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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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 위를 사뿐사뿐 걸으며 집 안을 둘러보는 해원의 모습에서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다. 돈을 잔뜩 바른 티가 나는 자신의 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 이 집에 드나들던 여자들 중 이토록 어색한 느낌이 드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 여자들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재벌가 여식들이다 보니 돈을 덕지덕지 처바른 이 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그런데 윤해원은 뭐랄까. 한 마리 고고한 학 같았다. 세상물정 모르는 때 하나 묻지 않은 청렴결백한 선비 같다고 해야 할까.

쉽게 설명하자면 촌스럽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촌스러운 윤해원이 둘러보고 있는 이 속물적 기질이 가득한 집이 부끄러워지는 걸까.

“건축가의 소견으로 말해 봐. 어때, 집은 괜찮아?”

당연히 괜찮을 거란 건 알고 있었다. 대학교 입학 선물로 할아버지에게 받은 집이라 지은 지 10년이 되었지만, 그 당시 제일 유명한 건축가를 불러다 직접 디자인해서 지은 집이었다.

“좋네요. 건축가 이한수 씨가 지은 거죠?”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클래식 건축 쪽에서 제일 유명한 분이시잖아요. 그분 좋아해서 건축물 보러 많이 다녔거든요.”

역시 윤해원다웠다. 값비싼 내부 인테리어나 그가 취미로 모으고 있는 미술품에 시선도 주지 않고, 천장, 창문, 계단, 각종 마감재에 관심을 더 보이고 있었다.

“밥은? 먹었어?”

밤 9시가 넘어가고 있는 시계를 보며 인우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벌써 저녁을 먹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이 집에 놀러 온다는 생각에 설레 밥을 안 먹었을 게 뻔한 해원을 배려해 일부러 먹지 않고 기다렸다.

“네. 기준 선배가 초밥 사와서 먹었어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준이란 이름에 인우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 회사 창립 멤버이자,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다, 기준은.

그런데 그가 해원의 저녁을 챙길 정도로 친했던가. 하긴 둘이 지방 출장도 자주 같이 가곤 했던 것 같다. 더군다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해원과 학교 선후배라 오래 알고 지내 오기도 했고.

“기준이랑 같이 먹었어? 둘이?”

“아니요. 남아 있는 직원들이랑 다 같이요. 기준 선배 오늘 기분 좋은 일 있나 보더라고요.”

“아, 투자한 주식이 껑충 뛰었단 이야기는 들은 것 같다.”

아침에 신이 나서 저 말을 하고 가던 기준의 얼굴을 떠올리며 인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사준 거였군.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피식 웃던 인우는 순간 다시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도 그렇지 여기에 오기로 했으면서 저녁을 먹고 오다니. 당연히 데이트하면 식사도 같이 한다는 상식이 없는 걸까. 자긴 배고픈 것도 참고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절 좋아한다 어쩐다 하며 먼저 연애를 제안한 해원이 이렇게 무심하게 나오니 신경질이 났다.

“난 저녁 안 먹었는데.”

“아, 그럼 전 나가서 집 외부 좀 둘러보고 올게요. 편하게 식사하세요.”

“뭐? 나 혼자 먹으라고? 옆에 안 있을 거야?”

“있어야 하나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그녀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분명 자기 입으로 제가 좋아 죽겠다느니-물론 죽겠다라고까진 표현하지 않았지만- 잠깐이라도 좋으니 연애를 하자고 떼를 쓰더니, 이건 뭐 한 10년은 같이 산 부부처럼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됐어. 나갔다 와.”

신경질이 나 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그러고는 곧장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배가 조금 고프긴 했으나, 밥보단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인우는 손을 뻗어 맥주 한 캔을 꺼냈다.

탁, 소리와 함께 거품이 살짝 올라오는 구멍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넓은 창이 나 있는 거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핸드폰 카메라로 집 외부 사진을 찍고 있는 해원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또 나왔네. 집중할 때 특유의 버릇.”

삐죽 내밀고 있는 도톰한 해원의 입술을 보며 인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럴 때 윤해원은 아무도 못 말린다. 얼마나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지 주변 사람들의 말은 아예 듣지 못했다.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에 꼭꼭 갇혀 있는 기분이 든달까.

아예 가방에서 다이어리까지 꺼내 무언가 메모하기 시작하는 해원을 보며 인우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연애를 하러 온 건지, 일을 하러 온 건지.

하지만 애인이기 전에 회사 대표로서 집중한 그녀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분명 무언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일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심통이 나는 걸까. 좋아하는 남자 집에 처음 왔으면, 보통 긴장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해야 하는 게 정상인 것을. 윤해원은 태연하다 못해 일까지 하고 있었다. 혹시 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새털처럼 아주 가벼운 그런 감정인 건 아닐까.

