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사랑 유치원 일곱 살 별님반에선 소꿉놀이가 한창이었다. 엄마 역을 맡은 다윤은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재헌을 향해 야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보. 난 요리할 테니까. 우리 딸이랑 좀 놀아 줘요.”
아기 인형을 내밀며 하는 다윤의 말에 재헌은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난 당신 보고 있을 때가 제일 좋아.”
“그래도 우리 별님이가 심심해해요.”
“별님아. 너도 아빠랑 같이 엄마 보고 있자.”
인형을 안아 들며 제 무릎에 앉힌 재헌은 생글생글 웃으며 다윤을 바라보았다.
“예쁘다. 별님아 너도 엄마 예쁘지?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엄마가?”
“여보도 참.”
다윤이 수줍은 얼굴로 답하는데 뒤에 서 있던 서린이 앞으로 나섰다.
“김다윤. 시간 다 됐어. 이제 내 차례야.”
“벌써? 싫은데. 재헌이랑 엄마 아빠 놀이 더 하고 싶은데.”
“안 돼. 우리도 다 기다린다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별님반 여자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다윤은 풀 죽은 얼굴로 역할 놀이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 모습을 짜증 섞인 모습으로 지켜보던 하서가 재헌의 손에 들린 아기 인형을 뺏어 들었다.
“우리랑도 해! 왜 맨날 재헌이랑만 엄마 아빠 놀이하는 건데?”
재헌이 앞에만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여자아이들을 보며 하서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맞아. 맨날 재헌이만 아빠 시키고.”
“우리한테는 같이 놀자고도 안 하고.”
남자아이들의 항변에 여자아이들이 코웃음을 쳤다.
“그거야 재헌이가 제일 다정하니까 그렇지.”
“맞아. 맨날 예쁘다고 해주고, 사랑한다고 해주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너희들은 안 그러잖아!”
“그러니까 맨날 밥 줘, 다녀올게. 다녀왔어. 엄마 아빠 놀이하면 그 말 밖에 안 하면서.”
“원래 아빠는 그런 거거든. 어떤 아빠가 재헌이처럼 저렇게 해?”
“맞아.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든데.”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하는 남자아이들의 항변에 재헌은 유리구슬 같이 까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아빠는 정말 그렇게 하는데. 우리 엄마 보면 맨날 예쁘다고 하고, 사랑한다 그러고. 보고 싶다 그러고,”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주먹을 불끈 쥐고 재헌이 외치는 그 순간, 인우가 별님반 안으로 들어왔다.
“정재헌.”
그의 등장으로 시끄러웠던 별님반은 금세 조용해졌다. 아직 오후 특기 수업이 남았건만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교실을 찾아온 아빠의 모습에 재헌은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아빠!”
“오셨어요?”
막 점심 먹은 뒷정리를 마치고 계단을 올라오던 별님반 선생님이 인우를 향해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네. 연락 받으셨죠? 오늘 재헌이 먼저 좀 데리고 간다는.”
“네. 재헌이 좋겠네. 아빠랑 같이 놀러도 가고.”
재헌의 가방을 챙겨 주며 선생님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네. 그런데 아빠 우리 어디 가?”
“어. 가보면 알아. 가자.”
가방을 받아 들며 인우는 재헌의 손을 붙잡았다.
“선생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인우는 재헌을 한 팔로 번쩍 안아 들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어디 가는데?”
유치원 앞에 세워 둔 차 카시트에 저를 태우는 아빠를 보며 재헌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엄마한테.”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답하는 인우의 말에 재헌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또 엄마 보고 싶어서 회사 땡땡이 쳤지?”
“땡땡이? 야, 그런 말 누가 가르쳤어?”
차에 시동을 걸던 인우는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기준 삼촌이 그러던데, 뭐. 아빠 맨날 엄마 보고 싶어서 땡땡이친다고.”
“그거 나쁜 말이야. 하지 마. 그리고 아빠는 땡땡이치는 게 아니야.”
“그러면 뭔데?”
해원을 쏙 빼닮은 도톰한 입술을 내밀며 재헌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반차. 정당하게 반차 쓰는 거다. 아, 가뜩이나 이제 반차 쓸 날 며칠 안 남아서 슬픈데. 땡땡이로 매도하지 마라, 아들아.”
풀죽은 얼굴로 운전을 시작하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재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차가 뭐지? 아무리 엄마인 해원을 닮아 머리가 좋다고 하나, 저런 단어를 이해하는 건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반차가 뭐야, 아빠?”
“너 유치원 조퇴하는 거랑 비슷한 거야.”
“땡땡이 맞네, 뭐.”
“아니라니까.”
마음이 태평양같이 넓은 엄마와 달리 소심한 아빠는 한 번 삐지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걸 7년간의 경험으로 재헌은 잘 알고 있었다.
