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자는 안 보이네요. 사람이 많아서 찾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제가 찾아볼까요?]
[아니, 그냥… 구경이나 하자.]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신이 나는 듯 어깨를 들썩대던 래리 경이 물었다.
[누굴 찾습니까? 스카리요? 좋은 생각이라도 나셨습니까?]
발레리아는 아직 래리 경에게는 고백하지 못했으므로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이멜다는 킁, 하고 콧방귀 소리를 내며 빈정거렸다.
[신경 꺼요. 필요하면 공주님이 알아서 다 말해 주실 테니까. 싫다고, 싫다고, 돌림 노래를 하더니 살판났네요. 하나만 해요, 모름지기 사람이 지조가 있어야지.]
[아니, 뭐….]
[기사님들을 봐요, 얼마나 한결같아요? 머리에 근육만 차서.]
이멜다가 말을 듣고 보니, 저만치서 노즈윈드인들과 같이 춤을 추며 노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도 어느새 저자들의 인사말을 배웠는지 연신 호쉬! 호쉬! 외쳤는데, 기사라 그런가? 꼭 기합을 넣는 것처럼 들렸다. 우스꽝스러웠다.
그 후 적당히 배를 채운 그들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독특한 분위기의 축제를 관망했다.
희한한 장대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이 날씨에도 웃통을 벗고 다니거나 털 조끼만 입고 다니는 몸매가 훌륭한 남자들도 많았다. 다투는 사람도, 술에 취해 하느작대는 사람도 보인다.
[으히히히, 흐히히.]
래리 경은 특히나 술이 약했는데, 웃는 주사가 있었다. 발레리아는 래리 경의 주사마저 형편없이 말랑하다 생각했다.
[제 인생이 말입니다, 공주님….]
뻔하디뻔한 하소연을 늘어놓는 주사도 있는 듯하고.
[어릴 때부터 진짜 진짜 저는 열심히 살았는데 말입니다, 공주님…?]
발레리아는 주절주절 늘어놓는 래리 경의 한탄을 절반쯤 흘려들으며 ‘어머, 그래요?’, ‘네에, 그렇구나.’ 하고 대꾸해 주었다.
술 단지를 절반 비운 것으로 만취한 래리 경은 오래지 않아 훌러덩 뻗어 버렸다. 이멜다가 투덜거리며 그가 다른 노즈윈드인들에게 밟히지 않도록 끙끙 끌어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러는 동안, 발레리아는 체통도 품위도 내려놓은 채 술 단지를 입에 가져다 대고 술을 홀짝이며 생각했다.
‘스카리… 없네.’
아직 그는 보이지 않았다.
즐거움은 주변 사람들의 몫이고 심란함은 공주만의 특권인 모양이다.
타는 불길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못된 년. 아무리 생각해도 노즈윈드인들의 여신은 쓸데없이 이 땅에 스카리 같은 남자를 내려 이 공주에게 시련을 주는 못된 년이다. 불경해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로리아인이니 행운의 성인이 잘 보우해 주실 터였다.
발레리아가 스카리를 발견한 것은 술 단지를 절반 정도 비워 냈을 즈음이었다. 술기운까지 더해져 점점 울적해지고 있던 차였다. 스카리는 나타나자마자 단숨에 눈에 띄었다. 비단 그녀가 그에게 반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황금색 가면을 쓴 소년을 목말 태운 그가 나타나니 무질서하게 어울려 놀던 사람들이 길을 만들어 냈다. 그는 놀랍도록 하얀 깃털로 만든 털 코트를 입고 있어 아름다운 은발이 색이 바랠 정도였다.
가슴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세상은 어느덧 밤. 스카리가 선 곳만 낮처럼 밝아 보인다. 스카리를 뒤따라 들어온 십수 명의 하얀 털옷을 입은 사내들은 등에 나무 장작을 잔뜩 지고 있었다.
불 앞에 멈춰 선 스카리가 목말 태우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소년이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커다란 불 주위를 한 바퀴 돈다. 어떤 의식인 듯했다. 소년이 가면을 벗었다. 파라윈의 공터에서 가끔 본 적 있던 소년이었다. 장난꾸러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줄지어 서 있던 흰 털옷의 사내들이 이고 있던 나무 장작을 타는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르자, 마치 그에 응답하듯 불길이 바람을 타고 한 번 크게 일어났다.
이어 소년이 가면을 불길에 던져 넣는다.
뭘 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묻기에는, 래리 경이 만취해 뻗어 있어 그녀에게 알려 줄 사람이 없었다.
