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9화 고부 지간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러면 공주께서는 더욱더 떠나가셔야 합니다. 저에게도…… 비밀 무기가 있거든요."
현음 장공주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들은 소식에 의하면, 북요 황제는 이미 성지를 내려 야율헌일을 태자로 세우고, 자네와 야율헌일의 혼사를 사흘 뒤로 결정했다고 하더군. 자네의 비밀 무기를 쓸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네."
그녀는 의아해서 말했다.
"북요 황제가 이렇게 빨리 아들들 문제를 해결했단 말인가요?"
북요 황제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모두 늑대로 아주 흉악해 그렇게 쉽게 해결할 수가 없었다.
"월진절이 있는 한, 북요 황제는 어떤 결정이든 다 내릴 수 있다네."
현음 장공주는 비웃으며 말했다.
"북요 황제가 월진절에게 무슨 약점을 잡혔나요?"
월령안은, 북요 황제는 자기 수중의 개로 자기 말만 따른다고 했던 월진절의 말이 떠올랐다.
"북요 황제는 뇌 질환이 있다네. 발작하면 머리가 부서질 지경이지…… 몇 년 전만 해도 아파서 거의 죽을 뻔했네. 월진절이 그를 위해 두통을 억제할 신통한 약을 구해 왔다더군. 그리고 그 약은 오직 월진절에게만 있다고 하네. 북요 황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월진절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하는 거야."
현음 장공주는 말을 마치고 한마디 덧붙였다.
"내 사람이 조사한 데에 따르면, 북요 황제의 뇌 질환도 바로 월진절의 작간이라고 하더군."
월령안은 침묵을 지켰다.
'내 조카는 과연 인재군.'
"됐어. 그런 것들은 이제 그만 말하자고."
현음 장공주는 살갑게 말머리를 돌렸다.
"사흘 뒤, 결혼식에 대한 건 무슨 계획이 있는 겐가? 만약 움직이려면 나도 협력할 수 있네."
월령안은 입을 열어 대답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육장봉의 귀띔이 떠올랐다.
육장봉은 현음 장공주를 그의 생모로 여기지 말라고 했다. 현음 장공주는 시종일관 주나라의 현음 장공주로,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주나라의 이익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귀띔했었다.
그녀는 갑자기 소스라치며 정신을 차렸다.
현음 장공주의 마음속에는 오직 주나라의 이익밖에 없었다.
그녀는 주나라 황제에 의해 북요로 보내졌다.
현음 장공주를 믿으면 안 되었다.
북요로 떠나기 전에, 육장봉은 현음 장공주가 자신의 생모라고 해도 믿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그런 육장봉이 어떻게 편지에서 그녀 자랑을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현음 장공주는 그녀를 속이고 있었다.
월령안은 순간적으로 온몸에 식은땀이 쫙 났다. 눈빛에는 경계와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실패했다. 그녀가 현음 장공주를 만나기로 한 순간, 이미 실패한 것이었다.
육장봉이 분명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그녀는 뜻밖에도 쉽게 속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너무 어리석었다.
월령안은 몰래 손바닥을 꼬집었다. 그리고 곧 미소를 지으면서 전과 같아 보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현음 장공주가 그녀를 속였다는 알게 된 순간, 그녀의 몸은 저도 모르게 뒤로 젖혀졌다. 본능적으로 현음 장공주와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그녀 자신은 몰랐지만, 현음 장공주는 알아차렸다.
'참, 약삭빠르군.'
그녀가 공을 들여 꾸민 연출, 암시적인 언어, 놀랍게도 모두 효과가 없었다.
역시 주나라 최대 상사를 이끄는 여인인 만큼, 어지간히 능력이 있었다.
현음 장공주는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녀는 긴 속눈썹을 내려 눈 속의 예리함을 가렸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여전히 애틋한 미소를 띠고 살갑게 물었다.
"령안, 웬일이야? 어딘가 아픈 거야?"
"바람이 좀 세서 춥군요."
월령안은 옷을 여미며 평온한 웃음을 지으려 애썼다.
그녀는 지금 정말 춥게 느껴졌다.
살을 에는 추위였다.
현음 장공주는 그녀의 앞에서 쉴 새 없이 육장봉 얘기를 꺼냈다. 그만큼 육장봉이 얼마나 그녀를 신경 쓰는지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현음 장공주는 주저 없이 그녀를 죽음에 몰아넣으려 했다.
'현음 장공주는 육장봉을 아들로 여기는 건가?'
아니었다.
어머니로서 자신의 아들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월령안은 마음속으로 육장봉을 대신해 처량함을 느꼈다. 하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못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북요는 주나라와 다르다네. 여기는 겨울에 바람이 세고 눈이 많이 오지. 외출할 때는 많이 껴입어야 하네."
현음 장공주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월령안의 손을 잡고 가슴 아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손이 정말 차군……. 아가씨라서 반드시 따듯하게 다녀야 하네. 내가 옷 한 벌 가져다주라고 하마."
현음 장공주의 손은 여전히 따뜻하고 섬세하며 매끄러웠다. 하지만 이 순간 월령안은 안도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현음 장공주의 손이 미끌미끌하다는 느낌이 들어 불편하기만 했다.
월령안은 현음 장공주에게 차를 따르며 손을 슬쩍 뺐다.
"장공주 마마, 차를 드시지요."
