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잠깐만, 이게, 무슨…! 지금 어딜 만… 아흑.]
하지만 스카리는 밀려나지 않았다. 반동으로 균형을 잃은 그녀만 떠밀릴 뿐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등은 단풍나무 기둥에 부딪혔다. 나무와 스카리 사이에 갇힌 발레리아는 듣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거칠어진 숨을 뱉어 낸 스카리가 제 목덜미를 빨아 올리는 것을 느꼈다. 스카리의 손이 그녀의 치마를 거칠게 끌어 올렸다.
“아흑…!”
목을 틀며 그의 팔을 다시 붙잡으려 했지만 손짓은 덧없었다.
“자, 잠…”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쥔 스카리가 우악스럽게 가슴을 주물렀다.
“기다, 기다리다, 기….”
뭐라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목덜미를 핥으며 올라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통째로 삼켜 버린다.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발레리아는 ‘공주답다’와 ‘얌전 빼다’를 같은 선상에 올려 두는 공주가 아니다.
정략결혼을 위해 준비된 로리아의 공주는 기실, 의외로 자유롭게 많은 것을 누리며 자란다. 많은 경험이 중요하다 여겨지는 왕실 풍토 탓이었다.
첫 키스는 어릴 적 소꿉친구였던 옆 나라 소공작과 나누었다. 몇 달간 그녀를 따라다니던 허우대만 멀쩡한 소공작이었다. 기사와 숙녀를 소재로 한 통속 소설에 빠졌을 때는 견습 기사들 사이를 살랑거리며 돌아다녀 잘생긴 기사들을 꼬시기도 했다. 밤이 새도록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손끝만 닿아도 짜릿한 관계의 스릴을 즐기면서, 은밀한 장난도 서슴없이 나누었다.
첫 키스를 하는 소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마치 처음 같았다.
눈으로만 훔칠 수 있었던 그의 입술이 야만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노략질하는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기이한 전율이 일었다. 다리 안쪽이 촉촉하게 젖어 드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 야만인, 키스도 잘한다… 까지 생각하던 발레리아가 그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기어들어 오는 것을 깨닫고 퍼뜩 정신을 차려 고개를 틀었다.
“[자, 잠깐만!] 이거, 아…! 읏! 기다리다! 기다리…!”
그녀의 외침마저 무시하고 거세게 턱을 당겨 입 맞추려는 야만인의 힘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발레리아는 그녀도 모르게 신음하며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그런데 웬걸, 꿈쩍도 안 할 듯하던 스카리가 선선히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건 발레리아의 저항 때문이 아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뺨에 이마를 기대고, 등을 크게 들먹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다그닥다그닥.
그녀를 방해, 아니, 구해 준 건 자리히였다. 그의 사촌인 마그리나도 함께였는데, 그들의 뒤로 주인 없는 여마 한 마리가 따르고 있다.
“스카리, 여기서 뭐 해.”
자리히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스카리와 나무 사이에 낀 그녀를 보고도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에 민망하게 됐네.’ 라거나 ‘이런, 남사스러운 일 중에 실례했군.’ 하는 반응은 없다. 발레리아는 자신이 너무 작아 보이지 않은 게 아닐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마그리나도 희한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한 번, 스카리를 한 번 보더니 털목도리를 당겨 올리며 하관을 가렸을 뿐이다.
노골적으로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티가 나는 스카리가 잇새로 짧은 숨을 들이켰다.
“자리히.”
“…….”
“지금 말고.”
두꺼운 눈썹을 모은 자리히는 못마땅한 눈길로 발레리아를 바라보았다. 발레리아는 미치도록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히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사 준비가 끝났어. 지금 다들 너만 기다리고 있는데, 저원의 여자와 흘레붙느라 제사를 소홀히 한다면 여신께서 아주 좋아하시겠군.”
콕 보루 경기가 끝난 후 제사를 올리는 것은 전통이다. 모든 노즈윈드인들의 제사가 으레 그렇듯 부족장과 제사장의 역할은 중요했다.
‘희한하네.’ 생각하던 마그리나가 마지못한 투로 거들었다.
“뭐든 간에, 계속 이러고 있을 건 아니잖아?”
