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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988)화 (988/1,004)

988화 천하를 굽어보는 기개

"그런데 나의 그 아들들이……."

북요 황제는 난감한 얼굴을 하며 월진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이 격렬하게 반대를 해. 심지어 나와 절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그럼 당신은 그들에게 당신이 북요의 황제라고 말하면 되죠. 당신이 그자를…… 야율헌일을 태자로 세울 수 있다면 당연히 폐위시킬 수도 있으니 그들더러 머리를 좀 써서 한인의 역사를 배우라고 하세요. 한인들에게는 태자를 세우고 폐위하는 일이 많고도 많은데 태자라는 말뿐인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다고요?"

황제도 폐위될 수 있는데 태자가 무슨 대수겠는가?

그리고 그의 고모는 정말 북요의 황자에게 시집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태자를 세우는 얘기를 꺼낸 것은 시간을 끌려 한 것에 불과했다. 북요의 멍청이들만 모를 뿐이었다.

"맞아, 맞아, 맞아! 진절 네 말이 참 맞아!"

북요 황제는 흥분되어 다리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황제니 태자도 세울 수 있고 물론, 폐위시킬 수도 있지. 난 지금 명령을 내려 태자를 세우게 해야지. 월령안을 셋째와 혼인시킨 뒤, 철저하게 월령안을 우리 북요와 한데 묶을 거야. 월령안더러 돈을 내놓으라고 하여 우리를 도와 주나라를 치게 해야지!"

북요 황제는 흥분되어 소리를 질렀다.

월진절은 바퀴 의자를 끈 채, 한 걸음 물러섰다.

만약 월진절에게 두 눈이 있었다면 북요 황제를 보는 그의 시선은 분명 경멸과 멸시로 가득했을 것이다.

북요 황제는 흥분하고 나서 갑자기 머리를 안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절…… 약, 너의 약을…… 좀 더 줄 수 있어? 요즘 두통이 자주 생겨. 네 약이 있어야만 내 두통을 잠재울 수 있어."

"물론이죠, 폐하께서 무사하셔야 제가 잘 지낼 수 있으니까요."

월진절은 대범하게 허락했다. 그러자 북요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진절을 얻은 것은 짐의 행운이야."

월진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명랑한 얼굴에는 사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 * *

월령안은 상경에서 온 오후 성을 거닐다가 날이 저물고 나서야 별궁으로 돌아왔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별궁의 집사는 금을 붙인 초대장을 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월 낭자, 현음 장공주께서 낭자께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낭자더러 내일 공주부로 와 함께 꽃구경을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음 장공주?"

월령안은 멍해졌다가 초대장을 열어 보았다. 그 위에 적힌 글씨가 정말 현음 장공주의 글씨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월령안은 초대장을 집사에게 돌려주고 태연자약하게 분부했다.

"회답 편지를 보내거라. 현음 장공주께 내일 제시간에 도착하겠다고 전하거라."

"월 낭자……."

시위는 본능적으로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자마자 월령안에게 말이 잘렸다.

"나는 북요 미래의 황후지 포로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희 북요의 예비 황후는 이 정도 자유도 없는 것이냐?"

시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어떻게 말을 이을지 몰랐다.

그들 북요의 황후는 당연히 아주 자유로웠다. 그러나 월령안의 신분은 특별했다.

그들은 이 선을 정말 통제할 수 없었다. 보아하니, 황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날 대신하여 내일 입고 나갈 옷을 준비하거라."

월령안은 주인의 말투로 분부하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시위는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동시에 밖에 있는 사람에게 눈치를 보내 북요 황제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그러나 북요 황제는 금방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서 약효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데 이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있겠는가?

그는 궁인이 하는 말을 잘 듣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가라고 하거라."

북요 황제가 이렇게 말하자 시위도 감히 막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월령안은 북요 황제가 보낸 시위를 데리고 현음 장공주의 공주부로 갔다.

