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하기 어려울 만큼 부정적이고 불길한 느낌을 받은 자리히가 조금 기어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뭐 하냐?”
스카리가 대꾸했다.
“왜.”
강인한 백금색의 눈썹을 들어 자리히를 돌아보는 스카리의 표정은 어느새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매양 담백하여 그저 가소롭다는 듯 미소 띤 얼굴.
“아니….”
자리히가 떨떠름하게 말끝을 흐리자 스카리는 이내 경기장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한창 진행 중인 경기를 관전한다. 자리히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잘못 느꼈나.’
하지만 자리히가 잘못 느낀 것은 아니었다.
사실 스카리는 경기장에 시선을 둔 채로도 다른 곳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소리치는 공주. 니몬의 발상에 편승해 저들과의 경기를 제안했을 때는 분명 경기를 구경할 심산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이렇게 되었다.
새끼 기린처럼 연약한 목을 쭉 빼고 독려의 목소리를 내며, 적갈색의 머리칼을 분한 듯 쓸어 넘기고, 가누지 못한 투지로 넘치는 금갈색 눈동자로 쉼 없이 경기장 안을 좇는 공주는, 뭐라 해야 할까… 처음으로 그에게 궁금증을 일으켰다.
이름은 무엇인지. 태어나 몇 해의 겨울을 맞이했으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
그들은 졌다. 정확히는, 로리아의 기사들이 속한 팀이 졌다 해야 옳을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발레리아는 침통해졌다.
‘망국의 공주가 이런 심정이구나….’
염소 사체를 두고 한 시간 가까이 엎치락뒤치락, 말에서 떨어지고 구르고 다시 타고를 반복했던 로리아의 기사들은 우중충하게 울타리를 건너왔다. 넝마가 된 모양새였는데, 발레리아는 그마저 패잔병의 잔흔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마르틴 경이 조그맣게 사과했다. 실망한 공주님도 공주님이지만 그보다 뼈아픈 것은 가시복처럼 쏘아보는 이멜다의 눈빛이었다.
경기가 이어지는 내내 지면 죽이겠다 협박했던 공주님의 하녀는 눈이 돌아 있는 상태였고, 기사들은 진심으로 목숨의 위협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나마 가장 먼저 이성을 되찾은 건 래리 경이었다.
[아니, 뭐… 잘들 하셨네. 처음 해 보는 규칙의 경기인데 그 정도면 안 밀리고 잘 뛰었지. 이긴 거나 다름없다고!]
[정신 승리는 집어치워요, 래리 경.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꼴인 거예요.]
거침없이 쏘는 이멜다에게 찔린 래리 경이 바로 깨갱, 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담.’
뚱하니 빈 경기장에 굴러다니는 염소를 바라보던 발레리아는 푸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쉬웠지만 그녀의 기사들은 훌륭했다. 최소한 노즈윈드인들과 맞서 여러 번 역전의 기회를 노리기도 했으니까.
[그래요, 고생했어요.]
[고생만 했죠.]
[이멜다.]
이멜다가 입술을 삐죽이며 콧숨을 뱉어 냈다. 이멜다가 제스퍼 경이라고 소리쳐서 그 이름이 제스퍼라는 걸 알게 된 제스퍼 경이 사과했다.
[저희가 조금 더 열심히 해야 했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공주님. 로리아의 명예에 먹칠을 하다니.]
[아니, 친선 경기였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예요.]
친선은 갖다 버리고 목숨을 걸 기세로 응원했던 공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지만, 발레리아는 지난 것은 흘려보내기로 했다.
그들의 기분이 바닥을 친 것과 반대로 노즈윈드인 관람단들의 기분은 몹시 좋았다. 특히나 히바니가.
“퍄하!”
히바니는 꼬부라진 허리가 무색하게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진 콧대를 세우며 이멜다를 보았다. 분한 채 서 있던 이멜다가 그 시선을 알아차릴 만큼 짙은 승리감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흥….’
