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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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VIP 회원 전용 클럽에 도착하니, 웨이터가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우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룸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살짝 취한 친구 놈들이 손을 흔들며 저를 반겼다.

“정인우, 빨리 와 봐. 석호가 너한테 할 말 있대.”

기준이 촐싹거리며 저를 향해 외쳤다. 도대체 무슨 말이기에 그런 건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재촉하는 기준 곁으로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갔다. 그러자 기준이 왼쪽에 앉은 석호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석호가 해원이 마음에 든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예상치 못한 해원의 이름에 잘생긴 인우의 미간은 더욱 찌푸려졌다.

“뭐?”

“아니. 저번에 너희 회사에 갔다가 봤거든. 근데 분위기가 매력 있더라고.”

“미친놈. 그래서 뭐? 소개라도 해달라고?”

치솟는 짜증에 앞에 놓인 위스키를 들어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 단숨에 삼켰다. 그러고는 짜증이 그대로 드러나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매력적이고 아니고를 떠나 이런 술자리에서 그녀의 이름이 안줏거리처럼 흘러나오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최석호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왜 얼굴은 붉어지고 난리일까.

“어. 그래 줄래?”

조심스레 저를 향해 묻는 석호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 자식 표정 굳은 거 봐. 내가 뭐랬어? 절대 안 될 거라고 했지? 최석호 넘볼 걸 넘봐. 정인우가 윤해원이라면 얼마나 싸고도는데. 너한테 소개를 해주겠냐?”

그때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기준이 쏟아 냈다. 자신이 해원을 싸고돌다니. 저건 또 무슨 말인 걸까?

“내가 언제 해원일 싸고돌았어?”

“그럼 안 싸고돌았냐? 대학 때부터 너 유명했잖아. 윤해원 과보호하는 거. 물론 여자로 생각 안 하는 건 알아. 그러기엔 해원이 배경이 너무 볼품없으니까. 그래도 너 유별나. 해원이 대하는 거.”

여전히 기준이 하는 말이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유별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이 해원을 챙겼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단지 해원에게 잘해 준 건 자신의 회사를 키워 나가게 해준 기둥이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기둥에게 그 정도도 안 해주는 오너가 어디 있단 말인가.

“너 없으면 우리 회사 돌아가도, 윤해원 없으면 안 돌아가니까.”

애써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퉁명스레 받아쳤다.

“해원이 우리 회사 들어오기 전부터 그랬거든. 남의 일 하나도 신경 안 쓰는 놈이 해원이 일에는 별스럽게 굴고 그랬어.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네가 윤해원 좋아한다고 생각했을걸?”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윤해원을? 말도 안 돼.”

펄쩍 뛰며 부인하는 제 말에 기준이 피식 웃음을 삼켰다.

“알아, 인마. 누가 그렇대? 어쨌든 네가 해원이 좋아하는 거 아니면 그냥 석호 소개해 주든가. 사실 나도 해원이 아끼지만, 석호 정도면 괜찮잖아.”

기준의 칭찬에 석호가 머쓱한 얼굴로 이마를 긁적였다. 그래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걸 보니 그런 칭찬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뭐, 객관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았다. 얼굴도 준수한 편이었고, 성격도 재벌가 아들치곤 무던하고 착했다.

“너희 부모님한테 불려 가기 싫다. 해원이 같은 보잘것없는 집안 여자 소개해 줬다고.”

하지만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둘을 소개해 주고 싶지가 않았다. 왠지 자꾸만 목이 탔다. 다시 술잔에 위스키를 따라 입 안에 단숨에 털어 넣으며 인우는 치솟는 짜증을 달랬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석호네는 집안 안 보고, 딱 여자 성품만 보더라. 얘네 형수 집안도 평범해. 형수는 고등학교 교사고. 장남을 그런 집에 보냈는데, 막내는 집안 가려서 보내겠어?”

“맞아. 우리 부모님은 집안 안 따져.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진짜?”

