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46/46)

<14>

전쟁은 시작되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그 뜻을 되새기며 인우는 넥타이를 매는 손길에 힘을 주었다. 코발트블루 색의 넥타이는 자신과 무척 잘 어울렸다. 역시 윤해원. 선물 고르는 센스까지 뛰어났다.

근처 백화점에 갔다가 제 생각이 나서 샀다며, 이 넥타이를 내밀던 그 수줍은 얼굴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하긴 뭔들 안 예쁘겠는가.

기분 좋은 얼굴로 자신의 목에 걸린 넥타이를 한 번 더 보고, 2층 문을 열고 나왔다. 계단에 서자 1층에 있는 테이블 앞에서 무언가를 열중한 얼굴로 그리고 있는 해원이 보였다. 아마도 무언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나 보다.

워커홀릭 윤해원 아니랄까 봐서, 잠시 일을 쉬고 있는 그 틈에도 나서서 일을 찾아 하고 있다. 뭐, 그것 역시 해원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노력하는 천재라고 해야 할까. 재능이 있는데다가 노력까지 하니,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저 반짝이는 재능을 자신이 지켜 주지 못할까 봐. 이한의 아버지가 그를 방해했던 것 이상으로, 할아버지는 저와 해원을 압박해 올 게 분명했다. 다른 사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본보기로 말이다.

하지만 그냥 앉아서 당할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저였기에, 넋 놓고 당하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윤해원,”

얼마나 집중을 하고 있는지 제가 부르는 소리에도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푹 빠졌네, 푹 빠졌어.”

옆으로 슬쩍 다가가 보자 정자 설계에 집중하고 있는 해원의 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구조나 분위기가 독특하고 매력적인 정자였다. 갑자기 왜 정자에 꽂혀 저걸 그리고 있는 걸까. 하여튼 여전히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똑똑.

“윤해원 씨. 저 좀 봐주시죠?”

테이블을 손으로 두드리며 장난스레 말을 걸자 해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 선배. 언제 내려왔어요?”

“이거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아무리 집중하고 있어도 말이야. 사랑하는 남자 목소리는 들어야지. 안 그래?”

해원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 노력할게요.”

“더 많이, 많이.”

“기준 선배 만나러 가는 거예요?”

“응. 일단 기준이부터 만나서 회사 넘겨야지.”

회사를 넘긴다는 그 말에 해원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안 섭섭해요? 그래도 선배가 꽤 긴 시간 공들여 키운 회사인데.”

“내가 키웠다긴보단 윤해원이 키웠지. 네가 그 회사에 없는데 내가 아쉬울 게 뭐가 있어. 기분 좋게 넘기고 올게.”

“네, 선배. 맛있는 저녁 해둘 테니까. 다녀오세요.”

가슴이 따뜻해졌다. 천군만마가 따로 없었다.

“그래. 다녀올게.”

이런 일상이 참 좋았다. 그녀와 함께 생활한 지 이제 일주일째.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난 후라 그런지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특별했다. 이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일상을 계속 살아갈 수만 있다면 세상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었다. 물질 만능 주의였던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신기한 일이었지만.

**

서류에 사인을 하던 기준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인우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어? 나한테 이 회사 넘겨도.”

“지금으로선 너 말고 맡길 사람도 없어. 우리 할아버지가 너 그나마 예뻐하잖아. 네가 맡으면 적어도 이 회사는 안 건드릴 거야.”

“뭐, 그렇긴 하겠지. 우리 아버지도 이젠 포기했나 봐. 이 회사 맡는다니까 알아서 하라더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사실 기준에게 이 회사를 맡길 때 그의 아버지도 계산에 있었다. 그나마 할아버지인 정 회장이 눈치를 보는 유일한 인물이 기준의 아버지였기에.

5년의 세월을 바친 회사였다. 그리 긴 세월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자신과 기준 그리고 해원의 청춘이 그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러기에 이 회사가 무너지는 것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제일 먼저 자신이 이 회사에서 나와야만 했다. 할아버지가 이 회사를 무너뜨리기 전에 말이다.

“그래서 넌 이제 어떡할 건데? 갈 곳은 정했어?”

