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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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우는 정말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다정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까. 아침엔 늘 집 앞으로 데리러 와 출근을 시켜 주었고, 점심땐 자신만 따로 불러 회사 근처 유명한 식당에 데려가기도 했다.

예전엔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는 장소만 고르던 사람이 이젠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과 함께 다녔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도 끝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 후엔 늘 본인의 집으로 데리고 가 여전히 뜨겁게 안았다. 매일 저를 안다시피 하면서도 그는 늘 굶주린 사람 같았다.

안을 때 감정 표현도 좀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예쁘다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는 그가 적응이 잘 안 되어서 심장이 자꾸만 덜컹거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쑥불쑥 사다 안기는 선물도 많아졌다. 머플러, 가방, 코트, 장갑, 향수 등. 포장을 풀 엄두조차 안 나는 비싼 선물들을 자신에게 사다 안겼다. 필요 없다고 거절도 해보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버리라면서 무조건 사서 안겼다.

‘흔들리지 마, 절대.’

그러면서도 늘 저 말은 잊지 않는 그였다. 어느새 책장 세 칸을 채워 가는 그의 선물을 보며 해원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장도 안 푼 채 비워 있는 책장에 그가 준 선물을 채워 넣다 보니, 이제 더는 둘 곳도 없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차라리 예전에 그가 그리울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다정하게 구니 마음을 다잡기가 힘겨웠다.

이러다 내가 떠나기 싫어지면 어쩌려고…….

서글픈 눈으로 선물을 보며 해원은 또다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밤 12시가 다 되어 가는 이 늦은 시간에 도대체 누가 벨을 누르는 걸까. 혹시?

오늘 모임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일찍 퇴근했던 인우를 떠올리며 해원은 인터폰 앞으로 걸어갔다. 덕분에 모처럼 해원도 정시에 퇴근해 집에 와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진짜 선배네.”

모니터 화면을 통해 보이는 인우의 모습에 해원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재빨리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자, 계단에 긴 다리를 쭉 뻗은 채 앉아 있는 인우가 보였다.

“선배?”

그녀의 부름에 그는 피식 웃음을 삼켰다.

“윤해원이다. 우리 해원이.”

그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술을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걸까. 코를 스치는 짙은 알코올 향에 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 또 술 마셨어요? 요즘 왜 이렇게 자주 마셔요?”

원래 술 마시는 건 좋아했지만, 취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그였다. 그런데 요즘엔 왜 이렇게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걸까. 뭐가 이토록 괴로워서.

“그냥 너 보고 싶어서.”

이렇게 툭툭 숨김없이 감정도 다 내보이면서 뭐가 이리도 힘든 걸까, 이 사람은.

“선배…….”

“술 마시니까 왜 더 보고 싶냐.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윤해원.”

품에서 자신을 떼어 낸 그가 커다란 손을 뻗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그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집 안으로 들어왔다.

“선배? 집에는 왜?”

재빨리 그를 뒤쫓아 안으로 들어가며 해원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고 갈래.”

“네?”

“매정한 윤해원. 어떻게 한 번도 집에 들어오라는 소리를 안 하냐? 우리 집은 맨날 들락날락하면서. 내가 아침에도 너 데리러 오고, 밤에도 데려다주는데. 어떻게 한 번을 말을 안 해.”

술을 핑계 삼아 작정하고 불만을 늘어놓을 생각인가 보다. 그러더니 피식 웃으면서 놀이터에 놀러 온 아이처럼 신이 난 얼굴로 집 안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네 향기가 나. 이 집에서. 아, 우리 남은 기간은 여기서 지낼까? 좋다, 네 향기.”

거침없는 그의 감정 표현에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버리듯 토해 내는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하는 건 저였기에.

“윤해원.”

“네.”

“근데 집이 왜 이렇게 작아? 음, 내가 더 큰 집 사줄까? 여긴 너무 작지 않아?”

