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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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55.

핸드폰 캘린더와 일에 열중하고 있는 해원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신경질적인 손길로 블라인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블라인드가 내려오자 바깥 사무실과는 완벽하게 단절이 되었다.

차라리 안 보고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 뒤로 벌써 일주일째다. 첫날 집에서 잠깐 데이트를 한 걸 끝으로 회사 밖에선 만나지도 못했다. 그건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연애하고 첫 주말이라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았건만. 단양에 직접 내려가 조사해야 한다고 설계 팀하고 휘리릭 내려가 버린 그녀였다.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혹시 밀당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그걸 의심하긴 윤해원의 표정이 너무나 해맑았다. 고의성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그녀의 검은 눈을 보면 끝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긴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우스웠다. 사실 이 연애에 더 집착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였다. 그런데 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가 허둥지둥하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똑똑.

초조한 얼굴로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한 얼굴로 의자에 앉으며,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서류를 보는 척하며 슬쩍 고개를 들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해원의 모습이 보였다.

“선배. 설계도 1차 시안 나왔어요.”

배치도, 평면도, 외부 조감도 등 해원이 내미는 설계도들을 받아 들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빛의 건축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해원은 빛을 사용하는 데 탁월한 감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해 외부 벽면에 높이가 각기 다른 창을 내어 자연광의 다채로운 변화를 꾀했다.

외부는 블랙 앤 화이트로 모던한 느낌은 주면서, 내부는 한옥을 연상케 하는 천장 구조로 전통미를 강조했다. 역계단식 구조로 지어진 발코니는 역동적인 재미가 있었다.

“다 좋은데. 외부가 너무 모던하지 않아? 자칫하면 밋밋해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뒷면은 발코니가 포인트가 되는데, 앞면은 밋밋하긴 하죠? 팀원들이랑 같이 회의해서 수정할게요.”

“그래.”

그래도 결과물은 제법 만족스러웠다. 바쁘게 일하더니 1차 시안부터 대단했다. 사실 외부 말고는 특별히 지적할 사항들이 보이지 않았다. 잘난 자신이 일에 밀린 것 같아 조금 심통이 났었는데, 그런 마음을 가진 것조차 미안해졌다.

“참, 선배.”

설계 도면을 챙겨 들던 해원이 살짝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데이트할래요? 모처럼 일찍 퇴근할 거 같아서요.”

생긋 웃으며 말을 건네는 그 모습에 심장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렸다. 방정맞게 왜 여기서 두근거리고 난리인 건지. 정신 못 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인우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쩌지? 오늘은 내가 안 될 것 같은데.”

사실 안 될 이유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데이트하자는 그녀의 한마디에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물며 꼬리치고 싶지는 않았다.

“음, 일정 좀 보고.”

아무 스케줄이 적혀 있지 않은 다이어리를 열어 살펴보던 인우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때 덤덤한 해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선배.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선배 한가할 때 데이트하면 되죠. 그럼 전 나가 보겠습니다.”

커다란 설계 도면을 품에 안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해원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의도하지 않고 밀당을 이렇게 하는 거라면, 윤해원은 어쩌면 타고난 연애의 신(神)일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을 이토록 미치게 만든단 말인가.

여자를 꽤 만나 왔다 자부했는데, 저런 스타일의 여자는 정말 처음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상대를 해야 할지 머릿속에 계산이 서지 않았다.

“윤해원.”

그녀가 막 문손잡이에 손을 대는 걸 보며, 재빨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선배.”

“끝나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선배 약속은……?”

“가기 싫어졌어. 참, 그동안 연습은 좀 했어?”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해원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 위로 한 팔을 뻗고 조용히 내려다보며 답을 기다렸다.

“키스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하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음을 삼켰다. 윤해원은 내숭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대책이 안 서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거.”

“네. 틈틈이 공부했어요.”

뭘 어떤 식으로 공부를 했다는 걸까. 혹시 아무 남자나 붙잡고, 키스를 해본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딴 남자와 그러고 있을 윤해원을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졌다.

“연습한다고 아무나 덮치지 마. 그러다 신고당해, 너.”

