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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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타인과 같이 사는 게 불편할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해원과 같이 살면서 그런 불편함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치 공기 같았다. 한 공간에 존재하고 있건만 그걸 잘 느낄 수가 없는 공기 같은 사람이었다.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한 사람.

물론 그걸 강요한 사람이 저이긴 했지만, 흔적 하나 안 남겨 놓는 해원을 보고 있으니 서운한 마음까지 들려고 했다. 하다못해 칫솔 하나까지 밖에 꺼내 놓지를 않았다.

씻고 나면 꼭 그것을 챙겨 캐리어에 집어넣는다. 옷 역시 세탁을 할 때 건조까지 해서 캐리어 안에 넣어 두었다.

자신의 집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건 소파 옆에 세워진 캐리어뿐이었다. 기준과 밖에서 술 한잔하기로 해서, 해원보다 먼저 퇴근한 인우는 나갈 채비를 하며 씁쓸한 눈으로 캐리어를 바라보았다.

이제 함께 할 시간이 불과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은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흘렀다. 그 시간이 아까워서 아무런 약속을 잡고 싶지 않았지만, 요즘 수상하다며 기준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오기에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캐리어가 해원이라도 되는 양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고 인우는 차 키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방금 전까지 회사에서 실컷 해원을 보고 와 놓고 벌써 또 그녀가 보고 싶다니. 중증은 중증이었다.

그녀를 보러 회사로 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인우는 클럽으로 차를 몰았다. 늘 기준과 함께 술을 마시는 룸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 있던 그가 손을 흔들며 저를 반겼다.

“바쁜 척하더니 웬일이냐. 네가 술을 마시러 다 나오고.”

술 한잔하자고 끈덕지게 조르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오늘도 안 나오면 친구 안 한다며.”

“자식. 유일한 벗을 잃을까 봐 무서웠구나.”

무섭긴 개뿔.

지금은 잃을까 두려운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잃는 게 당연한 건데, 잃고 싶지 않아 미칠 것 같았다.

“정인우.”

“왜?”

호박색 양주를 술잔에 따르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너 여자 생겼지?”

정곡을 찌르는 기준의 물음에 막 삼키던 양주가 목에 걸렸다. 뜨겁고, 따갑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이것 봐, 이것 봐. 완전 당황했지, 지금?”

“뭐래. 미친놈.”

“누구야. 어떤 대단한 집 여자기에 꼭꼭 숨겨 놓고 안 보여줘?”

대단한 집 여자면 참 좋겠다. 그러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여자 없어.”

“거짓말하지 마. 내가 자주 가는 레스토랑 사장님이 너 여자랑 온 거 봤다던데?”

윤해원 맛있는 거 먹이고 싶단 생각에 유명한 레스토랑에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사실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이었는데, 해원이 잘 먹는 걸 보고 싶다는 욕구가 그걸 이겼다. 그런데 하필 기준의 귀에 그 사실이 들어갔을 줄이야.

“누구야, 그 여자?”

“네가 모르는 여자야.”

“말도 안 돼. 네가 내가 모를 정도로 안 유명한 여자를 만난다고?”

그러게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불문율이 깨진 건 그렇다 치고 그 여자한테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리게 될 거라곤 저 역시 예상 못한 일이었다.

“그래.”

“평범한 여자야?”

“아니.”

세상에서 제일 특별한 여자.

“그만 물어봐, 인마. 소개할 수 있는 여자면 벌써 했어.”

기준에게는 사실 해원과 만나는 걸 알려도 상관없었다. 보기보다 입이 무거운 그를 아니까.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이 사실을 안다면 기준은 분명 펄쩍 뛰며 해원을 뜯어말릴 것이다. 저런 쓰레기 같은 자식 만나지 말라고. 제 친동생 같이 해원을 감싸며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그게 무서웠다. 유난히 기준의 말을 잘 듣는 해원이 예정된 시간보다 더 빨리 떠날까 봐. 가뜩이나 흐르는 시간이 아까워 죽겠는데. 남은 시간이라도 평화롭게 해원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런데 진짜 놓을 수 있을까.

