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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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출근하자마자 대표실로 따라 들어오는 기준을 보며 인우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정치하는 아버지가 싫다더니, 다른 사람 대변인 역할은 엄청 열심히 하는 그였다.

“정인우. 너 어제…….”

“그냥 가기 싫어져서 안 갔어.”

기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말을 자르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야, 그러면 전화라도 받던가. 주란이 계속 너 기다리다가 갔어.”

“피곤해서 자느라 몰랐어.”

“너 요즘 진짜 이상해.”

둔한 거 같으면서도 은근히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저를 관찰하는 그를 인우는 애써 덤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상할 거 없어.”

“여자 생겼어? 이번엔 또 어떤 대단한 집안 딸이야?”

어떤 대단한 집 딸이면 자신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인우는 짜증 섞인 시선으로 유리창 너머 해원을 응시했다. 그 순간 콜록 기침을 하면서 노트북을 보고 있는 그녀 모습에 인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윤해원 아파?”

“뭐? 해원이? 갑자기 여기서 해원이가 왜 나와?”

그때 콜록콜록 더 심한 기침을 하는 해원의 모습에 인우는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이 씨! 윤해원 아프잖아! 넌 본부장이 되어 가지고 직원 아픈 것도 모르냐?”

그는 기준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지르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홀로 대표실에 남겨진 기준은 안경 너머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본부장이 직원 아픈 것도 알아야 해? 뭐야, 저 자식. 설마 해원이랑…….”

잠시 그 생각을 하던 기준이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아는 정인우가 미치지 않고서야 해원을 만날 리가 없었다.

잠깐 만나고 헤어질 여자를 고를 때도 쟁쟁한 집안 여자들 아니면 상대를 하지 않는 인우를 그 누구보다 기준이 잘 알고 있었다.

“해원이 많이 아픈가.”

인우가 저토록 난리를 치는 걸 보니 보통 아픈 건 아닌 것 같았다. 다음부턴 본부장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세심하게 직원들을 살피자, 기준은 조용히 다짐하고 있었다.

한편 대표실 문을 열고 나온 인우는 곧장 해원을 향해 다가갔다.

“윤해원.”

여전히 기침을 하며 노트북 모니터를 보고 있던 해원은 뒤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네, 선배.”

“따라와.”

“네?”

“얼른.”

다짜고짜 따라오라며 재촉하는 그의 말에 해원은 어쩔 수 없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코트도 입고!”

“네? 아, 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코트를 챙겨 입은 해원은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목이 그게 뭐야? 휑하게.”

코트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녀린 목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녀를 보며 인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다려.”

그러고는 그는 다시 사무실 안으로 쓱 들어갔다. 홀로 엘리베이터 앞에 남겨진 해원은 이 상황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아, 어색한 얼굴로 이마를 긁적였다. 잠시 후 다시 사무실 밖으로 나온 그가 머플러를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목에 둘러.”

“괜찮아요, 선배.”

원래 목에 뭘 두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겨울에도 늘 목까지 올라오는 니트를 입든가, 아니면 그냥 휑하게 목을 내놓고 다녔다.

“말 들어. 기침하면서.”

지금 혹시 그가 저를 걱정하는 걸까. 살짝 붉어진 얼굴로 머플러를 내밀고 있는 그를 보며 해원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기대를 하면 안 되는데, 이런 사소한 배려에도 마음이 이상하게 몽글거렸다.

“고마워요.”

또다시 터져 나오는 기침에 서둘러 입을 가리며 답했다. 그러자 그가 으휴, 하고 한심을 내쉬며 직접 머플러를 그녀의 목에 둘러주었다.

익숙한 그의 스킨 향이 머플러를 통해 전달되었다. 그에게 안길 때마다 맡는 그 향에 해원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타, 얼른.”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그가 재촉하듯 말했다.

“네.”

여전히 살짝 달아올라 있는 얼굴로 해원은 엘리베이터에 탔다.

D-33일.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같이 침대에서 뒹구는 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진짜 그와 연애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숨기지 않고 감정을 표현하는 걱정 어린 그의 시선에.

