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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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3일의 달콤했던 휴가가 모두 끝이 났다.

“오랜만에 출근하려니까 기분이 어때?”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차를 출발시키면서 묻는 그의 말에 해원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막상 일 안 하고 쉬고 있으니까, 좀 지겨웠어요.”

“뭐야? 기껏 신나게 데이트해 주었더니 지겨웠어?”

인상을 찌푸리는 그를 보며 해원은 웃음을 삼켰다.

“선배랑 함께 있을 때 말고요, 혼자 있을 때요.”

“나랑 떨어져 있는 게 그렇게 싫었어? 이제 곧 나랑 헤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그의 물음에 해원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그와 함께 보낼 시간이 딱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덤덤히 이별을 맞이해야지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막상 끝이 다가오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표정 보니 알겠네. 헤어지기 싫지? 그래서 말인데…….”

인우가 막 입을 여는 그 순간 그의 핸드폰이 울어댔다.

“기준이네. 아침부터 무슨 일인지.”

투덜거리며 그가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왜?”

퉁명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해원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주란이한테 연락 왔는데, 오늘 오전에 회사에 온다던데?

스피커폰을 통해 울려대는 주란의 이름에 둘은 동시에 멈칫했다.

“뭐? 걔가 우리 회사를 왜 와?”

-너희 할아버지랑 같이 온단다. 너 어디 못 나가게 꼭 잡아 두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

“아, 우리 할아버지는 왜 또 와?”

-난들 아냐. 지금 둘이 같이 강국 병원에 있나 봐.

주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의 이름에 인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할아버지 건강 검진 날인가 보다. 알았어. 일단 회사로 갈게.”

-어. 다들 대청소 중이야. 너희 할아버지한테 꼬투리 안 잡히려고.

몇 번 그의 할아버지가 회사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회사가 쥐꼬리만 하네. 위생 상태가 엉망이네. 이래서 안 망하는 게 용하다는 둥, 쓰디쓴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그래서 아마 직원들도 덩달아 긴장 상태인가 보다.

신경질적인 손길로 전화를 끊은 인우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해원을 바라보았다.

“우리 할아버지가 좀 피곤하긴 하지?”

“잘 모르겠어요. 전 한 번도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어서.”

그의 할아버지에게 자신은 그저 하찮은 직원일 것이다. 인우와 똑 닮은 그의 할아버지는 더욱 철저하게 계급으로 사람을 나누는 타입이었다. 인우가 왜 그렇게 만나는 여자들의 재계 순위에 집착하는지는 할아버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저 같은 여자를 데려갔다간 그는 당장 호적에서 파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기준이 술자리에서 여직원들에게 인우의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괜히 그에게 흑심 품지 말라는 충고가 한가득이었다.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인우의 할아버지에게 불려 갈 수 있다면서 말이다.

“얘기 나누어 봤자 괜히 피곤하기만 하지. 지금은 상대 안 하는 걸 다행으로 여겨.”

“네, 선배.”

“우리 할아버지가 혹시……. 아니다, 괜히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지.”

말을 하다 멈춘 그는 해원을 향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손 참 작아. 손가락도 가늘고.”

“네?”

“아니야. 그런 게 있어.”

오늘따라 이해하기 힘든 말을 참 많이 하는 그였다.

**

대표실 안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는 인우의 할아버지와 주란을 밖에서 슬쩍 훔쳐보며 직원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대표님이랑 저 여자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네요.”

인우에게 관심이 많았던 재무 팀 서희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끝내주게 예쁜 저 여자는 누구래?”

조경 팀 박 대리의 물음에 기준이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강국 병원 외동딸.”

“우와, 정말요?”

놀라 반문하는 직원들을 보며 기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 자식 누구 만나는 것 같다더니 주란이었어? 할아버지까지 온 거 보니까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다. 쟤 곧 결혼하겠는데.”