“모르겠어. 네가 준 돈으로 해원이랑 멀리 도망가서 살까?”

“그게 가능하겠어? 네 할아버지 피해서 평생 숨어 산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안 되겠지? 그래서 나도 그건 조용히 접었어. 해원이도 도망자처럼 살게 만들고 싶지 않고. 일단 나 받아 줄 회사를 찾아봐야지. 그리고 지금 사는 집도 곧 뺏길 거야. 너한테 회사 넘기면서 받은 돈으로 집도 구해야지. 회사랑 집만 해결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마 그 두 개 해결하는 게 제일 힘들겠지.”

기준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힘내. 그래도 너희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같은 분 아닌 게 어디냐. 알지? 내가 이런 일 벌였다간 벌써 킬러한테 암살당했을 거라는 거.”

농담이 아닌 걸 알기에 소리 내어 웃을 수도 없었다. 사람은 가질수록 욕심이 많아지는 듯했다. 아주 작은 것 하나에 그 세계가 무너질까, 자신들과는 다른 세계에 속한 이들을 불순물 취급하며 커다란 방어막들을 쳐댔다.

하긴 누굴 욕하겠는가. 자신 역시 얼마 전까지 그러한 사람들 중에 하나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리 아등바등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런 마음을 좀 더 빨리 버렸다면, 해원과 더 빨리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버리자, 마음먹으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다 포기한 건 아니었다. 이한 같은 끝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볼 생각이었다. 이 선택이 서로에게 아픔이 되는 그런 결말만큼은 맞이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았다. 평상시엔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해오던 친구나 선배들이 모두 그의 연락을 피했다. 클럽에 가자, 신나게 놀고 있던 사람들도 인우를 보자마자 어색한 얼굴로 약속이 있다며 부리나케 사라져 버렸다.

“뭐, 이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홀로 룸에 남아 술을 마시고 있는데,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지이잉 하며 울어댔다. 액정에 뜨는 해원의 이름에 인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응, 해원아.”

-어디예요? 집에 안 와요?

같이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던 게 기억이 났다.

“아, 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

-아니에요. 일 있으면 천천히 와도 돼요.

“아니야. 지금 갈게.”

-네. 천천히 와요.

“응.”

따뜻한 해원의 목소리를 들으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인우는 마시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룸 문이 열리며 이한이 걸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형?”

“가게? 나 너 왔다는 소식 듣고 온 건데.”

이한의 물음에 인우가 뭉클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두 저를 외면하기 바쁜 이 시기에 따뜻하게 대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해원이 기다려서.”

“아, 애인?”

“응.”

“언제 한 번 정식으로 소개해 줘. 제수씨한테 미리미리 점수 따놔야지.”

기준을 제외하고 그녀를 인정해 주는 또 한 사람. 분명 해원도 이한을 좋아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응. 그럴게. 나중에 우리 집 한 번 놀러 와.”

“그래. 참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잠깐은 괜찮지?”

이한의 물음에 인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괜찮아. 잠깐만.”

핸드폰을 꺼내 들어 해원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괜찮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메시지를 보고 마음이 편안해진 인우는 이한과 마주 앉았다.

“회사 정리했다며?”

“응. 기준이한테 들었어?”

“어디 갈 곳은 정했고?”

걱정 섞인 이한의 물음에 인우는 애써 환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형. 나 쉽게 무너지지 않아. 조만간 할아버지랑도 협상해 보게. 후계자 자리는 날아갔지만. 내가 또 놓치기엔 아까운 인재잖아?”

농담처럼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인우 역시 걱정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놓치기 아까운 인재는 맞지만, 아마도 할아버지인 정 회장은 그냥 버리는 걸 선택할 것이다. 자기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는 핏줄이라도 과감하게 버리는 사람이었다.

“인우야. 내가 도움을 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도움이라도 괜찮으면 받을래?”

조심스레 묻는 이한의 말에 인우는 눈을 크게 떴다.

“형이? 그러다 괜히 형 입지까지 흔들리는 거 아니야? 복귀한 지도 얼마 안 되었잖아.”