**

잠깐 차가 신호에 걸린 틈을 타 인우는 힐끔 해원을 바라보았다. 차 안 공기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그녀의 기침은 더욱 심해졌다. 차마 보다 못한 자신이 내민 손수건을 받아 들고 숨죽여 기침을 하는 그녀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제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게 차에서 내리게 하는 건 아니었는데. 추운 날씨에 칼바람을 맞으며 대로변에서 택시를 잡느라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번졌다.

“선배, 신호 바뀌었어요.”

그녀가 건네는 말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운전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계속되는 그녀의 기침에 집중력은 금방 흐려지고 만다.

“그런데 선배.”

“어.”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해원이 입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내리며 물었다.

“병원.”

“병원엔 왜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너 아프잖아.”

“아, 저 때문에요? 그러면 안 가도 돼요. 아침에 오면서 약 사왔어요.”

저 말을 하는 동안에도 몇 번의 기침을 하면서, 잘도 괜찮다 말한다.

“기침이 그렇게 심한데 약 먹는다고 낫겠어? 그리고 너 때문만은 아니야. 우리 회사를 위해서 그러는 거지.”

미련 곰탱이 같으니라고.

아프면서 버티는 건 대학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아픈 몸을 이끌고 과제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러다 끝내 일하던 편의점에서 쓰러져 있던 걸 인우가 발견해서 병원에 데려간 적도 있었다.

늘 그렇게 처량 맞았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보다도 더 힘겨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동기나 선배들도 많았지만, 이상하게 자신의 눈엔 윤해원이 제일 불쌍했다.

아니, 안쓰러웠다. 그래, 아마도 지금도 그런 걸 거다. 여전히 제 눈에 해원은 안쓰러운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챙기는 이유도 오직 그것뿐이다. 결코 그녀에게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진짜 괜찮은데. 병원까지 안 가도 돼요.”

“그렇게 기침하다가 다른 직원들한테 옮기면 어떻게 할 거야? 가뜩이나 프로젝트다 뭐다 해서 직원들 체력도 딸리는데. 그러다 우리 일에 지장 생기면 네가 책임질 거야? 이 프로젝트 성공 시킨다는 조건으로 내 귀중한 시간 저당 잡았으면 잘해야 할 거 아니야. 책임감 없게 아프기나 하고.”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자꾸 병원에 안 가겠다 고집을 부리는 해원의 태도에 말이 거칠어졌다. 미친놈, 스스로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인우는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역시나 해원의 얼굴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걱정을 한 거지. 자신의 말에 상처 입을 윤해원이 아닌 것을. 수없이 겪어 놓고서 이다지도 학습 능력이 없는지.

“그러네요, 선배.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알았으면 조용히 따라와.”

“네.”

콜록콜록. 또다시 거센 기침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기침 소리에 이상하게 자꾸 심장이 덜컥거렸다. 그래서 더욱 속도를 올렸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병원에 도착할 수 있게.

**

대학 병원에 온 게 실수인 걸까. 대한민국에 이리도 환자가 많은지 몰랐었다. 초진 서류를 작성하고 접수를 기다리는 해원을 보며 인우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삼켰다. 오전에 회사에 들어가긴 틀린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된 건가. 이왕 병원까지 데리고 온 거 근처 삼계탕집에 데려가서 푹 곤 국물이라도 먹여야겠다. 일단 그 전에 커피부터 마셔야 할 것 같지만 말이다.

어제 심란해서 잠을 설쳤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고상한 자신이 품위 없게 윤해원 앞에서 하품이나 하고 있을 수 없으니 커피의 힘이라도 빌려야겠다.

“커피 좀 사올게. 너도 마실래?”

“제가 사올게요, 선배.”

“됐어. 환자는 안 부려 먹어.”

퉁명스레 답하고는 1층 로비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겨울에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는 해원의 취향을 알지만, 감기가 걸렸는데 차가운 걸 마시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 들고 캐리어에 담아 로비로 나왔다.

그때 의사 가운을 입은 한 남자와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는 해원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 남자는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뜨일 정도로 잘생긴 외모를 가졌다.

“뭐야? 아는 사인가.”

반반한 남자의 얼굴에 괜스레 걸음이 빨라졌다.

“와, 신기하네요. 선배를 이런 데서 다 만나고.”

“나도 신기해. 그래도 윤해원 이런 곳에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병원 올 일 없게 튼튼하게 살아.”