기준의 말에 인우를 좋아하던 여직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 대표님 결혼하는 거 싫은데.”

“그러게요. 무슨 낙으로 회사 다녀요.”

“내가 있잖아.”

기준의 말에 여직원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대표님이 훨씬 멋져요.”

“맞아, 맞아.”

“뭐야? 저런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이 뭐가 좋다고. 안 그러냐, 해원아? 넌 나랑 인우 중에 누가 더 멋있어?”

소란스러운 와중에 설계도를 보고 있던 해원은 기준의 질문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잘 모르겠어요.”

“와, 믿었던 너마저.”

평상시 같으면 오버하는 기준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겠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은 아까부터 설계도를 계속 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자꾸만 유리벽 너머 대표실로 향했다.

해원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어, 유리창 밖에서 그와 그의 할아버지와 주란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세상과 그녀의 세상은 갈라져 있다. 마치 이 딱딱한 유리창이 서로의 세계를 갈라놓듯이.

딱 맞는 조각처럼 잘 어울리는 그들의 모습에 자꾸만 심장이 저렸다. 이제 그와 남은 시간은 단 이틀. 이런 질투조차 할 자격이 저에게 없는데…….

왜 이리 심장이 쿡쿡 쑤셔대는지 모르겠다.

**

갈 생각을 하지 않는 할아버지와 주란을 보며 인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 리조트 공모전은 잘 되어 가고?”

할아버지의 물음에 인우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그거 때문에 제가 무척 바쁘거든요.”

눈치 빠른 할아버지가 제 말의 뜻을 이해했으리라 믿었다.

“다행이구나. 바쁠 때 일수록 쉬엄쉬엄 일해야지. 주란이랑 같이 점심도 먹고.”

이제 겨우 오전 11시가 지나고 있건만, 점심 이야기를 화제에 올리는 걸 보니 그때까지 여기 있을 모양이었다.

“제가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네요.”

할아버지인 정 회장의 눈이 매섭게 빛이 났다.

“이것 봐요, 할아버지. 오빠 매번 이런 식이라니까요. 같이 밥 한 번 먹기 힘들어요.”

애교 섞인 주란의 투정에 할아버지는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겠어. 이런 매정한 녀석한테 반한 네 잘못이지.”

“그렇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많이 도와주세요.”

당사자인 저를 앞에 두고 북 치고 장구 치고 아주 난리가 났다.

“저 일이 진짜 바빠서 그런데 이제 그만…….”

“녀석 이런 쥐꼬리만 한 회사 운영하면서 바쁜 척은 혼자 다 하는구나.”

5년 사이에 꽤 몸집을 키웠건만, 할아버지 눈엔 아직도 이 회사가 쥐꼬리로 보이는 모양이다.

“얼른 할아버지 회사처럼 큰 회사로 만들려면 더 열심히 움직여야죠.”

“그것보다 네가 후계자가 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주란이랑 결혼해서.”

주란이가 꽤 탐이 나나 보다. 아니, 업계 1위인 강국 병원이 탐이 나는 걸까. 외동딸인 주란과 손자 중 하나가 결혼하면 그 병원이 자연스럽게 P그룹에 흡수될 거란 생각을 하고 계신 듯했다.

“어머, 할아버지. 부끄러워요.”

결혼 이야기에 얼굴을 붉히는 주란을 보며 인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됐으니까 그만하죠.”

딱딱하고 서늘한 인우의 말투에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허허. 이놈도 참. 주란아 오늘은 일단 이 할아비랑 오붓하게 점심 먹을까?”

“네. 좋아요.”

“그래. 일단 먼저 차에 가 있거라.”

“네. 오빠 다음에 봐.”

인사를 건네는 주란을 무시한 채 인우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고얀 놈.”

주란이 나가자마자 인자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할아버지는 노기 어린 모습으로 변했다.

“내가 한 말 못 알아들은 게냐? 주란이랑 결혼 말이다.”