“어.”

그러고 보니 예전에 들었던 것 같다. 석호의 형인 석진이 평범한 집 여자랑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그땐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비웃었는데……. 지금은 왜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머릿속에 퍼져 나가는 그런 생각이 어이가 없어, 이를 악물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차라리 석호에게 그냥 소개를 해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둘이 만약 잘 된다면 귀찮은 63일에서 해방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차라리 잘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또다시 술잔으로 손이 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너한테 절대 피해 안 가게 정중히 대할게. 해원 씨 꼭 좀 소개해 줘.”

“알겠어. 내가 내일 해원이한테 물어볼게.”

“오, 최석호 좋겠는데.”

깔깔 웃으며 기준의 말에 석호가 얼굴을 붉혔다.

“고마워, 인우야. 진짜 내가 잘할게.”

저렇게 좋을까. 겨우 스치듯 한 번 봤다면서. 지가 해원이 대해 안다면 얼마나 안다고.

해맑게 좋아하는 석호의 모습에 또다시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인우는 말없이 다시 술잔을 채우고, 쓰디쓴 위스키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연거푸 도수가 높은 술을 들이켜서인지 벌써 취기가 올라왔다.

술이 선사하는 열감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목울대를 어루만지며, 인우는 가죽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재미없다. 나 그만 갈래.”

“벌써? 온 지 얼마나 됐다고?”

“피곤해.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다음엔 좀 일찍 부르든가, 인마.”

기준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건드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든 채 인우는 룸을 빠져나왔다. 겨우 위스키 몇 잔에 취한 건지 유난히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저를 향해 다가오는 웨이터를 향해 손을 내젓고, 인우는 곧장 클럽을 벗어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어차피 술 마실 생각에 차도 가져오지 않았다. 클럽 앞에 서 있는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도 됐지만, 왠지 조금 더 차가운 이 공기를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고마워, 인우야. 내가 진짜 잘할게.’

설렘 가득하던 석호의 목소리가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고맙긴 개뿔.”

비싼 구두로 바닥을 차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저 멀리 놓여 있는 돌멩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엇이 됐든 간에 화풀이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인우는 발을 들어 무작정 돌멩이를 걷어찼다.

“아!”

추위에 살짝 굳어 있는 발가락이 돌멩이와 충돌하면서 엄청난 통증을 선사했다.

“젠장!”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인우는 손을 뻗어 얼얼한 통증이 느껴지는 발가락을 어루만졌다. 이게 다 최석호 때문이었다. 최석호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다칠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자식한텐 해원이를 소개해 줄 필요가 없었다.

그래, 소개해 주기 싫었다.

문득 튀어나온 진심에 인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무작정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 인우야.

석호의 번호를 찾아 누르기 무섭게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안 되겠다. 해원이 소개해 주는 거.”

-뭐? 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해원이 소개팅 같은 거 싫어해. 우리 직원이 싫어하는 일 억지로 시킬 수는 없지. 오너가 되어 가지고. 어쨌든 그렇게 알아라. 미안하다.”

더 이상 석호가 말 걸 틈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자 민망함도 동시에 밀려왔다.

도대체 뭐하는 거냐, 정인우.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인우는 그렇게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

출근하기가 무섭게 자신을 쫓아 대표실 안으로 들어오는 기준을 보며 인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너 뭐야? 갑자기 왜 소개를 안 해준다는 거야? 해원이가 싫대?”

“어.”

“진짜? 왜?”

“좋아하는 사람 있대.”

그건 사실이었다. 그게 저라는 걸 밝히지 않았을 뿐.

“그래? 에이, 어쩔 수 없네. 석호 자식 기대 엄청 했다가, 네 전화 받고 장난 아니었어. 둘이 잘 어울릴 거 같았는데.”

“한기준.”

나지막한 자신의 목소리에 그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

“넌 무척 한가한가 보다. 다른 직원들은 다들 단양 리조트 건으로 정신없어 보이는데.”