얼마간 마그리나를 돌아보던 스카리가 이내 얕은 숨을 뱉어 내더니 천천히 몸을 세웠다. 물러선 것이다. 비로소 발레리아는 자유가 되었다. 두말없이 여마를 향해 걸어간 스카리는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런 스카리의 모습을 보며 발레리아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이대로 가는 거야?’
그는 사과 한마디 없었다. 발레리아는 그제서야 공주가 해야 할 말을 떠올렸다.
[이, 이, 파렴치한 같으니라고]
말 위에서 곧게 몸을 펴고 선 스카리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언제 그토록 짐승처럼 달려들었냐는 듯이 담백한 어투였다.
얼마간 그녀를 내려다보던 스카리는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려 반대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고삐조차 없는 말을 마치 제 팔다리처럼 움직여 쏜살처럼 멀어진다. 자리히와 마그리나가 그를 뒤따랐다. 그들은 훌쩍 울타리를 넘어 저 먼 곳의 점처럼 멀어졌다.
***
이 정신이 내 정신일까? 아니라면 누구의 정신일까? 넋을 놓은 발레리아는 기사들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 풍경은 평소보다 조금 더 소란스러웠다.
[말 그따위로, 응? 그따위로 해 봐요. 더 해 봐요. 더요.]
이멜다는 먼지떨이를 다채롭게 활용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아니면 래리 경을 먼지라고 착각했거나. 먼지떨이가 래리 경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아야, 아야야. 래리 경은 양팔로 머리를 감싸며 도망 다녔다.
[아니, 아, 아니, 여편네가 내 말은… 아야, 그만 좀, 아야.]
발레리아는 이멜다가 자신이 돌아온 것도 모를 만큼 화가 난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내가 왜 네 여편네죠? 나 아직 창창한 스물여덟이에요. 그리고 말이에요. 결정은 공주님이 내리는 거예요. 결혼 물 건너간 거 우리 중에 누가 몰라요?]
[나는, 아니, 그냥… 겨울이 오면 사막을 건너기도 힘들어지는데, 지금 우리가 보낸 편지는 제대로 도착했는지 안 했는지도 알 수가 없고… 하니까, 오늘 분위기가 좀 좋아진 김에.]
[공주님이랑 래리 경을 우리라고 도매금으로 묶지 말아 줄래요? 로리아에서 대접해 주는 사람은 공주님뿐이고, 사태가 이 지경이 됐다고 해도 로리아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 줄 거예요. 다 됐고, 나 지금 공주님 찾으러 가야 하니까… 어머, 공주님?]
이멜다의 목소리는 손바닥 뒤집듯 간드러지게 바뀌었다. 한참 얻어맞던 래리 경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반응할 기운도 없었던 발레리아는 머쓱하게 문 앞에서 대기하던 기사들에게 가 보라 손짓했다.
[아, 공주님, 오셨습니까?]
[어….]
이멜다는 사라진 발레리아를 찾아 방으로 돌아왔다가, 래리 경이 뾰족한 수랍시고 내놓은 도망치자는 소리에 화가 나 잔뜩 성질을 부리고 있던 차였다. 오늘 경기를 통해 파라윈 사람들과 그들 사이의 분위기가 썩 좋아졌으니, 사막을 건널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청을 넣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둥 하는 소리였다.
이멜다가 재빠르게 발레리아에게 다가갔다.
[공주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뭐 하다 이제 오신 거예요?]
…내가 방금 뭐 하다 왔더라.
얼을 빼고 있던 발레리아는 비로소 조금씩 정신을 주워 안았다. 하지만 영 힘이 나지 않아 설명은 간략하게만 했다. 스카리에게 시도한 세 번째 교섭의 내용에 관하여.
래리 경은 자신이 함께 갔어야 했다 아쉬워했는데, 사실, 그가 갔다 해도 별 차이는 없을 것이었다.
[그랬는데 스카리가….]
[그자가요?]
[…거절했어요.]
거절당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이번에 한 제안은 그녀가 현재 쥐어짜 낼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수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침대로 걸어간 그녀는 딱딱한 침대 위로 쓰러지듯 엎어졌다.