“알아들었습니다. 관심이 없을 뿐이지.”

단호한 제 대답에 할아버지는 혀끝을 쯧쯧 찼다.

“원하는 게 바로 코앞에 왔는데 쓸데없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는.”

“무슨 말입니까, 그게?”

이해하기 힘든 할아버지의 말에 인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됐다. 나 역시 너랑 더는 이야기하기 싫으니 가보마.”

“그러세요. 조심히 가세요.”

“쯧.”

끝까지 제가 마음에 안 드는지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나갔다. 홀로 남겨진 인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평상시 같으면 지독하게 유혹적이었을 할아버지 제안에 흔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장하다 생각을 하며 인우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

예상하지 못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약속 장소인 위압적일 정도로 높은 고층 빌딩 앞에 도착한 해원은 애써 차분하게 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다잡아 봐도 다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하는 곳이라 경비에게 신분증을 제출하고 임시 출입증을 받았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가 회장실 호출로 왔다 하니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회장실과 바로 연결이 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고층으로 올라가자 서울 도심의 풍경이 탁 트인 창을 통해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던 비서는 육중한 문에 노크를 했다.

“들어와.”

문틈을 통해 흘러나오는 근엄한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숨이 막혔다. 인우가 엄청난 집안의 핏줄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본사에 와보니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와 저의 차이가.

탁.

비서가 문을 열어 줌과 동시에 해원은 떨리는 걸음을 내딛었다. 인우의 할아버지인 정 회장이 보자고 했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이미 자신과 인우의 사이를 다 알고 있는지 전화 목소리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안녕하세요. 윤해원이라고 합니다.”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정 회장은 그녀를 거들떠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치 선생님에게 벌을 받는 아이처럼 해원은 커다란 문 앞에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앉으라는 말조차 건네지 않기에.

하지만 해원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2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보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뗀 정 회장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인우 놈 회사에서 일한다고?”

시릴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던지는 질문에 해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회장님.”

“그럼 그놈이 어떤 집 자식인지 모르고 만난 건 아닐 테고. 뭘 노리는 거지?”

목적이 있어 인우에게 접근한 여자 취급하는 정 회장의 말에 해원은 연한 입술 안쪽 살을 깨물었다.

“그런 거 없습니다. 그리고 걱정하실 만한 사이가 아닙니다.”

“걱정할 만한 사이가 아니다?”

헛웃음을 내뱉으며 되묻는 말에 해원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우 놈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지만, 아가씨 같이 형편없는 여자를 만나는 걸 처음 봤는데. 걱정할 일이 아니다?”

가진 게 없다는 이유 하나로 형편없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들의 기준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정말 다른가 보다.

“내일이면 깨끗하게 정리될 사이입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서로 동의하에 헤어질 날을 정하고 시작된 관계입니다.”

떨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당당하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가는 해원의 말에 정 회장은 날선 눈빛을 반짝였다.

“헤어질 날을 정하고 시작했다? 인우 놈이 그러자 했구먼. 그래서 아가씨는 뭘 얻었누?”

거리 낄 게 없기에 해원은 정 회장과 당당히 마주했다.

“제가 먼저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 회장이 나지막하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왜 그런 손해 보는 짓을 했어?”

“사랑하니까요.”

솔직한 그녀의 답에 정 회장이 순간 할 말을 잃었는지 멍한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껄껄 웃음을 터트리는 그였다.

“참 재미있는 아가씨구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차갑고 냉혹한 얼굴로 돌아온 정 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우 놈이 그런 걸 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그놈은 나를 쏙 빼닮았지.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냉철한 머리를 가졌거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걱정하실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어디 한 번 믿어 보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하지만 명심해. 자네가 약속한 걸 지키지 않으면 인우는 그동안 누렸던 모든 걸 잃게 될 테니.”

“네. 선배한테 피해가 가는 건 저도 싫습니다.”

