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정말로 굴욕적인 사건은 이튿날 벌어졌다.
동이 틀 무렵에야 잠든 발레리아가 간신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일어났을 때였다. 래리 경이 평소처럼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평소처럼 가지고 왔는데….
발레리아는 멀뚱하니 제 앞에 놓인 식사를 내려다보았다.
[어머….]
발레리아는 순수하게 제 인생의 질이 어제보다 더 추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탄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나마 먹을 만했던 식사가 더 형편없어진 것이다. 오늘은 식사라고도 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건더기는 한 가닥도 없는 맹물에, 빵은 반 토막이 났으며 식후에 마실 물조차도 없다.
빈민 체험도 이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자고 일어난 사이에 생쥐들이 부엌을 점령하기라도 했던 걸까?
지난 저녁 저들이 또다시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벌이는 걸 보지 못했다면 이 정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당하다는 듯 입술만 뻐끔거리던 이멜다가 그녀를 대신해 분통을 터뜨렸다.
[이, 이, 이, 이 망할 것들, 이 망할 것들, 이것도 목구멍에 부을 거라고 공주님께….]
래리 경은 창백하게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이게, 왜 오늘따라 이러냐고 물어봤는데….]
뻔하다. 별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구박해서 쫓아내려는 걸까요?]
발레리아는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귀찮게 하니까 대놓고 내쫓지는 못하고 제 발로 나가도록 하겠다는 걸까? 이멜다는 수프 그릇을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제가 이 망할 놈들 교육을 제대로 시키고 와야겠어요.]
발레리아가 말릴 새도 없었다. 거의 뛰쳐나가다시피 하여 달려간 이멜다가 ‘이 망할 것들아, 부엌 어디야!’ 하고 소리치는 것이 온 복도를 울렸다. 그녀는 어쩌면 노즈윈드인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유일한 로리아인일 것이다.
따라 일어선 래리 경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복도를 내다보았다.
[아이고, 저 여편네.]
그러거나 말거나 발레리아는 푹 한숨을 내쉬며 어제보다 반은 작아진 빵을 수프에 적셨다. 비리고 맛이 없었다. 흙 맛은 왜 나지? 이 야만인들이 발로 반죽을 하는 건 아닐까? 자신이 이런 걸 먹고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 화도 나지 않았다.
염려스러운 얼굴로 다가온 래리 경이 말을 꺼냈다. 그의 눈 밑은 조금 전보다 훨씬 퀭하고 어두웠다.
[저, 공주님, 이멜다 양을 좀 어떻게….]
[음, 왜요?]
[하는 꼴을 보니 조만간 노즈윈드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올 것 같아서… 주의를 주시는 게 어떨까 해 가지고 말입니다.]
발레리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멜다도 그 정도 분간은 할 줄 알아요.]
래리 경은 불충하게도 의문을 얼굴로 드러냈다.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요.’ 말로 반박하지 않은 건 발레리아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떨치지 못한 걱정을 안고 문 쪽을 돌아보던 래리 경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가 없어 이제까지 머물고는 있었지만… 공주님,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세워 봐야죠. 지금은 모르겠어요.]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 공주님,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 지참금으로 가져온 것들 중에는 생필품들도 많습니다. 지금도 하루하루 동나고 있을 겁니다. 보낸 기사님이 돌아온다고 해도 한두 달은 더 걸릴 테고… 어쩌면 모두 시간 낭비일지도 모릅니다.]
래리 경은 꽤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발언을 했다. 발레리아도 충분히 납득했다. 지참금의 반 이상이 곡식과 고기나 술 같은 식량이다. 나머지 절반은 비단과 패물 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 오래 끌수록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적어질 것이었다.
[쌀 한 톨만 가지고 돌아가게 된다 해도 이대로는 못 가요.]
결연한 발레리아를 바라보던 래리 경이 축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아는 흙 맛이 나는 빵을 내려놓았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발목으로 향했다. 붕대는 매우 단단했는데, 그녀의 기분은 이상하리만치 풀어졌다. 정말로 이상했다.