“안 그래요.”

농담과 진담을 반쯤 섞어 건네는 제 말에 그녀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좋아. 오늘은 끝까지 갈 수 있도록 기대하지.”

“저도…… 기대돼요.”

앙증맞은 말을 내뱉는 분홍빛 입술에 당장 입술을 맞추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쳐들었다. 윤해원에게 이토록 몸이 민감하게 반응할 거란 걸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아예 여자로 생각도 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몸이 달아서 돌아 버릴 것 같다니.

그래, 차라리 안아 버리자.

어차피 세상에 특별한 섹스는 없었다. 오로지 동물적 욕구를 배출하기 위한 욕망만이 있을 뿐이지.

**

젠장, 빌어먹을.

첫 교미를 하는 짐승처럼 들끓는 욕망에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샤워를 하고 수줍은 얼굴로 걸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에 무작정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그래도 타는 듯한 갈증은 좀처럼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위험하다 경고하는 뇌의 신호도 무시한 채 그녀의 샤워 가운을 벗겨 버리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야리야리한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길고 가느다란 목, 움푹 팬 쇄골,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봉긋한 가슴, 제 시선에 금세 달아올라 솟아오른 유두, 잘록한 허리, 앙증맞은 배꼽, 머리색과 똑같은 짙은 갈색 수풀, 부끄러운 듯 힘을 주어 오므리고 있는 다리를 차례대로 훑어보는 사이 흥분으로 인해 단단해진 아랫도리가 저려 왔다.

하지만 이런 시각적 자극보다 더욱 그를 미치게 만드는 건 그녀 몸에서 나는 특유의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었다. 그 향이 자신이 쓰는 보디샴푸 향과 어우러져 저를 짐승으로 만들고 있었다.

힘겹게 그녀의 몸에서 시선을 뗀 그가 고개를 들자, 욕망에 사로잡힌 까만 눈이 보였다. 아마도 지금 제 눈동자와 지독하게 닮아 있을 그 눈을 응시하며, 또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훅 코를 스치는 달콤한 향에 더욱 세차게 그녀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더 깊게 빨아 당기면 이 지독한 갈증이 사라질까. 뿌리가 얼얼할 정도로 세차고 격렬한 키스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 선배.”

숨소리에서 마저도 그녀 특유의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단단한 두 팔을 뻗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침대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올 정도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눈처럼 새하얀 해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이 크게 들이마셨다. 같이 따라 들어와 후각을 자극하는 향에 성난 페니스가 더욱 단단해졌다.

잘근잘근 이로 깨물었다, 혀로 핥았다를 반복하며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여린 몸을 팔딱거리며 야릇한 신음을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사실 그냥 이대로 바지와 브리프를 벗어 던지고 그녀 안으로 돌진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답지 않게 애무에 공들이는 건 생전 처음 보는 해원의 표정 변화 때문이었다. 이토록 그녀가 표정에 감정을 내비친 적이 있었던가.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원색적인 그녀의 표정이 그를 더욱 자극시키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 더욱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힌 그녀의 표정을. 그래서 힘겹게 들끓는 욕망을 억누르며 잔뜩 선 분홍빛 젖꼭지를 혀로 건드렸다. 그녀의 등 근육의 떨림이 안고 있는 손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몰랐다. 여자가 느끼는 걸 보는 것이 이토록 자극적이라는 걸. 단단해지다 못해 쓰라릴 정도로 아파 오는 페니스를 느끼며, 입술로 더욱 세차게 젖꼭지를 빨아 당겼다.

“서, 선배!”

더욱 짙어지는 검은 눈. 그 안에 꿈틀거리는 욕망이 반가웠다. 그게 꼭 저를 향한 그녀의 열망인 것 같아서.

“더 애타게 불러 봐. 여길 만지면 그러려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허벅지 사이로 손을 뻗으며 손등으로 부드럽게 수풀을 훑었다. 그러자 그녀의 동그란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연분홍빛 입술이 반쯤 벌어져 뜨거운 숨을 내뱉는 걸 보며 갈라진 틈 사이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살짝 젖어 있는 그곳이 뜨거웠다. 마치 심장이 두근거리는 듯 움찔거리는 그곳을 부드럽게 자극하며 인우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열망에 휩싸인 검은 눈동자, 달콤한 숨을 내쉬는 코, 야릇한 신음을 흘리는 입술.