이멜다는 치욕스러웠다. 며칠 전 저 노파의 콧대를 뭉개 버리고, 괜찮은 식단을 확보한 승리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이멜다와 히바니는 눈길을 교환했다.
‘봐라. 우리가 이겼다!’
‘망할 야만인들이 뒤끝하고는!’
그러나 이멜다는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문명인으로서, 의기양양하게 지팡이를 짚고 다가오는 히바니에게 마지못해 엄지를 세워 주었다. 무슨 욕인가, 하며 인상을 쓰기 시작하는 히바니를 발견한 래리 경이 재빠르게 달려가 통역해 주었다.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다.’ 그런 설명을 들은 후에야 히바니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빽빽 소리만 질러 댈 때는 저년 저거 독살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한번 봐주자 했다. 어차피 그들이 이겼으니 족히 너그러울 의향이 있었다.
어슬렁어슬렁 다가온 히바니가 말했다.
“좋은 경기였다. 저원 놈들치고는 말이여.”
‘저 할망구가 뭐래.’ 문자 그대로 알아듣지 못한 이멜다가 뚱하니 보고 있으니 래리 경이 소곤소곤 통역했다.
[좋은 시합이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멜다는 콧방울을 씰룩였다.
‘어쭈? 이 할망구 제법이네?’
발레리아는 이멜다와 히바니 사이의 미묘한 냉전을 느끼며 새침하게 말했다.
“다음, 안 져오.”
“요, 밤톨만 한 계집애가 아주 눌러앉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뭐라는 거야 저 망할 할망구가?]
“욕했냐. 욕한 거냐?”
[망할 할망구 관에나 들어가라!]
히바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번엔 욕이지? 이 창자를 뽑아 버릴 년이…!”
“아님미다! 아님미다!”
놀란 래리 경이 안절부절못하며 흥분한 히바니를 이끌고 자리를 피했다. 어쨌거나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쭉 침통해 있던 마르틴 경이 계면쩍은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 저희는 꼴이 이래서….]
[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볼일들 보세요.]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오겠노라는 기사들을 향해 발레리아는 그러라 하였다. 어쩌다 보니 경기에 푹 빠지기는 했지만 경기는 경기고 용건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오늘 스카리에게 다음 제안을 할 것이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똑똑한 묘안이 있다.
그러나 스카리가 앉아 있던 방향을 돌아본 발레리아는 이내 당황했다. 어느 틈엔가 그가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아니.’
발레리아는 떠나는 기사들을 따라가며 쓴소리를 하느라 정신이 팔린 이멜다를 뒤로하고 노즈윈드인들 사이를 헤매기 시작했다.
‘어디 갔지?’
한참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돌아다니던 그녀가 스카리를 발견한 것은 울타리 밖 천막 아래에서였다. 그는 조금 전 경기에서 승리한 노즈윈드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평소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와 함께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몸집이 크고, 개중 일부는 문신과 흉터가 많아 무섭기까지 한 인상의 사내들이었던지라 발레리아는 조금 긴장했다.
한 사내와 가볍게 손을 맞잡고 포옹하듯 등을 다독인 스카리가 돌아섰다. 아마도 ‘잘했다’, ‘공주에게 망국의 공주가 된 심정을 알게 해 주다니 훌륭하다.’ 그따위 말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는데, 발레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뜻밖에도 웃었다.
미소라는 건 대체 무얼까? 수일의 자기 세뇌를 통해 간신히 되찾은 사막의 밤 같은 평온이 와르르 무너지고, 다시 그날이 떠오르며 얼굴에 열이 일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가 천막 아래로 걸어 나왔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은발 위로 흐르는 햇살이 눈부시다.