투명한 유리벽 너머 보이는 직원들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기준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 인마. 나가서 일할게.”

손을 흔들며 기준이 대표실을 빠져나가자, 제가 원하던 고요함이 찾아왔다. 인우는 출근하는 길에 사온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집어 들며 다시 유리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습관적으로 시선이 머무는 곳엔 해원이 있었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7년간 윤해원의 얼굴에서 제일 많이 본 표정이 저 표정 같았다. 대학 다닐 때도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실습실 가서 저 표정으로 설계도를 그리던가, 모형을 만들거나 하던 그녀였다.

그 표정이 재미있어 간혹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해원을 발견하면 한참 동안 말없이 지켜보곤 했다.

지이잉.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음을 울려대는 핸드폰 소리에 그녀로부터 시선을 뗐다. 액정에 뜨는 기준의 이름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전화를 받으라는 신호를 보내는 그가 보였다.

“왜?”

-대표님은 무척 한가해 보이셔서 말입니다. 아니면, 직원들 관찰 중?

“시끄러워. 이럴 시간에 일이나 해.”

틈만 나면 뺀질거리는 기회만 넘보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또 특유의 친화력으로 고객 관리는 잘해서 버릴 수가 없었다. 정치계 거물의 외아들이면서도, 기준은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런 골치 아프고 재미없는 건 절대 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매해 그의 아버지에게 불려 가 기준이 좀 자르라고 잔소리를 듣지만, 인우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그나마 P그룹이란 배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자신이 보잘것없는 집안사람이었으면 벌써 예전에 이 회사는 무너졌을 것이다. 기준의 아버지의 방해로.

어쨌든 그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저런 녀석이 나왔다는 게 신기하긴 했다. 하긴 자식이 꼭 아버지를 닮으란 법은 없었다. 그건 자신과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저와 다르게 아버지는 재물과 권력에 별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P그룹에서 각자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큰아버지나 고모들과 다르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계 곳곳을 떠돌며 봉사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덕분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며 기업 이미지는 좋아졌지만, 다른 사촌들보다 든든한 배경이 없는 자신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가 누구인가. 경영 천재라는 할아버지를 쏙 빼닮아 태어난 인재 중에 인재였다. 멍청한 사촌들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축복받은 유전자. 그러니 그런 것쯤은 아무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결혼은 다르겠지.

P그룹처럼 혈통을 중시 여기는 집에서 해원 같은 여자를 들이밀었다간 당장 퇴출이었다. 그러니 절대 윤해원과 계약한 날짜 이상은 엮여서는 안 되었다.

자신이 앞으로 누리게 될 엄청난 부와 권력을 절대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건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제 것이었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며 자라 왔다.

그때 허공에서 해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저를 보며 그녀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 또 심장이 간질거렸다.

왠지 저 미소를 더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인우는 리모컨을 들어 블라인드를 닫아 버렸다.

다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절대 깨고 싶지 않은 그런 평화가.

**

D-62.

핸드폰 캘린더에 적힌 숫자를 노려보며, 인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도 63일간 연애를 하기로 했으니, 성의라도 보이는 게 낫겠지. 어제처럼 그냥 집으로 오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이왕이면 같이 퇴근하는 게 낫겠단 생각에 블라인드를 열고 해원의 동태를 살폈다.

퇴근 시간인 6시가 훌쩍 지난 시간이건만, 일이 많은지 그녀는 전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건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대표인 그가 퇴근을 하지 않으니, 다들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며 기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퇴근 안 해?”

“어. 일이 많아서. 나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끝났으면 먼저 퇴근해. 다른 직원들한테도 그렇게 전하고.”

“알겠어. 수고해라.”

“어, 너도 수고했어.”

인사를 건네고 이미 검토를 끝낸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길 잠시 슬그머니 바깥 쪽 동태를 살피자, 해원의 팀을 제외한 다른 팀들은 모두 퇴근한 후였다.