한눈에 훤히 다 들어오는 작은 원룸을 둘러보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머플러도 사주고, 옷도 사주고, 가방도 사주더니. 이젠 집까지 사준단다. 해원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전 여기가 좋아요. 그리고 선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제 내 선물 그만 사와요. 나 그런 거 정말 필요 없어요.”

선물이 필요 없다는 그녀의 말에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받아, 그냥. 그거라도 받아, 해원아. 나랑 놀아 주는 대가야. 정당한 대가. 내 마음은 줄 수가 없으니까 선물이라도 줄래.”

마음을 안 준다는 사람이 자꾸만 감정을 흘린다. 그러면서 저보곤 절대 흔들리지 말라고 한다. 참 이기적이다. 누구를 좋아하는 방법까지도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저는 이런 걸 다 알면서도 이 남자가 좋을까.

“참 못됐다, 선배.”

그 말에 그가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 난 뼛속까지 못된 놈이니까.”

“안 흔들려요. 걱정하지…….”

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입술에 포개지는 뜨거운 그의 입술 때문에. 아플 정도로 잔인한 키스였다. 정신없이 입 안을 헤집어 놓고, 혀를 휘어 감는 거친 키스. 다정하지도 않고, 달콤하지도 않은 키스인데 그와 관계에 익숙해진 몸은 금세 달아올랐다.

자신의 옷을 벗기는 그의 손길 역시 거칠었다. 광기 어린 탐닉. 고스란히 전달되는 그의 감정에 괜스레 마음이 아파 왔다. 참 못되게 구는 남자인데, 왜 자신은 이 남자가 이렇게도 안쓰러울까.

저보다 가진 게 훨씬 많은 사람인데도 왜 이리 가엾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윤해원, 해원아.”

그가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애달픈 목소리로 저를 불렀다. 그러더니 저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 위에 눕혔다.

동그란 젖가슴을 움켜잡는 손길이 뜨거웠다. 마치 엄마 젖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세차게 가슴을 빨아 당기는 입술 역시 뜨거웠다. 고스란히 전달되는 그 열기에 해원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말로 토해 내는 감정보다 더욱 적나라한 그의 감정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자극하며 입술로는 단단해진 유두를 머금고 혀 위에서 굴려댔다. 쾌락을 선사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그는 멈추지 않았다.

“흣.”

해원은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아냈다.

“참지 마. 소리 내.”

그는 기어코 소리를 듣겠다, 작정한 사람처럼 막 젖어들기 시작한 허벅지 사이로 손을 뻗었다. 거친 손놀림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손길에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여전하네, 윤해원.”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손에 힘을 주어 다리를 활짝 벌렸다. 미처 불도 끄지 못했는데. 환한 불빛 아래 은밀한 속살이 그대로 다 드러나는 게 부끄러워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가리지 마. 네 눈 보고 싶어.”

부드럽게 속삭이며 그가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곧장 흥분으로 인해 단단해진 음핵을 찾아 혀로 세차게 핥았다.

“흐읏!”

견딜 수 없는 쾌락에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온몸을 뒤덮는 엄청난 자극이 감당이 되지 않아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려 그의 머리를 밀치려고 했다. 하지만 제 손을 저지하는 그의 손길에 막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서, 선배. 제발!”

복수라도 하듯 그의 입술이 더욱 세차게 음핵을 빨아 당겼다. 두려울 정도로 강한 쾌락에 발끝까지 힘이 들어갔다.

“그만!”

날카로운 그녀의 외침에 그가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말과 다르게 여긴 무척 팔딱거리고 있어.”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가 움찔거리는 질구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오돌토돌한 내벽을 손가락으로 찔러댐과 동시에 그의 입술은 터질 것같이 단단해진 음핵을 물었다.

“아아!”

짐승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지 않으면 저를 덮치는 쾌락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그렇게 좋아? 여기가 아주 사정없이 조여 대.”

내벽에 예민한 곳을 푹 찔러대는 손가락에 해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하라고 외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또다시 음핵과 내벽을 동시에 자극하는 입술과 손가락에 울부짖듯 신음을 토해 내며 절정에 올랐다.