어깨 너머 펼쳐진 황금빛 가을의 고원. 파란 하늘과 몇 개의 산과 몇 그루의 나무들이 이뤄 낸 교묘하고도 정교한 조화는 고향의 화가들은 상상으로 그려 낼 수조차 없을 만큼 아름답다. 불현듯 그의 손끝이 매만졌던 발목과 복사뼈의 감촉이 살아나 숨을 참았다. 스카리의 뒤쪽에 서 있던 자리히가 평소처럼 불만 어린 눈길로 그녀를 흘겨보지 않았다면 한참이고 넋 놓았을 것이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스카리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더니 부드럽게 두드렸다.
“제법이더군.”
발레리아는 넋을 놓고 말았다. 감히 공주의 머리에 손을 대느냐 소리칠 여념조차 흩어졌다.
…이 야만인, 왜 갑자기 이렇게 친한 체하지?
발레리아는 조금 전 감히 공주의 머리를 다독인 남자의 크고 단단한 손을 올려다보았다. 손등에 퍼런 핏줄이 올라와 있는, 딱딱하고 거친 손이었다.
지난번부터 이상했다. 아니, 지난번에는 본인이 그녀의 발목을 다치게 했으니 사과의 의미라고 억지로 끼워 맞출 수라도 있었다. 한데 오늘, 지금은…
“…왜, 왜째서?”
그때, 그의 등 뒤에서 한 남자가 배를 잡고 웃으며 나타났다.
“말하는 거 참 갓난쟁이 같구먼. 요 조막만 한 계집애가 너를 재물로 사겠다고 했다는 거지? 이 조그만 몸 어디에 그럴 배포가 숨어 있는 거지?”
발레리아는 처음 보는 낯선 인상의 노즈윈드인의 등장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했다.
‘이 사람은 누구지?’
한 달 반 가까이를 이곳 사람들 사이에서 이방인처럼 겉도는 동안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웠다. 하지만 이자는 초면이었다.
긴 머리를 땋아 묶은 까무잡잡한 사내는 팔다리가 거미처럼 길어 보였다. 몸집이 작다기보다는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전사들과 다르게 호리한 편이라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스카리를 지나쳐 걸어온 니몬이 유심히 그녀를 뜯어보더니 말했다.
“니몬이다, 네가 공주라고?”
“모?”
“니몬이라고, 니몬.”
니몬은 조금 전 경기 끝에 저원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꽤 개선했다. 재미있었으니 나쁘지 않은 놈들이라고.
“이 공주, 전혀 못 알아듣나?”
대답 없는 발레리아를 향해 목을 쭉 뺀 니몬이 중얼거렸다. 발레리아는 그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처음 보는 이 남자는 발음과 억양이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던 데다가, 다른 노즈윈드인들처럼 로리아인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 의식적으로 천천히 말하는 기본적인 배려조차 없어서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는 거야?’
대답은 뒤따라 나온 자리히로부터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한마디도 못 했는데, 지금은 한마디쯤은 하는 거 같아. 그래 봐야 못 알아듣는 건 마찬가지지만. 저쪽에 있는 짧고 뚱뚱한 남자가 이 여자의 통역이랍시고 따라다니는데 그마저도 엉망진창인 걸 보면 고민할 거리도 없지.”
“전혀?”
“표정 봐.”
자리히의 말과 억양으로 말미암아 대화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해 낸 발레리아는 약간 성난 표정으로 엄지와 검지를 들어 ‘쪼금 해.’ 하고 표현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별도리 없는 일이다.
그러자 니몬은 배를 쥐고 웃기 시작했고, 자리히는 웃음을 참느라 코가 찢어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니몬의 웃음소리는 저만치 천막 아래 모여 회포를 풀기 위해 어울리던 노즈윈드인들의 관심까지 끌었다.
‘이, 이, 야만인들이 감히 공주를 비웃어.’
명백하게 얕보이고 있는 상황을 깨달은 발레리아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그런 그들에게 힐끔 눈길을 준 스카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도 내게 할 말이 있나?”