***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노즈윈드인들은 저원 출신의 여자에게 질렸다. 정확히는 손님으로 온 여자들 중 한 명에게.
그 여자는 작은 몸집과 다르게 엄청나게 큰 목소리를 가졌다. 기세가 어찌나 등등한지, 불평불만을 소리치며 덩치가 산만 한 그들마저 잡도리하려 해 이만저만 성가신 게 아니었다.
평소에도 그러했는데 오늘은 특히 더 심했다.
여자가 늦은 아침부터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롸롸롸롸롸롸! 롸롸롸롸롸롸롸롸롸! 롸롸롸롸롸롸롸롸롸!
그들은 마구 고함을 내지르며 부엌을 헤집고 다니는 저원 여자를 피해 떨떠름하게 굳어 있었다. ‘뭐지?’ 여자는 사정을 설명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몸짓으로 쏘다니며 횡포를 부리는 중이다. 왜 저러는지 알지를 못하니 혹시라도 미친 건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들 수밖에.
롸롸롸롸롸롸? 롸롸롸롸롸롸롸? 롸, 롸롸롸! 롸!
‘대체, …왜 저래?’
소식은 파다하게 퍼져 주방 안쪽에서 풀뿌리를 솎아 내던 히바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자글자글한 주름에 더 힘을 준 히바니가 대로하여 지팡이를 휘두르며 뛰쳐나갔다.
“신성한 주방에서 무슨 짓이냐, 이 망할 년아!”
막 손에 잡히는 식자재들을 집어 던지며 ‘책임자 누구야! 당장 나와! 감히 우리 공주님에게 그따위 걸 드시라고 올려 보내? 너희들이 우리 뒤통수를 친 것도 참아 주고 있는데, 감히 공주님을 만만하게 봐? 너! 그래, 너, 너도, 너희 말이야! 멍청하게 보고 있지 말고 책임자 불러!’ 하고 고래고래 악을 쓰던 이멜다는 분위기부터가 남다른 노파를 발견하고 눈을 부라렸다.
장수는 적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오호라, 이 할망구로구나.’
히바니도 물러서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이 불곰 같은 년이?’
이멜다와 히바니는 결투를 앞둔 맹수처럼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이멜다는 이곳이 노즈윈드인 것을 잊지 않았으나 전혀 두렵지 않았다. 외교 말곤 죽 쑤는 작은 로리아 출신이지만, 말싸움과 칼 없는 정치질이 난무하는 긍지 높은 왕궁 소속의 공주님 직속 하녀. 언제나, 어디서나, 싸움의 기본에만 충실하다면 못 이길 자 없다는 것이 이멜다의 지론이었다.
이멜다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네년들 오늘 나랑 해 보자는 거지? 어? 저질스러운 음식을 이제까지 너그럽게 참아 줬는데도 감사한 줄을 모르고, 지금 공주님한테 그따위 음식을 올려 보내?]
싸움에서 말이 통하고 통하지 않고는 사실, 의외로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싸울 때는 남의 말은 안 듣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이멜다는 산발한 채로 노즈윈드인들에게 끌려왔다. 이멜다가 그런 만신창이가 된 건 몸싸움 같은 게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들쳐 메고 주방에서 끌어낸 사내들에게 게거품을 물고 발작한 까닭이었다.
얼마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는지, 목소리까지 다 쉰 채 돌아왔다.
적당히 하겠거니 생각했던 발레리아는 생각보다 심각한 이멜다의 몰골에 놀라 ‘다음에는 그러지 마렴.’ 하고 주의를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멜다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그날 저녁부터 식사가 다시 먹을 만해졌다. 아니, 먹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 호화로울 지경이었다.
‘어머?’
공주 인생의 질이 수직 상승했다.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와 콩과 야채를 푹 끓인 짭조름한 수프에, 특이한 나무 열매도 몇 개 담겨 있었다. 빵은 아침의 것에 비하면 거위 털 베개처럼 부드러운 수준이었고, 수프에는 건더기가 절반이었다.
이멜다는 매우 흡족한 얼굴이 되었는데, 발레리아는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멜다가 그런 발레리아에게 입 모양으로 소곤거렸다.
‘얼른 잘 먹고 힘내시라고요.’
발레리아는 찡한 기분을 느끼며 쭉 입술을 당겼다. 이멜다 덕분에 기운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