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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990)화 (990/1,004)

990화 당당한 주나라의 공주

공주부.

월령안이 가자마자 한 흑의인이 걸어 나와 씁쓸하게 말했다.

"당신, 정말 그 애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오? 장봉을 위해서라도 말이오?"

"바로 장봉을 위해, 저는 그 애를 놓아줄 수가 없어요."

현음 장공주는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태해 보이면서도 아름다웠다.

시녀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두 손을 받쳐 들고, 약물에 담갔던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당신도 말했잖소. 그 애가 장봉이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소. 그 애가 죽는다면 장봉은 슬퍼할 것이오."

흑의인이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권했다.

"그 애가 죽지 않으면, 장봉인 살아도 무슨 쓸모가 있겠어요?"

그러나 현음 장공주는 그의 권유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곁눈질로 흑의인을 흘겨보았다.

"그 애 때문에 폐하와 장봉의 군신 사이가 서먹해졌어요. 그 애가 살아 있으면 폐하와 장봉 사이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지고 결국 언젠가 형제간에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이래도 당신은 그 애가 죽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요?"

관염, 조운, 해운, 관성 무역지역 그리고 월씨 가문 표호 장사 이 모든 곳에 조정은 사람을 심어 놓았다.

조정은 이미 월씨 가문 상사에 침투했다.

주나라와 북요의 전쟁이 끝난 다음, 주나라의 국고는 더는 돈이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월씨 가문은 이미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월령안이 죽는 것이 조정에 가장 유리하며, 육장봉에도 가장 유리했다.

"장봉은 결코 야심이 없소. 월령안도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오. 그들은 모두 어쩔 수 없이 강요에 의해 이 길에 들어선 것이오. 주나라와 북요의 전쟁이 끝난 뒤, 장봉은 폐하께 병권을 바치고 낙향할 것이오. 월령안은 월씨 가문 상사를 조정에 맡기고 조용히 지낼 거요. 모든 게 순리대로 풀릴 거란 말이오."

그는 육장봉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육장봉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다만 그의 어머니를 보호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월령안은 뛰어난 재능 때문에 해를 입은 것이었다.

"주나라는 일개 농부가 필요하지 않아요. 주나라는 전쟁터에서 백전백승하고 공격하면 승리하는 전신(戰神)이 필요해요. 주나라를 수호하고 주나라를 위해 땅을 넓혀 가는 전신이 필요하다고요. 그가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면, 내가 왜 그 애가 필요하냐고요?"

현음 장공주는 더 이상 아까처럼 다정다감하지 않았다. 그저 냉혹하기만 했다.

"당신 아들이오. 당신 어떻게……."

흑의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마치 자신이 들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이 연신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럴 수 있어요."

현음 장공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냉정하고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

"일찍부터 그 애한테 이야기해 주었어요. 나와 그 애 사이 모자의 정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되었어요. 저는 그 애를 낳았지만 돌보지 않았어요. 제가 그 애한테 빚진 것은 십일 년 전에 이미 갚았어요. 저는 그 애한테 빚진 게 없어요.

저는 그 애한테 나는 주나라 공주라는 말을 여러 번 했어요. 제가 한 모든 일은 오직 주나라를 위해서예요. 주나라에게 필요한 것은 나라를 위해 앞장서 돌격하는 대장군이지, 남녀 간의 정에 매인 사랑꾼이 아니라고요. 그 애가 주나라의 장군이 아니고, 주나라를 위해 싸울 수 없다면, 그 애는 내 눈에 들 자격도 없어요."

"그래서 당신은 주나라, 그리고 폐하를 위해 생각하면서, 유독 당신 아들을 위해서는 아무 생각도 안 한단 말이오? 그런 거요?"

흑의인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두 눈에는 무상함과 무기력함뿐이었다.

"하! 당신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현음 장공주는 비아냥거리며 냉소했다.

"그때 제가 왜 그 애를 낳았는지, 당신 모르세요?"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그 애한테…… 정말 아무 감정도 없는 것이오?"

흑의인은 두 눈이 빨개서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있죠. 그 애가 육씨 가문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군대를 통솔해 싸울 재목이라는 것을 알고는 무척이나 좋아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십일 년 전에, 제가 왜 자신을 희생하며 그 애를 구했겠어요?"

지금 이 순간, 현음 장공주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냉혹하기만 했다.

흑의인은 슬픔을 가까스로 참으며 물었다.

"만약…… 그 애가 싸움에 소질이 없었다면, 그때 당신은 그 애를 구했을 거요?"

"당신이 보기에는요?"

현음 장공주가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다…… 당신 너무 무정하오! 장봉은 죄가 없단 말이오."

"그래서요?"

현음 장공주는 거만하게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려 흑의인을 바라보며 조소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당신은 제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코 혼약을 취소하려 했어요. 당신은 그때 저도 무고하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있나요?"

현음 장공주의 눈에는 온통 가소로움과 경멸뿐이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저를 질책하시나요? 저와 장봉의 오늘날이 있는 게 모두 누구 때문인데요. 모두 당신 때문이에요.

만약 당신이 혼약이 있으면서도 예의와 염치를 아랑곳하지 않고 청희, 그 천박한 년하고 얽히지 않았다면 제가 왜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겠어요? 제 아들이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겠느냐고요.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저를 무정하고, 냉혹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유독 당신만은 그래서는 안 되죠. 육속, 제 몸을 보세요……."

현음 장공주는 벌떡 일어서더니 재빨리 옷을 벗어 얼기설기 상처로 얼룩진 몸을 드러내었다.