그게 제일 무서운 일이었다. 저로 인해서 인우가 모든 걸 다 잃게 되는 것. 태생부터 정복자의 피를 타고난 그는 아마 견디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걸.

그의 세계가 안전하게 지켜질 수 있도록 자신이 떠나는 것. 그게 유일하게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

소파 옆에 놓인 해원의 캐리어를 노려보며 인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해원과 헤어짐을 핑계로 데이트하면서부터 마음먹었었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만나 행복했었다는 그녀의 고백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했었다. 제가 알던 행복과는 전혀 다른 행복을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약을 사다 준 거, 도시락을 사다 준 거, 생일을 챙겨 준 거. 지나치게 소소한 것들에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 따뜻해졌다.

돈이 많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고의 위치에 올라 군림하는 것만이 행복이라 믿었었다. 그런데 그런 거창한 목표 따위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해원을 통해 배웠다.

누리던 부가 사라지면 분명 불편하겠지. 하지만 불편한 것뿐 불행한 건 아니었다. 진짜 불행은 해원이 없는 삶이었다.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오고, 갑갑해졌다.

이걸 너무 늦게 깨달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모진 말들이 떠올라 머리가 복잡했다. 사실 마음을 깨달은 순간 바로 그녀에게 매달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해원이 믿지 않을 게 뻔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긴 자업자득이다. 아무것도 믿지 말라던 사람이 바로 저였으니까.

어쨌든 말보다 강한 증표가 필요했다. 그래서 잠든 해원의 약지 사이즈를 끈을 이용해서 조심해서 재고 그다음 날 기준이 부른다는 핑계를 대고 회사에 나갔다.

보석 브랜드로 유명한 R그룹 손자인 형민을 닦달해 해원에게 잘 어울릴 법한 반지를 찾았다. 하얀 백금에 우아한 다이아가 박혀 있는 심플하지만, 청초한 들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랑스러운 반지였다. 그리고 그 반지가 드디어 오늘 제 손에 들어왔다.

흡족한 얼굴로 반지를 들여다보던 인우는 이걸 어디에 둘까 심각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다행히 해원이 일이 있어 오늘 조금 늦는다 하니 반지를 숨겨 둘 시간은 충분했다.

아이스크림은 너무 고전적인가. 하긴 단 걸 싫어하는 해원에겐 적합하지가 않았다. 그건 케이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냥 무릎을 꿇고 줄까. 아니면 캐리어 안에 넣어 두고, 거기서 뭐 좀 찾아오라고 시킬까. 괜찮은 생각 같아서 인우는 매력적인 검은 눈을 반짝였다. 그러고는 곧장 캐리어 앞으로 걸어가 지퍼를 열었다.

그 순간 캐리어 제일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곁에 적혀 있는 변호사 사무소 주소와 이름에 범상치 않은 서류임을 직감했다. 사생활은 존중해야 하는 거지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봉투를 열어 보고 말았다.

“취업 비자?”

영어로 어지럽게 적혀 있는 말들을 읽어 내려가며 인우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미국에 고용주가 있을 때 나오는 비자였다. 그런데 왜 해원의 이름으로 이런 비자가.

‘들었어? 엘 마크가 해원이 무척 마음에 들어 한대. 미국으로 스카우트해 가고 싶어 하나 봐.’

연봉 협상을 하기 전 기준이 제게 해주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면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미국에 갈 생각이었어.”

애초에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이 연애를 제안한 게 분명했다. 엘 마크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이고, 연애가 끝나면 미국으로 가버릴 생각이었던 거다. 그래서 그토록 덤덤했나 보다. 무조건 저와 헤어질 생각으로 연애를 시작했을 테니까.

비자를 붙들고 있는 손끝이 바르르 떨린다. 붙잡을 수 있을까. 제 곁에 남아 줄까. 해원이 없이는 이제 살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탁.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며 지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서는 해원이 보였다.