발레리아는 조금 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리가 턱짓하며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갔다. 발레리아는 그의 널찍한 등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등 뒤로 미개하고 못돼 처먹은 야만인들이 낄낄거리며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분했지만 봐주기로 했다. 지금 바쁘니까 이번 한 번만 봐주는 것이다.
***
스카리는 앞서 걸었고 그녀는 뒤에서 따라 걸었다. 승리의 후희를 즐기는 노즈윈드인들이 만든 북새통을 지나, 천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라는 단풍나무 아래 도착했다. 바람이 반대로 불기 때문인지, 경기장 주위의 북새통이 멀지도 않건만 제법 조용했다.
단풍나무 옆에는 다양한 크기의 그루터기와 샘 하나가 있었는데, 스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루터기에 앉았다. 발레리아는 그가 앉으라 권하기를 기다리다가, 이 야만인이 썩 그런 예의를 차려 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그의 옆 그루터기에 마주 앉았다.
사락사락. 고원의 바람이 잎사귀 스치는 소리가 청량하다.
단풍잎 그득한 그늘이 머리 위로 드리웠다.
야자나무, 올리브나무, 포도나무… 그런 나무들에 둘러싸여 자란 공주는 고원 높은 곳에서 가을을 맞이하는 밑동 굵은 단풍나무를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스카리와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인지 그는 관찰하듯 혹은 감상하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키키께서 떠나기 전 일으키는 불꽃이지.”
발아래 떨어진 단풍잎을 주워 엄지와 검지로 빙글빙글 돌린 스카리가 말했다. 미처 귀담아듣지 못한 발레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스카리는 두 번 말하는 대신 턱짓했다.
“그래서 오늘은?”
발레리아는 곧 소기의 용건을 상기하고는 재빠르게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준비한 말을 뱉어 냈다. 오늘은 조금 더 용기가 났다. 스카리가 먼저 대화할 마음이 있음을 보여 준 것이라 여겼다.
“거래해자.”
“거래?”
“필요해? 지참금의 돌려주는 대까. 남쪽 전… 정보 주께오. 한 개에, 한 개 수레.”
발레리아가 고개를 살짝 주억거렸다.
지참금을 돌려받는 대가로 사막 너머 왕국들의 정보를 넘기겠다는 꾐이었다. 어제 기사들이 담뱃잎 거래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떠올리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저들은 때때로 사막을 건너 다른 왕국들을 침략해 몸살을 앓게 하는 사람들이고, 남부가 이곳보다 훨씬 살기 좋은 곳이란 걸 알 테니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 어떤 정보를 줄 생각은 없었고, 아무 말이나 그럴싸하게 꾸며 낼 셈이었다. 양심의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혼인 빙자 사기에 허위 정보 제공 사기는 밸런스가 맞지 않나?
스카리가 그녀 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눈높이를 맞춰 왔다.
멀리서 보면 파랗기만 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투명하게 비치는 청회색의 홍채가 보인다. 눈 덮인 해안가에 선 마르그프리트성의 신비로움과 닮은 색. 얕게 뛰는 가슴을 느낀 발레리아가 은근슬쩍 시선을 내렸다.
“만 가지 중 하나. 난쪽 정보, 너희에게 주께.”
스카리는 말이 없다.
발레리아가 얄팍한 긴장감 속에서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스카리는 관찰했다.
‘정말 늘었군.’
처음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는 거의 알아들을 수도 없었는데, 공주는 이제 제법 복잡한 말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주는 착각 중이다.
노즈윈드인들은 사막 너머의 왕국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원정을 떠나는 건 고원의 삶이 각박해졌을 때나 대부족 회의에서 나눌 물자가 부족할 때뿐이었다.
“생각하다. 대답은 나중도 되오. 기안은 낼! 낼?”
목 안으로 웃음을 흘린 스카리가 짧게 말했다.
“내일.”
발레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일 말해 주겠다는 건가?’
“낼?”
“내일.”
“낼 말해?”
“내일.”