견제하는 세력과의 싸움만으로도 힘겨울 그를 알기에 인우는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우리 아버지도 내심 좋아하는 눈치야. 알지? 네 할아버지한테 라이벌 의식 강한 거. 손주들 중 젤 아끼던 네가 우리 회사 들어오면, 배 아파할 거라 생각하는 눈치셔. 그리고 너희 할아버지도 N그룹은 쉽게 못 건드릴 거 아니야.”

그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아무리 재계 순위 1위인 P그룹이라도 N그룹까지 건드릴 수는 없었다. 건드릴 만큼 만만한 작은 그룹도 아니었기에.

“형. 말만이라도 고마워. 난 형 힘들 때 아무 도움도 못 줬었는데.”

물론 도움을 줄 틈도 없이 이한이 먼저 숨어 버리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긴 했을 것이다.

“너는 그때 회사 운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잖아. 못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나 돌아왔을 때 유일하게 반겨 준 사람이 너였어. 나 그거 무척 고맙게 생각해.”

그래도 선뜻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다니.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동이었다.

“진짜 고마워, 형. 잘 생각해 볼게.”

“그래. 꼭 우리 회사에 오지 않더라도 내 제안을 잘 이용했으면 좋겠다.”

그의 말에 순간 인우의 검은 눈이 반짝였다. 제안을 잘 이용하라는 그의 말에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형? 나 진짜 그 제안 이용해도 돼?”

단번에 제 뜻을 이해한 인우가 대견했는지 이한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너는 절대 나같이 후회할 일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고마워, 형. 진짜 고마워. 내가 나중에 밥 살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

이한 덕분에 돌파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인우는 그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했다. 이한의 손을 꽉 붙잡고 인우는 환하게 웃었다.

**

해원은 오래간만에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인우를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런 얼굴을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지,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감정이 동시에 휘몰아쳤다.

저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괜찮아, 걱정 마, 너만 있으면 돼. 늘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가 이렇게 말해 주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회사가, 성공이, 그리고 후계자 자리가 그의 삶에서 얼마나 큰 부분인지 알기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한 응원이 전부였다. 그리고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정자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단양 프로젝트를 시작할 즈음 그의 할아버지가 집에 새로운 정자를 설치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스치듯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인후 말로는 할아버지인 정 회장이 아파트 단지 하나를 세울 수 있는 넓은 땅에 있는 기와집에 살고 계시다 했다. 정원이 특히 예술인데 언제 한 번 직접 데려가서 보여주겠다는 말도 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전통 건축의 대가인 이정남 교수님의 작품이라 직접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거라 했다. 그런 분이 설계한 그 집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자신이 설계하는 정자를 마음에 들어 할지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실 전통미를 최대한 살리면서 우아한 곡선의 미를 이용해 자신만의 느낌을 더했다.

침대에서 스르르 빠져나와 작업을 하던 거실 테이블로 다가간 해원은 태블릿을 켜서 곧장 설계 스케치를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매달렸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아 보였다. 해원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스케치에 집중했다.

**

무의식중에 옆으로 손을 뻗던 인우는 텅 비어 있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혹시 해원이 사라져 버린 걸까.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테이블 위에 기대 잠이 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인우는 침대에서 내려와 곧장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도대체 뭘 하다가 여기서 잠이 든 걸까. 태블릿PC 모니터를 보자 낮에 그녀가 그리고 있던 정자보다 한층 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스케치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해원의 건축물 특유의 감성이 그 정자에서도 느껴져 인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집도 아니고, 무슨 정자를 이렇게 열심히 그려?”

도통 무슨 생각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긴 언제 이해되기 쉬웠던 적이 있던가. 피곤했는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해원을 다정하게 지켜보던 인우는 팔을 뻗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사이 살이 더 빠졌나 보다. 가뜩이나 말라서 걱정인데,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그녀를 보니 신경질이 났다. 잠도 안 자고 일에만 매달리니 더 살이 빠지지. 내일부턴 다시 윤해원 살찌우기에 집중해야겠다.

원래는 예민해서 이렇게 안아 들기만 해도 깼을 텐데 엄청 피곤했나 보다. 침대에 내려놓아도 세상모르고 자는 걸 보면.