해원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걱정하는 그 남자의 말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무슨 사이기에 건강 걱정까지 해주는 건지.

“네. 그런데 오늘은 감기로 온 거예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래도 감기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만병의 근원이야.”

만병의 근원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의사가 되어 가지고 저게 할 말인가. 그깟 감기 가지고 호들갑은.

그깟 감기 가지고 해원을 대학 병원까지 끌고 온 자신을 잊은 채, 그의 의사 가운을 노려보았다.

“네. 어쨌든 선배 진짜 반가웠어요.”

“나도. 네가 나 따라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휴, 선배. 다 지난 이야기를.”

따라다니던…….

그 단어에 마지막 인내심까지 끊어져 버렸다.

“윤해원.”

무작정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캐리어에 담긴 커피를 내밀었다.

“누구야?”

그러자 그 남자가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해원을 향해 물었다. 누구냐고 물어봐야 할 사람은 정작 자신이건만. 선수를 빼앗긴 게 분했지만, 해원이 어떻게 답을 하나 궁금해져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 같이 일하는 선배요.”

“그러시구나. 반가워요. 해원이 선배시구나. 저도 이 녀석 선배예요, 고등학교 선배.”

해원의 등을 다정히 토닥이며 말을 하는 그 남자의 손을 당장이라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가뜩이나 그 남자와 동급으로 선배 취급을 받은 게 짜증이 나는데. 인우는 극한의 참을성을 발휘하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정인우라고 합니다.”

“아, 전 김태경입니다.”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냥 싫었다. 수컷의 본능으로 인우는 잔뜩 그 남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남자의 손에 들린 PDA가 울어댔다.

“어쩌지. 나 가봐야겠다.”

“네, 선배.”

“감기 얼른 낫고.”

“네. 다음에 봐요, 선배.”

다음에 보긴 개뿔.

그 남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해원을 인우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저 남자 뭐야? 고등학교 선배?”

그 남자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인우는 얼굴을 잔뜩 굳히며 해원을 향해 물었다.

“네. 맞아요. 같은 선도부여서 친해진 선배예요.”

순 날라리 같이 생겼더만 선도부는 무슨. 그런데 선도부란 단어를 들으니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그러다 동아리 MT때 진실 게임에서 해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첫사랑에 대해 묻는 아주 유치한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고등학교 때 같이 선도부를 했던 선배를 좋아했다, 말했던 거 같은데.

그게 설마……!

“가자.”

“네? 어딜?”

“기준이 전화 왔었어. 빨리 오래. 여기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그냥 회사 근처 병원으로 가.”

“아, 네. 알겠습니다, 선배.”

뒤돌아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윤해원의 첫사랑이 있는 병원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기에. 마치 자신의 영역에 다른 수컷이 침범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난 빌어먹을 개새끼니까.

이건 단지 본능적인 수컷의 방어 본능일 뿐이었다. 결코 이건 질투 같은 게 아니었다.

“저기 선배.”

보폭이 넓고 빠른 걸음을 따라오기 힘든지 해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저를 불렀다. 우뚝 걸음을 멈춰 선 인우는 짜증 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배라고 부르지 마. 너 선배란 단어에 환상 같은 거 있어?”

“네? 왜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해원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너 내가 왜 좋아? 어디가 좋아? 선배라서 좋아하는 거야? 아니면 얼굴 보는 건가? 아까 그 남자도 잘생겼던데.”

그만하자, 제발. 이런 말을 쏟아 내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해 인우는 커다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해원 역시 이런 자신이 우스운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지 마.”

“다 좋아요, 선배.”

그때 예상하지 못한 답이 해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냥 전부 다요. 이렇게 화내는 것도 좋고, 웃을 때도 좋고, 가끔 다정한 모습을 보여줄 땐 더 좋고. 그냥 다 좋아요, 선배라서.”

이상했다. 그녀가 건네는 말들에 심장이 뛰었다. 자신에게 사랑한다 말하던 여자들도 수없이 많았는데, 어찌하여 이 별것도 아닌 좋아한다는 말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까.

이렇게 뛰면 안 되는데. 진짜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 심장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선배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뛰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툴툴거렸다. 그러고는 서둘러 뒤돌아서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가 좀처럼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윤해원이 자신에게 뭔 짓을 했기에 이러는 걸까.