“그러면 나야 좋지. 63일까지 안 가도 되고.”

좋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순간에도 목이 탔다. 인우는 들고 있던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신경질적인 손길로 맥주 캔을 사정없이 구겼다. 사춘기가 다시 온 것도 아닐 텐데. 자꾸 짜증이 나는 게 이상했다.

찌그러진 맥주 캔을 휴지통 안에 던지고, 인우는 넓은 거실 창 바로 옆으로 나 있는 계단 위에 주저앉았다. 메모에 집중하고 있는 해원의 모습을 턱에 손을 괸 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 30분 앉아 있었을까. 그제야 메모를 다 한 해원이 고개를 들며 집 안에 있는 저를 바라보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멋쩍은 얼굴로 이마를 긁적이는 그녀를 향해 인우는 조용히 손을 까닥거렸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해원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인우는 계단에서 몸을 일으켜 현관 앞으로 걸어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초겨울 차가운 공기가 문을 염과 동시에 따뜻한 집 안으로 훅 밀려들어왔다. 이렇게 추운데 밖에서 30분을 꼼짝을 하지 않다니. 새삼 그녀의 집중력에 감탄을 하면서도, 무모한 행동에 짜증이 났다.

“감기 들려고 작정을 했지?”

가까이서 보니 퍼런 그녀의 입술에 괜스레 신경질이 나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이렇게 추운 줄 알았으면 진작 끌고 들어오는 건데. 무방비 상태로 놔둔 스스로에게도 짜증이 치솟았다. 윤해원이 자기 몸 안 챙기는 건 유명한데. 무슨 생각으로 방치를 한 건지.

모르겠다. 순간 뭐에 홀린 사람 같았다. 메모를 하는 그녀 모습을 지켜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었다. 마치 대학 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 순간 정신을 놓았나 보다.

“괜찮아요. 아, 선배 따뜻한 차 한 잔 좀 마실 수 있을까요?”

“직접 타 먹어. 주방에 보면 있을 거야.”

“네. 고마워요, 선배.”

차 한 잔도 직접 안 타주는 자신에게 뭐가 고맙다는 걸까. 싱긋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해원의 뒷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쪼잔한 정인우.

스스로를 향한 한탄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차 한 잔 타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거절을 한 건지.

그런데 왠지 잘해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잘해 주면 안 될 것 같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낯선 주방에서도 태연하게 차를 찾아 끓이는 해원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든 알아서 척척 잘해 내는 윤해원다웠다. 금방 차 두 잔을 끓인 해원은 저를 향해 한 잔 내밀었다.

“선배도 마셔요. 그런데 식사는 했어요?”

식사를 한 흔적이 없는 깨끗한 주방을 둘러보며 그녀가 물었다.

“아니. 별로 밥 생각이 없어서.”

“그래도 밥은 먹어야죠. 보니까 찌개랑 반찬은 다 있는 거 같은데 식사해요. 제가 금방 차릴게요.”

“괜찮…….”

음식을 떠올리자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멋대로 배가 꼬르륵거렸다. 조용한 집 안에 울리는 꼬르륵 소리에 더는 부인할 수도 없었다.

“그럼 차려 보든가.”

“네, 선배.”

회사에서 일하는 해원의 모습은 익숙했지만, 주방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낯설었다. 일하는 아주머니 말고 누군가 자신에게 밥을 차려 주는 것엔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묘하게 코끝이 간질거렸다.

“보니까 냉장고에 재료도 많네요. 선배 좋아하는 표고 버섯볶음도 만들까요?”

버섯을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특히 향이 좋은 표고버섯은 자신이 좋아하는 식재료 중 하나였다.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아?”

“네. 저 혼자 살잖아요. 요리는 제법 해요.”

“봐야겠네. 얼마나 잘하는지.”

비꼬듯 하는 제 말에도 해원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다른 여자들 같으면 짜증 내고 투정 부릴 법도 한데, 몸 안에 부처가 들어 있는 건지 그저 웃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도 마냥 좋을 만큼 자신이 좋은 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새털같이 가볍다 생각했던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좀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저를 좋아하면 안 되는데. 63일이 지나고도 포기 못했다고 달라붙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윤해원.”

야무지게 손을 움직여 재료를 준비하는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네, 선배.”

능숙하게 칼질을 하면서 대답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그렇게 좋아? 뭔 말을 해도 웃을 정도로?”

