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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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밤늦은 시간까지 일에 집중하고 있는 인우를 기준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원과 만난 이후, 벌써 일주일째 미친 듯이 일에 빠져 살고 있는 그였다. 마치 일로 살풀이하는 사람처럼 새벽까지 회사에 남아 있고, 아침 일찍 출근했다. 과연 잠을 자긴 자는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해원과 만난 다음 날 차갑게 굳은 얼굴에 안 좋게 끝이 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인우가 이렇게 미친놈처럼 굴 줄은 몰랐다. 차라리 술독에 빠져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식사도 잘 안 챙겨 먹고 일만 해대는 걸 보니, 저러다 금방 쓰러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정인우.”

회사 근처 일식집에서 사온 초밥을 내밀며 기준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인우는 초밥을 거들떠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설계 작업에만 집중했다. 해원만큼은 아니지만 사실 인우의 설계 실력도 최고였다.

대학 다닐 땐 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각종 크고 작은 공모전에서 수상한 이력도 꽤 있었다. 이 회사를 세운 이후 큰일 대부분은 해원에게 맡기고 인우는 경영에만 집중했었는데, 어쩐 일인지 해원을 만나고 난 일주일 전부터는 설계 작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아마 그렇게 일을 만들어서라도 실연의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다.

인우를 알고 지낸 지 벌써 20년 가까이 되어 가지만 여자 문제로 이토록 힘들어하는 건 처음이었다.

해원을 만나기 전에 그는 늘 자신이 정해 놓은 조건들의 여자들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들에게 어떤 집착도 보이지 않았다. 그 지독한 무관심을 못 견디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금방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럴 때도 정인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차이고 나서도 힘들어하긴커녕 오히려 속 시원해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어째서 해원과의 이별은 이토록 힘들어하는 걸까.

제가 아는 인우가 아닌 것 같았다.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해원과 연애를 한 것도 신기한 일인데, 실연 후유증을 이토록 심하게 앓다니.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던 정인우도 뼈와 살이 있는 인간이었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너 이러다가 쓰러져.”

한숨을 쉬며 인우 곁으로 다가간 기준은 초밥 포장을 벗기며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내밀었다.

“됐어. 안 먹어.”

“야. 너 오늘 아침에 베이글 하나 먹은 게 다야. 알아?”

점심 저녁도 건너뛰고 밤 10시가 넘는 시간까지 사무실에 처박혀 있는 인우가 도통 이해가 안 되었다. 꼭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이런다고 해원이 안 돌아와.”

해원의 이름에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윤해원 이름 꺼내지 마. 이제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상관없는 사람이긴. 유일하게 그 이름에만 반응한다는 걸 정인우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 몰라. 네 마음대로 해.”

신경질이 나서 더는 인우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일 모레 해원이 미국으로 떠나 버리면 정신 좀 차릴까. 미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생각하며 기준은 또 한 번 한숨을 삼켰다.

**

1월 24일.

해원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다. 회사도 쉬는 날인데 오늘따라 왜 이리 빨리 눈이 떠지는 건지 모르겠다.

‘11시 비행기래, 해원이. 그래도 마지막으로 얼굴은 한 번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기준이 어제 자신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지막은 개뿔.

자신들의 마지막은 이미 열흘 전이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건넨 진심도 해원은 끝끝내 차가운 얼굴로 외면했다. 맨날 저보고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하더니. 자신보다 더한 인간이 윤해원이었다.

갈증이 나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시던 인우는 신경질적인 손길로 생수통을 내던졌다. 하지만 그걸로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럴 땐 윤해원이 아무 흔적도 안 남기고 떠나 버린 게 더 화가 났다. 흔적이라도 남겨 놓았으면 거기에라도 분풀이를 하는 건데.

그때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침부터 누구야.

짜증 섞인 얼굴로 인터폰 앞에선 인후는 야외에 놓는 의자로 추정되는 물건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누구세요.”

인우는 인터폰을 누르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인우 씨 댁이죠. 가구 배달 왔습니다.

남자의 입에서 정확하게 흘러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인우는 더욱 인상을 썼다. 가구 같은 거 시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보낸 걸까.

대문 열림 버튼을 누른 인우는 곧장 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러자 대충 봐도 튼튼해 보이는 의자를 들고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여기 놔둘까요?”