아주 잠깐, 어지럽게 뛰는 사람들 사이로 스카리의 얼굴이 보였다. 제 쪽을 보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일까. 가슴이 또 조금 죄어든다. 그가 가려졌다. 사람들이 이제까지의 무질서를 벗어나 질서 있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목소리가 겹친 노래였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스카리를 좇는 눈이 애탔다.
“…이런 건 꽤 대단하네요.”
뻗어 버린 래리 경을 수습하고 돌아온 이멜다가 드물게 칭찬했다.
발레리아의 깨달음은 자연스러웠다. 저들의 삶과 맞닿은 노랫가락 속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스카리에게도 그럴 것이다.
술 취한 한숨이 올라올수록, 눈썹 끝은 처연하게 처졌다. 저가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알베르토가 보고 싶고, 기오르지아도 보고 싶고, 언니들도 보고 싶고, 숙부님, 숙모님도, 조카들도, 사촌들도 보고 싶었다. 아니… 숙부님은 취소하자.
하지만 가장 보고 싶은 건 저 너머의 남자였다. 타향에 덩그러니 붙어 지내는 서러움이 함께 밀려와 눈가가 시큰했다. 그녀는 단지를 들고 술을 꼴깍꼴깍 들이켰다.
공주의 체면이나 체통 따위 알 게 뭐람. 야만인한테 반해 버린 순간 공주 실격이었다.
염려스럽게 그녀를 지켜보던 이멜다는 말리고 싶은 것처럼 머뭇거렸으나 다행스럽게도 말리지 않았다. 뒤늦게야 하는 말이지만 이멜다는 그때 그녀를 말렸어야 했다.
발레리아는 술이 그렇게 센 건 아니지만, 래리 경의 두 배 정도는 세다. 반 마시고 뻗어 버린 래리 경의 주량을 기준으로 제 몫으로 받은 한 단지의 포도주를 비우는 게 딱 적당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녀는 제 것을 다 비우고 마시다 만 래리 경의 술 단지를 노략했고,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취한 것 자체는 별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공주인 그녀가 몸에 밴 품위를 잊고 꺼어억 트림을 하거나, 로리아의 국왕 폐하 알베르토의 엉덩이에 점이 몇 개 있는지 깔깔대며 누설할 만큼 정신이 해이해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얘들은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당연하게도 스카리였다.
의식을 끝낸 그는 불가에서 사람들과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 발레리아는 본능적으로 그를 주시하게 되었는데, 꼴에 야만인이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있는 걸 보니 조금 더 반했다.
아, 물론, 그것도 문제는 아니다. 이미 공주는 그에게 망했, 아니, 반해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이 축제에는 여자들이 많았고, 스카리를 에워싼 사람들 중 반은 여자라는 것이다.
스카리는 쉴 새 없이 다른 여자와 뺨 키스를 했다. 아이들에게도 뺨 키스를 했다. 심지어는 남자들이랑도 뺨 키스를 했다. 축제의 한복판이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으니 사실 귓속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발레리아에게는 그게 그걸로 보였다.
‘쟤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남자였네.’
속이 끓기 시작하니 모든 게 거슬렸다.
‘웃는 거 봐, 여우처럼 꼬리 치는 거 봐.’
그가 보일 듯 말 듯 웃거나, 피식 웃거나, 그냥 웃기만 해도 이 남자, 저 여자, 저 할머니, 저 할아버지에게 마구잡이로 추파를 던져 대는 것처럼 보였다.
저한테 그렇게 키스했으면서, 감히 공주인 나한테 키스해 놓고서 아는 체도 안 하고, 사과도 안 하고.
결국 발레리아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꼴을 보고 있는 것조차도 자존심이 상했다.
“이멜다, 나 바람 쐬고 올게.”
“네? 공주님, 같이 가요.”
“래리 경이 쓰러져 있잖아. 돌봐 줘야지. 나 혼자 한 바퀴 돌고 오는 건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멜다는 원수 보듯 래리 경을 노려본 후, 염려 섞인 천사의 얼굴로 발레리아에게 당부했다.
“길 잃어버리지 마시고요.”
“응.”
발레리아는 달아나듯 인파 속으로 걸었다. 속이 진정되지 않아 숨을 크게 들이켰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안 울어, 나는 공주야. 이런 데서 안 울어.
입술을 꽉 당겨 물고, 머릿속에서 그를 떨치려 했다. 지참금 가지고 돌아갈 생각이나 해야지. 이런 생각은 그만해야지, 그만….