왈칵.

그가 손가락을 빼내기 무섭게 여성에서 쏟아져 나온 애액이 침대 시트를 흠뻑 적셨다.

“돌겠다. 당장 들어가고 싶어서.”

마음이 급한지 아랫도리만 벗어 던진 그가 지갑에서 콘돔을 찾아 성난 페니스에 씌웠다. 그러더니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려 자신의 위에 올라오게 했다. 엉덩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성기의 감촉에 해원은 자연스레 허리를 흔들었다.

어서 빨리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욕망을 외면한 채, 갈라진 틈 사이에 성기를 놓고 비벼댔다.

“윤해원.”

그가 으르렁대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다.

“흣!”

그 부름을 무시한 채 더욱 빠르게 엉덩이를 흔들며 비볐다. 절정을 맛본 음핵에 단단한 성기가 닿을 때마다 입에서 나른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찌걱찌걱. 콘돔을 씌운 남성과 흠뻑 젖은 여성이 마찰을 일으키는 색스러운 소리가 조용한 집 안을 채워 나갔다.

“젠장. 도저히 못 참겠네.”

몸을 벌떡 일으킨 그가 빙그르르 그녀의 몸을 잡고 돌려 자신의 아래에 두었다. 졸지에 엎드린 자세를 취한 채로 깊숙이 찔러 안으로 들어오는 남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기, 깊어요.”

자세 때문인지, 평상시보다 더욱 깊숙이 찔러 들어오는 페니스가 버거웠다.

“여긴 좋은지 잔뜩 부풀어 올랐는데.”

그 말을 속삭이며 흥분으로 인해 솟은 음핵을 검지와 중지로 문질렀다.

“하!”

엄청난 쾌락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질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세차게 페니스를 조이는 듯한 그 느낌에 그의 입에서도 뜨거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조금만 풀어. 이러다 금방 가겠어.”

“그런 거 모, 못해요.”

사정없이 여성을 찔러대는 성난 페니스의 감촉에 머릿속 새하얗게 질려 갔다. 그 역시 쾌감이 밀려오는지 더욱 세차게 허리를 움직여댔다.

“윤해원, 해원아.”

애타게 그의 입에서 불리는 자신의 이름. 출렁거리는 침대. 맞닿은 두 몸에서 뿜어지는 뜨거운 열기. 그 모든 걸 느끼며 어느새 절정으로 나아갔다. 온몸이 바르르 떨리는 엄청난 쾌락 속으로.

**

코를 파고드는 달콤한 향기에 인우는 번쩍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눈에 들어오는 낯선 천장을 멍한 눈으로 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한눈에 집 안 가구가 다 들어올 정도로 작은 크기의 공간이 보였다. 공간 곳곳에 배어 있는 향기만으로도 이 집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깊게 잠이 들어 있는 해원의 얼굴이 들어왔다. 무슨 안 좋은 꿈을 꾸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녀 모습이 안쓰러웠다. 꿈조차도 편안하지가 않은가 보다.

현실도 요즘에 저 때문에 괴로울 텐데 꿈만이라도 편하게 꾸길 바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미간을 어루만지자, 그녀의 찌푸린 미간이 펴졌다. 조금은 편안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자라, 윤해원.”

나지막하게 속삭이고 인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집에서 잠이 든 걸까. 꿈에서 그녀를 안았던 게 기억이 나는데. 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단 말인가.

분명 이한과 함께 술을 마신 게 마지막 기억인데 자신도 모르게 이 집으로 오고 말았나 보다.

“잘하는 짓이다.”

누굴 원망하겠는가. 정신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신 자신의 탓인 것을. 어제 술을 많이 마시긴 한 모양이었다. 타는 듯한 갈등을 느끼며 냉장고를 찾은 인우는 곧장 문을 열어 생수를 꺼냈다.