자그마한 연못이 보이는 평지를 가리키며 묻는 남자의 말에 인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낸 겁니까?”

그러고 나서 제일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윤해원 씨요.”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에 인우는 돌처럼 굳었다.

“여기에 잘 받았다는 사인 좀 해주세요.”

그가 내미는 종이에 신경질적인 손길로 사인을 하며, 인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누가 보낸 거라고요?”

“윤해원 씨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가는 남자를 보지도 않고, 인우는 바닥에 놓인 의자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해원의 이름에 마음이 들끓는 자신이 싫었다.

“이딴 걸 왜 보내.”

인우는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뒤돌아섰다. 의자를 보고 있고 싶지도 않았다. 분명 해원이 만든 것이리라. 회사에도 해원이 만든 가구가 몇 개 있어서 그녀의 솜씨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왜 자신에게 저런 걸 보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별의 선물 뭐 그런 건가.

“젠장. 빌어먹을.”

너 따위 다 잊었다며 무시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됐다. 신경질이 나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짜증 섞인 얼굴로 다시 의자 앞으로 돌아온 인우는 번쩍 그걸 집어 들어 내동댕이쳤다.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집어진 의자를 보니 그나마 속이 조금 편안해졌다.

누가 이딴 선물 소중하게 간직할 줄 알고.

네가 준 선물 따위 누가……!

그런데 그 순간 뒤집어진 의자 바닥에 새겨져 있는 글씨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랑해요.>

인우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눈에 익은 손 글씨였다. 몇 년간 보아 온 그녀의 필체에 인우는 비틀거리며 자신이 집어 던진 의자로 다가갔다.

<사랑해요.>

나무 위에 깊게 파여 있는 글자를 만지는 순간 그녀와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글자뿐이 아니다. 그녀는 이 의자를 직접 만들면서 어떤 생각을 했던 걸까. 어떤 마음으로 이런 글자를 새겼을까.

이 의자를 만들었을 매시간, 매순간 저를 떠올렸을 것이다. 제가 건넨 모진 말들, 거짓처럼 사랑을 말하던 순간들, 그 모든 순간마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는 그것을 마음에 두었을 거다.

듣고 있지 않다 생각했었는데, 상처 입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제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생각했었는데…….

<사랑해요.>

해원에게선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 그 말들이 이 의자에 담겨 있었다. 인우의 검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인우는 곧장 집으로 들어가 차 키만 들고 나왔다.

정신없이 인천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견인이 되든 말든 입구 앞에 차를 세워 둔 인우는 곧장 공항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출국장을 향해 무작정 내달렸다. 시간을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그저 해원이 떠나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전광판에 뜬 뉴욕행 11시 비행기 입장 마감 표시를 보는 순간 인우의 눈은 절망으로 일렁였다.

‘마지막이야.’

그런 말 따위 하지 말걸. 해원이 저를 용서해 줄 때까지 매달리고 또 매달릴걸. 아니, 애초에 곁에 있을 때 믿음을 줄걸. 그랬다면 해원이 의자 밑에 몰래 그런 말을 새기지 않았을 텐데. 입으로 직접 그 말을 전했을 텐데.

의자 아래 그 말을 새겼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니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급기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그는 참았던 오열을 터트렸다. 어떻게 매 순간이 이토록 후회될 수 있을까.

사랑한다 많이 말해 줄걸 그랬다.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에게 반했었다 솔직하게 고백할걸 그랬다. 네 걱정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는 말도 해줄걸. 네가 곁에 있어서 좋았다는 말도…….

“흐흑.”

한 번 터져 나온 흐느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자신에게 손수건을 내미는 게 흐릿한 시야 사이로 보였다. 익숙한 달콤한 향기에 인우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인우는 떨리는 시선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저를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해원의 얼굴이 보였다.

“선배…….”

저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 너무 간절하게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환상을 보고 있는 걸까. 그때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엽서가 한 장 보였다. 익숙한 자신의 글씨가 적혀 있는.

“너 정말 해원이야?”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으며 그 손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손끝에 와 닿는 따뜻한 온기. 환상이 아니었다. 진짜 해원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네, 선배.”

“환상이 아니야?”

눈물 섞인 목소리로 묻자, 해원 역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갈 수가 없었어요. 가려고 했는데. 오늘 아침 우편함에서 발견한 이 엽서 때문에 갈 수가 없었어요, 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해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지금 네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엄마 저 사람들 뽀뽀해.”