“저 팀은 뭐가 저리 바빠.”

남아서 더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괜스레 심통이 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단양 리조트 프로젝트의 핵심인 설계 팀이 바쁜 건 당연한 거였는데, 왜 이리 짜증이 나는 걸까.

자신이 이토록 화가 많은 사람인지는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 그런데 해원과 이상하게 엮인 이후로는 자꾸 이유 없는 짜증이 치솟았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고 해야지.”

7시가 넘어가고 있건만 밥을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회의에 열중하고 있는 설계 팀을 보며 인우는 푹신한 가죽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곧장 문을 열고 나가 테이블에 모여 있는 네 명의 직원들을 향해 다가갔다.

“저녁은 먹고 일하죠.”

그의 부드러운 로우 톤 목소리에 회의에 집중하고 있던 직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아, 대표님.”

“대표님은 식사하셨어요?”

직원들의 물음에 고개를 내저은 인우는 조용히 해원을 응시했다.

“윤해원.”

“네.”

“팀장 자격 상실이야. 직원들 식사도 안 챙기고.”

“죄송합니다. 일이 바빠서.”

“따라 나와. 같이 저녁 사러 가자.”

인우의 말에 직원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표님이 직접 가시게요?”

“제가 가도 되는데.”

팀의 막내인 명원이 조심히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괜찮아. 원래 저녁은 상사가 사는 거야. 윤해원 뭐해?”

거듭되는 그의 재촉에 해원은 재빨리 자리로 가 코트를 챙겨 입었다.

“어제 초밥은 먹었을 테고, 뜨끈한 한식으로 할래요?”

인우의 물음에 직원들은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해원을 향해 다시 한마디 던지고 인우는 먼저 문을 열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오전에 내린 비 때문인지 날씨가 한층 더 추워진 거 같았다. 원래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락집으로 걸어갈 생각이었는데, 목이 휑하게 드러나는 옷을 입은 해원을 보니 그건 안 될 것 같았다.

“차 타고 가자.”

“어디로 가는데요?”

“나 아는 한정식집. 회사 일 때문에 고생하는데 그 정도는 사줘야지.”

“저기 선배, 그냥 도시락집으로 가죠? 빨리 들어가서 회의 계속 해야 하는데.”

역시 윤해원은 이상했다. 원래 좋아하면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야 정상인 거 아닌가. 자신과 둘이 있는 이 순간에도 오직 일 생각뿐인 그녀를 보니 또다시 기분이 상했다.

“그러든가.”

퉁명스레 답하고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빨리 타. 시간도 없다면 뭐 그리 굼떠?”

자신보다 느리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해원을 보며 인우는 잔뜩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유치한 본인에게 화가 났지만, 그래도 툴툴거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일은 그래서 몇 시에 끝나는데?”

퉁명스러운 그의 물음에 해원은 추위로 인해 금세 붉어진 뺨을 긁적였다.

“잘 모르겠지만 자정은 되어야 끝날 것 같네요.”

자정이란 단어에 인우의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너 지금 나랑 연애 중인 건 알고 있어? 그것도 딱 63일을 전제로?”

“네. 당연히 알죠. 제가 먼저 하자고 한 건데.”

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짓는 해원의 모습에 인우는 머리가 아파 왔다. 왜 연애를 먼저 제안한 해원보다 자신이 더 그 연애에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일한다고 아무것도 못하고 넘어갔다고, 괜히 나중에 이 핑계로 더 엉겨 붙을 생각하지 마. 이렇게 지나가는 날도 그냥 63일에 포함시키는 거야. 알겠어?”

“네. 알고 있어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선배.”

여전히 미소 짓는 얼굴로 자신을 안심시키는 그녀의 말에 인우는 속으로 짜증을 삼켰다. 이렇게 63일 중 하루가 흘러가 버리는 게 윤해원은 전혀 아깝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왜 이렇게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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