스카리와 결혼하게 되었으니 전부 다 해결된 셈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마르틴 경이 말했다.
[아, 그러면 프림 경이 헛고생을 한 게 되었군요.]
[뭐,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잘 풀렸으니까요.]
처음 스카리에게 혼인을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본국에 전달하라 보냈던 기사를 생각하면 약간 미안하지만, 어쨌거나 좋은 게 좋은 것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 결혼한 친척들이 불쌍하고 가련해질 지경이다.
그러나 사건은 보름 후에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