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16/46)

<12>

인우는 긴장된 얼굴로 눈앞에 회색 문을 바라보았다. 꽉 닫힌 철문이 마치 해원의 마음 같아서 마음이 갑갑해졌다.

딩동.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눌렀지만, 안에선 아무런 답이 없었다.

딩동딩동딩동.

사정없이 벨을 눌러도 그녀는 역시 답을 주지 않았다.

“윤해원! 윤해원! 문 열어 봐!”

쾅쾅쾅!

주먹으로 두드려도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였다.

“누구 마음대로 사표 쓰래? 대표 허락도 안 받고 멋대로 그만두는 직원이 어디 있어? 무효야, 인정 못해.”

혹여나 잡아당기면 열릴까 문손잡이를 꽉 붙잡은 채 인우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엘 마크가 얼마 준대? 돈 때문이면 내가 더 줄게. 가지 마. 너 정도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능력 펼칠 수 있잖아? 윤해원, 듣고 있어?”

안에서 여전히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고 있었지만,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그만두면 노동법 위반으로 신고할 거야.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거 모두 다 동원해서 너 미국 못 나가게 막을 거야.”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건네고 싶은 진심을 따로 있었다. 하지만 그 진심을 꺼내 들어도 해원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못할 거 같아? 나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너 이렇게 떠나 버리게 내가 놔둘 거 같아?”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손이 아파 왔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아픈 건 마음이었다. 이렇게 모진 말이라도 내뱉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았다.

“윤해원, 윤해원!”

애타게 부르는 그 이름이 자꾸만 심장을 찔러댔다. 소리 내어 불러도 닿지 못하는 먼 곳으로 그녀가 떠나 버린다는 사실이 너무나 두려웠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해본 적 없었다. 윤해원이 없는 삶을.

언제든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그녀가 있었는데, 고개를 들면 유리창 너머 일에 집중하는 그녀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인우는 무너지듯 문 앞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꿇고 문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차가운 냉기를 대신해서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다 잘못했어.”

토해 내듯 잘못을 빌고 또 빌었다. 그동안 그녀에게 건넸던 못된 말들이 모조리 다 후회가 되었다.

**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을까. 그걸 가늠할 판단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잠도 오지 않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저 해원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녀의 집 문 앞에 기대 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행복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제나 그녀를 볼 수 있었던 그 일상의 풍경이 미치도록 그리워졌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대학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늘 한 발자국 떨어져 그녀를 따라 걷던 길도 그리웠다.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7년의 시간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진작 알았다면 그때 그녀의 손을 잡았을 텐데. 그랬으면 좀 더 빨리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독한 불행의 길에 놓여 있다 보니 자신이 가지 못한 행복의 길이 탐이 났다.

“정인우.”

그때 익숙한 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우는 힘겹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기준아.”

“미친놈.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걱정 섞인 그의 타박에 인우는 간절한 눈으로 기준을 올려다보았다.

“해원이가 안 나온다. 해원이 좀 불러 줘. 네가 부르면 나오지 않을까?”

“그만하자, 인우야. 해원이 결심 단호해. 알지? 윤해원은 한 번 마음먹으면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었다. 그걸 믿고 그토록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약속한 날이 되면 떠나라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라고. 혹여나 매달리면 냉정하게 뿌리치라고. 말하고 또 말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좋아한다 말하면 돌아봐 줄 거라 믿었었다. 늘 저를 좋아한다 말하던 그녀였으니까.

“가자. 이건 진짜 아닌 거 같다. 해원이한테 민폐야. 너 더 싫어하게 될 수도 있어.”

저를 더 싫어하게 될 수 있다는 기준의 말에 인우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건 안 되지. 나 미움 받기 싫어. 해원이한테 정말 미움 받기 싫어.”

기준이 한숨을 내쉬며 인우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정히 토닥여 주는 손길에 위로를 받으며 인우는 그를 따라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발에 철근이라도 매단 듯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혹시나 이런 저를 가엾게 여겨 문이 열릴까 기대를 해보았지만, 끝끝내 굳게 닫힌 철문을 열리지 않았다.