“잘 자라.”

그녀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인후는 다시 몸을 일으켜 그녀의 태블릿PC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저 모르게 일이라도 맡은 걸까. 이런 정자는 딱 할아버지의 취향……!

생각을 멈춘 인우는 눈을 크게 뜨며 다시 정자를 들여다보았다.

“설마 이거…….”

해원이 왜 이리 열심히 정자 설계 스케치를 하고 있는 건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혼자 애쓰는 저를 보기 힘들어서 시작한 일인 거 같지만 꽤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취향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우리 해원이.”

인우는 흐뭇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얼굴엔 그녀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 나오고 있었다.

**

정 회장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제 앞에 생글거리며 앉아 있는 인우를 바라보았다.

“꼬리를 내리고 올 줄 알았더니, 여전히 정신 못 차린 모양이구나. 오늘 네 앞에 있던 펀드며 주식이며 다 정리되었단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못 들은 게냐?”

그의 물음에 인우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습니다. 남김없이 다 가지고 가셨더라고요. 지금 살고 있는 집부터 할아버지가 선물로 주신 차까지 말입니다.”

“다 아는 놈치곤 표정이 상당히 밝구나. 아깝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아깝습니다.”

재빠른 인우의 대답에 정 회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잘 아시잖습니까? 제가 얼마나 돈 좋아하는 놈인지.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죠. 살다 보니까 돈보다도 더 좋아지는 게 있더라고요.”

“고얀 놈.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구나.”

날선 목소리로 하는 말에도 인우는 여유로운 얼굴로 어깨를 가볍게 들었다 내려놓을 뿐이었다.

“반성할 일이 아니죠. 사실 축복 받을 일 아닙니까. 사랑을 한다는 거.”

“미친놈.”

“품위에 어긋나십니다. 욕 좀 그만하시죠?”

예전부터 말로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그래서 손자들 중에선 제일 인우를 아끼기도 했다. 그가 가진 배짱, 포부, 뛰어난 경영 능력까지. 후계자는 저 녀석이다, 하고 점찍어 놓고 있었는데 이런 어이없는 선택으로 자신을 배신할 거라곤 꿈에도 몰랐었다.

“이리도 모자란 놈인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제가 이런 사랑꾼인 줄은.”

“정인우!”

노기가 잔뜩 서려 있는 정 회장에 호통에도 인우의 얼굴은 지독하게 평온했다. 이런 건 둘이 꼭 닮은 것 같았다. 이 방에 불려 왔던 해원도 저렇게 덤덤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았었다.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제 앞에선 모두 긴장을 하곤 했는데, 보잘것없는 작은 계집아이가 배포 크게 행동하는 걸 보고 정 회장은 속으로 내심 감탄을 했었다.

“아직 정정하시네요. 100세까진 끄떡없겠습니다, 할아버지.”

“시답지 않은 소리 할 거면 그만 나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나고 싶으면 그 여자 정리하고 와. 안 그러면 절대 이 회사에 발 들일 생각도 하지 마.”

물론 그와 해원이 어디도 가지 못하게 철저하게 방해할 생각이었다. 다른 손주들에게 제 뜻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삼을 겸, 일어서지도 못하게 밟아 줄 것이다.

“그러죠. 그래서 이 회사 말고 내일부턴 N그룹에 출근하려고요.”

“뭐?”

정 회장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저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본 거죠. 회장님이 직접 스카우트 제의를 했더라고요. 뭐, 조건도 나쁘지 않아서 그냥 출근하려고요.”

“이, 이놈! 어, 어딜 출근해?”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씩 웃으며 뒤돌아서는 인우를 보며 정 회장은 뒷목을 붙잡았다.

“거기 안 서!”

우렁찬 정 회장의 외침이 조용한 회장실 안에 울려 퍼졌다.

**

“짜잔.”

해원은 인우가 내미는 사원증을 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정말 여기로 출근하는 거예요?”

“응.”

“어떻게요? 신기하다.”