“선배. 거기서 뭐……!”

저를 향해 다가오던 그녀의 걸음이 멈추는 걸 보며 인우는 떨리는 손으로 비자를 내밀었다.

“너 미국 가?”

제발 아니라고 해주길 바랐다. 그것만큼은 아니길.

“네, 선배.”

무심하도록 덤덤한 대답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인우의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그저 붙잡아야겠단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비자를 내던지듯이 캐리어 위에 내려놓고 인우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진짜 간다고? 와, 너 진짜 무섭다. 미국까지 가놓기로 결정해 놓고 어떻게 나한테 말 한 마디도 안 할 수가 있어?”

처음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배신감이 섞인 분노. 저와 만나서 행복하게 지내는 그 시간 동안 윤해원은 정말 바람처럼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용의주도함에 놀랐다.

“죄송해요. 안 그래도 오늘쯤 말할 생각이었어요.”

한 점 흔들림 없는 차분한 검은 그녀의 눈에 그의 심장이 요동쳤다.

“오늘쯤 말할 생각이었다고? 하, 기가 막히네. 내가 반대하면 어쩔 건데? 안 놔주면 어쩔 건데? 그래도 갈 거야?”

그의 마음이 속삭였다.

내게 이러지 마. 윤해원.

“네.”

마음을 차지했던 분노가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가슴이 아팠다. 시큰시큰한 심장 안에 간절한 바람만이 남았다.

해원의 대답은 냉정하고 단호했다. 눈빛만큼이나 흔들림이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거렸다.

“윤해원.”

저 눈빛을 알고 있었다. 해원이 저런 눈빛을 할 때면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조용한 카리스마. 그녀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눈빛을 그렇게 표현하곤 했다.

“선배한테 미리 말 안 한 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내 뜻은 변함 없…….”

“가지 마. 윤해원,”

간절함이 소리가 되어 밀려 나왔다. 떨리는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저를 보는 그녀의 눈은 차가울 정도로 고요했다.

살면서 이토록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라본 적은 처음이었다. 인우는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저를 보는 그녀의 눈은 차가울 정도로 고요했다.

“왜 이래요, 선배. 어차피 우리 내일이면 끝날 사이잖아요. 이러지 마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그녀의 목소리에 인우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이별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원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어떤 잘못부터 빌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중 제일 큰 잘못은…….

“이러지 마요, 선배.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선배가 말했었죠. 매달리면 냉정하게 뿌리치라고. 선배가 하는 말 아무것도 믿지 말라고.”

저토록 아픈 말들을 직접 제 입으로 했다는 사실이었다. 지독한 이기심에 눈이 멀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했던 말을 모두 후회했다.

“해원아, 윤해원.”

애달프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엔 한 점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손을 밀어낸 해원은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흔들리지 않아요, 절대.”

흔들리지 마, 절대.

자신이 그녀에게 내뱉었던 말들이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멍한 얼굴로 서 있는데 그녀가 캐리어를 챙겨 드는 게 보였다.

“어차피 약속한 날짜까지 몇 시간 안 남았어요. 조금 빨리 헤어진다고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선배, 잘 지내요.”

본능적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대로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그때 해원이 손바닥을 뻗으며 그의 손을 저지했다.

“잡지 마요, 제발. 그랬다간 선배 진짜 싫어하게 될 것 같아.”

싫어하게 될 것 같다는 말에 허공에서 손이 멈췄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었다. 윤해원이 저를 싫어한다는 말이. 그래서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온 해원은 무조건 걷고 또 걸었다. 혹시나 인우가 저를 뒤쫓아 나올까 두려워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애써 힘겹게 저를 붙잡는 그를 외면하면서도 그 순간이 지옥 같았다.