세상에 이보다 더 야한 걸 본 적이 없었다. 적나라하게 쾌락을 드러내는 자그마한 얼굴이 그의 피를 더욱 뜨겁게 들끓게 했다.

“흣!”

기분 좋은 그녀의 신음을 들으며 갈라진 틈 사이를 부드럽게 훑고 올라가 볼록해진 클리토리스를 찾아냈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여기가 엄청 질척거려.”

부푼 음핵을 손가락 끝으로 긁을 때마다 여성은 점점 더 많은 애액을 흘려대고 있었다. 신음을 참으려는 듯 해원은 눈을 여전히 질끈 감은 채 침대 시트를 움켜잡았다.

하얀 시트 위에 흐트러진 갈색 머리, 잔뜩 달아오른 두 뺨, 바르르 떨릴 정도로 세차게 침대 시트를 움켜잡고 있는 작은 주먹, 이런 게 이토록 사람을 자극시키다니!

“윤해원, 소리 질러. 그렇게 참다가 더 큰일 난다고.”

그녀가 지금 절정에 오르기 직전이라는 걸 알면서도 음핵을 자극하는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제 손 아래에서 그녀가 폭발하는 걸 보고 싶었다.

동그란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점점 한계가 오는지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요란한 신음성을 내질렀다.

“선배, 제발. 제발 그만해요. 기분이 이상해요!”

숨을 헐떡이며 애원하는 그녀의 외침에 인우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가락을 움직이는 템포는 더욱 빨라졌다. 아예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잔뜩 독이 오른 음핵을 잡아당기며 더욱 세차게 자극했다.

선배, 선배, 하고 그녀가 더욱 애타게 저를 부르다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왈칵하고 쏟아져 나온 뜨거운 애액이 손가락을 흠뻑 적셨다.

미끈거리는 애액이 묻어 있는 손가락을 붉은 입술에 가져다 대고 살짝 혀로 핥아 맛을 보았다. 달았다. 직접 그곳에 혀를 가져다 대고 싶을 만큼.

이성을 마비시키는 강렬한 충동에 인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곧장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애액이 번들거리는 분홍빛 속살이 미처 끄지 못한 조명 아래 적나라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서, 선배!”

그가 뭘 하려는지 뒤늦게 눈치챈 해원이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걸 들으며 뜨거운 입술을 그곳에 가져다 댔다. 입술보다 더욱 뜨거운 속살을 느끼며 움찔거리는 질구를 혀로 살짝 건드렸다.

“흣!”

그러면서 살짝 시선을 들어 해원을 올려다보자, 아까보다 더욱 적나라한 쾌감을 드러내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저 얼굴이 더욱 욕망에 사로잡히길 바라며, 시선은 고정시킨 채 혀로 갈라진 틈을 세차게 핥았다.

여전히 달았다. 이 달콤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싶을 만큼. 한 번도 여자의 은밀한 곳에 입술을 댄 적이 없었다. 그저 본능에 따라 넣고, 허리를 움직이고, 싸는 게 끝이었는데, 윤해원은 왜 모든 것을 맛보고 싶게 만드는 걸까.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오므리는 다리를 벌리며 도톰한 음핵을 찾아 입에 물었다. 혀의 움직임을 따라 점점 더 단단하게 변해 갔다.

“서, 선배. 선배!”

애달프게 저를 부르며 절정에 도달하는 그녀의 모습에 욕망이 거세졌다. 당장 성난 페니스를 흠뻑 젖은 그녀의 안으로 밀어 넣고 싶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인우는 침대 옆 서랍장을 열어 구비해 둔 콘돔을 하나 꺼내 입으로 뜯었다. 그러고는 딱딱해질 정도로 단단한 성기에 콘돔을 씌웠다.