“알았어. 아니라고 할게. 그런데 어쩐 일로 아빠가 날 데려가? 원래 엄마랑 밖에서 둘이 만나는 거 좋아하잖아.”
정곡을 찔렸는지, 핸들을 붙잡고 있는 인우의 손이 살짝 떨렸다.
“아, 엄마가 바쁘다고 오지 말라고 했구나? 엄마가 아무리 바빠도 내가 가면 무조건 나오니까. 그래서 나 데려가는 거지?”
“크흠. 뭐 가지고 싶은 건 없어? 장난감이라든지.”
“없어. 할아버지랑 기준이 삼촌이 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든. 대신 주말에 엄마랑…….”
“기각.”
말을 끝내기도 전에 들려오는 아빠의 목소리에 재헌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치사해.”
“치사한 건 너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거야.”
승부의 세계 운운하고 있었지만, 사실 아주 단순한 보드 게임 젠가에서 승리한 것뿐이었다. 그것도 일곱 살 아들을 상대로 눈에 핏발을 세워서 이긴 게임이었다.
주말 해원과 오붓한 데이트 권을 걸고 이렇게 종종 아빠와 아들이 유치한 게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게임을 할 때 두 남자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승패에 따라 해원의 반나절을 독차지할 수 있었기에, 그녀를 사이에 둔 두 남자는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은 뮤지컬 있었는데.”
“기준이 삼촌이랑 가. 안 그래도 삼촌 심심하대.”
“삼촌 또 그 핑계로 맞선 나가기 싫어서 그런 거지?”
“아마도?”
마흔 살이 다 되었건만. 기준은 아직까지 장가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자 만나는 것보단 일하는 게 더 좋고, 그것보단 재헌과 노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긴 천재라 불리는 일곱 살 재헌과 기준의 정신 연령 차이는 크게 없어 보이기도 했다.
“삼촌은 도대체 언제 철들까.”
“일곱 살이 그런 걱정을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아빠는.”
“난 아빠도 걱정이야. 얼른 철들어야 할 텐데.”
지나치게 성숙한 아들의 혼잣말을 들으며 인우는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아빠.”
“응?”
“다른 아빠들은 아빠처럼 안 그런대.”
아까 같은 반 친구들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재헌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뭐가?”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잘 안 하고, 예쁘다는 말도 잘 안 하고. 보고 싶다는 말도 잘 안 한다는데? 다른 아빠들은 엄마들을 안 사랑하는 건가?”
진지한 재헌의 물음에 인우는 피식 웃음을 삼켰다.
“사랑할걸.”
“그런데 왜 그런 말을 잘 안 해?”
“사람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 다르니까. 아빠도 사실은 그런 말 잘 못하는 사람이었어.”
“말도 안 돼.”
그런 아빠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재헌이었기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야. 그러다가 후회했지. 하마터면 엄마를 잃을 뻔했거든.”
“정말? 그러면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겠네?”
“그래. 그러니까 감사해야 해. 아빠가 이런 사랑꾼으로 변한 걸. 그리고 나중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잘해 줘, 무조건. 그래야 후회가 없어.”
“잘해 줄 거야, 나는. 세상에서 제일.”
“그래. 아빠처럼만 해.”
이 말엔 반발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랑받기 위해 아빠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그 누구보다 재헌이 잘 알고 있었다.
* *
회사 근처 카페로 간 해원은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재헌과 인우의 모습에 웃음을 삼켰다. 일이 정말 정신없이 바빴지만, 재헌을 데리고 회사 앞까지 왔다니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기어코 여기까지 왔어요? 재헌이까지 조퇴 시켜서?”
슬그머니 인우를 흘겨보며 묻자, 그가 싱긋 웃었다.
“그럼 어떡해. 보고 싶어 죽겠는데.”
“당신도 참.”
“오늘 또 야근한다며? 내일도 새벽 일찍 출근할 게 뻔하고. 이렇게라도 와야지 얼굴 보지.”
결혼을 한 지 벌써 9년이 되어 가건만, 변함없이 저를 사랑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물론 그 넘치는 사랑이 가끔은 부담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재헌아. 점심은 먹었어?”
“응. 그런데 아빠가 안 먹었다고 하래. 엄마랑 점심 먹고 싶다고.”
아빠가 한 말을 고대로 일러바치는 아들을 보며 해원은 웃음을 삼켰다.
“엄마도 점심 먹었는데 어떡하지. 아빠만 안 먹었나 보다.”
“그러게.”
“여보. 여기 근처에 괜찮은 도시락집 있는데 점심 먹고 와요. 나 재헌이랑 둘이 있을 테니까.”
해원의 말에 인우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싫어. 샌드위치 먹으면 돼. 기다려. 주문하고 올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 거지?”
인우의 물음에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카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엄마 보고 싶어서 반차 썼대. 그게 얼마 안 남아서 슬프대.”