**

철썩철썩 거센 파도가 치는 제주도 푸른 바다를 향해 걸으며, 해원은 인우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그날을 떠올렸다.

사실 인우가 왔을 때부터 해원은 현관문 앞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두꺼운 철문을 사이에 두고 등을 마주 대고 앉아서, 그가 토해 내는 한숨 섞인 말들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버텨 내면서.

흔들리면 안 된다. 믿으면 안 된다.

오직 그 생각만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자신과 그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걸 알고 시작한 관계였다.

그러니까 약해지면 안 돼.

훗날 분명 인우는 자신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지금은 잠깐 감정에 현혹이 되어 저를 사랑한다 착각하고 있었지만, 그 마음은 진짜가 아니었다. 7년간 인우를 지켜봐 왔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제 옆에 아닌 화려한 세계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흔들지 말걸. 보고만 있어도 좋은 사람인 그를 그냥 지켜보기만 할걸. 끝없는 후회를 하며, 숨소리조차 죽인 채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추위에 약한 그를 더는 그대로 둘 수가 없어 기준에게 핸드폰 메시지를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달려왔다. 그렇게 둘이 떠나자마자 해원은 짐을 챙겨 곧바로 제주도로 내려왔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살 집을 구하고, 인우가 보고 싶을 때마다 무작정 바다로 달려 나왔다.

“하아.”

해원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바람으로 인해 격렬하게 치고 있는 푸른 파도를 바라보았다. 무서운 속도로 일렁이다 처절하게 부서져 하얀 거품이 이는 그 파도가 마치 저와 인우 같았다. 그와 만났던 63일, 아니 62일의 시간은 격렬할 정도로 뜨거웠다. 원 없이 안기고, 원 없이 함께하다 처절하게 부서졌다. 그러니까 후회는 없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아픈 걸까. 스스로 선택한 이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집에 남아 있다간 저도 모르게 인우를 찾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찾았다. 이곳이 저를 얼마나 안전하게 지켜 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서울에서처럼 그에게 쉽게 달려갈 수는 없었다.

그거면 됐다. 어차피 이제 열흘 후면 미국으로 떠나야 했으니까. 조금만 더 이곳에서 버티면 된다.

해원은 하얀 모래사장 위에서 한참 동안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이곳에 구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작업하고 있던 건축 모형 앞에 가서 앉았다.

그림 같은 집.

언젠가 인우와 말한 적 있는 그런 집을 모형으로나마 짓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라도 그와 이런 집에 살고 싶었다. 상상 속에 윤해원과 정인우는 행복했다. 욕심도 욕망도 이기심도 아픔도 격차도 상상 속에선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서로를 향한 마음만 있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상상 속 세계가 좋았다. 적어도 그 안에선 마음껏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

인우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해원의 집으로 향했다. 이곳에 해원이 없다고 기준이 말해 주었지만, 여기 말고 다른 곳은 갈 수가 없었다. 그녀의 집 문 앞에 기대앉아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어쩐지 이곳엔 그녀의 향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해원아, 보고 싶다.”

인우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내 말 좀 믿어 줘.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그 말이 거짓말이었어. 진짜 그게 거짓말이었어.”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인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나 그녀가 이런 저를 불쌍히 여겨 나타나 줄까 싶어서.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어도 상관없었다. 어떤 감정이어도 좋으니까 그녀가 제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그녀의 마음보다 자신의 마음이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60일이 넘게 만나면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좋아한다는 고백은 수없이 많이 했던 그녀지만, 단 한 번도 사랑을 입에 담지 않았다.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은 저 혼자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사랑이든 아니든. 뭐든 좋으니까 그저 제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

“또 여기 있냐.”

귓가에 들리는 기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그가 자신의 옆에 와서 앉는 게 보였다.

