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8)

[…기운이 나려다가도 쭉 빠져 버린다.]

심각하게 주름진 발레리아의 미간을 콕콕 찌른 이멜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공주님이 처음이시잖아요.]

[역사에 이름은 남겠네. 노즈인드윈과 결혼하려고 사막을 건넜다가 뒤통수를 맞은 첫 번째 공주 같은 걸로?]

자조적인 발레리아의 반문에 이멜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 공주님의 첫 번째 시도잖아요. 어떤 선택이든 시행착오는 당연한 거죠.]

[언니들이나 이모나, 삼촌들은 다들 잘했을걸.]

[그건 모르는 거예요.]

[…….]

[여기는 노즈윈드인들의 땅이잖아요. 공주님과 왕자님들이 외교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밤낮없이 공부한 거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교본에서 저런 망할 자식들….]

욕설이라도 할 듯 고양되던 이멜다의 목소리는 이내 무던하고 평이해졌다.

[노즈윈드인들 같은 근본 없는 작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교본에도 나오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아직 우리는 이쪽 말이나 문화도 모르고, 대체 저 망할… 작자들이, 흠, 무슨 생각으로 매일 맛없는 음식들을 먹으면서 이런 형편없는 곳에 모여 사는지도 모르니 실수할 수는 있는 거죠.]

[이건 실수라기에는….]

엉망진창이다. 눈 뜨고 코 베이듯 지참금을 빼앗긴 와중에 공주가 가진 거라곤 그저 신기하다며 파라윈을 돌아다니는 기사들과 외국어를 못하는 외교 대사와 사랑하는 망무새 하녀 한 명이 전부였다.

이멜다는 전연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전 몰라요. 실수가 있어선 안 된다 하시지만, 저는 공주님이 아니거든요.]

[…처음부터 지참금만 빼앗을 의도였다면 왜 지금 우리를 내버려 두는 걸까?]

[어깨너머로 공주님들이 하시는 말을 주워들은 거지만, 원래 외교라는 게 표면적인 게 하나도 없다면서요.]

[이 야만인들이 외교의 전문가는 아니잖아?]

[초보자가 원래 더 무서운 거랬어요. 확실히 이쪽의 초보보다는 저쪽의 초보가 한 수 위네요.]

침울하게 눈을 내리까는 발레리아를 측은히 바라보던 이멜다가 말했다.

[사실 래리 경이 제일 문제죠. 공주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대체 각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형편없는 통역을 붙여 주셨대요? 아마추어도 아니고…. 아니, 이 짐승 같은 인간들은 여기 있다던 통역사는 삶아 먹었대요? 공주님이 이 고생을 하는 게 그 망할 래리 경의 소심함과 무능함 때문이라 생각하면 화가 나서 저 야만인들에게 토막 내 던져 주고 싶어진다니까요. 그러기도 전에 달아나 버릴 겁 많은 작자….]

가끔 발레리아는 공주답지 않은 언사를 구사하여 사람들을 당혹하게 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면 이멜다의 말버릇이 제게 옮은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멜다의 손을 맞잡은 발레리아가 진지하게 당부했다.

[래리 경이, 뛰어난 외교 대사는 못 될 위인이기는 하지만 그라도 있어 다행이니 앞에서는 그런 말 말렴. 이멜다, 가끔 네가 그렇게 말하면 정말 무섭거든.]

[참을 수 있는 데까진 참아 볼게요. 하지만 수도였다면 당장 외교부로 쫓아가 모가지를 절단 내라 했을 거예요.]

발레리아는 조그맣게 웃었다. 위로 아닌 위로에 기분은 손톱만큼 나아졌다.

이멜다와 대화하며 얻은 깨달음도 있었다.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노즈윈드인들을 아등바등 쫓아 사막을 건너는 동안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완전히 무시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래리 경의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의사소통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파라윈에 도착하면 기다릴 것이라는 공용어를 구사하는 노즈윈드 측 통역사를 철석같이 믿었고, 달리 소통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래, 가장 큰 문제는 의사소통이었다. 발레리아가 침대 아래로 엉금엉금 내려갔다.

[노즈윈드어.]

소맷자락을 입술로 꾹꾹 물어 당기며 표독하게 눈을 떴다.

[배우면 돼.]

그녀는 유별나게 외국어에 소질이 있었다. 숙부가 그녀를 회유하며 ‘너는 그런 재주가 있으니까.’ 했던 건 단순히 그녀를 떠밀기 위한 입바른 소리가 아니다.

그녀는 켈시어를 반년 만에 숙달했고, 마도르어를 1년 만에 정복했으며, 고어(古語)는 아직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어떤 왕자와 공주보다 빠르다 칭찬받았고, 공용어는 그냥 잘했다. 공용어니까.

책상에 앉아 노즈윈드 단어 500선을 펼친 발레리아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발레리아가 로리아에서 가졌던 별명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밤송이다. 한번 어디에 꽂히면 뒤가 없는 여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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