"사람들 앞에 드러낼 피부 말고, 제 몸에는 매끄러운 살갗이라고는 없어요. 이 모든 것을 초래한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제가 장봉을 잘 대해 주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건가요? 제가 그 애한테 잘못하는 게 싫으면 당신이 그 애를 찾아가세요. 그 애한테 말해 주고, 그 애를 잘 대해 주세요."

현음 장공주는 점점 다가오더니 서슬이 퍼레서 따졌다.

"제가 그 애한테 잘못한다고요? 그럼 당신은? 당신은 그 애를 잘 대해 주었나요? 아버지 노릇은 제대로 했어요?"

"그만하시오. 제발 그만하시오."

흑의인은 다가가 현음 장공주의 옷을 주워서 그녀를 꼭 감쌌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내 잘못이오. 다 내 잘못이오."

"꺼져!"

현음 장공주는 매정하게 흑의인을 밀쳐냈다.

"누가 당신의 사과가 필요하대요? 누가 당신이 잘못을 인정하든, 안 하든 신경이나 쓰나요? 저는 당신을 아예 보고 싶지도 않아요. 당신, 모르시죠. 당신이 그림자처럼 제 옆에 따라다닌다는 거, 그 생각만 해도 저는 속이 메슥거려요."

현음 장공주는 흑의인이 만졌던 겉옷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세상에는 어찌 당신처럼 역겨운 남자가 있어요? 뭐, 저한테 보상한다고요? 당당한 주나라 공주에게 당신의 보상이 필요할 거 같나요?

당신 정말로 보상하고 싶으면 제 눈앞에서 썩 사라지세요. 영원히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상이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어떤가요? 보상이라는 명분 아래 제 뒤만 쫓아다니면서 날마다 제 속을 뒤집어 놓잖아요. 쫓아도 가지 않고, 이게 무슨 보상이라는 말인가요?

당신, 그거 알아요? 혐오감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을 한 번 볼 때마다 저는 수백 번도 더 죽었을 거예요."

"지금 당장 갈 거요."

흑의인의 눈은 온통 슬픔과 수치심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감히 현음 장공주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휘청휘청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떠나기 전, 흑의인은 여전히 참지 못하고 현음 장공주에게 주의를 주었다.

"월령안이 당신을 의심하오. 그 애가 당신을 믿지 않소. 당신…… 조심하시오."

"의심하면 또 어쩔 건데요?"

현음 장공주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차디찼다.

"아가씨는 아가씨죠. 아무리 영리해도 아직 여려요."

월령안은 경계심이 높았다. 설령 그녀가 육장봉의 어머니라 해도, 설령 그녀가 끊임없이 가까워지려고 해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 먹고 안 만진다고 피해갈 수 있겠는가.

그녀가 월령안의 손을 먼저 잡았을 때, 월령안은 이미 진 것이었다.

흑의인의 눈에는 갈등이 스쳐 지나갔다.

"현음, 월령안 그 애는…… 반드시…… 죽어야 하오?"

현음 장공주는 비웃듯이 말했다.

"왜요. 또 저를 팔아먹으려고요?"

흑의인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나는 평생…… 당신의 노복이 될 거고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소."

"꼭 기억하세요."

현음 장공주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아래턱을 살짝 들고 거만하고도 냉혹하게 말했다.

"나가!"

'다 꺼져! 나 조현음은 누구의 동정도, 사랑도 필요 없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다.'

그때 당시, 모든 이가 그녀를 버렸을 때, 오직 그녀의 오라버니인 선황만이 목숨도, 황위도 다 내놓고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했다.

그녀의 목숨은 그녀의 선황이 준 것이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목적은 바로 그녀 선황의 소망을 이루는 것이었다.

주나라가 강대해지기 위해서라면, 주나라 백성들이 영원히 더는 북요의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희생할 수 있었다.

"나는 잘못이 없어!"

흑의인이 가자마자 현음 장공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 * *

월령안은 별궁으로 돌아와 현음 장공주가 준 비녀를 건사했다. 그리고 곧장 북요 황제가 그녀를 황궁으로 부르는 어명을 받았다.

그녀는 홀로 궁전에 들어갔다.

북요 황제는 자신이 붙여 준 시위를 데려가지 않아도 묻지 않았다. 그는 공주부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북요 황제가 묻지 않자 그녀도 그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했다.

북요 황제가 그녀를 불러들인 것은 혼사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그런 불쾌한 일들을 삼가려 했다.

"짐은 한시라도 빨리 어명을 내려 셋째를 황태자로 삼을 것이다. 그러니 자네와 셋째의 혼사도 더 이상 미루지 말아라. 사흘 뒤로 하지. 짐이 사주를 보았는데 사흘 뒤가 좋은 날이라고 하는군. 그날 혼인하는 것으로 하겠다."

북요 황제는 겉치레도 하지 않고 곧바로 일을 강행했다.

"언제 결혼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월령안은 결코 야율헌일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았다. 한 사람을 골라 남편으로 삼겠다고 한 것은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더러 사흘 내에 결혼하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녀는 직접 거절하지 않고 문제를 북요 황제에게 떠넘겼다.

"폐하, 북요의 침모는 사흘 만에 제 혼례복을 수놓을 수 있나요?"

북요 황제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이었다.

"폐하, 제 첫 결혼 상대는 주나라 전신 육장봉이었습니다. 제 혼수는 백은 백만 냥이었고요. 육씨 가문에서 저에게 준 폐백은 육씨 가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준비한 혼례복은 궁중 백 명의 침모가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이었어요. 또한 봉관에는 동그란 남주(南珠) 아흔아홉 개가 박혀 있었거든요."

육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시집가자마자 가주 자리를 내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폐백이 아니었다. 그녀의 혼례복도 궁중 침모가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북요의 상경(上京)과 변경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북요 황제는 단시일 내에 진위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허풍을 좀 치더라도 큰 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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