“공주.”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밀치다 결국 가장자리로 밀려 나온 그녀를 불러 세운 것은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왼편 좌판에 앉은 건 그리카였다.
그리카는 문신이 턱 위까지 올라와 단정한 용모는 아니지만 이목구비의 조화 자체가 제법 좋은 편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그리카에게는 꽤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파라윈에 와 처음으로 그녀를 도와주었던 노즈윈드인이 바로 그리카다.
그리카가 평화로운 표정으로 손을 들며 인사했다.
“호쉬 트리란챠 그뉴.”
고백하자면 발레리아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제 심정이 이렇게나 엉망인데, 이자들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여신 따위가 기쁘건 말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외국에 나와 그들의 문화에 횡포를 부리는 공주가 될 수는 없으니, 어색하게나마 잠긴 목소리를 감추고 미소로 인사할 따름이었다.
“호쉬, 그리카.”
“앉아.”
살짝 웃은 그리카가 손짓했다. 빤히 그의 손끝을 바라보던 발레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가 펼쳐 놓은 좌판 앞에 쪼그려 앉았다.
좌판에는 독특한 모양의 뼈와 작은 해골과 거북이 등껍질과 조인지 피인지 모를 것을 잔뜩 담은 금색 잔이 놓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납작하면서도 둥그런 화로가 자리했다.
평소에도 그리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미신을 믿는 것 같아 보였는데, 역시나인 모양이다. 그녀의 짐작대로 그리카는 여신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전해 줄지 모를 예언을 기다리며, 겸사겸사 사람들의 점을 봐 주는 중이었다.
공주가 눈에 띈 것은 그저 우연이었다.
“자.”
그리카가 내민 조가 가득 담긴 잔을 밀었다. 거절하기도 뭣해 받아 드니, 그리카는 잔 안을 쥐는 시늉을 선보였다. 발레리아는 머뭇거리며 그를 따라 했다. 조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자, 그리카가 작은 접시를 내민다.
접시 위에 수십 알의 자잘한 조가 흩어졌다. 그리카는 묘한 향기가 나는 불붙은 나뭇가지를 그 위로 휘휘 젓더니 유심히 그릇을 들여다보다가, 화로 안에 조를 쏟아 넣었다.
‘미신쟁이들.’ 내심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던 발레리아는 화륵 타는 연기에 놀라 살짝 고개를 젖혔다. 불길은 순식간에 다시 작아졌지만 방금 좀 이상하지 않았나?
그리카는 의아한 내색이나 놀란 내색 없이 불을 뚫어져라 본다. 마치 그 안에서 뭔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 후, 그리카가 물었다.
“공주, 번민이 있어?”
“……?”
“고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일 같은 거.”
발레리아는 조금 늦게야 그의 말을 이해했다.
고민이 있다면 있는 셈이다. 야만인한테 반해 버렸으니 공주 인생의 오욕이다. 스카리. 이름만 떠올려도 그가 했던 키스가 떠오르고 그날의 아득하던 기분이 되살아났다. 자매품으로 잊었던 서러움까지 다시 밀려와 발레리아는 무릎을 모으고 앉아 얼굴을 묻었다.
‘발레리아, 너 어쩌려고 이러니.’
취기가 몰려오는지 어질어질했지만 스카리만큼 그녀를 어지럽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답답한 심경에 하소연처럼 중얼거렸다.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딨겠니.]
“내 점이 공주의 근심은 덜어질 거라고 하네. 깨끗하게.”
[스카리가 날 차 버렸잖아. 지참금도 뺏겼어. 한심해. 지참금만 뺏긴 게 아니야. 내 입술도 빼앗아 갔다고. 내가 이러려고 여기 와 있는 게 아닌데….]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면 용기를 내라는데.”
[내가 너무 한심해….]
그리카가 뭐라 떠드는지는 들리지도 않았다.
생각할수록 한심했다. 허락 없이 키스한 남자에게 사과는 못 받아 낼망정, 국빈 대우를 하라 당당히 요구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혼자 반해서…
‘…술 괜히 마셨어.’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데,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정수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카, 치지 말다.”
조금 더 비련에 빠져 있고 싶었던 발레리아가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런데 다시 한번 더 가볍게 툭, 하고 그녀의 정수리에 큰 손바닥이 얹힌다. 그리카가 ‘음.’ 하며 콧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술도 마셨겠다, 기분도 안 좋겠다, 일순 욱하여 고개를 들고 ‘야, 이 미신쟁이야, 너도 공주가 우스워?’ 하고 호되게 경고하려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든 발레리아는 굳어졌다.