돌아 버릴 정도로 어지러운 감정에 마음이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더는 아무것도 아니다 세뇌시킬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

오랜만이었다. 예전에 살던 동네 근처에 있는 가구 공방을 찾은 해원은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곳에 오면 늘 마음이 편해졌다. 엄마와 친한 친구였던 수연이 운영하고 있는 공방이었다.

수연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혼자 사는 해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분이었다. 대학 때 종종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구 만드는 걸 배웠다. 손재주가 좋은 덕에 배우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나무를 만지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져 평생 이 일을 할까, 잠시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이 좋은 일을 직업으로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땐 이렇게 공방을 찾아와 무언가를 만들곤 했다.

집에는 하나둘씩 그녀가 만든 작품들이 쌓여 갔다. 나무로 만든 라디오,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흔들의자, 좋아하는 책들을 꽂아 둘 수 있는 책장, 자신의 보물들을 넣어 둔 보물 상자 등. 이곳에선 늘 소중한 게 탄생하곤 했다.

“해원이니?”

귓가에 들리는 수연의 목소리에 해원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이모.”

“오랜만에 왔네. 요즘에 일 바쁘다더니.”

“그러게 말이에요. 잘 지내셨죠?”

오기 전에 백화점에 들러 사온 홍삼을 내밀며 수연에게 내밀며 물었다.

“뭘 이런 걸 사와. 이런 거 안 사와도 되니까 얼굴이나 더 자주 보여 줘.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퇴근하기엔 이른 시간 아닌가?”

오후 4시를 막 지나고 있는 시계를 보며 그녀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 오래간만에 일찍 퇴근하게 됐어요.”

이렇게 일찍 퇴근할 정도로 몸이 아픈 건 아니었는데.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라고 난리를 치는 인우와 기준 덕에 어쩔 수 없이 일찍 회사를 나서야만 했다. 그냥 집에 가서 쉴까, 잠시 생각했지만 사실 누워 있을 만큼 아프진 않았다.

그러다 수연의 공방이 떠올랐다. 모처럼 여유가 생긴 김에 인우에게 선물할 의자 작업을 조금이라도 해놓고 싶었다.

“뭐 만들고 싶어서 왔구나? 이번엔 뭐 만들려고?”

수연의 물음에 해원은 머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의자요.”

“의자? 저번에 흔들의자 만들지 않았었나?”

“네. 근데 이번엔 흔들의자 말고요, 야외에 놓는 의자 만들고 싶어서요.”

묵직하고, 튼튼하면서도 편안한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그런 의자를 만들고 싶었다. 인우가 언제든 앉아서 쉴 수 있는 그런 의자를.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그 자리에 묵묵히 있으며, 세월의 흔적에 따라 또 다른 멋이 나는 그런 의자. 그래서 아주 가끔은 그 의자를 보며 그가 자신을 떠올릴 수 있기를.

“그래?”

“네.”

“어디 보자, 그러면 생각해 온 나무는 있어?”

“너도밤나무요.”

“너도밤나무?”

수연이 해원의 말을 하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만들어 줄 의자구나?”

정곡을 찌르는 그녀의 말에 해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네?”

“그 사람한테 행운을 주고 싶은 거 아니야? 보통 누군가에게 선물할 때 많이 선택하는 나무지.”

해원 역시 알고 있었다. 너도밤나무에 깃든 행운의 의미를. 하지만 사실 그녀가 그 나무를 택한 이유는 길고 긴 나무의 수명 때문이었다. 너도밤나무는 무려 900년의 시간을 산다 했다. 감히 상상도 되지 않은 길고 긴 시간.

자신은 900년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가 그 집에 머무는 시간 동안 부디 튼튼하게 버텨 주길 바라는 마음에 그 나무를 택했다.

“디자인은 결정했어?

“네. 작은 테이블이랑 나무 의자가 붙어 있는 구조로 그려 봤어요.”

미리 짜온 디자인 시안을 건네자, 수연이 안경을 쓰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디자인 특이하고 예쁘네. 그런데 왜 의자가 하나 뿐이야? 이왕이면 2인용으로 하지. 같이 마주 보고 앉을 수 있게.”

