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24/46)

<6>

해원의 태도가 평상시보다 차갑게 느껴지는 건 착각인 걸까. 수정된 2차 설계 시안을 설명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인우는 애써 짜증을 삭혔다.

“이대로 진행할까요, 대표님?”

설명을 마치며 제게 묻는 그녀의 말에 인우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대표님? 저 호칭은 상당히 어색했다.

회사 창업 멤버인 기준과 해원은 다른 직원들과 있을 때도 그런 호칭으로 저를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저 딱딱한 호칭은 뭐란 말인가.

“진행해. 그런데 그 호칭은 뭐야?”

“뭐가요, 대표님.”

또 대표님이란다. 그게 왠지 듣기 싫어 인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불러? 불편하게.”

“선배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이렇게 부르란 말 아니었어요?”

그런 게 아니었다. 좀 더 친근한 호칭을 원한 거지. 기준이나 그 의사 놈을 부를 때 붙는 선배라는 호칭이 아닌, 좀 더 특별한 호칭을 원했다. 기간을 정해 놓고 하는 연애이긴 하나, 어쨌든 지금은 연애를 하는 중이었으니까.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차라리 그냥 선배라고 불러.”

“네, 선배.”

말은 참 잘 듣는데, 그게 더 사람의 신경을 긁는다. 분명 자신에게 무언가 기분 나쁜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언지를 잘 모르겠다. 워낙 표정을 읽기 어려운 해원이었으니까.

그나마 그녀의 얼굴에 감정이 온전하게 다 드러나는 순간은 침대에서밖에 없었다. 자신에겐 안길 때 숨김없이 쾌감을 다 드러내는 얼굴이 미치도록 자극적이었다.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허리 아래 남성이 묵직해질 정도로.

“오늘 바빠?”

설계 도면을 챙겨 드는 그녀를 보며 인우는 애써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윤해원.”

“네.”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굴어, 오늘?”

날카로운 인우의 물음에 그녀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방금 한숨 쉬어 놓고.”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스쳐 지나갈 바람 같은 여자한테.”

그 말을 던지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고 나가 버리는 그녀였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라니? 그 순간 어제 자신이 이한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해원이 그걸 들었던 걸까. 전화가 끊어졌던 게 아니었나. 어디까지 들은 걸까. 머릿속이 복잡하고 어지러워졌다.

인우는 서둘러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벌컥 문을 열고 해원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다. 일을 하던 직원들은 다들 긴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미친놈처럼 굴고 있구나.

감정 기복이 심한 사춘기 청소년처럼 굴고 있는 제 모습이 한심해 인우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다시 들어와. 아직 얘기 안 끝났어.”

다행히 다시 대표실을 향해 걸어오는 해원을 보며, 인우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리모컨을 들어 착, 하고 블라인드를 내리는 사이 해원이 다시 대표실로 들어왔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어디까지 들었어? 설마 도둑고양이처럼 계속 엿듣고 있었어?”

전화가 안 끊어진지 모르고 떠든 건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민망해 해원을 몰아붙이게 된다. 정말 한심하게도.

“뭘 걱정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딱 거기까지만 들었어요. 그 뒤에 더 심한 말이라도 했어요? 뭐, 그래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전 신경 안 쓰니까요.”

거기까지밖에 못 들었다니 다행이긴 했다.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진심마저 그녀가 들었다면 더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안해.”

그리고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듣고 있는지 알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분명 자신의 말에 상처를 입었을 테니까.

“그런데 맞잖아. 바람처럼 사라질 여자. 설마 내 옆에 더 있고 싶어그래?”

이 말은 차라리 하지 말걸 그랬나 보다. 저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번지는 혐오감에 목이 갑갑해졌다. 손을 뻗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저에게 정이 확 떨어져, 이 관계를 끝내는 게 나을까.

아니다, 그건. 그 생각이 머릿속에 퍼지는 순간 두려워졌다. 그녀가 끝을 말할까 봐.

“아니, 이것도 실수. 미안해.”

살아생전 누구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 해원에겐 벌써 두 번이나 그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서라도 옆에 두고 싶었다. 남은 시간만큼이라도.

“아니에요. 선배 말이 맞아요. 선배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요. 그리고 그 말이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던 해원이 다시 평상시와 똑같은 덤덤한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았다.