별생각 없이 물은 말에 해원은 또다시 생긋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과감한 애정 표현에 괜스레 자신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런 말 여자들한테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닌데, 왜 윤해원의 고백엔 자꾸 심장이 덜컹거리는 걸까.

“그래도 딱 계약하는 날까지만 만나는 거야. 그 후에도 달라붙으면 곤란해.”

이런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상처 받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어 조심스레 그녀의 표정을 살피게 되었다.

“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선배.”

상처 받기는커녕,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자신을 향한 집착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울컥 치솟았다.

집착하는 여자들은 정말 딱 질색인데, 왜 해원이 저에게 집착하지 않는 모습에는 자꾸 화가 나는 걸까.

좀 더 간절히 저를 원했으면 좋겠다.

순간 마음에 치솟는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런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아 더욱 신경질이 났다.

“역시 밥은 됐다. 입맛이 없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무작정 해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선배. 그래도 식사는…….”

“피곤해. 밥은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 테니까. 다른 거부터 하자.”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처음 잡아 보는 팔은 생각보다 더 가녀렸다. 이렇게 여린 몸으로 험한 건축 판에선 어떻게 버티는 건지.

“선배.”

순간 마음을 침범하는 걱정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인우는 저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재빨리 걱정을 지워 버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자연스럽게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은은한 듯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독한 향수와는 전혀 다른 그녀 특유의 향에 아랫도리가 순식간에 묵직해졌다.

위험했다. 머릿속에 빨간 램프가 반짝였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이 상했다. 여자로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해원에게 이렇게 반응하는 스스로가. 그래서 차마 밀쳐내지도 못한 채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집에서 만나자고 한 목적 잊은 건 아니겠지?”

자신의 물음에 해원이 살짝 긴장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눈빛을 전혀 피하지 않으면서.

“그럼 침대로 갈까? 아니면 여기서도 나쁘지 않고.”

차라리 그녀가 저를 밀쳐 주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선을 넘어 버리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디든 괜찮아요.”

차분한 그녀의 대답이 도발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강력한 유혹은 그 어디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다. 늘 감정보다는 이성이 앞서는 자신이 윤해원 앞에선 사춘기 소년처럼 날뛰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의 턱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 분홍빛 입술에 무작정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후각을 자극하던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입을 맞추는 순간 온몸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여유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 향기를 더욱 깊숙이 느끼고 싶어 세차게 그녀의 혀를 휘어감아 빨아 당겼다. 이제 막 생애 첫 키스를 맛본 사람처럼 정신없이 그녀의 볼을 감싼 채 입술을 탐했다.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강력한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거란 걸 예전엔 미처 몰랐다. 도대체 윤해원이 자신에게 뭔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이성은 그만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고, 더 가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본능은 끝없이 쾌락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청바지 아래 있는 남성은 아려 올 정도로 부풀어 올랐고, 본능에 함락당한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쾌락이 강해질수록 두려움 또한 커지고 있었다. 윤해원이 정말 감당하기 힘든 여자가 되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멈춰야 해. 멈춰야 했다. 여기서 더 갔다간…….

Rrrrrr.

Rrrrrrrr.

그 순간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간신히 끊어져 가던 이성을 되찾아 주었다. 인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재빨리 그녀를 놓아주었다. 해원 역시 잔뜩 달아오른 두 뺨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말간 검은 눈에 번져 있는 짙은 욕망에 다시 그녀를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다행히 또다시 요란하게 울어대는 전화벨 소리에 그 충동을 억누를 수가 있었다.

“여보세요.”

해원을 두고 전화기 쪽으로 걸어간 인우는 거친 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설마 여자랑 있어?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익숙한 기준의 목소리에 당황한 얼굴로 이마를 어루만졌다.

“뭔 헛소리야.”

-그런데 숨소리가 왜 이렇게 섹시해?

“미친놈. 왜 전화했어? 그것도 집으로.”

-핸드폰 안 받아서 집으로 했지. 나와라. 주식 비싸게 팔아치운 기념으로 거하게 한턱 쏠 테니까. 다들 모였어. 너만 오면 돼.

기준이 하는 말을 들으며 인우는 해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선 채로 말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정말 해원을 안아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지, 뭐. 어차피 지루했던 참이었는데. 어디로 갈까?”

해원에게 상처가 될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입이 멋대로 이 말을 내뱉어 버린다. 상처 입히고 싶은 걸까. 아니면 상처를 입혀서라도 도망치고 싶은 걸까.

-오케이. 클럽으로 와.

“그래. 이따 보자.”

전화를 끊고 다시 해원 쪽을 보자 묵묵히 주방을 정리하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나가 봐야 할 거 같은데.”