현음 장공주의 공주부는 상경의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황궁과 매우 가까웠다.

월령안은 어제 밖에서 지날 때, 감탄하기까지 했다.

'현음 장공주의 공주부는 참 크구나. 현음 장공주는 공주부에서 꽤 잘 지내는 것 같아.'

정문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월령안은 현음 장공주의 공주부는 클 뿐만 아니라 몹시 호화롭다는 것도 깨달았다.

벽돌로 담을 쌓았고 유리로 기와를 얹었으며 백옥을 땅에 깔았다. 현음 장공주의 공주부는 주나라의 황궁보다 못하지 않았다.

월령안을 안내하여 들어가는 하인은 월령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먼저 월령안에게 소개했다.

"우리 공주께서는 고국을 그리워하셔서 그 그리움을 풀어 드리려고 궁의 모양대로 이 공주부를 지은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동안 고생하셨겠네요."

그녀는 왠지 자랑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일반인들은 고국을 아무리 그리워해도 이럴 능력은 없었다.

보아하니, 북요에서 현음 장공주의 세력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큰 듯했다.

'어쩐지 현음 장공주는 전에 자칫 수모를 당할 뻔했던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또다시 상경으로 돌아왔지.'

여기까지 생각한 월령안은 북요를 도망치는 것에 또 희망이 생겼다.

한시름을 놓은 월령안은 갑자기 현음 장공주가 육장봉의 생모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난 지금…… 시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건가? 어……. 내가 조금 있다 현음 장공주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은 아내로 보일까?'

월령안은 가는 내내 여러 표현을 떠올렸다. 하지만 현음 장공주를 보는 순간, 그녀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현음 장공주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녀는 절세가인으로 예쁘면서도 요염하고 대범했으며 기품이 뛰어났다.

그녀의 두 눈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했다. 눈에는 갖은 풍파를 겪은 뒤의 지혜와 평온함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오래 숙성된 좋은 술과 같았다. 그저 조용히 앉아만 있어도 시선을 끌었다.

"령안. 이렇게 불러도 괜찮을까?"

그녀는 방긋 웃자 마치 천지가 밝아진 것만 같았다.

월령안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몰래 아차 하고서는 얼른 현음 장공주에게 예를 올렸다.

"장공주를 뵙습니다. 장공주……"

"너무 예의 차릴 필요는 없단다."

현음 장공주가 다가와서 월령안의 손을 와락 잡았다.

"처음 만났지만, 진작부터 자네를 알고 있었지. 아주 익숙하다고 할 수 있네."

현음 장공주는 눈을 깜빡거리며 비밀스럽게 말했다.

"자네는 모를 거야. 장봉, 그 녀석이 매번 편지를 보낼 때마다 자네가 그 녀석을 위해 무얼 했는지 자랑했었네. 내가 그 녀석을 시샘할 정도로 말이야."

현음 장공주의 손은 가늘고 여리며,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넘쳤다.

아주 잘 가꾼 손으로 그녀의 손에 못지않았다.

월령안은 이렇게 사람과 닿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현음 장공주의 살가움이 싫지는 않았다.

현음 장공주는 마치 물과 같았다. 부드러움과 강인함 속에 끈질김과 따듯한 정이 깃들어 있었다.

"령안. 감사하네……. 십 년을 하루 같이 그 녀석을 사랑해 주고, 또 함께해 주고 도와주어서. 그 녀석이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고 버리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 말이네."

현음 장공주는 월령안의 손등을 가볍게 다독였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모습이었다.

"저는 공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훌륭하지는 못합니다."

월령안의 얼굴에는 어색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왠지 불편해서 저도 몰래 속으로 나무랐다.

'육장봉, 이 나쁜 놈은 평소 도도하고 거만한 모습이더니 어찌 현음 장공주한테는 편지로 무슨 말이든 다한 거야? 정말 못 말려.'

"자네가 좋은지 나쁜지는, 자네가 아닌 장봉의 마음에 따른 것이지."