단숨에 생수를 삼키고 나니 그나마 정신이 좀 차려졌다.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햇살을 조명 삼아 천천히 그녀의 집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녀를 이 집에 데려다줄 때마다 들어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무정한 윤해원은 한 번도 집에 들어오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술에 이성을 잃으니, 이 집에 오고 싶다는 충동만 남았나 보다. 그러니 여기 와 있지.

평수가 작은 원룸임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꽤나 깔끔했다. 평상시 해원의 성격이 집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중 제일 눈을 사로잡는 건 한쪽 벽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책장이었다.

전생에 공부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건지. 벽장을 가득 채운 책들을 살펴보며 피식 웃음을 삼켰다.

참 윤해원다웠다. 웃으면서 책을 살펴보던 인우는 책장 아래 칸에 일렬로 놓여 있는 쇼핑백들을 발견했다.

자신이 최근에 한 선물들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닌 건 알았지만 뜯어보지도 않았을 줄은 몰랐다.

이런 선물들이 기분 나빴던 걸까. 대가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그런 의미가 담긴 건 아니었다. 이상하게 쇼핑을 하러 나가서도 자꾸 해원의 물건만 눈에 들어왔다.

보는 순간 해원이 하면 예쁘겠단 생각이 들어 본능적으로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이미 계산까지 마친 상태였다.

“어렵다, 윤해원.”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 싶었는데. 그때 책장 옆에 놓인 커다란 상자 하나가 인우의 눈에 들어왔다. 상자에 적혀 있는 글씨가 잘 안 보여서 핸드폰 조명을 비추자 <보물 1호>라고 적힌 글씨가 보였다.

보물 1호?

명품 가방도 옷도 싫어하는 윤해원의 보물 1호가 무언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조심스레 상자로 손을 뻗은 그는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커다란 곰 인형 하나가 보였다.

“뭐야, 이게.”

겨우 이런 게 보물 1호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첫사랑한테 받은 선물이라도 되는 건가. 잘생긴 태경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으로 곰 인형을 내려쳤다.

그 순간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6년 전 비가 내리던 여름, 커다란 우산 아래 함께 서 있던 자신과 해원의 모습이.

우연히 해원의 생일을 알게 된 그날, 곧장 그녀가 일하던 편의점으로 달려갔었다. 생일날에도 밤늦게까지 일하는 해원이 안쓰러워서 친한 후배를 불러 대타를 세우고 무작정 그녀를 끌고 나왔다.

갑작스럽게 비가 내려 편의점에서 커다란 우산 하나를 사서 같이 걸으며 해원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생일인 거 왜 말 안 했어?’

제 물음에 해원은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별로 중요한 날도 아닌데요, 뭐.’

‘생일 하루라도 편하게 보내야 할 거 아니야. 맛있는 것도 먹고. 아르바이트 좀 쉬고.’

챙겨 줄 가족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한 시간 남았다, 생일. 먹고 싶은 거는.’

‘김밥 먹었어요.’

해원의 대답에 인우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김밥? 아, 그렇다 치고. 그러면 갖고 싶은 건?’

‘없어요. 저 진짜 괜찮아요, 선배.’

문을 연 상점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인형을 상품으로 탈 수 있는 사격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인형 좋아해?’

‘네?’

‘일단 와 봐.’

무작정 해원의 어깨를 감싸 안고 사격장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제일 커다란 곰 인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가 무조건 저거 따준다.’

‘선배?’

‘나만 믿어. 군대에서 나 명사수였어.’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무려 10만원 가까운 돈을 투자해서 간신히 그 인형을 딸 수 있었다. 생일도 훌쩍 넘긴 후에야 말이다.

흑역사라고 생각하고 기억 깊숙이 묻어 두었었는데. 이 곰 인형이 윤해원의 보물 1호라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주인 잘 지켜.”

아까 주먹으로 때렸던 자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인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선배?”

그 순간 뒤에서 들리는 해원의 목소리에 인우는 서둘러 상자 뚜껑을 닫았다.

“어. 깼어?”

“네. 그런데 거기서 뭐해요?”