벌써부터 자신 없었다. 그 자그마한 손을 꽉 잡고 놓기 싫었다. 자신이 누리던 모든 걸 포기하고서라도 그 손을 잡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그 손을 잡지 못할 게 분명했다. 자신은 사랑에 모든 걸 바칠 정도로 순수하지 못한, 지독하게 속물적인 인간이었으니까.

**

팬티 안을 파고드는 차가운 손가락 느낌에 해원은 스르르 눈을 떴다. 여성의 갈라진 틈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곧장 움찔거리는 질구를 파고들었다.

“흣.”

차가운 손의 감촉 때문일까. 내벽을 긁고 올라가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해원은 여전히 잠에 취한 눈으로 나른한 신음을 내뱉었다.

“금방 젖네. 야한 꿈이라도 꾼 건가.”

귀를 간질이는 익숙한 인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질 안을 찔러 들어오는 손가락 개수가 점점 많아졌다. 한 개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예민한 내벽을 긁어대며 무서운 속도로 찔러 오는 손가락에 자궁이 요동쳤다.

“흐으읏. 아아, 선배. 제발.”

흐느끼듯 신음을 내지르며 여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찌걱찌걱, 손가락이 질 안을 드나드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애원 섞인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엔 자비가 없었다. 더욱 속도를 높이며 내벽 안쪽 예민한 곳을 찔러대는 손가락에 해원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왈칵.

자극을 받은 G스팟에서 샘이 솟아났다. 그의 손가락뿐만 아니라 항문과 침대 시트를 흠뻑 적실 양의 애액이 흘러나왔다.

“맛있어.”

절정에 여파에서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애액으로 흠뻑 젖은 손가락을 빨고 있는 그가 보였다.

“들어갈까?”

그러더니 다시 손가락으로 움찔거리는 질구를 더듬으며,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가락 말고 다른 걸 원하는 거 같은데.”

“선배.”

“말해 봐. 원하는 걸.”

욕망에 사로잡힌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넣어 줘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하자 그가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뭘?”

“선배…….”

더 적나라한 답을 원하는 그의 짙은 검은 눈을 보며 해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걸 원해?”

단숨에 바지 버클을 풀은 그가 잔뜩 성이 난 페니스를 밖으로 꺼내 흔들며 물었다.

“네.”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절정을 맛본 여성은 연신 움찔거리며 어서 그가 안으로 들어오길 재촉했다.

“어서요.”

“내가 또 말은 잘 듣지.”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페니스에 콘돔을 씌운 그는 곧장 주름진 질구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예민해진 내벽은 격렬하게 남성을 반기며 세차게 조여 댔다.

“하, 물고 놔줄 생각을 안 하네. 그렇게 좋아?”

음란한 그의 말에 부끄러워할 정신이 없었다. 저를 꽉 끌어안고, 그가 힘 있게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더 깊은 곳까지 페니스가 찔러댔다.

“여기도 잔뜩 부풀어 올랐어.”

부드러운 음모를 손가락을 훑으며 꽃잎 사이에 숨겨진 클리토리스를 찾아낸 그는 엄지로 빠르게 문질렀다.

“하아! 서, 선배.”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제 목을 받쳐 주고 있는 단단한 팔을 꽉 움켜잡았다. 클리토리스와 질 안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미치겠다. 쌀 것 같아.”

쾌감이 커질수록 질이 더욱 빠르게 조여졌다 풀어졌다를 반복했다.

“윤해원, 해원아.”

그 역시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애타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흘러나오는 한마디.

“사랑해.”

애달픈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 말에 해원의 까만 눈이 요동쳤다.

“사랑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속삭이며 그는 절정에 올랐다. 해원 역시 저를 덮치는 절정의 파도 아래 욕망과 서글픔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정사의 여운보다 더 강렬한 두근거림에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간 인우가 보여주었던 행동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모진 말과 다르게 한없이 다정했던 행동들. 그게 어느새 심장 속에 새겨지고 있었나 보다. 이 달콤한 말을 믿어 보고 싶다. 그런 기대감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아니야.

해원은 입술을 좀 더 세차게 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차분하고 냉정했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 아무것도 믿지 마.’

아무것도 믿지 않을게요.