"나 지금 며느리가 주는 차를 마시는 건가?"
현음 장공주는 차를 마셨다. 눈매에는 웃음이 번졌다.
그녀는 웃을 때 정말 보기 좋았다. 무심한 듯한 모습은 눈매를 화려하게 하고 잊지 못할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모르는 듯했다.
'이렇게 부드럽고 예쁜 여인이 자신의 아들한테는 왜 이리 독살스러울까.'
월령안은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어색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공주께서는 방금 북요 황제가 저와 야율헌일의 결혼식을 사흘 뒤로 정했다고 하셨나요?"
현음 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괜히 질질 끌다가 문제가 생길까 두려운 모양이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자네를 북요 황실과 한배에 묶어, 자네가 북요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바란다네."
특히 월령안이 황제인 자신보다 더 부유하다는 사실을 안 북요 황제는 더욱 그녀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월령안의 부는 너무나 마력이 있었다. 누구라도 놓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어요."
월령안은 머리를 끄덕이고 더 말하지 않았다.
현음 장공주가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월령안은 되도록 말을 아꼈다. 몇 글자라도 적게 말할 수 있으면 적게 말했다.
말이 많으면 실수를 범하기 쉬웠다.
"령안? 무슨 계획이 있어?"
월령안이 말하지 않자, 현음 장공주가 먼저 물었다.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북요 황제의 이 수는 저도 미처 예상치 못했어요. 북요로 오기 전에는 북요 황제가 황후 자리로 저를 핍박하여 북요와 한데 묶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아직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군요. 제가 방법을 대서 결혼 날짜를 최대한 미뤄 볼게요. 어쩌면 또 다른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죠."
월령안의 말도 거짓은 아니었다.
그녀는 북요 황제가 황후의 지위로 그녀를 북요와 한배에 묶어 놓으려 할 줄은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혹여 상인은 오로지 이익만 좇는다는 그녀의 말에, 북요 황제는 충분한 이익만 있다면 그녀가 영혼마저 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북요 황제는 북요와 그녀 사이가 아버지, 오라버지를 죽인 철천지원수 사이라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현음 장공주는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북요 황제한테 말해 결혼 날짜를 뒤로 미루는 게 좋을 거야. 수 맹주 그들은 며칠 지나야 입성할 수 있다네. 수 맹주는 무공이 뛰어나 반드시 자네를 구할 수 있을 거네."
월령안은 얼른 말을 받았다.
"공주님, 수 오라버니 그들이 입성하면 귀찮으시겠지만 꼭 저한테 알려 주세요. 수 오라버니와 자세하게 의논하려고요…… 우리의 적수는 북요 전체예요. 일단 일에 차질이 생기면 우리 모두 죽을 수 있어요."
"좋아. 수 맹주가 입성하면 자네에게 편지를 보내겠네."
현음 장공주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월령안에게 신신당부했다. 북요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안위를 위주로 하고, 모험을 하지 말며 더욱이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현음 장공주 자신과 수횡천을 믿어야 하며 그들이 꼭 그녀를 구할 것이라고 했다.
월령안은 말을 잘 듣는 새색시처럼 영특하게 대답했다.
둘은 한참 동안이나 한담을 나누었다. 대부분 시간에 현음 장공주가 말하고 월령안은 듣기만 했다. 멀리서 보면 화기애애해 보였다.
월령안이 떠날 무렵, 현음 장공주는 머리에서 봉황 비녀를 빼 월령안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그리고 월령안이 거절하지 못하게 했다.
"이는 나의 모후(母后)께서 남겨 준 것이야. 딸에게 물라주라고 하셨지. 하지만 내 평생 아이는 장봉밖에 없잖아. 그 애는 어려서부터 내 곁에서 자라지 않았네. 하지만 그 애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와도 못지않아."
현음 장공주는 비녀를 월령안의 머리에 꽂아 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정말 예쁘구나. 남들은 사위도 반은 자식이라고 하던데. 그러면 며느리도 반은 딸이잖아. 내가 자네 차를 마시고, 자네가 내 비녀를 받았으니, 자네 이제는 내 반은 딸이네."
"어……."
월령안은 어떻게 말을 받아야 할지 몰라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령안,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겠어?"
현음 장공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부탁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월령안이 거절할까 두려운 것처럼 가냘프고 가벼웠다.
월령안은 잠깐 멍하게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사과할지언정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현음 장공주, 그녀는 자격이 없었다.
"지금 안 불러도 괜찮아. 앞으로…… 남은 세월이 많으니까."
현음 장공주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농담으로 가볍게 서로의 난감함을 해소했다.
"이 비녀를 돌려드릴게요."
월령안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녀는 비녀를 뽑아 돌려주려 했다. 하지만 현음 장공주가 저지했다.
"자네한테 선물한 거야. 아무튼 '어머님'은 조만간 불러야 할 테니까. 다만 상견례를 미리 준 것에 불과할 뿐이야."
월령안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대범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공주부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비녀를 뽑았다. 그러고는 가게에 가서 함을 하나 사 비녀를 봉했다.
그녀는 공주부에서 아무 맛도 없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외에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현음 장공주에게 차 한 잔을 따랐을 뿐,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다.
그녀가 공주부에서 가져온 것은 오직 비녀뿐이었다.
의심이 과하다고 해도 좋고, 옹졸하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녀는 현음 장공주가 준 물건을 감히 받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