이 가을의 마지막 밤, 세상이 멈추는 듯하다. 시야가 눈부시게 밝았다. 새처럼 날아갈 듯한 하얀 깃털을 무수히 엮은 털 코트를 걸친 스카리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그가 허리를 펴자, 그녀의 정수리에서 떨어져 나간 손이 천천히 늘어진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은발 사이로 감히 공주를 굽어보는 청회색의 눈.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가슴이 달음박질했다.
스카리가 내리깐 눈으로 그녀를 훑었다.
‘아.’
불현듯 제가 얼마나 품위 없이 앉아 있었는지 떠올린 발레리아가 일어서려다가 어지러움에 주저앉았다. 스카리의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의 손은 오늘도 차가울 터인데, 잡힌 팔뚝에서는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스카리는 그리카를 향해 무어라 말했다. 그녀에게 말할 때와는 다르게,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거친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그만 보였다.
이 남자, 나한테 온 건가? 나한테 용건이 있나?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떨리고 설레어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돌린 스카리가 그녀를 보았다. 그러더니 살짝 턱짓하며 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을 잡은 채로.
발레리아는 이끌리듯 그를 따라 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축제의 한복판. 온갖 음악, 온갖 웃음소리, 온갖 소음이 사방을 가득 메운다. 그녀는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떤 소리도 무시할 수 있었다. 바로 코앞에 스카리의 등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손은 어느덧 미끄러져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대체, 갑자기 왜….’
발레리아의 손끝은 저절로 오므라졌다. 바람보다 더 차가운 그의 손이 뜨겁다. 저 앞에 활활 타는 그들 여신의 불길보다 더 뜨거운 것이 제 가슴인가 싶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엉겁결에 뒤따르던 발레리아가 그를 불렀다. ‘스카리.’ 조그만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소음 속으로 묻혔다. 한 번 더 불렀다. ‘스카리, 어디 가?’ 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못 들은 척하는 건가?’
서서히 약이 오르기 시작한 발레리아가 한 번 더 불렀다.
“스카리.”
하지만 그는 제 등 뒤에 발레리아가 있다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걸을 뿐이다.
설렘이 가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발레리아는 갑자기 서러워졌다. 왜 또 무시해? 왜 또 네 마음대로야? 취기로 진탕이 된 머릿속에서 간신히 서러움을 막고 있던 둑이 터졌다.
발레리아가 그의 손을 세게 떨쳐 냈다.
[놔!]
스카리는 그제야 멈추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날 다정했던 모습이나, 가끔 보였던 웃음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발레리아는 발간 눈시울로 그를 보며 말했다.
“사과해.”
자존심 상해서 다시 한번 말했다.
[나한테 네 마음대로 키스한 거 사과하란 말이야. 공주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반성은 하란 말이야.]
울음으로 목이 멨다. 눈물은 제멋대로 떨어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와 눈을 맞추자마자 가슴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창피해. 재빠르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낸 발레리아는 돌아서 인파를 헤쳐 그로부터 달아났다.
충고를 입에 달고 살았던 언니들은 언제나 옳았지만 틀렸다.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공주로 기록된들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야만인에게 반하다니? 기껏 사과하라고 하고서 도망은 왜 쳐? 하나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배우지 못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언니들도, 이모들도, 삼촌들도, 나라를 위해 결혼을 하고, 언제나 외교의 자세를 잊지 말라 가르쳐 주었을 뿐, 예의를, 화술을, 인내와 절제를 알려 주었을 뿐, 사랑에 빠지지 말라 말했을 뿐, 사랑에 빠지면 어찌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랬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잖아. 이렇게 좋아져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걷던 그녀는 미련에 붙들려 뒤돌아보았다. 무질서하게 어울리는 사람들 사이로, 가만 서서 그녀를 바라보는 스카리가 보였다. 가려졌다, 다시 보인다.
아랫입술이 떨려서 당겨 물었다.
제발, 좀 쫓아와.
저 야만인은 화난 공주를 쫓아오지도 않았다. 공주가 화가 나서 달아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애타는 마음은 서운함이 되고, 서운함은 이내 술기운을 입고 분노가 되었다. 그녀는 울고 싶을 만큼 분했고, 그 분함을 어떻게든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직후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이멜다는 아까 그녀를 말렸어야 했다. 술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해악이다.