두 팔로 그녀를 가두며 움찔거리는 질구에 페니스를 가져다 댔다. 욕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그녀의 검은 눈이 저를 올려다보는 순간 천천히 좁은 질 안으로 남성을 밀어 넣었다.

“응.”

꼭 깨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해원의 애절한 신음에 인우가 멈칫했다. 그의 남성의 끝에서 얇고 단단한 막이 느껴졌다

“너……!”

떨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설마 처음이었어?”

천천히 끄덕여지는 그녀의 고갯짓을 보는 순간, 성기를 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의지보다 강한 욕망이 벽을 향해 끊임없이 돌진하고 있었다. 어서 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며 피스톤질을 멈추지 않았다.

“젠장, 젠장.”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으며 끊임없이 안으로 밀고 들어가자, 해원의 자그마한 얼굴이 고통으로 얼룩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어먹을 욕망은 멈추지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막은 허물어지고, 끈질기게 성기에 달라붙는 쫀득한 질의 촉감에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헉. 하아!”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라 믿기지 않는 거친 신음성이 들려왔다. 윤해원이 저를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한 마리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다. 발정난 개새끼처럼.

**

쏴아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인우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해원이 처음일 거란 걸.

아니,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해원을 알아 온 7년 동안 그녀가 연애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자신은 알고 있었다. 욕망에 사로잡혀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

마음이 복잡했다. 누군가의 처음을 가져 본 건 인우 역시 처음이었다. 애초에 책임지는 게 싫어 순진한 여자들은 아예 건들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쉽게 만났고, 또 쉽게 헤어졌다. 구속할 게 없는 그런 가벼운 만남들만 이어 왔던 것이다.

물을 잠그고, 수건으로 몸을 닦은 다음 샤워 가운만 입은 채 문을 열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어디서 찾아냈는지 침대 시트를 갈고 있는 해원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가진 관계로 몸 상태가 엉망일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괜스레 짜증이 나서 굳은 얼굴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뭐하는 거야?”

“아, 시트 더러워져서요.”

차분한 얼굴로 답하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누가 너한테 이런 거 신경 쓰래? 그리고 왜 말 안 했어?”

갑자기 목이 콱 조여 왔다. 명치 어딘가가 아릿했다. 인우가 이마를 찌푸렸다. 여러 가지 감정이 한 번에 뒤엉키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큰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안전하게 지켜 온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 것 같은 그런 두려움.

“처음이란 거 왜 말…….”

“신경 쓰지 마요, 선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제 말을 끊고 들어오는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에 인우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뭘?”

제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한 말간 눈이 지나치게 덤덤했다. 방금 전 안을 때 봤던 열망이 이 눈동자에선 느껴지지가 않았다.

“저 별로 처음이란 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속이 뒤틀리며 짜증이 치솟았다. 차라리 해원이 처음을 책임지라고 말했으면 이보다 나았을 지도 모른다. 비겁한 속내를 들켜 버린 것도 짜증이 나고,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어 보이는 해원의 모습에도 짜증이 났다.

“개새끼네, 너한테 나.”

격한 자신의 말투에도 그녀의 눈빛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저 덤덤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내저을 뿐.

“그런 거 아니에요, 선배.”

아니. 차라리 개새끼인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어차피 개새끼니까. 뭔 짓을 해도 상관없겠지.

“개새끼 하지, 뭐.”

가녀린 해원의 턱은 한 손에 다 들어왔다. 그녀의 턱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거칠고 뜨거운 키스가 길게 이어졌다.

타액과 타액이 뒤섞이고, 호흡과 호흡이 뒤엉키는. 오직 욕망만이 가득한 키스를 퍼붓다가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이왕이면 발정난 개새끼.”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씁쓸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스스로에게 느껴지는 혐오감을 애써 억누르면서.

**

‘자고 가. 아무리 발정난 개새끼라도 오늘은 안 건드릴 테니까.’

저를 붙잡는 그의 손길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침대에 누웠지만,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공간 뿐 아니라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결 역시 지독하게 낯설었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일정해진 그의 숨소리에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협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들어, 새벽 1시가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을 확인한 해원은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소파에서 자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 자신의 옆에 인우가 있다고 생각을 하니, 긴장이 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릎을 세워 둥글게 몸을 만 해원은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인우를 바라보았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마음으로 수없이 많이 되새겨 봐도 통증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육체적인 통증보다도 마음속 깊이 새겨진 통증이 더 아파서 그런 걸까.