아마 자신과 그가 그 의자에 마주 앉아 있을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과 헤어지고 나서야 그 의자가 집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자신이 만든 의자에 다른 여자가 마주 보고 앉는 건 더욱 싫었다. 기대가 없다고 해서 질투가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냥요.”

차마 그 못난 속내를 밝힐 수가 없어, 해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대표실 안으로 들어오는 기준이 보였다.

“왜? 무슨 일 있어?”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막상 해원을 일찍 퇴근시키고 나니 회사에 있는 게 지루했다. 일을 할 땐 단 한 번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한 형 연락 왔어.”

“누구?”

“이한 형.”

이한, 그 이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때 자신의 롤 모델이었던 사람이었다, 이한은. N그룹의 사생아. 하지만 뛰어난 머리와 경영 능력으로 본가의 한심한 자식들을 제치고, 후계자 자리에 오른. 이 바닥에서 거의 전설과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남들은 사생아라고 그를 무시하기도 했지만, 인우는 진심으로 그를 존경했다. 뛰어난 지력과 배짱, 남자답게 배포도 크고, 의리도 강했다. 사생아는 아니었지만, 경영에 관심이 없는 부모덕에 번번한 힘을 내지 못했던 인우는 그를 보며 다짐했었다. 자신도 꼭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모임이 있을 때마다 자신을 잘 따르는 인우를 이한 역시 예뻐했었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따로 회사를 차려 힘을 키우라고 조언을 해준 사람 역시 그였다.

물론 회사를 이만큼 성공시킨 건 자신의 능력이었지만, 이한의 조언이 있었기에 좀 더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의 부서에서 일하던 계약직 여직원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잠깐 노는 건 줄 알았는데, 이한은 끝내 회사와 여자 중에서 그 여자를 선택했다. 힘겹게 얻은 후계자 자리까지 내어놓으면서. 그 뒤로 이한을 볼 수 없었다.

“뭐래? 이한 형이?”

“우리 자주 가는 클럽에 있대. 아, 나도 가고 싶은데. 하필 중요한 일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계속 살아갈 수 있으려면, 부모님이 들이미는 여자들이랑 열심히 맞선을 봐야 하거든. 알지? 그것조차 안 했다간 우리 아버지가 고용한 킬러한테 어느 날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웃으며 농담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이었다. 그걸 알기에 차마 그의 웃음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클럽에 있다고?”

사랑에 눈이 멀어 이 바닥을 떠난 안타까운 사람이었지만, 인우는 여전히 그가 그리웠다.

“응. 너 연락처 바뀌어서 연락 못했나 보더라. 이한 형 연락처 넘겨줘?”

“어. 바로 가봐야겠다.”

“그렇게 좋냐? 이한 형 돌아와서?”

“그냥. 어떻게 살았나 궁금해서.”

그가 그렇게 사라진 이후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공사판에서 막노동하는 그를 봤다는 소문도 있었고, 어느 산골에 처박혀 농사를 짓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을 거라는 건 직감할 수 있었다.

회사를 버리고 보잘것없는 여자를 선택한 후계자를, 그것도 든든한 배경도 없는 이한을 N그룹에서 가만둘 리가 없었다. 힘들면 자신에게 도움이라도 청했으면 좋았으련만. 자존심이 센 이한은 연락 한 통 없었다.

VIP 카드가 있는 사람들만 출입 가능한 그 클럽에 이한이 다시 나타난 걸 보니, 아마 그 여자와 헤어졌나 보다. 아마도 다시 N그룹의 품으로 돌아간 듯했다. 하긴 N그룹으로선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한이 떠난 후, 능력 없는 장남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벌써 말아먹은 사업이 몇 개였다. 워낙 덩치가 큰 N그룹이었기에 당장 망하지는 않겠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10년도 못 갈 것 같다는 업계의 분석도 떠돌고 있었다.

“잘 만나고 와.”

“응.”

기준이 나가고 홀로 사무실에 남은 인우는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집어 들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이한을 떠올리며 씁쓸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했다. 모든 걸 내던지고 사랑하는 여자를 선택한 그의 삶은 행복했을까.

“미친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소름 끼쳐 고개를 내저었다.

행복했으면, 뭐.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해원의 얼굴을 밀어 넣으며, 코트를 입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자신은 절대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 속으로 굳게 다짐하면서.