“그냥 책장 구경. 뭔 책이 이렇게 많냐?”

태연한 얼굴로 답을 하면서도 아쉬운 눈빛으로 쇼핑백들을 바라보았다. 사격장에서 뽑은 값싼 곰 인형은 그토록 소중히 아끼면서 왜 이 비싼 선물들은 뜯어보지도 않는 걸까.

“윤해원.”

“네?”

“내가 해준 선물들 마음에 안 들었어?”

막 침대에서 일어나고 있던 해원은 제 질문에 어색한 얼굴로 이마를 긁적였다.

“그게 좀 부담스러워서요. 말 나온 김에 가져가세요. 전 진짜 필요 없어요.”

“한 번 해보기나 해.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서운한 마음에 말이 퉁명스럽게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해보고도 마음이 안 들면 그냥 버리고.”

말도 안 되는 억지인 거 알지만 선물들을 돌려받긴 정말 싫었다.

“선배.”

“데이트나 하러 가자.”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막무가내로 말했다. 그러자 해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저를 올려다보았다.

“데이트요?”

“주말이잖아.”

사실 집 이외에 장소에서 하는 데이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해원과는 해보고 싶었다. 이 관계가 끝날 때 한 점 후회도 남지 않게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볼 생각이었다.

“저 나가 봐야 하는데…….”

망설이며 꺼내는 해원의 말에 인우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뭐? 어딜?”

“단양이요. 기준 선배랑 같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준의 이름에 인우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기준이랑 주말에 단양을 왜 가?”

“아, 3차 설계도 마무리하기 전에 리조트 터 한 번 더 보고 오려고요. 놓친 건 없나 싶어서요. 기준 선배도 일 때문에 단양 가야 한다고 해서 신세 좀 지기로 했어요.”

“나랑 가. 내가 태워 줄 테니까.”

“네?”

“기다려.”

인우는 핸드폰을 켜서 기준의 번호를 찾아 곧장 눌렀다. 아무리 일이라도 단둘이 단양에 가게 둘 수 없었다. 주말엔 일하기 싫어하는 놈이 단양까지 간다니 기준도 수상했다. 혹시 해원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일어나기 싫어 침대에서 꼼지락거리던 기준은 요란한 핸드폰 벨소리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

-나야.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제 말을 가로막았다.

“정인우?”

-어. 너 오늘 단양 가?

“응. 매우 가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회사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

-내가 갈게.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그의 말이 가로막았다.

“네가?”

-어. 뭐 때문에 가는 건데?

뭐야. 무슨 일로 가는 건지도 모르고 가겠다고 나서는 건가. 철두철미한 정인우답지 않은 행동에 기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석호 부모님이 단양에 있는 땅에 별장 짓기로 했잖아. 그래서 거기 보러 가는데. 마침 해원이도 단양 간다고 해서 같이 가보려고 했지.”

사실 별장을 짓는 작은 일엔 대표인 인우가 나서지 않았다. 보통 그는 큼지막한 일을 처리했고, 이런 일들은 자신이 나서곤 했다. 그런데 인우가 직접 단양까지 간다고 나서니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연애라도 하는 걸까. 즐겨 가는 유명한 레스토랑 사장이 여자와 같이 온 인우를 봤다고 했을 때도 안 믿었다.

여자를 만나도 집 이외에 장소에선 절대 데이트를 하지 않는 인우의 성격을 알기에. 더군다나 사람들 많은 맛집은 더더욱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양까지 직접 가겠다고 나서는 걸 보니 진짜 수상하긴 했다. 그 여자랑 일 핑계로 드라이브라도 갈 생각인가. 아니면 그 여자가 단양이랑 연관이 있나. 단양에서 사업을 하는 그룹은 D리조트 밖에 없는데. 그 집안 딸이라도 만나는 걸까. 프로젝트 따내려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 자신이 오늘 책임지기로 한 해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냥 내가 갈게. 해원이 데리고 내려가야 해.”

인우가 데이트한다고 해원을 버리고 가면 안 되니까, 귀찮아도 직접 나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한기준.