라고 적혀 있는 사원증을 해원은 꼼지락거리는 손길로 매만졌다. 할아버지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라며, 그가 신신당부했을 때만 해도 솔직히 걱정이 더 많았었는데 이렇게 결과로 보여주니 마음이 놓였다.

“이한 형 도움이 컸지. 아, 조만간에 한 번 소개해 줄게. 이한 형도 너 많이 보고 싶어 해.”

“네, 좋아요. 저도 그분 궁금했어요.”

이한이 궁금했다는 해원의 대답에 인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한 형이 왜 궁금해?”

“선배랑 친한 거 같아서요.”

“단지 그거뿐이야? 그 형 엄청 멋있는데. 됐다. 그냥 만나지 마. 괜히 만났다가 반하고 그럼 안 돼.”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내젓는 인우를 보며 해원은 웃음을 삼켰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전 이미 콩깍지가 씌어 있는 상태라, 다른 사람한테 반할 일 없어요.”

“그래? 그럼 지금 누구한테 반해 있는데?”

슬며시 허리를 끌어안으며 묻는 인우의 물음에 해원은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음, 강동헌?”

“뭐?”

“아니다. 조인상?”

“어?”

“아, 선배가 일할 백화점 모델인 최진후도 좋아요.”

그녀의 대답에 인우가 잘생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안 되겠네. 당장 가서 모델부터 교체해야지.”

“평직원한테 그런 힘이 있을까요?”

“뭐? 안 되겠다. 내 힘을 보여줘야지.”

그 말을 하며 인우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곧장 침대 위로 내달렸다.

“선배.”

저를 두 팔로 가두는 인우를 보며, 해원은 얼굴을 붉혔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누구한테 반했는지. 이번에도 제대로 말 안 하면 밤새 괴롭힐 거야.”

“그래요? 음, 그럼 조정…….”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가로막았다. 해원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끌어안았다.

“밤새 괴롭혀 줘요.”

그가 천천히 입술을 놓아주자, 해원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점점 더 밝히는 거 같아.”

“그래서 싫어요?”

“아니. 미치도록 좋아.”

그의 입술이 또다시 그녀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길고 긴 키스가 이어지며, 어느새 두 사람은 서로의 옷을 벗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

여기저기 흩어진 옷가지들, 땀에 흠뻑 젖은 머리, 잔뜩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서 둘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방금 전 뜨거웠던 절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은 여전히 후끈거리는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진짜 다행이에요.”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해원의 말에 인우는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젖은 머리를 어루만졌다.

“나 진짜 걱정했어요. 나로 인해 선배 인생이 많이 힘들어질까 봐.”

“너로 인해 즐거워진 거지.”

“진짜 후회 안 해요? 후계자 자리 버리고 나 선택한 거.”

“응. 안 해. 그냥 밑에서부터 천천히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면서 너랑 같이 성장하고 싶어. 그게 기업 운영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아.”

해원은 감동 받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면서, 그의 품 안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곳은 무척이나 넓고, 따뜻했다.

“넌 후회 안 해? 엘 마크 따라 미국 안 간 거?”

그의 물음에 해원은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안 해요. 나도 이렇게 선배 옆에 있는 게 더 행복하니까.”

“그럼 다행이고. 참, 곧 너한테 스카우트 제안 하나 갈 거야.”

“네? 어디서요?”

“조건 잘 들어 보고 해. 마음에 안 들면 냉정하게 거절하고.”

이해하지 못할 소리만 했다.

“괜찮겠어요? 어떤 회사인지 몰라도 나 들어가면…….”

“걱정 마. 나 출근하는 조건으로 넌 절대 안 건드리기로 하셨어. 물론 그렇다고 허락한 것도 아니지만. 넌 신경 안 써도 돼. 참, 우리 부모님은 너 궁금해하셔. 다음 달에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면 같이 보재.”

그의 부모님 이야기에 해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에요?”

“응. 우리 부모님은 아마 너 엄청 마음에 들어 하실 거야. 딱 한 가지만 보시거든.”

“어떤 거요?”

해원이 긴장된 눈빛으로 묻자, 인우가 씩 웃었다.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런 의미에서 넌 합격. 네가 만들어 준 의자는 꼭 보여드려야겠다.”