“하, 정말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 회사도 안 나오고 맨날 여기 와서 뭐해? 해원이 여기 없다니까.”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 말고 갈 곳이 없었다. 이러고 있으면 언젠가 해원이 나타날 것만 같아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진짜 어떡하면 좋냐, 너를. 딱 한 번이면 돼? 해원이 불러 줄 테니까 만나 볼래?”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멍하게 앉아 있던 인우는 그의 말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만나게 해줘.”

“에휴, 모르겠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제발 기준아. 만나게 해줘.”

기준은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키며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해원이 마음 안 바뀌면?”

“그때는 내가 포기할게. 그러니까 제발 만나게 해줘. 아직 못 전해 준 게 있어.”

해원에게 미처 건네주지 못한 반지가 여전히 코트 주머니 안쪽에 있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일단 집에 가서 잠 좀 자. 얼굴 꼴이 그게 뭐야? 해원이 왔다가도 얼굴 보면 도망가겠다. 네 몰골이 하도 처참해서.”

그의 말에 인우는 손을 뻗어 깍지 않은 수염 때문에 까끌거리는 턱을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면도를 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기력했다. 윤해원이 제 앞에서 사라져 버렸단 이유 하나만으로 지독한 상실감에 빠졌다.

“기준아 고맙다.”

그녀가 떠나간 이후, 인우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

김포 공항을 빠져나온 해원은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밤 11시를 가리키는 핸드폰 시계를 보며, 저녁때 기준과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

‘제발 해원아. 나 한 번만 도와줘. 리조트 프로젝트는 잘 마무리해야지. D리조트에서 네 설계도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은데, 몇 가지 수정 좀 해줬으면 좋겠대. 이건 너 말고 다른 사람이 할 수가 없잖아, 응? 밤엔 나 말고 아무도 없으니까 회사로 와 줘. 그리고 다시 아침 비행기로 제주도 내려가면 되잖아.’

기준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리조트 프로젝트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 맞았다. 리조트 프로젝트만큼은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인우가 무척이나 공들이던 일이란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곧장 공항으로 가 김포로 오는 제일 마지막 비행기를 탔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택시는 막힘없이 잘도 달렸다. 오랜만에 보는 서울의 야경을 감상하며 40여 분을 달려 강남에 있는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웠던 회사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올라가자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이 보였다. 해원은 천천히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커다란 유리창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지독하게 익숙한 그 뒷모습에 해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선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인우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사이 많이 야위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심장이 저릿했다.

“왔어?”

여전히 듣기 좋은 목소리가 고막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왜 선배가…….”

“마지막이야.”

그가 저벅저벅 걸어와 제 앞에 멈춰 섰다.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짙은 검은 눈에 시선을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를 봐, 윤해원.”

나지막하면서도 간절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볼 일 없어요, 저는.”

여기 있으면 위험했다. 돌아가야 했다. 다시 안전한 제주도 돌아가서……!

“윤해원.”

그가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을 돌려 자신 쪽을 향하게 했다.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딱 내 마음을 전할게. 만약 그걸 듣고도 네가 거절하면, 다신 귀찮게 하지 않을게.”

해원은 애써 차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약속 꼭 지켜요.”

그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저를 향해 내밀었다. 해원은 떨리는 눈으로 그가 내미는 반지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뭐예요, 이게?”

“너랑 평생 함께 하고 싶은 내 진심.”

그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해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랑 살고 싶어. 해원아, 내 옆에 있어 줄래?”

바르르 손이 떨려 왔다. 하지만 차마 그에게 손을 뻗을 수 없는 건…….

‘명심해. 자네가 약속한 걸 지키지 않으면 인우는 그동안 누렸던 모든 걸 잃게 될 테니.’

시리도록 서늘했던 그의 할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라서였다. 그리고 그걸 잃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치던 인우의 모습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독하게 좋은 기억력이 또 한 번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미안해요, 선배.”

거절의 말을 내뱉는 제 목소리가 지독하게 낯설었다. 분명 이 순간을 죽도록 후회하고, 또 후회하겠지. 하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건, 저와 살면서 이 순간을 후회할지도 모르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것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땐 돌이킬 수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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