재헌의 말에 해원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하는 인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엄마도 슬프네. 아빠 반차 얼마 안 남아서.”
“그게 얼마 안 남으면 슬픈 거구나. 그런데 아빠가 예전엔 엄마한테 잘못한 적도 있었다면서?”
재헌의 물음에 해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가 그래?”
“응. 엄마를 잃을 뻔했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그때 일이 기억이 났다. 가슴 아팠던 일도 많았지만, 그 시간들을 겪었기에 지금 느끼는 이 행복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살면서 혹시 인우가 그런 선택을 한 걸 후회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지만, 다행히 그는 그런 내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아빠가 그때 많이 잘못했어?”
한참 호기심이 많은 일곱 살답게 재헌은 인우를 쏙 빼닮은 까만 유리구슬 같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니야. 아빠 잘못한 적 없어. 다만 그때는 사랑을 말로 전하는 법을 몰랐을 뿐이야.”
“말로 전하는 법을 몰랐다고? 그러면 뭐로 전했는데? 문자? 편지?”
재헌의 엉뚱한 질문에 해원은 웃음을 삼켰다.
“아니, 눈빛.”
“눈빛?”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재헌을 향해 미소 지어 주고 다시 카운터에 서 있는 인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저를 바라보고 있던 인우와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애정이 가득 담겨 있는 따뜻한 그의 눈빛에 해원은 마음이 편해졌다.
저 눈빛을 보면 늘 안심이 되었다. 이 남자가 저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 눈빛을 통해 모두 전달이 되었기에.
“아, 저런 눈빛이구나. 알겠다, 나도.”
인우의 얼굴을 보며 재헌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응?”
“아빠가 엄마 정말 많이 사랑하나 봐.”
천연덕스러운 아들의 말에 해원은 행복한 웃음을 터트렸다. 일이 바쁘고 힘들었지만, 제 곁에 있어 주는 이 든든한 두 남자 덕분에 버틸 수가 있었다. 두 남자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
* *
밤 12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인우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세 가족이 애정을 가지고 보살피는 자그마한 정원을 지나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조용하고 적막한 골목길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 밑을 서성이며 곧 집 앞에 도착할 해원을 인우는 설레는 얼굴로 기다렸다. 누군가 그랬다. 살다 보면 사랑도 평범한 일상이 될 거라고. 사는 게 바빠, 사랑 같은 거에 열중을 할 시간이 없을 거라고. 부부는 사랑이 아닌 정으로 사는 거라고.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애정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평범한 일상도, 그녀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매일매일 특별하게 여겨졌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구나. 그걸 해원을 통해 배워 나가고 있었다.
이런 걸 모르고 살았으면 얼마나 원통했을까.
그때 해원을 붙잡지 못했다면…….
상상을 하기도 싫었다. 그런 끔찍한 인생은 정말이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젓고 있는데, 골목길 끝에 해원의 하얀 차가 들어서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인우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해원을 볼 때면 자동으로 번지는 미소였다.
“왜 나와 있어요? 날씨도 추운데.”
대문 앞에 차를 세운 해원이 놀란 얼굴로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그냥. 오랜만에 너 기다리고 싶어서. 좋더라. 윤해원 기다리는 시간.”
그녀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재헌이랑 저녁은 뭐 먹었어요?”
“아, 피자 먹고 싶다 그래서 집 근처 피자집 갔어.”
“둘이 또 안 싸웠죠?”
해원의 물음에 인우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애야? 애랑 싸우게. 뭐, 정정당당하게 체스 한 판 뒀지.”
“졌겠네요.”
웃음을 삼키며 묻는 해원의 말에 인우는 침울한 표정을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 주말은 뺏기고 말았지. 치사하게 젠가는 이제 안 한대. 아, 걔는 왜 그렇게 머리가 좋아서. 그나마 이길 만한 건 젠가 뿐인데 말이야.”
“이제 게임은 그만해요. 어차피 이기지도 못하는 거. 그냥 다음 주엔 가족들 다 같이 여행이나 갈까요?”
“나야 좋지. 분명 재헌이는 치사하다고 하겠지만.”
하루를 끝마치는 시간. 도란도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이 평범한 시간들조차 소중했다. 이 시간 안에 해원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윤해원.”
씻으러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 뒤를 졸졸 뒤쫓으며 인우는 나른한 목소리로 해원의 이름을 불렀다.
“네?”
“사랑해.”
벌써 수천 번도 넘게 그녀를 향해 말했지만, 매번 처음 말하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늘도, 내일도, 또 그다음 날도 여전히 정인우는 윤해원을 사랑할 것이다. 그녀가 존재하는 이 일상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렇게 또 하루하루를 살아 나갈 것이다.
마음을 인정하지 않고 흘려보냈던 7년의 시간들을 후회하면서. 그녀가 제게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어 준 그날을 감사히 여기면서 정인우는 그렇게 윤해원을 평생 사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