믿고 싶었다. 저를 붙잡는 그의 말을.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 말이 맞았다. 저를 선택하는 순간 그는 많은 것을 잃어야 할 것이다. 그걸 잃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 역시 그가 자신 때문에 불행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매몰차게 뿌리쳐 달라고.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말라고. 약속한 시간이 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 달라고. 절대 흔들리지 말라던 그의 진심들을 떠올리고, 또 떠올리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휘황찬란한 도심의 불빛에 해원은 멈춰 서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곧장 손을 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캐리어를 옆 좌석에 실은 채 택시에 탄 해원은 차가운 차창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카드를 내밀어 요금을 지불하고, 캐리어를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덜커덩, 덜커덩. 정비되지 않은 거친 돌바닥을 지나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요란하기만 했다. 마치 복잡한 제 머릿속처럼.

그런데 그때 캐리어 바퀴가 무언가에 걸렸는지 꼼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있는 힘껏 힘을 주어 캐리어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도대체 그 꽉 끼는 틈에 어떻게 걸린 건지, 캐리어는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지 마.’

끙끙거리며 캐리어를 끌어올리는 그 순간 귓가에 인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윤해원, 해원아.’

제 이름을 부르던 애절한 그의 목소리.

‘사랑해.’

언젠가 그가 제게 했던 애달픈 고백도 떠올랐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쓸수록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해원은 이를 악물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나 끝내 빠지지 않아, 지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울분 섞인 외침이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왜 이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왜 너까지 속을 썩여. 왜!”

해원은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이건 절대 인우 때문에 우는 게 아니었다. 소중한 캐리어가 망가지는 게 속상해서 우는 거였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눈물의 이유는. 그것뿐이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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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이른 시간 회사로 간 해원은 곧장 짐을 정리하고, 기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에서 막 깬 듯한 기준에게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전하고, 챙겨 놓은 짐을 들고 회사 밖으로 나왔다.

커피숍에 도착해 미리 집에서 작성해 온 사직서가 담긴 하얀 봉투를 해원은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회사가 문을 연 순간부터 지금까지 5년이란 시간을 함께 했다. 그러기에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잘 넘어가지 않는 쓰디쓴 커피를 넘기고 있는데 기준이 헐레벌떡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해원이 손을 들어 그를 반겼다.

“무슨 일이야? 왜 회사 말고 밖에서 보자고 그래?”

그의 물음에 해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사직서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윤해원?”

봉투에 적혀 있는 글씨를 본 기준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선배. 갑작스럽게 사직서 내서.”

“뭐야? 무슨 일인데 이래? 이거 진짜야? 오늘은 만우절이 아니라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기준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인우 선배한테는 선배가 대신 좀 전해 주세요.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우는 몰라? 너 회사 그만두는 거? 그러면 인우한테 상의도 안 하고 나한테 사직서부터 내는 거야?”

“미안해요. 경우가 아닌 거 아닌데.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어요.”

그 말에도 기준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서운한 감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해원을 바라보았다.

“무슨 사정? 그게 뭔데 인우한테는 말도 안 하고 갑자기 그만둔다는 거야? 왜? 너랑 정인우랑 나 몰래 연애라도 했다가 깨졌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쏟아 내는 그의 물음에 해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뭐, 뭐야, 이 반응은? 설마! 아니지? 아니, 설마……. 진짜야?”

해원은 천천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어요, 선배. 선배한테는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인우 선배 좀 잘 챙겨 줘요.”

“도대체 뭐라는 거야? 너 진짜 정인우랑 사귀었어?”

“……네.”

“이런 미친!”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던 기준은 재빨리 입을 막았다.

“이건 너한테 하는 욕이 아니다. 정인우 그 미친놈한테 하는 욕이지. 그놈이 너 꼬셨어? 아, 그럴 놈이 아닌데.”

“인우 선배는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사귀자고 했어요.”

솔직하게 털어놓는 해원의 말에 기준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네가? 왜 그랬어? 너 정인우가 어떤 놈인지 몰라? 물론 친구나 선배론 괜찮은 놈이지. 그런데 남자로는 진짜 아니야.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이기적인 놈이 뭐가 좋다고.”