“네.”

그 말이 끝이었다. 화도 내지 않고, 투정도 부리지 않고 묵묵히 정리를 마친 그녀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이상했다. 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녀 모습에 화가 나는 걸까. 다른 여자들처럼 짜증을 내면서 자신과 있어 달라 조르는 그녀의 모습을 기대한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혼자 갈 수 있지? 어차피 술 마셔서 운전도 못하거든.”

“네. 괜찮아요.”

아쉬운 기색이 하나도 없는 그녀의 태도에 오히려 자신이 짜증이 났다.

“그래.”

“그럼 가볼게요.”

가볍게 목례를 건네고 현관 앞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바라봤다. 자꾸만 삐뚤어진 못된 마음이 치솟았다.

“윤해원.”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해원이 자신의 부름에 멈춰 섰다.

“키스 별로더라. 더 연습해 와. 몸이 동해야 널 안든지 말든지 하지.”

자신이 듣기에도 날선 말들이 그녀에겐 비수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인지 몰라도 차라리 상처 입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상처를 위로해 준다는 그 핑계로라도 입을 한 번 더 맞추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럴게요, 선배.”

하지만 해원은 흔들림 없는 차분한 얼굴로 답하고는 조용히 제 눈앞에서 사라졌다.

“젠장, 미친놈!”

그녀가 사라지고 난 후 인우는 저 스스로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사실은 무서웠다. 뭐가 무서운지도 모르면서 무서웠다. 그냥 다 두려웠다.

**

뚜벅뚜벅.

고요한 고급 주택가에 해원의 구두 굽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밤이 깊어진 만큼 더욱 차가워진 공기가 두툼한 코트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냥 택시를 불러서 내려가도 되건만, 무작정 걷고 싶다는 생각에 길고 긴 골목길을 묵묵히 걸어 내려갔다. 하나 같이 담장이 높아 사람 사는 온기가 잘 느껴지지 않은 고급 주택가가 끝이 나자 휘황찬란한 도시의 밤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때 에엥, 하는 요란한 구급차 소리가 해원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바닥만 보며 걷고 있던 해원은 세차게 흔들리는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들었다.

‘엄마! 엄마!’

울부짖는 열일곱 살 자신의 목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엄마와 바닥에 나뒹구는 과일들, 해원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본떠 만든 과일가게 벽에 박힌 채 연기를 내뿜고 있는 차.

해원은 여린 몸을 바르르 떨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머릿속에 이미 오래전에 잊었어야 하는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건너편 신호등에 서 있는 저를 향해 엄마가 웃으며 손을 흔들던 그 순간 인도 위로 올라온 차가 엄마를 덮치고, 가게를 들이박은 다음에야 폭주를 멈추었다.

엄마를 부르며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엄마를 품에 끌어안았다. 멀리서 구급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남들이 소위 천재라 부르는 해원은 시각적, 청각적 기억력이 특히 뛰어났다. 그러기에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기억들이 숱하게 많았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그날의 기억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해원은 거친 숨을 내쉬며,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자신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홀로 자신을 키우면서도 늘 따뜻하고, 든든한 나무 같았던 엄마에 대한 기억들은 많았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늘 환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던 엄마의 미소를 떠올리자 마음이 점차 편안해졌다. 제 어깨를 다정히 토닥이던 거친 손, 엄마가 차려 주던 따뜻한 밥, 혹여 제가 아플 땐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걱정을 가득 담아 저를 바라보던 검은 눈동자.

‘해원아.’

‘우리 딸.’

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까지.

지금도 바로 곁에 엄마가 있는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모습과 목소리에 해원의 떨림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남들보다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슬프고 아픈 기억들을 평생 잊을 수 없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좋았던 기억들 역시 평생 기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처음엔 이런 원치 않은 자신의 기억력이 싫었지만, 좋았던 기억들을 끊임없이 떠올릴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며, 지금은 이 능력을 축복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엄마는 자신의 곁에 없었지만, 엄마가 남겨 준 따뜻한 추억들이 그녀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고 있었기에.

“휴.”

더 이상 귓가에 들리지 않는 구급차 소리에 해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인우에게 얼토당토않은 연애를 제안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와 연애를 하면서 생길 좋은 기억들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짧았던 풋사랑을 제외하곤, 누굴 이토록 오랜 시간 짝사랑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기에 인우와 좋은 기억 몇 개쯤은 남기고 싶었다.

‘이거 네 거야?’