자신이 처음이란 걸 알았을 때 그의 얼굴에 번지던 낭패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지만, 상처 받은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잊어야지. 잊지 못하더라도 잊은 척 살아야지. 그가 준 상처들이 모여 있는 기억 상자 속으로 억지로 그 기억을 밀어 넣었다.

행복했으니까. 저를 만지던 그의 손길에서 느껴지던 열망에 분명 행복했었다. 마치 사랑받는 느낌이었다. 저를 향해 욕망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그의 모습이 마치 저를 사랑하는 남자 같았다. 물론 그게 착각이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지만.

기대하지 말자. 애초에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시작한 관계였다. 집착하지 말자. 그런다고 그가 제 사람이 될 리 없으니까.

처음엔 그저 후배가 아닌 여자가 되어 곁에 머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이런 관계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스스로가 한심해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

뒤척이다 무심코 옆자리로 손을 뻗은 인우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 해원이 옆에 있는 걸 확인했었는데. 설마 그사이에 일어나 집에 가버린 걸까.

신경질적인 손길로 엉망이 된 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돌리는데, 소파에서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들어 있는 해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잠시, 도대체 왜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저기서 자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불도 덮지 않은 채 말이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집어 든 인우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쪼그리고 있어서 더욱 왜소해 보이는 몸 위에 이불을 덮어 주고, 푹신한 카펫 위에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불편할 텐데 이런 자세로 참 잘도 잔다. 많이 피곤했는지 쌕쌕 숨소리를 낸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차라리 집에 간다고 했을 때 데려다줄걸 그랬나. 사실 집에서 여자와 이렇게 온전히 밤을 같이 보낸 건 해원이 처음이었다.

보통 관계가 끝나고 나면 더 있겠다, 고집을 부리는 여자들도 냉정하게 내보내곤 했는데 해원은 억지로라도 붙들고 싶었다. 무리하지 말라는 핑계를 대서라도 말이다. 한참을 그녀를 바라보다가 인우는 해원을 향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아니다.”

영 불편해 보이는 해원을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혀 놓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손을 거두었다. 예민한 해원이 그러다 혹시 잠에서 깰까 봐.

분명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해, 여기 이러고 앉아 있다 잠이 든 것 같은데. 그런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해원처럼 무릎을 모으고 거기에 얼굴을 가져다 댄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참 작았다. 얼굴도, 체구도, 손도, 발도. 몸을 둥글게 말고 있어서 그런지 자그마한 체구가 더 작아 보였다. 이 자그마한 여자가 도대체 자신에게 뭔 짓을 했기에 이리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저도 모르게 긴 시간을 그녀를 바라보다가, 어슴푸레하게 해가 밝아 오는 걸 느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뜨려는 걸 보니 7시쯤 되었나 보다. 근처 빵집에 가서 간단하게 아침으로 먹을 베이글이라도 사와야겠다는 생각에 인우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서두르다 미처 바닥에 있는 해원의 가방을 보지 못한 채 발로 걷어찼다. 퍽, 소리가 나며 엎어진 가방에선 소지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혹여 그 소리에 해원이 깨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서둘러 그녀 쪽을 내려다보았다.

몸을 살짝 뒤척이긴 했지만, 쌕쌕거리는 일정한 숨소리는 여전했다. 인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쓰러진 가방을 세워 쏟아진 소지품을 집어넣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집어 든 책 제목에 인우는 피식 웃음을 삼켰다.

[키스 잘하는 법]이라고 대놓고 적혀 있는 제목과 함께 연습했다던 해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역시 학구파 윤해원다웠다. 키스를 글로 배우다니. 근데 그게 또 왜 이리 귀여운 건지.