“선배 진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약속한 날이 되면 제 마음도 조용히 끝낼게요. 정말 바람처럼 그렇게 스쳐 가 줄게요. 이건 화가 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말간 검은 눈으로 저를 보며 전하는 그녀의 진심이 더 아팠다. 차라리 아까처럼 화를 내며 말을 하는 게 덜 아플 거 같았다.

마음을 끝낸다는 말이 이토록 자신을 아프게 할 줄은 몰랐다. 제발 마음에서 저를 지우지 말라고 사정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정말 미쳤다, 정인우.

“그래. 고맙다.”

애써 그 충동을 억누르며, 그녀를 향해 답했다.

“그럼 나가 볼게요.”

“기분 풀린 거지?”

돌아서려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해원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

“그럼 오늘 만나.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 같이 집에 가자.”

단순히 안고 싶다는 욕망에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약속한 날이 되면 마음을 정리할 거란 그녀의 말에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까워졌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그녀와 같이 있고 싶어졌다.

“그래요.”

그녀의 대답에 안심이 되었다. 그러면서 느끼고 있었다. 이 연애의 갑을 관계에 변화가 왔음을. 분명 시작할 땐 자신이 갑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완벽한 을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 얼마 남지 않은 시간까진 을이 되어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D-32를 가리키고 있는 핸드폰 캘린더를 노려보며 인우는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

자신이 조급하게 미쳐 날뛰고 있다는 걸 안다. 그걸 알면서도 인우는 욕실에서 씻고 나오는 해원에게 다급하게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하면 타오를 듯한 갈증이 조금은 사라질까 해서.

입을 맞춘 채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무게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그녀의 몸에 살짝 신경질이 났다. 살 좀 더 찌우면 좋으련만. 워낙 입이 짧은 해원을 알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이러니 처량 맞아 보이지.

그런데도 어이없는 건 이 비쩍 마른 몸에 반응하는 자신이었다. 풍만하고 육감적인 가슴보다 작아서 한 손에 잡히고도 남는 그녀의 가슴이 더 사랑스러웠다. 입술로 빨면 금세 단단해지는 분홍빛 유두는 지독하게 섹시했다.

침대에 눕히자마자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곧장 분홍빛 유두를 찾아 입 안 가득 물었다. 해원 특유의 달콤한 체향이 코를 가득 채웠다.

입 안에서 더욱 단단해진 돌기를 이로 살짝 깨물자, 아픈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해원은 나지막하게 쾌감의 신음을 터트렸다.

“아픈 거야, 좋은 거야?”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요.”

수줍은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이번엔 반대쪽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 역시 모르겠다.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은 건지, 아닌 건지. 불뚝 솟아오른 유두를 또다시 혀로 자극하며, 다른 한 손은 아래로 내려갔다.

이렇게 가슴을 빨아 주면, 예민한 그곳은 흠뻑 젖어든다. 그 순간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아, 손길이 조급해졌다. 여성의 갈라진 틈을 파고들어, 뜨거운 입구에 손가락을 하나 가져다 대자 빨아들일 듯이 당기며 뜨끈한 애액을 쏟아 냈다.

이게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만드는지 윤해원은 알까.

당장 그 안으로 성난 페니스를 밀어 넣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제 손길 아래 신음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보고 싶었다. 흥분으로 인해 색이 짙어진 유륜을 혀로 세차게 핥으며, 흠뻑 젖은 음부에 손가락을 하나 더 가져다 댔다.

잔뜩 부풀어 오른 클리토리스를 찾아 부드럽게 비비자 그녀의 입에서 달뜬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욕망으로 더욱 짙어진 검은 눈, 이리저리 비틀며 쾌락을 느끼는 가냘픈 작은 몸. 예나 지금이나 시선을 끌어당기는 사람이었다, 윤해원은.

애액으로 더욱 붉어진 여성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인우는 해원을 처음 본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날의 날씨, 공기, 냄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벤치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햇볕을 쬐고 있던 스물한 살의 해원은 지금보다 더 처량 맞았다.

마치 아픈 병아리가 살아 보겠다고 비실거리며 햇볕을 쬐고 있는 것처럼 가냘프고 안쓰러웠다. 그래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음을 가득 채우는 연민 때문에.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흣! 선배.”