충동적으로 방향을 바꾸어 다시 사람들을 헤친 발레리아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잠자코 그녀를 내려다보는 스카리의 멱살을 잡고 당겼다. 한껏 발꿈치를 들고는, 그의 입술에 온 힘을 다해 입 맞추기까지의 모든 것은 충동이었다.
그렇게 입술이 맞닿자, 세상의 소리가 멀어졌다.
스카리의 눈이 조금 크게 열렸다가 서서히 내리깔렸다. 발레리아는 피하지 않고 그 눈을 똑바로 보았다.
공주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 그녀는 스카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대화다운 대화조차 나눠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나 이 남자를 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에, 사실 스카리가 그녀를 좋아해 주기를 바랄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녀만큼이나 그 역시 그녀에 대해 알지 못할 테니까. 그는 한 달 반을 넘기고서야 처음으로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본 못돼 먹은 남자였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그녀가 이 순간 그와 키스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입술을 뗀 발레리아가 발꿈치를 내렸다. 미동 없이 선 스카리의 시선이 그녀를 따랐다. 백금처럼 빛나는 긴 속눈썹 아래 파란 눈만 서슬 선 듯 빛났다. 마치, 공주의 용기 낸 입맞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비참하게도.
입술을 앙 다물고 버티던 발레리아가 물었다.
“내가… 시러?”
불안에 휘말린 용기를 쥐어 짜내서.
“나 시러?”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참아 누르면서.
“스카리, 내가, 싫…”
그 순간 눈앞으로 하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입술은 다물리고 말은 자연스럽게 삼켜졌다.
이마 위로, 또 하나. 둘, 셋, 넷,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하얀 눈송이가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떨어져 내린다. 서서히 턱을 든 발레리아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아….”
무수한 눈송이가 높고 광활한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노즈윈드인들도, 로리아인들도, 어린아이들도, 나이 든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본다. 여신의 불길은 탄사에 힘입어 더욱 활활 타올랐다. ‘눈이야.’, ‘눈이 내린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높이 소리쳐 웃는 소리가 아스라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로리아의 세 번째 공주 발레리아에게 그해 시월의 마지막 밤은 마법의 밤이었다.
눈발 사이로 흘러드는 것은 스카리의 웃음소리였다. 발레리아는 홀린 듯 그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흔들리는 부드러운 은발 사이로 웃음기 어린 청회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본다. 입가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어린 시절, 잠들기 전 유모가 겁을 주기 위해 해 주었던 이야기 속의 작은 거인처럼 커다란 남자가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안아 가뿐히 들어 올렸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 팔뿐이었다. 그래서 발레리아는 양팔로 스카리의 목을 끌어안고 덤벼들 듯 키스했다. 키스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입술뿐이었다.
정중하게 서로의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었다. 무질서하게 맞물리는 입술은 뜨겁고 설레었고, 그의 목 안에는 웃음이, 그녀의 목 안에는 울음이 맴돌았다.
“으.”
그들의 여신이 떠나는 날, 공주는 한 남자에게 온몸으로 고백했다.
나, 진짜 당신 좋다고. 왜인지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진짜 당신이 좋다고.
지참금도, 자존심도, 먼발치서 황망하게 바라보던 이멜다의 ‘공주님, 체통이요!’ 하는 비명도, 찬 눈을 맞고 잠에서 깬 래리 경이 영문을 몰라 놓아 버린 넋도, 만취하여 노즈윈드인들과 어울리던 기사들의 빠진 턱도… 무엇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오늘 죽을 듯이 그에게 매달려 키스했고, 그러고 싶을 뿐이었다.
***
스카리는 발레리아를 안고 어느 낡은 유르트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입술은 쉴 새 없이 서로에게 맞물렸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맞붙기를 반복했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그녀의 입맞춤에 스카리가 꽉 그녀의 엉덩이를 쥐었다.
공주를 안고 나타난 스카리를 발견한 유르트 안의 전사들은 조금 놀란 눈으로 비켜섰다.
“나가.”
입술을 뗀 스카리가 갈라진 목소리로 씹어 뱉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발레리아는 목마른 사슴처럼 그의 턱을 쥐어 다시 입 맞추었다. 스카리는 그녀에게 키스 당하며 웃었다.
‘무슨 상황이냐.’
멀거니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전사들은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둘 유르트 밖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축제를 위해 마련되었던 이 넓은 유르트에 남은 것은 그들뿐이었다.
그가 그녀를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누였다. 그의 숨도 적이 거칠었다.