“미친 거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녀의 가방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코트를 챙겨 입었다. 혼자 살 건데 방을 나누는 게 귀찮아 탁 트인 공간으로 지었더니 이게 영 불편했다. 혹시 자신이 문을 여는 소리에 해원이 깰까 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뺨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아침 공기에 몸이 절로 웅크려들었다. 하지만 이런 차가운 공기가 싫지는 않았다. 지금은 차가운 공기라도 쐬면서 정신을 차려야 했으니까. 정신이 차려질지는 의문이었지만.

**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해원은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제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아무것도 덮지 않고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인우가 자고 있던 침대로 고개를 돌리자, 주인 없이 텅 비어 있는 침대가 보였다. 그럼 방금 전의 문소리가?

해원은 벽에 걸린 시계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침 7시가 막 넘어가고 있는 시계를 보며 소파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욕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씻고 나온 해원은 곧장 코트를 챙겨 입고, 가방을 찾아 열었다.

그 안에서 포스트잇과 펜을 꺼낸 그녀는 집에 들렀다가 바로 출근한다는 메모를 남겼다. 지금 시간에 택시가 잡힐지 의문이었지만, 출근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 움직이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며, 커피와 빵 봉투를 들고 들어오는 인우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가려고?”

인우의 물음에 해원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집에 갔다가 출근하려고요.”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는 저를 본다면 분명 팀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일단 여기 앉아서 베이글이랑 커피부터 먹어. 내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괜찮아요, 선배.”

“말 들어. 아직 컨디션도 별로 안 좋을 텐데.”

인우의 배려를 계속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답지 않은 따뜻한 배려가 좋았기에.

“이리 와.”

먼저 식탁 쪽으로 걸어간 그가 손을 들어 손짓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식탁으로 다가가자 먹음직스러운 베이글과 커피를 그가 내밀었다.

“먹어.”

“네, 선배. 잘 먹을게요.”

“그래.”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살짝 붉어진 얼굴을 보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예전부터 남을 챙겨 줄 땐 꼭 저렇게 부끄러워하곤 했다.

그와 친한 기준이 말하길 원래 누구를 챙겨 주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다 했다. 태어날 때부터 받는 것에만 익숙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런 인우가 왜 이리 너를 챙기는지 모르겠다고. 예전부터 기준이 자주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그래서 한땐 헛된 기대를 가지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에게 자신이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그 기대는 얼마 못 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우연히 기준과 인우가 나누던 대화를 엿 듣게 되던 그날에.

‘솔직히 말해 봐. 너 윤해원 좋아하지?’

‘뭔 소리야.’

‘그러지 않고서야 너같이 이기적인 놈이 해원일 그렇게 챙기는 게 말이 돼?’

동아리방에 들어가려던 순간 문을 타고 들려오는 기준의 목소리의 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럼 왜 그러는데?’

‘그냥.’

‘장난하냐?’

‘윤해원 보고 있으면 좀 짠하잖아. 어딘가 모르게 처량 맞기도 하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챙겨 주게 되나 봐.’

안타까움이 묻어나오는 인우의 목소리에 품에 안고 있던 책을 더욱 힘주어 움켜잡았다.

‘하긴 해원이가 좀 짠하긴 하지. 부모님도 다 돌아가셨다더라.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살았대. 대단하지 않아?’

‘응. 그러게.’

‘어쨌든 신기하다. 정인우 너한테 그런 동정심이 있다니.’

‘그건 나도 좀 신기해. 내가 아주 못돼 처먹은 인간은 아니야. 그렇지?’

‘하여튼 띄워 주질 못해요.’

티격태격하는 두 남자의 대화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왈칵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상처도 더 컸다. 그가 자신에게 베풀던 친절이 동정인지도 모르고 좋아했던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 인우를 향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 그가 잘해 주는 이유를 확실히 알았기에. 그런데 참 바보같이 마음은 접어지지가 않았다.

멋대로 들어온 인우가 마음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런 비참한 말까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윤해원.”

자신을 부르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해원은 옛 생각에서 벗어났다.

“네, 선배.”

“뭔 생각을 그렇게 해? 빨리 먹고 가야 한다면서.”

“아, 아니에요.”

그때 그 기억은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씁쓸한 추억일 뿐이었다. 이제는 그때처럼 상처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더는 그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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