현음 장공주는 인자한 표정으로 월령안을 끌어다 앉혔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하인을 불러 차와 간식을 내오게 했다.

하인을 내보낸 다음, 현음 장공주는 다시 눈길을 월령안을 따라온 시위 네 명에게 옮겼다.

"너희들도 물러가라. 너희들이 시중들지 않아도 된다."

"공주, 폐하께서는 저희들더러 월 낭자 곁을 한 걸음도 떨어지지 말고 보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시위가 포권하며 죄를 청했다.

"왜? 내가 너희들에게 명령할 수 없는 것이냐?"

현음 장공주는 눈동자를 움직이더니 기운이 급변했다. 천하를 굽어보는 기개가 엿보였다.

월령안은 순간 멍해졌다. 그녀가 틀렸던 것이다. 물 같은 것은 현음 장공주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현음 장공주는 왕이며 천하를 굽어보는 패자였다.

"공주께서는 소인들을 난감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시위는 급히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현음 장공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단호한 태도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흥! 내 공주부에서는 아무도 감히 거절하지 못해."

현음 장공주는 화내지 않아도 위압감을 갖추고 있었다.

"여봐라. 이자들의 머리를 잘라 북요 황제에게 보내라. 저번에 출성해서 노닐게 해 주신 데 대한 내 감사의 답례라고 전해라."

현음 장공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은 옷을 입은 암위 네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신속하게 다가가서 시위 네 명이 소리를 내기 전에, 상대방의 입을 막고 손목을 살짝 움직여 그들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는 깔끔하게 사람을 끌어냈다.

월령안은 두 눈을 반짝였다.

'와, 멋져!'

북요에서 주나라 첩자들의 정보 체계를 손수 창립한 여인다웠다. 기개가 넘쳐흘렀다.

"됐어. 성가신 파리들은 이제 사라졌으니 우리 잘 얘기해 보자."

현음 장공주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드럽고 친절하게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에 명령을 내려 네 사람의 목을 자른 사람은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네, 그러지요."

월령안은 살짝 뒤로 물러서며 저도 모르게 현음 장공주와 거리를 두었다.

현음 장공주는 기운이 너무 강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경계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 행동이 틀린 것임을 알고 있었다. 현음 장공주는 육장봉의 어머니이니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육체적 본능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현음 장공주가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녀는 부끄럼을 타는 어린 아가씨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웃기만 하고 될수록 말을 적게 했다.

현음 장공주는 그녀의 불편함을 알아차린 듯 먼저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는 현음 장공주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또다시 불편해졌다.

현음 장공주가 그녀를 보는 눈빛에는 아이에 대한 총애와 유감으로 가득했다.

이는 그녀에게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사실 노인도 그런 눈빛으로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더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현음 장공주가 말을 꺼냈다.

"자네가 의뭉스러워한다는 걸 알고 있네. 왜 내가 떠날 기회가 있는데 여전히 돌아왔는지 말이야. 이번에 자네를 청한 것은 바로 이 일에 대해 말해 주려는 것이네. 자네가 괜한 생각을 하지 않게 말이야."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공주의 답신을 보았습니다. 공주께서 저를 구해 주기 위해 돌아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고국의 백성은 항상 내 마음에 있다.'

이 구절을 보고 그녀는 현음 장공주가 그녀의 안위를 걱정해 되돌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공주께서 먼저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때문에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습니다."

공적인 일을 말하자, 월령안은 부끄러운 척하지 않고 정색하며 말했다.

"저는 북요를 떠날 방법이 있습니다."

"자네에게 방법이 있는 것은 자네 일이야. 웃어른으로서 자네를 늑대 굴에 혼자 둘 수는 없지. 하물며 나도 연약한 여자가 아니네."

현음 장공주는 월령안에게 귀엽게 눈을 깜빡여 보였다.

"걱정하지 말게. 나한테는 비밀 무기가 있다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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