**

인우가 클럽에 도착하자 웨이터가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그를 따라 룸 안으로 들어가자, 홀로 독한 양주를 마시고 있는 이한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저녁 7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벌써 살짝 취한 듯했다. 예전보다 많이 거칠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 한숨을 삼키며 인우는 입을 열었다.

“형.”

인우가 부르는 소리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인우야. 우리 인우. 자식, 더 멋있어졌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인우는 말없이 그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고맙다. 너라도 나와 줘서. 아, 자식들 옛날에 내 전화 한 통화에 곧장 달려 나오더니. 오늘은 죄다 바쁘다네.”

뻔했다. 다들 N그룹에서 그의 위치가 어떻게 될지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이리라.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 클럽에서 있는 집 자식들이 돈 지랄하고 노는 건 줄 알겠지만, 이곳은 전쟁터였다. 보이지 않는 이해타산 관계로 엮여 있는.

“아예 돌아온 거야?”

“어. 그렇게 됐다.”

“형 아버지가 기어코 찾아냈구나? 둘이 사는데.”

“아니. 내가 내 발로 아버지 찾아가서 빌었다. 제발 다시 받아 달라고 울며불며 사정했다. 날 두 번이나 버린 아버지한테 말이야.”

그의 얼굴에 번지는 씁쓸한 조소에 인우는 쓰디쓴 한숨을 삼켰다.

“N그룹 배경이 없어진 나는 쓰레기더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 우리 아버지 무서워서 나 취직시켜 주는 회사도 없고, 간신히 쥐꼬리만 한 작은 회사 들어가도 어떻게 내 소문을 들었는지 금방 내치고. 공사판에서 막노동하면서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면서 살았는데. 너무 힘들더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이한의 여린 갈색 눈을 보며 인우는 말없이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사랑했는데……. 그 사랑이란 거 참 아무 힘도 없더라. 힘드니까 오히려 원망하게 돼. 왜 하필 눈에 뜨여서, 내 마음에 들어 이 꼴을 만드느냐고. 그 여자한테 그렇게 독한 말을 하고 있더라고. 그런데도 그 여자는 미안하대. 그냥 미안하대. 바보 같지 않냐? 나 같은 놈 만나서 그 고운 손에 물 묻히며 이 집 저 집 일해 주러 다니면서. 그러면서도 미안하대. 젠장, 빌어먹을.”

술잔을 든 이한이 갈증이 나는지 단숨에 술을 마셨다.

“미안할 일이 뭐가 그렇게 많아. 그래서 더는 못 살겠더라. 그 여자 너무 짜증 나잖아. 짜증 날 정도로 멍청하게 착하잖아. 아버지한테 사정했어. 그 여자 인생 망쳤으니까 보상은 해줘야하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피식 웃음을 삼키는 그였다.

“야, 웃기지 않냐? 보통 드라마에선 부모들이 헤어지라고 돈 봉투를 내밀잖아. 난 내가 내밀었다. 제발 이거 받고 내 인생에서 사라져 달라고. 너랑 못 살겠다고. 근데 또 그 여자는 울지도 않고 그 봉투를 받더라. 괜찮대. 고마웠대. 뭐가 고마워. 뭐가…….”

그의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까칠한 그의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을 보며, 인우는 지독하게 쓴 술을 삼켰다.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다. 욕을 해줘야 할지 위로를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이 순간에 해원이 떠오르는 걸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해원의 얼굴을 애써 힘겹게 털어 내며 이를 악물었다.

역시 윤해원은 위험했다. 애초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관계를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윤해원을 마음에 담는 멍청한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멍청한 짓은 딱 여기까지다. 마음에 그녀가 들어왔든 말든 상관없었다. 약속한 날이 되면 버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헤어진다.

그래, 자신은 그럴 수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후회를 하는 이한을 보며 인우는 더욱 굳세게 다짐했다.

“넌 나같이 멍청한 짓 하지 마. 할아버지가 정해 주는 여자랑 결혼해. 넌 야망도 큰 놈이잖아.그러니까 절대 이렇게 멍청한 짓 하지 마.”

“형은 뭘 후회하는 거야? 그 여자를 선택하면서 망가진 형의 인생을 후회하는 거야, 아니면 형이 망가트린 그 여자의 인생을 후회하는 거야?”