처음으로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교수님이 내주신 엄청난 과제에 지쳐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쉬고 있는데, 듣기 좋은 중저음 톤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잘생긴 얼굴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쾌청한 가을 하늘만큼이나 맑은 그의 검은 눈동자에 그대로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유난히 동공이 커다란 그의 눈동자는 마치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처럼 반짝거렸다. 아름다운 사람, 그게 그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상이었다.

막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한 같은 과 선배인 인우는 그 뒤로도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봤는데, 내가. 그 과제 윤해원이 하고 있던 거.’

자신의 과제를 선배인 철민이 가로챘을 때도, 인우는 유일하게 해원의 편에 서 주었다. 자기가 빼앗았다는 증거 있냐며 큰소리 땅땅 치던 철민도 그의 한마디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P그룹 후계자 중 하나인 인우를 건드릴 배짱이 있는 사람은 그 학교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서울시에서 개최하는 공모전에 나가 보라고 해원에게 권해 준 사람 역시 그였다.

‘내가 어릴 때부터 최고인 거만 보고 자라서, 보는 눈이 아주 높거든. 이거 그냥 썩히긴 아까운데 한 번 나가 봐. 무조건 입상 한다에 내 전 재산을 걸지.’

자신이 연습 삼아 만들어 본 건축 모형을 보고 직접 공모전 일정까지 알아 오며 그는 본인 일처럼 신경을 써 주었다. 덕분에 나간 그 공모전에서 해원은 운 좋게도 대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이름이 높아졌다.

더군다나 그 공모전을 통해 지어진 미술관도 건축업계에서 호평을 받았다. 빛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한국적 모더니즘이 묻어나오는 건축 기법이 상당히 독특하며 매력적이다, 라는 평이 대다수였다.

인우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빨리 이름을 알리고 성공을 할 수 없었을 게 뻔했다.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천재 건축가로 이름이 드높아지면서, 여러 회사에서 동시에 러브콜이 쏟아졌다.

그중에 돈을 투자해 줄 테니 해원의 이름으로 건축 사무소를 내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과감하게 거절했다. 그 전에 자신의 회사로 와달라는 인우의 제안이 있었기에.

‘우리 회사로 올래? 뭐, 아직 정식으로 오픈도 안 했지만 네가 오면 큰 힘이 될 것 같은데.’

그의 말에 고민도 하지 않고 덥석 그러겠다, 답했다. 그렇게 졸업하자마자 그의 회사로 들어갔고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짝사랑하면서 홀로 쌓아 온 좋은 기억들이 많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를 향한 마음이 커질수록 후배와 선배가 아닌 여자와 남자로의 기억들을 만들고 싶어졌다.

급기야 사귀자는 얼토당토않은 제안까지 하게 되었다. 큰 공모전을 앞두고 저를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가 이 연애를 받아들인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시간 동안 그저 좋은 추억을 많이 남기고 싶었다. 그를 사랑한 7년의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추억 몇 개쯤은 남겨도 되지 않을까.

“동교동이요.”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고 자신의 원룸이 있는 동네를 말하고, 해원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걸어 내려온 길고 긴 골목 끝을 보며, 방금 전 그의 집에 있었던 좋았던 기억들을 끄집어내 보았다.

늘 상상만 하던 그가 살던 집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너무 좋았다. 그의 흔적이 묻어 있는 집 안 곳곳을 훑어보며 클래식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던 그곳을 기억에 새겼다. 밖에 나와서 자그마한 연못이 있는 정원을 둘러보다, 문득 그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외부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집 외부와 자연 친화적인 정원에 잘 어울리는 나무 의자를 하나 선물하고 싶었다. 아이디어가 떠올라 메모를 해두었는데, 일이 좀 한가해지면 자주 가는 목공 작업실에 가서 직접 만들 생각이었다.

좋아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힘겹게 얻어 낸 63일이 끝나기 전엔 꼭 만들어서 선물하고 싶은데 시간이 그걸 허락할지 모르겠다.

‘어차피 지루했던 참이었는데.’

그때 불쑥 좋은 기억을 침범하는 서늘한 인우의 목소리에 해원은 연한 입술 안쪽 살을 깨물었다.

‘윤해원. 키스 별로더라. 더 연습해 와. 몸이 동해야 널 안든지 말든지 하지.’

또다시 떠오르는 쓰라린 그의 목소리에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런 건 떠올릴 필요가 없다. 어차피 상처가 될 뿐이니까.

해원은 선명한 그 기억을 애써 밀어 넣으며 다시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유난히 포근했던 집 안 조명, 그와 나누어 마시던 따뜻한 차, 그리고 미치도록 뜨거웠던 키스까지.

그래, 아직은 좋은 기억이 더 많으니까.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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