발레리아는 비로소 스카리가 그녀의 발음을 교정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익은 홍시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왜 얘기가 또 이렇게 가 버리지.
잠시 머뭇거리던 발레리아가 무안함을 덜어 내기 위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하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시선이 부딪치듯 맞닿았다.
똑바로 그녀를 보고 있는 청회색의 눈동자는 낚아챌 먹이를 주시하는 맹금류의 눈 같기도 했고,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온종일 말을 타고 다니고, 가끔은 양과 소를 몰고 목동처럼 여정을 떠나고, 염소를 집어 던지는 해괴한 놀이를 하고, 술을 물처럼 마시는 이자들과는 다른 문명인이었다. 이곳에 온 후, 이렇게나 다른 형태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많은 순간 느껴 왔다.
하지만 반대로 이들도 같은 사람이구나 느낀 일도 많았다. 오늘의 경기에서 그녀는 자신이 노즈윈드인들과 같은 마음으로 응원했으리라는 데에 아름다운 자신의 머리칼을 걸 수 있었다.
표정은 많지 않지만 몸동작은 큰, 말보다는 행동을 하는, 무례하지만 악의적이지는 않은, 놀기 좋아하는, 나름의 연민을 가진, 기쁘면 웃고 슬프면 화내는 야만인, 그러한 수식어가 발레리아가 이자들에게 붙이게 된 여러 감상이었다.
하지만 스카리라는 남자는, 종잡을 수가 없다.
무심한 듯하다가, 장난스러운 듯하다가, 친절한 듯하다가…. 저렇게,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무릎 위로 단풍잎이 떨어졌다. 발레리아는, 무심코 시선을 내려 알록달록 물든 단풍잎을 내려다보았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다소 거만하게 턱을 괸 스카리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콕 보루는 즐거웠나?”
곧장 이해하지 못하여 눈만 깜빡이자 그가 저편의 울타리를 턱짓한다.
콕 보루. 콕뽀루. 꼭볼. 아, 그거구나. 발레리아는 불현듯 품위 잃은 공주가 되었던 응원의 순간을 떠올리고는 살짝 입술을 오므렸다. 그게 뭐 별거라고 쑥스러웠다. 살짝 턱만 살짝 끄덕여 답하자 스카리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왜 저렇게 웃고 그래. 괜히 공주 떨리게.
그런데 그때였다.
검독수리 한 마리가 커다란 날개를 펄럭대며 날아들었다. 이렇게 가까이 검독수리 같은 맹금류가 날아든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발레리아는 기겁하며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손에 잡히는 나뭇가지를 쥐었다가, 놓았다.
‘어?’
토끼를 그들 사이에 떨어뜨린 검독수리가 자연스럽게 스카리의 팔에 앉는 것이었다. 한이었다. 피가 묻은 검독수리의 부리를 손가락으로 정성스럽게 닦아 준 스카리가 말했다.
“한.”
“어?”
“이 녀석의 이름, 한.”
한. 반복해 말한 스카리는 발레리아가 집어 든 나뭇가지에 눈길을 주며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름?”
“가끔 나와 함께 사냥을 나가지. 사람은 공격하지 않도록 훈련되어 있으니 겁먹을 필요는 없어.”
발레리아는 느리게 해석하며 검독수리를 관찰했다.
“…한.”
한이라는 검독수리는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컸는데, 기지개를 켜듯 쭉 마른 다리를 뻗으며 날개를 펼치자 제 팔 길이만 했다.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부리를 딱딱 부딪치다가 발레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형언하기 어려운 날카롭고 굵은 소리를 내며 한 번 울었다. 로리아에도 가끔 매나 독수리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은 그녀가 보아 온 어떤 맹금류보다 크고 품위가 있었다. 스카리와 멋들어지게 어울렸다.
경이로운 한 폭의 그림 속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자신에게 다시 놀랐다.