거친 손길로 두꺼운 털 코트를 벗어 던진 그가 흘러내린 은발을 쓸어 올렸다. 하얀 털 코트가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진다. 화롯가와 바투 붙어 위태로웠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제 아래 깔린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발레리아는 오는 내내 얼마나 그를 물고 빨아 댔는지, 벌써 입술이 발갛게 부풀어 있었다. 턱까지 찬 숨을 스스로 가누지도 못하여 허덕대면서,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스카리는 저 눈에 미치도록 흥분했다.
“술을 많이 마셨군.”
놀리듯 물으며 머리칼이 붙은 뺨을 두껍고 투박한 손끝으로 꾹 눌러 올렸다. 발레리아는 그 손길만으로도 작게 신음했다.
“으.”
그녀는 어지러울 만큼 좋았다. 계절은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데 가슴만큼은 고국의 여름이었다. 다시 키스하려 드는 그녀의 턱을 잡아 누른 스카리는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그러곤 감상하듯 내려다보았다.
오늘 그는 축제가 이어지는 내내 발레리아를 주시했다. 달아나는 이를 쫓는 것은 그와 같은 사냥꾼들의 본능일 것이다. 그는 발레리아가 그들의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을 보며 이유 없이 족했고, 흥미로운 듯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는 모습을 귀엽다고 생각했고, 즐기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카의 앞에 웅크린 것을 발견했을 때는 ‘왜’인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눈길이 갔을 뿐이다.
그러니, 그는 오늘 이 여자를 낚아챌 계획이 없었다.
“근심?”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공주가 고민거리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기는 하잖아.”
추운 듯 어깨를 움츠리는 그녀를 보며 별것 아닌 호의를 베풀고 싶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를 불가로 안내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어쩐지 저항 없이 그를 따르던 공주는 결국 그로부터 다시 달아났다. 그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분한 얼굴로 소리치고서. 도망치듯 사람들 사이로 멀어지는 공주를 바라보며 스카리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잡을까. 말까. 잡을까. 말까. …잡을까.
하지만 그가 결론으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시 달려온 것은 이 여자다. 그녀는 가는 손끝으로 그를 쥐고 먼저 입 맞추었다.
겁먹어 넋 놓던 눈은 어디 가고 어린 맹금류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내가 시러?”
시월의 마지막 밤.
공주는 내리는 눈발 속에 붉었다. 머리칼도, 입술도, 뺨도…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그에게 내던졌다.
‘나를 놀리는군.’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상관없이 여자는 그를 정확하게 피격할 수 있는 사수임이 분명했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발정하는 짐승처럼 흥분했다. 스스로도 놀라워 유쾌할 만큼, 이 작은 여자가 지독하게 사랑스러웠다. 허수아비처럼 가냘프다고만 생각했던 작은 몸뚱이. 한 팔로도 거뜬히 안기는 이 여자를 붙들겠다는 몸짓은 오로지 본능에 따른 것이었다.
정신은 온통 이 작은 여자를 벌리고 들어가고 싶은 욕망에 집중되었다.
발레리아는 그의 목을 죽을 둥 살 둥 끌어안고 신음했다.
“스카리, 으, 하아.”
거침없이 그녀를 일으켜 앉힌 스카리는 발레리아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털 코트를 거추장스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뜯어 벌렸다. 무두질 된 털가죽으로 기운 그들의 조끼와 치마가 드러나, 헐떡이는 그녀의 숨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그는 그녀의 조끼마저 벗겨 내고, 목까지 채워진 웃옷의 매듭을 풀어낸 후 세게 끌어당겼다. 감춰져 있던 젖가슴이 수줍게 드러났다.
갑작스럽게 살갗에 닿는 찬 공기에 발레리아가 몸을 바르작대기도 전이었다. 그녀의 뽀얀 젖가슴을 강하게 입술로 물며, 그르렁대는 듯한 거친 숨을 뱉어 낸 스카리는 지체하지 않고 발레리아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아흑!”
허벅지를 지나 다리 사이로 엄습하는 손아귀가 차가웠다. 발레리아는 화들짝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스카리는 한참 전부터 젖어 있던 그녀의 음문을 서슴없이 비벼 댔다. 거친 손아귀가 다리 사이를 통째로 쥐고 흔들어 대니 발레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조차 없었다.
“아, 아, 아앗!”
반사적으로 오므라지려는 허벅지는 그의 단단한 장골에 막혔다. 스카리는 그녀의 젖가슴을 혀로 빨아 올렸다, 단단하게 선 젖꼭지가 이에 긁히고, 뜨거운 숨결에 휩싸일 때마다 발레리아는 울음 같은 신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