“이제 정리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기준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뭐, 일단 그렇다 치고. 상처 입었다고 일을 그만두면 어떻게 해? 너 갈 곳은 있어?”

정이 많은 기준은 회사 걱정보다 그녀의 걱정을 먼저 하고 있었다.

“저 곧 미국 가요.”

“미국? 설마 엘 마크가 스카우트 제안했어? 그랬다는 소문이 돌긴 했는데. 진짜야?”

역시 정보통인 기준은 모르는 게 없었다.

“네. 죄송해요, 선배. 사실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리조트 프로젝트 끝나기 전에 말하면 분위기 안 좋아질까 봐 미리 말을 못했어요.”

“인우랑은 언제 헤어진 건데?”

“어제요.”

해원이 급하게 사표를 낸 이유를 이제야 이해했는지, 기준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정인우가 레스토랑에 함께 왔다는 여자가 너였구나. 주란이가 아니라.”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기에, 해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 쉴 때 기어코 같이 쉰 이유가 있었네. 어쩐지 그 자식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굴더니. 그런데 왜 헤어진 거야? 인우가 그러재?”

기준의 물음에 해원은 또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시작할 때부터 끝은 정해져 있었어요. 리조트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만 만나기로 했거든요.”

“참 나, 나 모르게 별짓을 다 했네.”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기준을 해원은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말 죄송해요, 선배. 물론 선배 능력이면 저 대신 일할 사람 구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혹시 몰라서 아는 선배들이랑 동기들한테 연락해 두었어요. 그중에서 긍정적인 반응 보인 사람들 명단은 선배 메일로 보내 놓을게요.”

“참 너답다. 아주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다 해놓았구나. 붙잡을 수도 없게.”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선배.”

인사를 전하며 커피숍 창을 통해 보이는 회사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중 제일 아쉬운 건…….

“인우 선배 잘 부탁해요.”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자식 걱정을 왜 해? 분명 그 못된 놈이 너 상처 준 걸 텐데.”

“아니에요, 그건.”

오히려 상처를 준 건 자신이었다.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한 상처 입은 인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해원은 애꿎은 커피 잔만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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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해원을 그렇게 보낸 건 회사에 오면 그녀를 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걸 진짜 윤해원이 너한테 주고 갔다고?”

기준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사직서를 내려다보며 인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왜 그랬냐? 네가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왜 해원이를 만났어? 뭐, 윤해원 말로는 자기가 고집을 부렸다지만. 네가 여자가 만나자 그런다고 덜컥 만날 놈이야? 아니잖아. 더군다나 해원이는 네 기준에 전혀 맞는 여자도 아니었고. 충분히 거절하거나 설득할 수 있었잖아. 그런데 왜 만났어?”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 사실은 해원이 그 제안을 했을 때 거절할 수 있었다. 리조트 프로젝트를 망칠까 봐, 라는 비겁한 핑계를 대긴 했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가려져 있던 본심, 들여다보지 못했던 진심. 이미 오래전부터 저는 윤해원을 사랑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던 날, 학교 벤치에 앉아 있던 그녀 모습에 발걸음이 멈췄을 때부터,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설계도를 주워 주며 그 핑계로 말을 걸고 싶었을 때부터 그 사랑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 단정 지어 버린 이기심에 진심이 가려져 버렸다. 그 진심을 알아 버리면 자신의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에 죽어라 외면하기 바빴다.

“정인우?”

벌떡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저를 기준이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손에 들린 해원의 사직서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런 일방적인 이별은. 자신은 아직 진심을 전해 보지도 못했다.

“야, 너 어디 가?”

무작정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는 저를 부르는 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인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진심을 전해야 했다. 이대로 해원을 놓칠 수 없었다. 놓치기 싫었다. 그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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