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바람이 불면 휘청거리는 가냘픈 몸으로 꿋꿋이 서 있는 해원을 보며 인우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윤해원이 추위에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벌써 한 시간째다. 아무리 추위에 강하다고 해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을 게 분명했다.
리조트를 세울 산 중턱에 서서 해원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다가 다시 설계도를 보고 골똘히 고민하기를 무한 반복 중이었다.
코는 벌써 루돌프 사슴 코가 되어 있었다.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에 루돌프 코스프레라도 할 생각인지.
이대로 뒀다간 동사 걸릴 것 같은 느낌에 인우는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들고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산이라 그런지 살을 에는 차가운 바람이 입고 있는 니트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 추워.”
코트를 다시 입을까 고민했지만, 일단 고집불통 아가씨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윤해원.”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여린 어깨를 코트로 감쌌다. 덩치가 어찌나 작은지 자신의 코트 안에 몸이 쏙 들어온다. 그게 귀여워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코트를 왜……. 선배 그러다 감기 걸려요. 코트 입어요.”
“네가 더 추워 보이거든. 너 이러다 병원 실려 가겠어. 나머지 할 거 있으면 차에 타서 해.”
“아, 저기 조금만 더…….”
“들춰 업기 전에 타지?”
싱긋 웃으며 건네는 인우의 협박에 해원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
“그 정도 봤으면 여기 풍경을 외웠겠다, 외웠겠어.”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면서 인우는 계속해서 잔소리를 쏟아 냈다. 이러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을 해원을 알기에 일부러 더 잔소리를 해댔다.
“시간도 얼마 없어. 해 지기 전에 별장 터도 보고 가야 해.”
“아, 맞다. 제가 시간을 너무 오래 썼죠?”
“그래서 시간을 투자한 성과는 있고?”
그의 물음에 해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천장 전체는 빛이 너무 강하게 들어와서 무리일 것 같은데요. 스카이라운지 공간에만 투명한 유리 천장을 쓸까 해요. 단양 하늘이 청명한 게 매력적이잖아요. 밤하늘도 예쁘고. 고객들이 좋아하지 않을까요?”
해원은 정말 건축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일 이야기를 할 때 말간 검은 눈이 유난히 더 반짝인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까. 그대로 입 맞추고 안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인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은데? 관리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 천장이 있는 구간은 철창을 이용해서 관리자만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겠다. 사람들이 밟으면 흠집 날 테니까.”
“네.”
“일단 그렇게 추진해 봐. 그러면 3차 설계도는 거의 마무리되는 건가?”
“네. 사실 스카이라운지 포인트가 고민이었거든요. 그래서 인공 하늘 천장을 만들까도 생각해봤는데, 진짜 하늘을 볼 수 있는 게 더 매력적일 것 같아서요.”
“그러네. 자, 그럼 여기는 이제 대충 마무리된 건가? 별장 짓는 곳 보러 가도 돼?”
인우의 물음에 해원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인우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그러면서 남은 한 손을 자연스럽게 해원을 향해 뻗어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붙잡았다. 꽁꽁 얼어붙은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냉기에 인우는 괜스레 신경질이 났다.
“정말 너 조금만 더 밖에 있었다간 얼어붙었겠다.”
“그러게요. 오늘 춥긴 춥네요.”
“추운 정도가 아니야. 산이라 바람도 매서운데. 하여튼 윤해원 집중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어떻게 인간의 본능을 이기냐, 집중력이.”
더 내버려 두었다간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어 잔소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저 괜찮아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을 하며 해원은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고 했다.
“손 빼지 마. 별장 터 도착할 때까지.”
“네.”
“대답은 참 잘해요.”
얼어붙은 그녀의 손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면서, 인우는 미소 짓고 있는 해원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잘 웃는다. 그 미소에 제가 약하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웃는 그녀의 얼굴이 좋으면서도 두려웠다. 저 미소를 자신이 오래도록 잊지 못할까 봐.
**
온통 논과 밭뿐인 넓은 평야,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집들, 간혹 들리는 개 짖는 소리가 소음의 전부인 고즈넉한 마을을 둘러보며 해원은 맑은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좋네요, 여기.”
그런 제 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인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여기가? 난 지금 석호 부모님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별장을 짓는다고 하는 건가, 고민했는데. 여기가 좋다고, 넌?”
“네. 진짜 좋아요.”
“뭐가 좋다는 거야. 볼 게 없잖아, 볼 게.”
투덜거리는 그의 말에 해원은 미소를 지었다.