“응?”

-윤해원 좋아해?

뭐 이리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지는 건지.

“아니거든. 야, 난 회사에선 절대 여자 안 만나.”

그건 기준의 오랜 불문율이었다. 재계 순위 100위 안에 드는 여자 아니면 안 만난다는 인우의 불문율이 있듯이, 자신 역시 직장 내 스캔들은 절대 사절이었다.

-아니면 됐어. 그냥 내가 가. 쉬어라.

“해원이는?”

-내가 챙길 테니까 끊어!

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귀가 따가웠다. 왜 이렇게 성질을 내는 건지. 뭐 어쨌든 해원까지 챙겨 간다니 마음이 놓였다. 아무래도 만나는 여자가 단양에 먼저 내려가 있는 모양이다. 진짜 D리조트 딸이라도 만나나.

제대로 헛다리를 짚으며 기준은 폭신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좀 더 단꿈을 즐길 수 있게 된 사실에 감사했다.

**

차에서 설계 도면을 주의 깊게 보고 있던 해원은, 어쩐지 볼이 따가운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 근원지인 옆을 보자, 핸들에 얼굴을 기댄 채 인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배?”

놀라 창밖을 보자 익숙한 휴게소 간판이 보였다.

“어. 휴게소네요?”

“윤해원 집중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한참 전에 도착했거든.”

“그래요?”

머쓱한 얼굴로 볼을 긁자 그가 피식 웃음을 삼켰다.

“솔직히 말해 봐. 나 좋아한다는 거 거짓말이지?”

뜬금없는 그의 물음에 해원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아니, 보통 좋아하는 남자가 옆에 있으면 설레서 일이고 뭐고 못해야 정상인 거 아니야?”

투덜투덜 불만을 늘어놓는 그의 말에 해원은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웃지 마.”

“왜요?”

“정들면 안 되잖아. 가뜩이나 못난 네 얼굴이 자꾸 예뻐 보여서 미칠 지경인데.”

참 이상한 남자다. 가슴 떨리는 말과 가슴 아픈 말을 동시에 잘도 한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내리자. 뭐라도 좀 먹고 가야겠어.”

“벌써요?”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오전 11시. 점심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아침 대용으로 먹었던 샌드위치가 아직 소화가 다 안 되기도 했고.

“사실은 식욕이 아니라 성욕을 채우고 싶은 거지만…….”

노골적인 인우의 말에 해원은 슬그머니 그를 흘겨보았다.

“알았어. 그래서 식욕이라도 채우려고. 우동 먹자. 너 휴게소 오면 꼭 우동 먹잖아.”

그런 건 참 잘도 기억한다. 의외로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그가 신기했다.

“아, 춥다.”

차에서 내리자 매서운 바람이 피부를 할퀴고 지나갔다. 추위를 별로 안 타는 해원마저 몸을 웅크리게 될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연신 춥다는 말을 내뱉으며 인우는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았다.

“너무 추워서 차마 옷은 못 벗어 주겠고. 인간 목도리나 되어 주려고.”

놀라 올려다보는 해원을 향해 그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자, 어서.”

다정히 어깨를 토닥이며 걸음을 재촉하는 그를 따라 해원도 걸음을 내딛었다. 이러고 걸으니 진짜 연인이 된 것 같다.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보일까.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였으면 좋겠다. 누군가 아주 잘 어울리는 연인을 봤었다, 스치듯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적어도 그 사람들 시선 속에선 자신들이 연인이긴 할 테니까.

“여기 앉아 있어. 우동 사올 테니까.”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인우가 말했다.

“제가 사올게요, 선배.”

“됐어. 내가 해주고 싶어.”

그 역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아쉬워하는 걸까. 다른 날보다 유난히 더 다정한 인우의 모습에 해원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생긋 웃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어차피 헤어질 날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마음 아파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흘려보내기 아까운 시간을 마음 아파하면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후회가 남지 않게 마음껏 사랑하고, 씩씩하게 헤어져야지.