“쉿.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의 말 역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제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윤해원 뿐이었으니까.

**

집에 들어오는 순간 정신없이 서로의 옷을 벗겨댔다. 둘이 지나간 흔적이 바닥에 떨어진 옷으로 여과 없이 드러났다. 침대에 도착했을 땐 나체가 된 두 사람은 뜨거운 육체를 끊임없이 부딪쳐 가며 서로를 탐미했다.

이 순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꿈에서 얼마나 수없이 많이 그녀를 안았는지 모른다. 그런 꿈을 꾸는 게 두려워 잠들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해원은 아마 모를 것이다.

“흣.”

그런 것쯤 몰라도 상관없었다. 지금 제 눈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었으니까.

한 손에 쏙 들어오는 가슴을 움켜잡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분홍빛 유두를 입 안 가득 베어 물었다. 깊게 향기를 빨아들이고, 단단하게 솟은 유두를 혀끝으로 살살 자극하며 애달픈 그녀의 신음을 들었다.

환상이 아니었다. 진짜 이곳에 해원이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혹시 이게 또 꿈일까 봐 두려운 마음에 손을 아래로 내려 젖어들기 시작한 여성을 어루만졌다. 다행이다. 꿈과 다른 생생하게 전달되는 애액의 감촉에 그의 손이 더욱 다급해졌다.

갈라진 틈 사이를 파고들어, 움찔거리며 애액을 뿜어대는 질구 안으로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주름진 내벽의 느낌, 세차게 조여 대는 질, 몸을 비틀며 신음을 내지르는 해원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보고 또 보아도 예뻤다. 붉게 달아오른 몸이 사랑스러웠다. 이제야 확실히 제 것이 된 해원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이제 아무 데도 안 보내. 평생 내 옆에 둘 거야.”

해원은 상기된 두 뺨을 한 채 떨리는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후회 안 해요? 나 때문에 모든 걸 다 잃어도?”

“잃는 게 아니야. 너를 얻는 거지.”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순간 질이 더욱 세차게 내벽을 찌르는 손가락을 조여 왔다. 도저히 못 참겠다고 성난 페니스가 움찔거렸다. 인우는 번쩍 몸을 일으켜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 상태 그대로 페니스를 그녀 안으로 찔러 넣었다.

“흣! 선배. 너무 깊어…….”

일어서서 안긴 채 들어가니 중력의 힘에 의해 더욱 깊숙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도달한 적이 없는 깊숙한 곳을 찔러대는 페니스를, 질은 강하게 조여 왔다.

“하, 해원아.”

온몸을 지배하는 강한 쾌감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러면서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더더욱 깊숙이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끝없는 쾌락의 세계로 폭주하듯이 질주했다.

**

강렬한 절정을 맛보고 씻지도 않은 채 둘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누워 있었다.

“정말 그 소망 엽서 보고 안 간 거야?”

인우의 물음에 해원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으면 100장쯤 보낼걸 그랬다. 그랬으면 네가 더 빨리 나에게 왔을까?”

“딱 한 장이라 좋았어요. 진짜 선배의 진심이 느껴져서.”

인우가 손을 들어 절정의 여파로 땀에 젖어 있는 해원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도 봤어. 의자 밑에 네가 적어 놓은 말.”

“……봤어요?”

해원이 더욱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빨리 자신의 진심이 들킨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응. 이왕이면 직접 들으면 더 좋았겠…….”

“사랑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백에 인우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사랑해요. 이제는 말하고 싶을 때 마음껏 말할래요. 사실 그동안 그 말을 참느라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가 살짝 몸을 일으켜 두 팔로 그녀를 가두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봐.”

“사랑해요.”

“또.”

“사랑해요.”

계속되는 해원의 사랑 고백에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 흐읏! 서, 선배.”

이마, 볼, 콧잔등, 입술에 차례대로 닿던 그의 붉은 입술이 말랑거리는 젖꼭지 위에 닿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니 도저히 못 참겠어. 또 널 안고 싶어서.”

덮고 있던 이불을 던져 버리는 그의 손길에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그녀의 나체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이불이 일으킨 바람 때문에 협탁 위에 올려져 있던 엽서가 팔랑거리며 날아갔다.

[너만 있으면 돼. 평생 내 곁에 있어 줘.]