“왜요, 좋지 않아요? 전 여기 너무 좋은데. 나중에 좀 더 나이가 들면 이런 데서 살고 싶어요. 제가 직접 지은 집에서 가족들이랑 같이. 한가롭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그 미래에 인우는 분명 없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저와는 너무 많이 다른 사람. 그걸 알고 있었기에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 남자와는 잠깐의 가슴 떨리는 연애면 충분했다. 딱 이 정도까지만 자신이 욕심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족들이랑? 이런 곳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인우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집에 당연히 나는 없겠네?”
그의 물음에 해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요.”
“와, 너무한 거 아니야? 지금 나랑 연애 중이면서, 다른 놈이랑 미래를 꿈꾼다고? 너 그거 정신적 양다리다.”
“그래요? 몰랐네. 조심할게요.”
발끈하는 그를 보면서 해원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 대답을 잘해서 더 짜증 나. 그런데 윤해원.”
그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선배.”
“나랑 미래는 그려 본 적 없어? 보통 좋아하면 그 사람이랑 결혼까지 꿈꾸지 않나? 넌 안 그래?”
머뭇거리며 묻는 그의 말에 해원은 복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왜 저런 쓸데없는 게 궁금한 걸까. 어차피 이뤄질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미래이건만. 해원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요,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기분 나쁘다는 듯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네. 단 한 번도.”
이건 사실이었다. 정말 그와의 미래는 욕심 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서, 그다음엔 그가 전혀 틈을 주지 않아서, 그리고 이젠 저 스스로 그의 곁에 머물 자신이 없어서.
핑계일 수도 있지만, 자꾸만 그런 핑계들이 생긴다. 그의 곁에 머물면 안 되는 핑계들이.
“대단하네. 그래, 그 마음 변치 마라. 절대 흔들리지 마, 윤해원.”
이를 악물며 하는 그의 말에 해원은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가자.”
“벌써요?”
이제 막 별장 터에 와놓고 바로 돌아가자 말하는 그가 이해가 안 되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볼 게 없잖아. 사진이나 대충 몇 장 찍고 가면 되지. 빨리 와.”
구시렁거리며 먼저 걸음을 옮기는 그를 뒤쫓아 가던 해원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별장이 지어질 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상상해 보았다.
여기에 지어질 그림 같은 집, 넓은 마당, 거기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미소 짓고 있을 그와 자신의 모습을.
딱 한 번은 괜찮겠지. 이렇게 잠깐 동안 스치듯 미래를 떠올리는 건.
“윤해원, 뭐해?”
재촉하는 그의 목소리에 해원은 재빨리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따뜻한 상상을 밀어 넣었다. 이제 다시는 이런 미래를 떠올리지 말자 다짐했다.
**
누군가 저를 번쩍 안아 드는 느낌에 해원은 스르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저를 번쩍 안아 들고 있는 인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놀라 주위를 둘러보자 익숙한 그의 집이 보였다. 차에서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그냥 깨우지, 왜 굳이 애써 힘들게 저를 안고 있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내려 주세요, 선배.”
“싫어. 집까지 이렇게 안고 들어갈래.”
“저 무거워요.”
그 말에 그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안 무거워. 가벼워서 신경질 나. 이렇게 몸이 약해서 어디다 써?”
걱정을 가득 담아 잔소리를 늘어놓는 그의 말에 심장이 따뜻하게 두근거렸다.
“튼튼한데.”
“튼튼하긴. 살 좀 찌라고 그렇게 맛있는 걸 많이 사다 먹였건만. 어째 더 빠진 거 같아, 너.”
그게 누구 탓인지 모르나 보다. 매일 밤 그가 저를 격렬하게 안아대는 통에 살이 찔 틈이 없었다.
“집에서 밥도 잘 안 챙겨 먹지?”
그의 물음에 해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선배.”
“아니긴.”
여전히 저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하늘에서 하얀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넓은 그의 정원에 하얗게 휘날리는 눈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눈 와요, 선배.”
“그러게. 예쁘네. 이게 바로 그림 같은 집이지.”
정원 돌계단 위에 멈춰 서서 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윤해원.”
“네?”
“잠깐이라도 나랑 그림 같은 집에서 살아 볼래? 우리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허공에서 시선과 시선이 얽혔다. 진중한 검은 그의 눈을 보니,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그의 심장에 닿아 있는 귀를 통해 세차게 두근거리는 울림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난 살아 보고 싶어, 잠시만이라도.”
심장을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해원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분명 이 순간을 후회할 걸 알면서도 그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