“……둘 다. 그런데 인우야.”

이한은 그 여자를 떠올리는지 아련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기억을 다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난 또 그 여자 사랑할 것 같다.”

바보같이 저렇게 후회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단다. 도대체 사랑 그게 뭐기에 사람을 이토록 미치게 만드는 걸까.

“형 이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는데. 나도 지금 아주 이상한 여자를 만나고 있거든.”

“누구? 어느 집 여자인데?”

술을 마시며 건네는 이안의 질문에 인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우리 회사 여직원. 아무것도 가진 거 없어. 아, 아니다. 머리는 아주 좋다. 걔 천재야. 근데 멍청한 것 같기도 해. 천재면서 왜 나를 좋아해? 나랑 자기랑 당연히 안 될 거 알면서. 그리고 걔 엄청 웃겨. 매달리지 않을 테니까 잠깐만 사귀자더라. 낭만적이지 않아? 단어 선택이. 고딩들도 요즘은 그런 말 안 하겠다. 순진하고, 멍청하고. 그런데 또 의외로 귀여워.”

“인우야.”

이한이 복잡한 눈으로 보며 그를 불렀다.

“사랑하는구나, 그 여자.”

인우는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형. 사랑 같은 거 아니야. 내가 그런 거 할 놈이야?”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감정이란 거 그저 우기면 되는 거다. 이한은 못했어도, 자신은 달랐다. 그보다 훨씬 이기적이고 못된 놈이었으니까.

“그래. 아니면 됐어.”

그래, 맞다. 아니면 된 거다.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

마음에 드는 목재를 찾아 고르고, 자르는 데만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게 힘들기도 했지만, 이런 정성을 들일 수 있어서 해원은 수제 가구 만드는 일이 좋았다. 건축처럼 마음을 담아 형체를 만들 수 있는 일이었기에.

이번에 만드는 의자는 오직 인우만 생각하며 만들었다. 자신이 만든 의자에 그가 앉을 걸 생각하니 절로 힘이 났다. 목재를 고를 때도, 자를 때에도 계속해서 인우를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 인우를 떠올리다 보니 문득 그가 보고 싶어졌다.

앞치마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며 해원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그에게 공적인 일로 전화를 건 적은 많아도, 개인적인 일로 전화를 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연애를 시작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인우도 자신에게 전화를 안 걸었고, 저 역시 그에게 전화를 걸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헤어질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연애라지만, 그 흔한 통화조차 안 해봤다니 참 우스웠다.

그래도 연애를 하는 동안 전화는 한 번 해봐야지.

그 생각을 하니 조금 용기가 났다. 해원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는 그의 번호를 눌렀다.

그가 좋아하는 팝송이 흘러나오는 통화 연결음을 들으면서 해원은 긴장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손가락으로 나무를 두드렸다.

-여보세요.

하지만 잠시 후에 흘러나오는 딱딱한 그의 목소리에 다시 긴장을 하고 말았다.

“저 해원이에요.”

긴장된 목소리로 말을 건네자, 알아, 라는 딱딱한 답이 되돌아왔다.

“바쁘세요?”

-어.

딱딱하고 기계적인 그의 답변에 괜히 전화를 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끊을게요.”

-그래.

해원은 민망함에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귀에서 핸드폰을 뗐다. 그렇게 막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그의 목소리가 다시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그 여자야, 형.

전화가 끊겼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는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 좋다고 매달리는 그 여자. 아, 왜 또 전화까지 해. 진짜 연애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조용히 바람처럼 머물다 사라질 것이지.

수화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흘러나오는 그의 말에 해원은 서둘러 종료 버튼을 눌렀다. 가슴에 커다란 생채기가 났다.

기대하지 말자, 그렇게 수없이 다짐했으면서 또 그에게 기대를 하고 말았나 보다. 그의 말이 이토록 아픈 걸 보면.

한편 인우는 뒤집어서 내려놓은 핸드폰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형……. 사실은 그 바람이 사라지지 않고, 내 곁에서 평생 머물렀으면 좋겠다.”

인우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한은 술에 취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답이 없었다. 하긴 이런 한심한 마음엔 답을 해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후회할 마음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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