간절한 그의 소망이 적힌 엽서가 은은한 달빛 아래 반짝였다.

**

해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잠깐 깜박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간절하게 보고 싶었던 이 얼굴을 못 보는 그 찰나의 시간도.

‘마지막이야.’

사실 그날 마지막이라고 말하며 그가 제게 프러포즈를 했던 그날, 거절하고 나가는 그 순간부터 후회를 했다. 다시 돌아가 그를 꽉 붙잡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힘겹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제주도에 돌아가서도 후회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한 번만 믿어 볼걸. 처절하게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곁에 있을걸. 저를 택한 걸 그가 후회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눈 딱 감고 버틸걸.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나갔다. 하지만 이미 그가 준 마지막 기회는 끝이 났고, 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다.

힘겹게 제주도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고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미리 챙겨 둔 짐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이 집에 대한 정리는 수연에게 일임했다. 그 외 대부분의 정리는 제주도에 갔을 때 이미 끝난 상태였다.

망가진 캐리어를 대신해 새로 산 캐리어를 끌고 이른 새벽 문을 열고 나온 해원은 언젠가 그가 제집 앞에 왔을 때처럼 문 앞에 기대앉았다. 서늘한 철문의 냉기가 등을 타고 흘렀다. 그도 이랬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서늘한 곳에 긴 시간 앉아 있을 때 그냥 문을 열고 안아 줄걸. 또다시 사무친 후회가 시작되었다. 이 후회 역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복도에 나 있는 창을 통해 해가 밝아 오는 게 보였다. 해원은 비틀거리며 그가 앉아 있던 집 앞에서 일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해원은 아쉬운 얼굴로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때 1층에 있는 우편함이 해원의 눈에 들어왔다. 서류 정리가 끝나 날아올 우편물이 거의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우편함을 열었다. 그 순간 그 안에 들어 있던 하얀 엽서 한 장이 보였다.

주소에 적어 놓은 글씨가 무척이나 익숙했다. 보는 순간 정동진에 갔을 때 보낸 소망 엽서라는 걸 알아보았다. 자신은 그의 행복을 빌었었다. 과연 덤덤히 이별을 맞이하던 그 순간에 그는 뭘 빌었을까. 해원은 떨리는 손으로 엽서를 들어 올렸다.

[너만 있으면 돼. 평생 내 곁에 있어 줘.]

볼펜으로 꽉꽉 눌러 적은 흔적이 남은 그의 간절한 소망의 말을 보는 순간 해원의 눈엔 눈물이 차올랐다. 그냥 일시적인 감정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미국에 가는 걸 알고, 보내기 싫어 붙잡고 싶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건네던 고백들이.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그가 분명 후회할 거라 생각이 들어 인우가 내민 손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미국에 가는 걸 알기 전에 이 말을 적은 건…….

묵직하게 다가오는 그의 진심에 해원은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그동안 꽉꽉 눌러 참아 왔던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제 너무 늦었다. 차분히 마음 정리를 잘하고 있는 그를 다시 흔들 수 없었다.

그 생각을 하며 공항까지 갔지만 끝내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제 손에 꽉 들려 있는 엽서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끝내 탑승을 포기하고 힘없이 돌아서 나오는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열을 터트리고 있는 인우를 발견했다. 고마웠다. 지쳤을 법도 한데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손을 내밀어 준 그가.

공항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해원은 한 달 사이 많이 야윈 인우의 얼굴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제 손을 움켜잡는 그의 손이 보였다.

“선배? 안 잤어요?”

놀라 묻는 말에 그가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못한 말이 하나 있어서.”

미소만큼이나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가 눈을 떴다. 가을 하늘처럼 청명한 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처음 그를 만난 순간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랑해.”

귓가를 간질이는 달콤한 그의 고백에 해원은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행복했다. 이 순간이 정말. 이제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결코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다짐을 하며 그의 넓은 품에 파고들었다.

“사랑해요.”

오늘 하루 수없이 그에게 많이 했던 그 말을 중얼거리면서. 저를 꼭 끌어안아 주는 팔이 무척이나 든든했다. 어떤 풍파와 맞서 싸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힘든 일이 많겠지만 이 든든한 팔만 믿고 앞으로 나갈 것이다.

창밖엔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소록소록 쌓여 가는 하얀 눈처럼 포근한 밤이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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