연민이 아닌 관심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부풀어 오른 음핵을 더욱 끈덕지게 빨아대며 절정에 오르는 해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연분홍빛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흘리는 그 모습이 순간 너무 예뻐 보였다. 큰일 났다. 진짜 윤해원이 갖고 싶어졌다. 잠시가 아닌 영원히 자신의 옆에 두고 싶어졌다.

이제 더는 연민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는데, 뭐라 부르며 널 곁에 둘 수 있을까.

허리를 흔들며 애액을 흘려대는 붉은 음부를 응시하며 미리 꺼내 놓은 콘돔을 성난 페니스에 씌웠다. 그러고는 움찔거리는 뜨거운 질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저를 집어삼킬 것 같은 거센 욕망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래, 이건 사랑이 아닌 욕망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욕망일 뿐이니까 끊임없이 안고 또 안으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제 곁에 둬도 될까. 사랑이 아닌 욕망이니까 조금만 더 같이 있어도 되지 않을까.

자신 스스로를 끊임없이 설득하며 거칠게 더욱 거칠게 그녀의 안에 남성을 박아댔다. 이렇게라도 그녀를 향한 욕망을 분출하고 싶었기에.

**

이상하게 해원의 뒷모습은 늘 제 가슴을 울컥거리게 만든다. 그녀를 집 앞에 내려 주고, 들어가는 뒷모습을 차에 앉아 바라보면서 인우는 예전의 그녀를 떠올렸다.

무거운 가방에 등에 메고 터덜터덜 걷던 그 모습을 학교에서 발견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끌리듯 다가가곤 했다.

그러고는 말없이 그녀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면 그녀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 스스로가 황당하면서도 일하는 그녀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 돌아가곤 했다.

그 감정이 연민이라 생각했을 땐 편했는데…….

“하아.”

가슴 깊은 곳에서 쉼 없이 꿈틀거리는 이 감정이 버거웠다. 떨쳐 내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이 깊어지니 술 생각이 간절하게 났다. 그래서 무작정 자주 가는 클럽으로 차를 몰았다.

혼자 룸에 처박혀 실컷 술이나 마실 생각이었는데. 클럽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는 이와 마주하고 말았다.

“오랜만이다.”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인물은 바로 최강후.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재벌가 자식이었지만, 의대에 가서 정신 의학과를 선택한 아주 특이한 녀석이었다. 주변에 미친놈들이 많으니 개원을 해도 먹고살 걱정은 없겠다, 말하고 다녀 빈축을 사기도 했다.

물론 인우가 보기엔 강후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지가 미친놈이면서 누굴 보고 미친놈이라는 건지. 미쳐도 저놈에겐 절대 안 간다,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그가 반가운 걸까.

“혼자 왔어?”

인우의 물음에 강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한 형이랑 한잔하는 중. 같이 마실래?”

생각해 보니 강후 역시 이한과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땐 셋이 자주 어울렸었는데. 이한이 사라지고 난 후 강후랑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성격이 지나치게 비슷했기에 오히려 둘이 만나기 더 꺼려졌달까.

“그러지, 뭐.”

흔쾌히 오케이하며 그를 따라 룸에 들어가자 흠뻑 취해 있는 이한이 보였다.

“보시다시피 형은 좀 많이 취했어.”

“그러네.”

앞으로 한동안은 이렇게 미친 듯이 술만 마셔 댈 모양이었다. 그 여자랑 헤어진 게 이토록 괴로운 일일까. 왠지 그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사랑이 뭔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강후가 피식 웃었다.

“정신병이지.”

“뭐?”

놀라 반문하는 자신의 말에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사랑도 정신병의 일종이야. 호르몬 작용에 의한 착각. 사랑을 할 땐 그 사람 아니면 안 될 거 같지만, 그것도 다 호르몬의 장난질이지. 시간이 해결해 줘. 그래서 세상에 영원한 사랑은 없는 거야. 그걸 일찍 깨닫느냐, 늦게 깨닫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

시니컬한 그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르몬 작용에 의한 착각이라. 해원을 향한 자신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인 걸까.

“그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는 방법은?”

약을 먹어서라도 빨리 벗어날 수 있다면, 이 감정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왜? 누굴 사랑하기라도 해?”

“사랑은 무슨. 그런 거 아니거든.”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인우는 해원을 향한 자신의 감정을 부인했다.

“멀었네. 벗어나려면.”

강후의 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무슨 소리야?”

“궤변 같겠지만 감정을 인정하면 정리하기 더 쉬워져. 그러니 더는 힘 빼지 말고 인정할 건 인정해.”