흔들리면 안 된다. 그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 해원은 자신을 바라보는 갈망 어린 그의 눈빛을 힘겹게 외면했다. 그래야 곧 찾아올 이별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기에.

**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에 인우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사랑해.’

그 순간 떠오르는 열망 어린 제 목소리에 인우는 눈을 번쩍 떴다. 미친놈. 설마 진짜 그렇게 말한 걸까. 아니다. 그럴 리 없었다. 어제 술이 너무 과했나 보다. 이런 망상이 머릿속을 휘젓는 걸 보면.

그런데 왜 이렇게 아랫도리가 허전하지.

깜짝 놀라 이불을 걷고 아래를 보자, 헐벗은 제 다리와 분신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술을 끊든가 해야지.

술만 먹으면 왜 이리 미친놈처럼 폭주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말 자신이 어제…….

‘사랑해.’

또다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제 목소리에 인우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마트 이름이 찍힌 비닐 봉투를 들고 있는 해원이 보였다.

“어, 선배. 깼어요?”

해원의 물음에 인우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술 많이 마셨나 봐요. 사실 나도 잠결이라 선배 취한 것도 몰랐는데. 나 안고 나서 선배가 바로 잠든 거 보고 알았어요. 취했다는 거. 미안해요. 뒤처리는 대충했는데, 도저히 선배를 들 힘이 없어서 옷은 못 입혔어요.”

마트에서 장을 봐온 재료들을 냉장고에 넣으며, 해원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차분한 걸까. 어제 분명 자신이 내뱉은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 그녀를 안은 기억보다 그 말을 한 기억이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걸로 봐서는 그 말은 한 게 확실할 텐데 말이다.

“윤해원.”

“네, 선배.”

막 앞치마를 매던 해원이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제 내가 너한테 무슨 말 하지 않았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자, 말간 검은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했구나, 역시.”

진짜 어쩌자고 그런 말은 한 건지. 의지를 벗어나 멋대로 흘러나온 말을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선배.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때 차분한 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밤에 엄청난 고백을 받은 사람답지 않게, 지독하게 차분한 그 모습에 오히려 심사가 뒤틀렸다.

“뭐가. 뭘 걱정 안 해도 되는데?”

“믿지 않으니까요.”

도마를 꺼내 채소를 썰며 해원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선배가 그랬잖아요. 아무것도 믿지 말라고.”

쓰디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행이라 안도해야 하건만 속에선 쓴 물이 올라왔다. 저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자신의 감정이 아무 의미가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내 감정은 이리도 형편없구나. 아무런 힘도 없구나.

하긴 아무것도 믿지 말라고 한 사람이 자신인데 누굴 원망하겠는가. 원망할 자격도 없었다.

“똑똑하네, 윤해원.”

허탈한 목소리로 건네는 칭찬에 그녀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조금 서글퍼 보이는 건 제 착각일까. 그래, 윤해원이 그럴 리가 없었다.

“씻고 나와요. 선배 속 쓰릴 것 같아서 북엇국 끓이려고요.”

“됐어. 안 먹어.”

심술 난 아이처럼 퉁명스럽게 말하고 곧장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산 지 일주일 가까이 되어 가건만 해원이 바빠서 그녀가 해준 요리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윤해원이 해주는 음식에선 어떤 맛이 날까.

서둘러 씻고 나온 인우는 편안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그녀 가까이에 있는 스툴 위에 가서 앉았다.

“먹을래. 속 쓰려.”

그의 말에 해원은 예쁘게 웃었다.

“끓이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이미 자신이 변덕 부릴 거란 걸 알고 있었나 보다. 요리를 멈추지 않는 것을 보면. 갑자기 부러워졌다. 이 똑똑하고 눈치 빠른 여자와 함께 살 남자가. 그리고 그 부러운 마음은 그녀가 끓인 국을 먹으면서 더욱 강해졌다.

“건축 사무소 그만두고 식당이나 하나 차릴까. 대박 나겠는데.”

농담을 건네는 제 말에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제 밥그릇에 자신의 밥을 더 덜어 주면서. 그게 또 너무 예뻐 보여 마음이 아팠다. 그만 예뻐 보여야 하는데 점점 더 예뻐 보이기만 하니 미치겠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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