가만히 그런 그녀를 보던 이멜다가 염려스럽게 물었다.
[공주님, 왜 그러세요?]
발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어뜯듯 덮쳐 왔던 입술의 감촉이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스카리. 스카리 홀트….
자리히가 나타나 방해… 아니, 자리히가 나타나 훼방… 아니, 어쨌든 자리히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이 벌어졌을 것이었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었다.
…스카리가 나한테 관심이 있었나?
발레리아의 가슴이 조금 더 크게 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이름조차 오늘 처음 안 개자식이었다. 아니, 그래, 여자라면 눈이 뒤집히는 몹쓸 새끼인지도…. 아니, 그런데 스카리는 미혼이라 하였다. 그 남자 몇 살이랬더라? 그렇게 잘생기고 매력 있는데… 아니, 내가 뭐라고 했지? 어쨌든, 이제까지 여자 많았겠지? 여자 많았을 거 같은데? 그렇게 키스를 잘하는 걸 보면… 그래서 그런가? 여자 밝히나? 그런데 이제까지는… 아니, 나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발레리아는 가죽 냄새가 물씬 풍기는 베개에 쿵, 하고 얼굴을 처박았다.
[공주님?]
말도 꺼내지 못할 일이었다. 뒤늦게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야만인 주제에 공주에게 키스를 하다니.’
그랬다. 그녀는 스카리와 키스했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했다.
발레리아의 그런 기이한 반응이 조금 전 이멜다와 그가 나누던 얘기 때문인지 염려한 래리 경이 기가 죽어 중얼거렸다.
[…공주님,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이멜다 양과 얘기하고 있었는데,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으니 아무래도… 일단 돌아가서 테스 공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웃어른들끼리 해결하게 하는 게 어떨까요…?]
[내가 애라는 거예요?]
팩 고개를 돌린 발레리아가 쏘듯 물었다. 그녀의 눈에 평소와 다른 예기가 번뜩이는 것을 깨달은 래리 경이 흠칫 놀랐다.
[아, 아니, 공주님은 아직 어리기는 하시지만… 제 뜻은 그게 아니라… 어차피 지금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저자들은 지참금을 털어먹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가능한 한 빠르게….]
래리 경이 조금 위축된 듯 말끝을 흐렸다.
…내가 왜 이런담. 뚫어저라 래리 경과 시선을 맞추던 발레리아는 이내 울상을 지었다.
나 정말 왜 이런담. 안다. 래리 경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게 정답이었다.
처음 발레리아는 자신이 이자들의 왕비가 되어 고원의 야만인들을 개화시키는 큰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게 사막을 누비는 노즈윈드인들과의 인연을 맺고 길을 여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이곳에 온 첫날 그 기대는 전부 물 건너갔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자신이 왜 여기 와 있는지조차 헷갈렸다. 지금은… 키스하던 스카리의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콩닥거렸다.
가슴아, 좀 얌전히 있어 봐! 발레리아가 스스로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그 야만인이 키스를 잘하는데, 뭐, 그게 뭐! 키스가 지참금을 돌려주니? 그만하란 말…!
그런 발레리아를 황망한 눈길로 바라보던 이멜다와 래리 경이 입술을 오므렸다. ‘공주님이 왜 저러시지.’ 래리 경은 허겁지겁 변명을 덧붙였다.
[아, 아니… 저는 다만 공주님께서 결정을 내리실 때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솔직히 벌써 두 달 가까이를 이렇게 아등바등 버티며 시간을 보냈는데…. 저자들은 우리와 우호 관계를 가질 마음이 없는 게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자와 결혼이 하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래리 경!]
발레리아가 비명처럼 소리치며 튕기듯 일어났다. 벼락같은 기세였다.
[모, 모욕적이군요! 그런 몰상식한 자와 결혼하고 싶어 이러는 걸로 보이세요? 나는 로리아의 공주예요. 외교의 의무가 있다고요. 내게 노즈윈드와의 미래가 걸려 있는데 지참금을 저렇게 코앞에서 빼앗기고 빈손으로 되돌아가면 대체 무슨 면목으로 살 수가 있나요? 저들이 순전히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당당하게 지참금을 다시 가지고 돌아가서 숙부에게 따지겠어요! 어떻게 나를 이렇게 형편없이 보내서 이런 고초를 겪게 하셨느냐고 말이에요! 내가 그자를 그렇게 쉽게 포…, 아니, 내가 지참금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 같아요?]