잠잠했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뭐야, 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때, 검독수리가 훌쩍 뛰어내리더니 가뿐히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발레리아는 당황하여 피할 듯 몸을 뺐으나, 마치 제가 올빼미라도 되는 것처럼 목을 괴이하게 움직이며 그녀를 올려다보는 검독수리와 눈을 맞추고 멈추었다.
부리 끝은 갈고리처럼 날카로웠고, 발톱은 휜 창끝처럼 매섭다. 한데 까만 눈을 보고 있으니 귀여운 것도 같고… 어째서인지 스카리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곁눈을 든 발레리아는 스카리의 눈치를 잠시 보다가, 살짝 한의 부리 끝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한은 부리를 딱 다물더니 고개를 틀어 그녀의 손끝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생긴 건 안 그런데 되게 순하네.’
어릴 때부터 큰 새들을 좋아했던 알베르토가 부러워할 사건이었다. 사람에 이렇게나 길들여진 검독수리라니. 그때였다.
“…사냥을 해 본 적이 있나?”
발레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부러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느리게 말하는 스카리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귀에 콕콕 박혀 든다. ‘사냥?’ ‘사냥.’ 생각하던 발레리아가 어렴풋이 추측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스카리는 살짝 콧잔등을 찡그리며 그녀를 보았는데 마치 의외란 듯한 표정이었다.
“첫 사냥으로 무얼 잡았지?”
발레리아는 연이어 던져 오는 스카리의 물음을 차근차근 답하려다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이 남자는 그걸 왜 묻지? 평범하게 친분을 나누고자 하는 남녀의 대화라고 할 수야 있겠지만 이 남자와 제가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한다는 것은 현실감이 없었다.
왠지 모르게 말려드는 것 같아 잊었던 저항감이 살아났다. 야무지게 입술을 오므린 발레리아는 그의 물음을 묵살하고 원래의 화제를 끄집어냈다.
“대답은, 내, 일?”
그런 그녀를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던 스카리가 보일 듯 말 듯 입술 끝을 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오늘 거절하지.”
그는 그녀와 이야기를 할 때는 의식적으로 느릿하게 말했는데, 그 느린 어조가 섹시하기 그지없다. 잠시 감상하듯 그의 목소리를 되감던 발레리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거절?’
간단히 거절당해서는 안 될 제안이었다. 이마저 여지가 없다면 그녀는 정말로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 왜, 때문에?”
“…….”
“왜 때문에.”
“무엇 때문에.”
“왜 때… 무엇 때문에?”
삽시간에 발개진 얼굴로 순순히 고쳐 말하는 그녀를 응시하던 스카리가 턱을 매만졌다. 그런 후에야 그는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신기한 여자였다.
찌푸려진 둥그런 이마로부터 떨어지는 공주의 콧날과 입술은 연약했고, 떨어지는 단풍잎의 그늘에 드리워 적색으로도, 갈색으로도 비치는 빗질 된 머리칼은 섬약하다. 새끼 기린처럼 뻗은 목과, 한 팔로도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자그마한 어깨, 오므라지는 주먹, 어느 한구석도 매력을 느낄 수가 없어 마땅하건만.
갈증이 나고,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름은 무언지, 몇 해를 살았는지, 아까 뭐라고 그리 열심히 소리를 쳤는지, 벗은 몸은 겉보기만큼이나 가냘플지….
파란 눈을 비스듬히 내리깐 스카리가 한쪽 입매를 당겼다.
‘뭐야, 정말.’
하란 대답은 않고 가소롭단 듯 웃는 그를 보니 속이 또 꼬인다. 꼬시려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쳐다보면 어쩌란 말인가? 괜히 설레는 기분에 발레리아가 한마디 더 하려는 순간이었다. 파드득 날아오른 한의 날갯짓에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단풍잎이 바스스 떨어진다. 날린 머리칼을 쓸어 귀 뒤로 넘기는 그녀의 귓전으로 또 다른 물음이 던져졌다.