“인정하고 나면?”

제 감정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빛에 목소리에 날이 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누구에도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으니까.

“정인우. 세상에 영원한 사랑은 없어. 특히 너랑 나같이 이기적인 인간한테는 더더욱. 그러니까 걱정 말고, 그 순간을 즐겨. 인정하고 마음껏 감정을 분출해. 그러면 정리하기도 더 쉬울 테니. 원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거야. 감정 역시 마찬가지고.”

역시 궤변이다. 인정하고 다 토해 내면 정말 이 감정이 희미해질까. 하긴 인정 안 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게 더 힘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차라리 인정해 버릴까. 어차피 자신이 인정하든 안 하든 한 달 뒤엔 이 관계가 끝이 날 텐데.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윤해원이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면 아마 뒤도 안 돌아보고 이 관계를 끝낼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또다시 속이 쓰려 왔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의지가 약한 자신과 달리 굳건한 의지를 가진 해원을 믿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뭔가 실마리를 찾은 모양이네.”

피식 웃으며 양주가 담긴 술잔을 돌리는 강후를 인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응시했다.

“그런데 최강후.”

“응.”

“넌 사랑해 봤냐?”

제 물음에 강후가 혀를 쯧쯧 찼다.

“미친놈. 그런 걸 내가 왜 해. 말했지. 사랑은 정신병이라고. 이한 형을 보면서 못 느끼냐.”

미친놈. 그러면서 왜 저보곤 감정을 인정하래.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랑 같은 거 안 해봤다고 당당히 말하는 강후가 부러워졌다. 사실은 저 역시도 평생 이 감정을 모르고 살고 싶었으니까.

해원에게 흘러들어가는 마음을 죽어라 7년 동안 외면했는데……. 이젠 더는 외면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 버린 이 감정이 버겁고, 또 버거웠다.

**

Rrrrrr.

Rrrrrrr.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 벨소리에 해원은 눈을 덮고 있던 안대를 풀었다. 베개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들자 액정에 인우의 이름이 반짝였다.

생전 전화도 안 하던 사람이 새벽 2시에 왜 갑자기 전화를 한 거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하는 걱정에 해원은 서둘러 통화를 눌렀다.

“선배?”

-윤해원.

취기가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걸 봐서는, 술을 상당히 많이 마신 듯했다.

“선배 술 마셨어요?”

-역시 우리 윤해원은 모르는 게 없네.

새된 인우의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무슨 일 있어요?”

-없어.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걸었어.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그의 말에 심장이 따끔거렸다.

“선배…….”

-윤해원.

자신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그의 목소리에 해원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약속한 시간이 되면 바람처럼 사라져 주겠다고.

뭐가 이리도 걱정이 되는 걸까, 이 남자는.

“네, 선배.”

-그 약속 꼭 지켜라. 약속한 건 꼭 지키는 윤해원이니까 믿는다.

“걱정 마세……!”

-좋아해.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좋아한다는 말에 해원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네가 좋아졌어. 그런데 해원아. 내가 좋아한다는 말에 절대 흔들리지 마라. 나 무지 이기적이고, 변덕 심한 놈인 거 알지? 잠깐일 거야. 이런 감정도. 그러니까 내 말에 흔들리지 말고 약속한 날 되면 무조건 끝내. 넌 그럴 수 있잖아.

좋아한다 고백하면서 동시에 끝을 말하는 그였다. 참 이기적이고 못된 고백인데, 이런 고백에도 심장이 반응했다. 좋으면서도 아픈.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처럼 감정 역시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그럴게요, 선배.”

-약속한 시간이 끝나고, 혹시 내가 매달려도 받아 주지 마. 미친놈이 잠깐 헛소리하나 보다 생각하고 무시해. 그냥 냉정하게 차버려. 내가 하는 말들 잠깐 감정에 눈멀어 쏟아 내는 거짓말들이니까 아무것도 믿어서는 안 돼.

이 남자는 자신과 끝까지 갈 생각이 없었다. 그건 감정을 자각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사랑보다도 더 중요한 게 많은 남자니까. 그걸 다 알면서도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 자신이 참 한심했다.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 역시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아무것도 안 믿을게요.”

씁쓸한 목소리로 답하며, 비집어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스스로 선택했으니, 아파할 자격 또한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