래리 경이 허겁지겁 변명을 주워섬겼다.
[아니, 그, 저, 그, 아니요. 당연히 아니시죠. 당연히 아니신 거 압니다. 공주님, 그러니….]
씩씩대던 발레리아가 딱딱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러곤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다 덮었다. 가만히 분위기를 보던 이멜다가 먼지떨이로 탁탁 래리 경의 머리를 때리며 몰아냈다.
[이거 봐요, 이거 봐. 우리 공주님은 항상 계획이 있고 생각이 있으시다니까요? 관 뚜껑 덮고 누운 노인 같은 소리는 그만하고 나가요, 나가요!]
[아니….]
[나가요!]
이멜다의 호통에 래리 경이 울상이 되어 나갔다.
래리 경이 떠나고도 한참을, 발레리아는 이불 속에 누워 꼼짝도 않았다. 가슴은 진정될 줄 모른다. 그런 그녀를 잠시 돌아보던 이멜다가 청소를 하는 체 그녀의 주위를 맴돌다가 슬쩍 다가와 머리맡에 앉았다.
[공주님, 정말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죠?]
[…….]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라면 저에게라도 말씀해 주세요. 공주님이 그렇게 기운 없으시니 속상해요. 오늘 경기에서 지기는 했지만, 재미는 있었잖아요?]
가죽 이불에 묻힌 발레리아는 미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스카리와 했던 키스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두렵고 절망스러웠다.
스카리가 그녀를 원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키스했을 때, 그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을 때, 그가 ‘발레리아.’ 하고 이름을 불렀을 때, 그 모든 순간에 발레리아는 가슴이 뛰었다.
‘도대체 왜.’
그 모든 순간에, 그녀는 그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미쳤어.’
이제 미친 건 로리아의 공주다.
로리아의 공주와 왕자들은 교육을 받는다. 결혼 장사가 그들의 업이니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교육의 일부였다. 혼인한 상대와 정답게 지내되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가르침은, 가장 기본적인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 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반했다. 자각이 선명해질수록 지참금의 문제도, 그가 자신에게 이제까지 얼마나 무례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발레리아의 불규칙한 숨을 알아차린 이멜다가 결국 그녀의 이불을 강제로 끌어 내렸다.
[공주님, 왜 그러세… 아니, 안색이 왜 이러세요? 정말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열이 나시는 건 아니죠?]
이멜다가 그녀의 이마와 뺨을 어루만졌다. 제 뺨을 스치던 스카리의 손길이 떠올라, 발레리아는 그녀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다.
[공주님, 왜 그래요.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발레리아가 간신히 소리를 냈다.
[이멜다, …나 어떡하지?]
[왜요, 무슨 일이신데요. 저한테는 편히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아시잖아요.]
[그 남자한테 반한 거 같아.]
공주 실격이었다. 문명국의 공주로 태어난 자신이 저런 미개하고 하등한 사기꾼 야만인에게 반해 버리다니.
[…네?]
멍한 표정의 이멜다를 보던 발레리아는 애처로울 정도로 조그만 목소리로 고백했다.
[나… 진짜 그 남자한테 반했나 봐.]
눈물이 치받치려 했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
오늘부터 발레리아에게 반했다와 망했다는 같은 말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망한 것이다. 그녀의 뺨을 짚던 손을 내린 이멜다가 한참이나 말문 막힌 얼굴을 하더니 확인 사살해 주었다.
[어머… 망하셨네요, 공주님.]
행운의 성인께서도 그녀를 가엾이 여겨 ‘너 망했구나.’ 하실 일이었다.
그날은 저녁 늦게까지 노즈윈드인들이 불 앞에 모여 어울려 놀았다. 그러나 공주의 밤은 외로웠고,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짙게 깔렸다.
잠 못 드는 공주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