멀리 보이는 인우의 뒷모습을 보며 해원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

우동을 먹고 나오는 길에 보이는 인형 사격장 앞에서 인우가 걸음을 멈춰 섰다. 덩달아 그를 따라 걸음을 멈춘 해원은 사격장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6년 전 여름, 무척이나 행복했던 생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그렇게 따뜻한 생일은 처음이었다. 물론 저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당사자인 인우는 그날을 기억도 못할 테지만.

그가 자신에게 처음 해준 생일 선물이 바로 사격장에서 딴 커다란 곰 인형이었다. 10만원이란 거금이 들어간 몸값 비싼 녀석이다. 그 인형이 너무 소중해 감히 안고 잘 수도 없었다. 세월에 닳아 버릴까 봐. 그래서 커다란 상자 안에 곰 인형을 넣어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간혹 너무 힘이 드는 날엔 그 곰 인형을 상자에서 꺼내 꼭 안고 잤다. 그러면 어쩐지 위로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해원아. 내가 인형 하나 따줄까? 갖고 싶은 인형 없어?”

“괜찮아요, 선배.”

그의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해원은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왜? 나 못 믿어? 나 군대에 있을 때 명사수였다니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옛 기억이 가슴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좀처럼 웃음을 멈출 수 없도록.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자, 그가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선배?”

“야, 너 그렇게 웃지 마.”

“왜요? 정들까 봐 무서…….”

“짜증 나. 예뻐서.”

퉁명스레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해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른 남자들이 다 쳐다보고 지나가잖아. 웃을 거면 나랑 둘이 있을 때만 웃어. 알겠어?”

대답을 재촉하는 그를 향해 해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말은 참 잘 들어.”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그가 커다란 손을 뻗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다시 사격장을 가리켰다.

“믿어 봐. 내가 딱 만 원만 써서 제일 큰 인형 타준다.”

집에 있는 갈색 곰 인형과 잘 어울릴 것 같은 핑크색 곰 인형을 가리키며 그가 호언장담했다. 썩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응원해, 열심히.”

“네.”

누가 보면 올림픽이라도 출전하는 줄 알겠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해원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사격 폼과 다르게 그의 실력은 역시나 별로 훌륭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곰 인형의 짝꿍을 만들어 주긴 힘들 듯했다.

**

무려 2만원을 투자해서 딴 인형 모양 손난로를 꽉 쥐고 있는 해원을 보며 인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100발을 쏴서 따낸 게 겨우 저런 조그마한 인형이라니. 이건 주최 측의 농간이 분명했다.

“내가 못한 거 아니다. 거기 총이 이상했어. 아, 나 군대 있을 때 진짜 총 잘 쐈는데. 그걸로 휴가도 나온 적 있어.”

이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속된 말로 빡세기로 유명한 백골 부대에서도 당당히 1등을 차지했었다. 그런데 왜 저런 사격장에만 가면 실력이 제대로 발휘가 안 되는지 모르겠다. 그저 미소만 짓는 해원을 보니 제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중에 나랑 클레이 사격장 한 번 가. 제대로 실력 발휘해 줄 테니까.”

“그래요.”

대답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쓸쓸했다. 그제야 인우도 깨달았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15일 남았던가. 해원에게 마음을 고백한 이후엔 의식적으로 날짜를 확인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게 아까워서.

약속한 그날이 오면 정말 윤해원을 놓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머리는 그럴 수 있다고 말을 하는데 심장은 자꾸만 덜컹거렸다. 그녀를 놓기 싫다고.

인정하고 나면 정리하는 게 더 쉽다던 최강후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인정을 하고 나니 감정이 더 걷잡을 수 없이 흘러들어갔다. 이별을 생각하기 두려울 정도로.

정신 차리자, 정인우.

태생이 이기적인 놈이었다, 자신은. 모든 걸 버리고 윤해원만 선택하는 헌신적인 사랑 따위는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절대 그런 인간은 될 수 없었다.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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