“…이름이 뭐지?”
발레리아는 그 물음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려운 말이라서가 아니라,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름?”
“너의, 이름.”
스카리는 담담히 반복했다.
발레리아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름…? 이름이 뭐냐고?’
스카리는 그녀에게 국가적 혼인 빙자 사기를 쳤다. 그리하여 이곳에 발 묶인 그녀가 파라윈 생활을 한 지도 한 달 반여다. 한데 이제 와 제 이름을 묻는다니?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예 로리아인들에게 관심 자체가 전혀 없었다는 실토였다. 그녀에게도 전혀. 가슴 한편이 놀랄 정도로 조여 왔다.
형언할 수 없는 수준의 모욕이었다.
그를 노려보던 발레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미개한 야만인이, 사람을 가지고 놀려고.]
자존심이 상했다. 저한테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그런데 그때였다. 우악스런 손길이 그녀의 팔목을 홱 잡아 돌렸다. 휘청이며 돌아선 발레리아는 어느새 그녀의 등 뒤에 서 제 손목을 붙잡은 스카리를 보았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오자, 거인처럼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에게 드리워졌다.
분은 미처 가라앉지 않았으니, 시선은 당연히 곱지 못했다. 그러나 스카리는 마치 그런 그녀가 재미있다는 듯 내려다볼 따름이다. 그게 더 화를 부추겼다.
[무례하게 함부로 손대지…]
그 순간, 스카리의 두껍고 투박한 손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왔다. 그의 손은 겨울바람처럼 차가웠다. 허리를 기울인 스카리가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멈추었다.
“조금 전의…”
놀라 얼어붙은 발레리아를 응시하던 그는 키스할 듯,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가 놀리듯 입꼬리를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긴 말이 네 이름일 것 같지는 않은데.”
발레리아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코앞에서 저를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와 그가 눈꺼풀을 움직일 때마다 느릿하게 오르내리는 긴 속눈썹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하는데도.
“네 이름, 뭐지?”
잇새에 힘을 준 발레리아가 씹어 뱉었다.
“발레리아.”
“…….”
“발레리아 살레르노스.”
“…발레랴?”
“발,레,리,아.”
“발레리야, 살레르노즈…?”
“발레리… 아. 살레르노스.”
경청하듯 귀 기울이던 스카리가 입안으로 그녀의 이름을 굴린다.
발레리아… 발레리아…. 어설프지만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렇게 속삭이니, 그녀에게조차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서되는 건 아니었다.
[못돼 처먹은 야만인 새끼 같으니라고.]
살짝 눈썹을 위로 올린 스카리가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젖혔다. 그녀가 저항감을 느끼며 그의 손을 밀어내려는 순간이었다. 놀리듯 코앞을 맴돌던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아니, 닿았다기보다 빨았다. 분명하게 키스였다. 그가 목 안으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발레리아는 일순 멍해져 그를 바라보았다. 순수한 당황으로 입술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뺨을 강하게 눌러 젖힌 스카리가 거침없이 입술을 비벼 문질렀다. 다물리지 못한 입술 사이로 밀려든 혀는 뜨거웠고, 숨은 이미 거칠었다.
놀란 발레리아가 그의 팔뚝을 간신히 붙잡았다.
밀어내려는 의도였으나 그가 더 몸을 바짝 붙여 오자 되레 떠밀리고 말았다. 그의 혀가 그녀의 혀를 쫓으며 웃는다. 그의 혀끝이 파고들어 헤집을 때마다 발레리아는 등골까지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가슴이 요란하게 뛰었다. 코앞에 그의 얼굴이 있고, 지금 그가 제게 입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서 현실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반쯤 넋이 나가 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의 크고 우악스런 손아귀가 그녀의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와 주무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거세게 움켜쥐는 손아귀에 불에 덴 사람처럼 소스라친 발레리아가 고개를 비틀어 돌리며 그를 밀쳐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