“아, 그러지 마요.”

“왜? 그거 보면 무척 좋아하실 텐데.”

“선배.”

“키스해 봐. 그러면 생각해 보…….”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 위에 포개졌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둘의 뜨거운 밤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

해원은 기준이 내미는 명함을 멀뚱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KJ 건축 사무소 대표 한기준입니다.”

“선배?”

“스카우트 제안하려고 왔습니다. 사실 조건은 엘 마크에 맞춰 주라고 전에 있던 대표가 난리를 치긴 했지만.”

크음, 하고 기준이 낮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제 막 회사를 인수 받은 자라나는 새싹이라 그건 무리일 것 같고, 그 전과 동일한 조건은 어떻습니까?”

“선배 지금 나 스카우트하러 온 거예요?”

다짜고짜 인우의 집에 찾아와 명함부터 내미는 기준을 보며 해원은 웃음을 삼켰다.

“나 진지해. 너 무조건 스카우트해야 하거든.”

“진짜 괜찮겠어요? 인우 선배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 스카우트해 갔다가 괜히 안 좋은 영향 있으면 어떡해요?”

“걱정 마.”

기준이 씩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서 더 네가 필요한 거니까.”

“네?”

“이걸 정 회장님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셨거든. 물론 아직 네가 한 건지는 모르지만.”

그가 내민 설계 도안은 자신이 얼마 전에 정 회장을 위해 만든 정자였다.

“선배? 선배가 어떻게 이걸?”

“인우가 보내줬어. 이거 할아버지한테 한번 보여주라면서. 정 회장님이 아주 좋아하시더라. 당장 공사 시작해 달래.”

“정말요? 다행이긴 한데.”

“걱정하지 마. 걸려도 내가 책임져. 그리고 뭐, 정 회장님 스스로 마음에 들어 하셨던 거니까. 이 일로 널 좀 좋게 보실 수도 있고.”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다. 정 회장에게 예쁨 받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다. 그저 저로 인해 인우가 할아버지에게 미움 받는 게 싫을 뿐이었다.

“스카우트 제안 오케이 하는 거지?”

“네. 안 그래도 진짜 돌아가고 싶었어요.”

“좋았어, 그런 의미에서 인증 샷.”

기준은 다짜고짜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얼떨결에 기준을 따라 고개를 든 해원은 사진을 찍고 말았다.

“인우 자식 배 좀 아파하겠다.”

하여튼 이럴 때 보면 둘 다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하는 짓이 어찌나 어린아이 같은지. 뭐, 그게 이 남자들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지만 말이다. 기준이 그 말을 하고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기준이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갖가지 욕에 해원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저 남자의 질투를 누가 말리겠는가.

“아, 이 자식 나이 들수록 점점 욕이 늘어.”

전화를 끊은 기준이 손을 들어 귀를 파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건드려요.”

“재밌잖아. 아, 맞다. 온 김에 너한테 밥도 얻어먹고 가야겠다. 인우가 얼마나 자랑하는 줄 알아? 너 요리 잘한다고?”

“그래요?”

“어. 못 먹어 본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는지.”

“기다려요. 금방 해줄게요, 선배.”

그 뒤로 기준은 신나게 욕을 한 번 더 먹어야만 했다. 해원이 해준 요리 인증 샷을 SNS에 올리자마자 인우로부터 또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출근 첫날이라 바쁠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가 보다.

해원은 유치한 두 남자의 싸움을 지켜보며 웃음을 삼켰다. 어쩐지 앞으로 이런 일이 무척이나 자주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비록 인우는 물려받을 재산과 후계자 자리는 포기해야 했지만, 그래도 평사원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올 기회를 다시 얻게 되었고, 자신 역시 하고 싶던 일은 계속하며 그의 곁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아무런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사랑하고 때론 다투기도 하며 다른 평범한 연인들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겠지.

햇살이 들어오는 따뜻한 창 앞에 서서 자신이 만든 의자와 테이블을 보며 해원은 입가에 미소 지었다. 저 의자 밑에 마음을 담을 때만 해도 이런 미래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기에, 이 평범한 일상이 무척이나 소중하고 감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