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28)

어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머리 위에 내동댕이쳐진 찢긴 치마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감싼 것은 옷이 아니라 스카리의 코트 한 벌뿐이었다. 흰 깃털투성이의, 묘하게 알싸한 향이 배어나는.

스카리가 그의 옆에 서 있던 전사에게 무어라 말하자, 전사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열리는 문틈 너머로 하얀 눈 덮인 풍경이 잠시 보였다. 로리아는 온화한 기후에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서, 눈을 보기 힘들었다. 닫히는 문을 바라보고 있으니 스카리가 다가와 그녀의 뺨을 두드렸다. 일어나라는 건지. 어디 감히 공주의 얼굴을 때려? 습관처럼 일어나던 생각은 그의 따뜻한 눈빛에 중탕된 마시멜로처럼 녹아내렸고, 얼굴은 다시 발개졌다.

무심하게 저를 보던 그 남자가 맞는지, 꿈인 것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다.

밖으로 나갔던 남자가 먹을 것을 가지고 돌아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발레리아는 그제야 제 뱃가죽이 등에 붙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찢기다시피 한 치마를 더듬더듬 당겨 그의 코트 아래에서 다시 입으려 하자, 그가 반대편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새 옷을 가져다주었다. 누가 입었던 건지도 모를 것을 어찌 입으라고? 그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내색이었다.

발레리아는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고 뾰로통하게 옷을 입었다. 쉽지는 않았다. 온몸이 두드려 맞은 듯 아프기도 했고, 어젯밤 하도 그가 빨아 대어 왼쪽 젖꼭지가 잔뜩 부어 쓰라렸다.

“먹어라.”

다독이듯 그녀의 머리를 두드린 스카리는 이내 식사와 그녀만 남겨 둔 채 다른 전사들과 함께 돌아 나갔다. 처음부터 그렇게 다정했던 사람인 양 익숙하게 헤집는 손길이었다. 발레리아의 얼굴은 서서히 붉어졌다.

발레리아는 꿈같은 기분에 잠긴 채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르트의 문이 살짝 열리더니 찬 바람이 들이닥쳤다. 누군가 하고 보니 밤새 한숨도 못 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멜다와 아연한 래리 경과 그 뒤로 머쓱하게 서 있는 기사들이다.

[저… 공주님. 들어가도 됩니까?]

마치 자신들이 몰래 잠입이라도 한다고 착각 중인 것처럼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그들의 얼굴로 말미암아 발레리아는 잊었던 현실을 되찾았다.

로리아인 일행들은 축제 중 갑자기 스카리에게 달려든 공주님과 그런 공주님을 안고 가 버린 스카리를 목격하고 대체 이게 어찌 된 건지, 말려야 하는 건지, 막아야 하는 건지, 끼어들어야 하는 건지, 끼어들 수나 있는 건지, 하는 혼란 속에서 밤을 지새웠다.

십중팔구 뭔 일이 날 분위기였고 뭔 일이 났다. 기사들은 이멜다가 ‘공주님이 무슨 생각이 있으실 거예요.’ 하고 막지 않았다면 지난 새벽 검을 뽑아 들고 달려와 공주 구출을 시도했을 것이었다. 일단 심정적으로는 말이다.

발레리아는 조금 부끄러웠으나 솔직하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대충, 스카리랑 잤다고.

[그렇게 됐어요.]

[아니, 그러니까….]

이야기를 마쳤을 때 래리 경은 턱이 빠진 것처럼 입을 벌렸고, 기사들은 왠지 계면쩍어했으며, 이멜다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뻔뻔한 척 말했지만 술까지 다 깬 지금 발레리아가 민망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라서 이렇게는 덧붙였다.

[어쨌거나, 처음부터 저자와 내가 함께하게 될 거라고 해서 온 건데….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듣던 래리 경은 한참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만 뻐끔거리다가, 이내 감탄의 색을 비치며 손뼉을 쳤다.

[아니, 그니까, 공주님께서, 저 야만인을 꼬신 겁니까…?]

발레리아의 귀가 뜨거워졌다.

꼬신 건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카리를 원해 어쩔 줄 몰라 했던 건 공주인 그녀였고, 스카리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사실 발레리아는 잘 모른다. 그녀가 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뿐이었다.

나부끼는 눈송이가 바람에 실려 하늘거리던 지난밤, 눈이 마주친 순간의 기묘하던 감정은 터지기 직전의 화약처럼 위태로웠고, 그녀는 그에게 안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랬다는 것이다.

술김에 저지른 일이라, 지금 생각하면 ‘채신머리없게 왜 그랬지.’ 싶었지만, 솔직히 행복했고 후회는 없었다.

발레리아의 온 얼굴에 뜨는 얕은 설렘을 알아차린 이멜다는 낯선 유목민의 유르트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복잡한 심경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우리 공주님을… 그래요… 이렇게 된 거, 몸으로라도 꼬셔요…. 일단 꼬시는 게 이기는 거죠.]

[그런 큰 뜻이셨습니까, 공주님…!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녀가 스카리에게 홀딱 빠진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기사들은 다른 의미로 그녀를 칭찬했다. 그게 더 낯간지럽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곧 염려를 놓지 못한 이멜다가 넌지시 물어 왔다.

[그러면 공주님, 스카리와 결혼하게 되시는 거죠?]

[아, 맞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까?]

래리 경이 거들며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몹시 흥분한 얼굴이었다.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잘 풀리도록 해 봐야죠.]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배 속이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양 볼을 붉힌 발레리아는 힐끔, 화로 너머의 작은 상자를 보았다. 스카리가 두고 간 하얀 털의 코트가 걸려 있다. 저를 감싸 안던 그 넓고 딱딱한, 하지만 뜨거웠던 품이 떠오르니 가슴이 병 걸린 것처럼 뛰었다.

좋다는 생각뿐이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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